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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하격홍 (증언자-성갑순)
이름: 관리자
2013-09-16 11:05:28  |  조회: 2390


060317A 하격홍 / 2006. 3. 17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하격홍), 사진2(증언자:성갑순)

피랍자
성명: 하격홍 (河格弘)
생년월일: 1921년 4월 9일 (인천 출생)
당시 주소: 서울 중구 남창동 4-2
피랍일: 1950년 8월 2일
피랍장소: 서울 중구 남창동 4-2 (자택)
직업: 제분소 운영, 대한 청년단 총무 부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녀
외모 및 성격 : 호남형에 정직하고 검소함.

증언자
성명: 성갑순(1924년생)
관계: 배우자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6.25발발 직후 가족과 함께 친가가 있는 부천으로 피난 가 있다가 8월 초 피랍자가 운영하던 제분소의 상태가 궁금해 상경했다가 내무서원에 의해 정치보위부로 연행됨. 피랍자는 당시 제분소를 운영하며 대한 청년단 총무 부장을 맡아 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 확인 및 6.25납북인사 가족협의회의 요구 사항을 적극 수렴할 것










“대한 청년단 총무부장을 했어요. 동네에서 이제 대한 청년단이 그때 있었거든요.
이제 납치된 원인이 거기죠. 자기 사업하면서 그냥 시간 나는 대로 그 동네에 조직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같이 일했어요”

“내가 시부모한테도 많은 박대를 받았어요. 왜냐하면 딸만 셋이고 내가 그때 젊으니까 혼자 수절하고 살겠나 싶어서 그랬는지 잘 안 돌봐 주더라구요. 그래서 많이 가슴이 아팠어요. 어느 날 인가는 내가 너무 괴로워서 애들 다 고아원에 줄라고도 했어요(울음). 너무 살기 힘들고 그랬는데 차마 그건 못하겠더라고.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잖아.”

직업 및 활동

<제분소를 운영하며 대한 청년단 총무 부장을 맡아 함>

Q: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A: 직업이. 우리 자영업 했어요. 제분소. 크게. 집에서 기계 설비해서. 제분소. 밀가루 가루 내고, 떡방아 갈고, 고추 가루. 그런 제분소. 집에서 그 큰 기계 갖다 놓고 했어

Q: 그러면 그 당시에 경제적으로 형편이 넉넉 했겠네요?
A: 그냥 생활 그저 할 정도죠 모. 젊은 사람인데 무슨 모아둔 게 있겠어요? 없죠. 젊은 시절이니까 그냥 그냥 생활 한 거죠 뭐.

납북 경위

<6.25발발 직후 가족과 함께 친가가 있는 부천으로 피난 가 있다가 8월 초 피랍자가 운영하던 제분소의 상태가 궁금해 상경했다가 내무서원에 의해 정치보위부로 연행됨>

Q: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그때는 한 8월쯤 되는 것 같아요. 부천에 시댁이 있어서 아이들도 어리고 하니까 한강다리 끊어지기 전에 우리는 피난을 갔어요. 남편은 거기 있다가 기계도 많이 있고 하니 서울 집이 궁금해서 잠깐 왔다가 납치당한 거에요. 우리 시아버님이 아들이 서울에 갔는데 안 오니까 궁금해서 갔어요. 가 보니 내무서원이 데려갔다 그러더래. 물어볼게 있다고. 그러고는 그만이야. 을지로에 중앙 도서관 자리가 있었거든요. 거기로 문초한다고 다 끌어갔대요. 그러다가 9.28되니까 이북으로 다 끌어 간 거죠.

납치이유

<대한 청년단원이었음>

A: 대한 청년단 총무부장을 했어요. 동네에서 이제 대한 청년단이 그때 있었거든요.
이제 납치된 원인이 거기죠. 자기 사업하면서 그냥 시간 나는 대로 그 동네에 조직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같이 일했어요

납치 후 소식

<전혀 없음>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시댁에서도 박대를 받아 피랍자의 배우자 혼자 노점상을 하며 딸 셋을 힘들게 양육함>

A: 9.28 인천 상륙해서 들어오면서, 우리 영감 쫓겨나가고 군인이 서울 들어왔잖아요? 그러면서 막 그냥 하늘에서 막 수류탄 떨어지고 그럴 때 우리 집 2층집이 그걸로 인해서 불 타 버렸어요. 기계며 제분소는 다 타버리고 몸뚱이만 나왔죠 뭐.

Q: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셨나요?
A: 내가 시부모한테도 많은 박대를 받았어요. 왜냐하면 딸만 셋이고 내가 그때 젊으니까 혼자 수절하고 살겠나 싶어서 그랬는지 잘 안 돌봐 주더라구요. 그래서 많이 가슴이 아팠어요. 어느 날 인가는 내가 너무 괴로워서 애들 다 고아원에 줄라고도 했어요(울음). 너무 살기 힘들고 그랬는데 차마 그건 못하겠더라고. 나 하나만 희생하면 되잖아. 결국 시집하고는 단절 했어요. 아직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는 친정으로 가서 아이들을 맡겨 넣고, 집앞에서 좌판을 했어요. 양말이니 세면도구니 그런 노점에다 놓고 파는 거 있잖아요. 거기서 한 일년이상 친정에서 밥 얻어 먹으면서 장사를 하고, 돈을 모아 가지고 불타버린 먼저 살던 집에 가서 그 터에 방 한 칸을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그리 와서 살면서 남대문시장에 가까우니까 시장 길에 노점 있잖아요? 거기서 화장품. 화장품 파는 노점상을 했어요. 그러다가, 남대문 시장이 또 불이 났어. 그래서 집 옆 빈터에 천막을 치고 우동장사를 시작을 했어. 참 고생 많이 했지. 나중엔 너무 힘이 들어서 병도 났어. 그러면 친정 가서 병을 고쳐 오고, 또 다시 남대문 시장 가서 장사하고 그렇게 살았어.

Q: 자녀분들의 교육은 잘 시키셨어요?
A: 아이들은 다 가르쳤어. 그럼 어떻게 해? 그때만 해도 딸만 셋인데 그래도 잘 길러 놓으면 나중에 내가 편하지 않겠나 싶어서 그저 열심히 살았어. 다른 어머니 다 그렇게 살지 않아요? 나만 특별한 건 아니니까.

Q: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A: 제일 서러운 게 명절 때. 참, 명절 때는 가슴 아파요. 그리고 길에 가다가 놀이터나 어디 가다가 엄마, 아빠가 애들 손 붙들고 손 붙들고 가는 가족, 그런 건 아주 못 봐. 보면 눈물 나잖아. 다 살았어 이제는. 그래도 (피랍된 후) 10년 정도는 그래도 혹시 하는 그런 기대가 있는데. 10년이 지나니까 기대도 안 됩디다. 다 잊어 버리고 그냥 사는 거지 뭐.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신고야 뭐 하나 마나 지. 동네서 다 아니까. 또 납치 인사 500명이 신문에 났었어요. 한국일보에 나온 거 있잖아. 62년도에 발표된 거 500인 거기에 나와 있죠.

Q: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내가 한가지 여태까지 섭섭한 게 집도 다 불타 버리고 애들하고 살수가 내가 없어서 동에 구호물자 같은 거라도 없나 하고 가서 물으니까 아직 정부가 혼란시기이고 약해서 그렇게 도와 줄 힘이 없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그 말을 듣고 나오는데 눈물이 나고 섭섭했어요.
남편이 군인으로 가서 희생을 당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개인사정으로 그렇게 납치된 게 아니고, 이 나라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정부에서 조금도 도와줄 수 없다니. '나라가 약해서 그렇구나' 이해는 하면서도 참 많이 몹시 유감스럽고 섭섭하더라구요. 집 불 타버리고 애들은 다 어리고 어떻게 살겠어요?

호적정리

<사망 정리>
A: 호적은 그냥 사망신고를 못 내잖아요. 근데 내가 이민 가려고 수속을 하는데 비자를 내려니까 사망신고를 해야지 납치인사로 해서는 안되더라고. 비자가 안 나와. 그때는 할 수 없이 사망신고를 했죠. 그러고는 미국 대사관에서 모든 생활상태 같은 거를 보더라고, 그래서 그때 했어요. 그전에는 안 했죠. 혹시라도 살아 오나 해서.
연좌제 피해

<없었음>

A: 그런 문제는 없어. 완전히 납치 인사로 나와있어서 그런지 그런 거는 안받았어요.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 확인 및 6.25납북인사 가족협의회의 요구 사항을 적극 수렴할 것>

A: 우리 6.25납북 인사가족협회에서 하는 그 일을 좀 정부에서 인정을 하고 좀 열심히 도와주면 좋겠지. 이제 뭐 본인들은 다 죽어가고 없고 이제 가족들인 자식들이 할 때인데 이제 뭐 소수의 무리이고 그게 안타깝죠. 그러니까 정부에서 좀 적극적으로 국민의 호소를 좀 들어서 좀 도와줘야 해요. 이만하면 대한민국도 이제 살만하잖아요. 그런데도 너무 무관심해. 좀 많은 도움을 달라는 거 그거 하나 소원이에요. 다른 거 없어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영아 아버지, 이렇게 또 인터뷰로다가 이렇게 내가 마음에 있는 걸 조금 호소를 하는데
지금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은 참으로 전쟁으로 인해서 생이별을 하고 이렇게 5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서야 이런 좋은 기회가 왔네요. 너무 기가 막히고, 일일이 그 가슴 아픈 얘기를 다 어떻게 여기다 하겠어요. 죽은 영혼이래도 어디가 있는지 나 죽은 다음에 만나 볼 수 있으면 다행이고 지금 당신 나이가 살았으면 여든다섯이야. 그러니 살았다고 생각 할 수도 없는 거고. 모든 게 다 지나간 과거니까. 나라를 잘못 만나서 이런 일을 당하는 거니까 모든 거 잊어버리고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서 만납시다.

기타 - 1969년 6월 25일에 증언자가 쓴 일기

1969년 6월 25일
6.25의 쓰라린 동난이 난 지도 언 십구 해를 맞았다.
27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에 생의 뜻도 체 알지 못했던 아주 순박한 시절,
예고 없이 몰려든 적군에 휘말려 남편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야만 했던 쓰라렸던 과거, 남은 것은 어린것과 육체만인 나. 네 식구가 전전긍긍 먹어야만 하는 것이 삶인 양, 그저 먹기 위해 나는 주야로 노력으로만 일관. 이젠 거의 다 종말이 가까워지니 좀 삶의 위치도 많이 향상되어 있지만 아직도 할 일은 태산 같고 살아갈수록 인간생활은 심산유곡으로만 느껴진다. 동작동 국군묘지에 바뀐 대통령이 참배를 했고, 매스컴을 통해 쓰라렸던 과거사를 새로이 되새겨보는 프로도 많이 보도 되었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존엄한 생명을 꺾인 납치인사에 대해서는 그 피해자에 관한 기사는 한군데도 없는 것 같아 무척이나 마음속으로 섭섭하고 억울하다. 모든 것이 죽음이란 무서운 낱말 앞에는 종말이 오는 법. 어쩌면 이렇게 세상을 험난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 이렇게 생존경쟁에 낙오가 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건만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외면만 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인 나의 조국이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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