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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주신 (증언자-이경찬)
이름: 관리자
2013-09-16 11:13:08  |  조회: 3025


060330A 이주신 / 2006. 3. 30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이주신), 사진2(증언자:이경찬)

피랍자
성명: 이주신
생년월일: 1910년 9월 15일생(서울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창신동 664번지 3호
피랍일: 1950년 7월 7~9일경
피랍장소: 서울시 종로 4가 노상
직업: 서울 지방 검찰청 부장검사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 1녀
외모 및 성격 : 곱슬머리, 다정하고 가정적임.

증언자
성명: 이경찬(1939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서울 지검 부장검사였던 피랍자는 전쟁 직후 가족들을 분산시켜 인근 친척집에 피신 시키고, 피랍자 본인도 일단 피신해 있다가 가족들이 걱정이 되어 한복을 입고 밀짚 모자 차림으로 자녀들을 보러 다니다가 7월 초 종로 4가 노상에서 연행된 후로 소식 없음. 이후 대중잡지 ‘희망’에서 배상화씨의 탈출기를 통해 음악인 김혜송, 문필인 박영애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돼 있던 것을 확인, 이들 일행이 청량리, 우의동, 한탄강을 거쳐 평양으로 납북된 것으로 추정. 2006년 3월 13차 이산 가족 상봉에서 피랍자 생사확인을 요청했다가, 그의 동생 이주국씨의 가족들을 발견, 증언자 이경찬이 상봉했으나 피랍 상황 및 북한의 현재 생활에 대한 정보는 일체 얻을 수 없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 확인 및 유골 송환, 북한에 가족이 있을 시 상봉, 전쟁 납북자 상봉을 위한 특별법 제정, 정부가 납치 피해 가족을 돌아볼 것




“당시 연합신문 편집국 국장 배상화라는 분이 납치됐다가 탈출을 했어요. 이분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버지를 목격했나 봐요. 감방 안에서 복도로 저희 아버지가 분뇨차를 끄는 것을 매일 봤다는 기사가 있어서 서대문에서 이제 수감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그걸 보면 '음악인 김혜송, 문필인 박영애, 검사 이주신 등의 행방은 어찌 되어 있는가?' 이렇게 기사가 나와요. 배상화씨는 나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북쪽으로 끌려가기 위해서 전차를 타고 청량리로 가는 도중에 탈출한 분이거든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도 그 일행에 끼여서 청량리까지 가서 우의동을 거치고 한탄강을 거쳐 간 걸로 알게 됐어요.”

“이번 이산가족상봉과 관련해서 몇 가지 추정할 수 있는대요.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넣었는데 그 형제의 가족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버지의 기록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추정할 수 있고, 이분의 가족이 또 함경도니 그 변방으로 쫓겨난 걸 보니 북한 당국으로부터 연좌제로 성분이 나쁜 계층으로 판정을 받아서 산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직업 및 활동

<서울 지방 검찰청 부장검사>

Q: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A: 6.25 때는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계셨고, 전쟁 나는 날도 전화 받고 회의 나가시고
우리가 피신할 때까지 그 직장에 나가셨어요. 다른 특별활 활동은 없고, 처음부터 공직에 계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해방 전에도 검찰 계통에 계셨고, 우리 정부 수립되고 나서도 다시 검찰로 임명이 되셔서 일하셨어요.

납북 경위

<전쟁 직후 가족들을 분산시켜 인근 친척집에 피신 시키고, 피랍자 본인도 일단 피신해 있다가 가족들이 걱정이 되어 한복을 입고 밀짚 모자 차림으로 자녀들을 보러 다니다가 7월 초 종로 4가 노상에서 연행됨>

Q: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그 납북현장은 내가 보질 못했고 6.25전쟁이 일요일에 났잖아요. 그 때 전화 받고 직장에 나가시고 그 이튿날도 직장에 나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계속 회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전황이 굉장히 다급해지니까 그 때부터 가족에 대한 처리문제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를 먼 친척 집으로 분산시켜 보내려 하셨는데, 결국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다들 집으로 돌아오게 됐어요. 당시엔 아버지가 당황하셨지만 일단 우리를 가까운 친척들한테라도 맡기고, 그때서야 아버지도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은신하러 가셨어요. 처음에는 을지로 4가에 작은 삼촌댁으로 가셔서 그 댁 지하실에서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할 때까지 계셨어요. 그러다가 6월 28일부터 그 자수를 권하는 공고가 게시판에 붙여지고,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가족들이 걱정돼서 한복을 입고 밀집모자를 쓰고 애들을 보러 자꾸만 다니셨어요. 저는 그 때 을지로 4가에 숨어있었는데 아버지가 다녀가신 기억이 나요. 그때 본 게 마지막이었죠. 결국 그렇게 다니시다가 납치되셨어요. 저희 숙부가 기록했던 적십자사 납치인사 신고서에 보니까 그 종로 4가인가 거기 뒷골목에서 납치됐다고 그렇게 신고를 하셨더라구요. 나중에 정치 보위부를 거쳐서 서대문 형무소까지 간 것은 거기 있다가 탈출하신 분이 알려줘서 저희가 알게 됐죠.

납치이유

<피랍자가 고급 공무원이었음>

A: 당시 공직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잡아갔으니까.

납치 후 소식

<연합신문 편집국장 배상화씨의 탈출기를 통해 음악인 김혜송, 문필인 박영애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돼 있던 것을 확인, 이들 일행이 청량리, 우의동, 한탄강을 거쳐 평양으로 간경로를 통해 피랍자도 함께 납북된 것으로 추정>

A :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 대중잡지 희망에 나온 기사대로 한다면 8월 달인가에 청량리로 이송이 되어서 청량리에 가는 전차에서 탈출한 사람이 탈출기를 적었거든요. 거기 전차에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Q: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A: 당시 연합신문 편집국 국장 배상화라는 분이 납치됐다가 탈출을 했어요. 이분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아버지를 목격했나 봐요. 감방 안에서 복도로 저희 아버지가 분뇨차를 끄는 것을 매일 봤다는 기사가 있어서 서대문에서 이제 수감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그걸 보면 '음악인 김혜송, 문필인 박영애, 검사 이주신 등의 행방은 어찌 되어 있는가?' 이렇게 기사가 나와요. 배상화씨는 나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북쪽으로 끌려가기 위해서 전차를 타고 청량리로 가는 도중에 탈출한 분이거든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도 그 일행에 끼여서 청량리까지 가서 우의동을 거치고 한탄강을 거쳐 간 걸로 알게 됐어요. 또 자료를 보다 보면, 김혜송이라는 분이 연예인인데, 그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씨 남편이거든요. 아버지가 이 분하고 같이 분뇨차를 끌은 기록이 여기 있어요. 그런데 이 분이 이 청량리를 통해서 우의동으로 해서 한탄강까지 가서 거기서 1박을 할 때, 납치인들이 너무 고되고 힘들고 하니까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노래를 불렀대요. 또 다른 탈출 증인인 김용씨가 납북 과정에서 '김혜송씨가 한탄강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는데, 김혜송씨가 아버지가 같이 있었던 때니 저희 아버지도 이들 일행이 갔던 것처럼 평양까지는 갔을 거다 이렇게 추정하는 거죠.

Q: 찾아보려는 노력은?
A : 그때 이제 납치당한 사람이 우리 뿐만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찾아보는 다른 또 별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리고 북쪽하고는 계속 그 대결국면이 계속 됐고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노력은 없었고, 다만, 이제 적십자사에서 국제적십자사를 통해서 민간이 납북자를 한 번 송환교섭을 해보겠다 그래서 신고를 받고, 그런 정도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런 정도의 신고만 했죠.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처음에는 땅을 처분해 받은 지가 증권으로 생활하다가, 결국 집마저 잃고 피랍자의 배우자가 막일을 하고 어렵게 자녀들을 양육함>

A: 1949년도에 이제 농지 개혁이 있었는데, 그게 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땅을 정부가 사서 그것을 농사짓는 사람한테, 경작자한테 나눠주는 거거든요. 그 농지대금이 채권으로 몇 년에 걸쳐서 나왔어요. 저희가 사실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던 집안이기 때문에 이 농지가 쫌 있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 지가증권을 받아가지고 피난생활 할 때 생활을 했어요. 그게 저희한테는 큰 도움이 됐죠. 그러고는 피난생활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어머니가 막일도 하러 다니시고, 또 모자라는 것은 빚을 얻어서 살고 그랬어요. 그러다 제가 고등학교 1958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때는 집이 빚으로 넘어가게 돼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월셋방 생활을 하면서 살았어요. 이후엔 제가 과외도 하고, 돈이 안 되면 또 휴학도 하고, 모든 우리 동생들이 다 그렇게 어렵게 생활을 했죠. 인척들의 경제적인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어머니는 그 당시에는 자유당 집권 때니까 아버지의 친구들이 자유당 고위층이 많았어요. 그래서 자유당 당사에 무슨 뭐 청소하러도 다녔고. 결국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신 거죠 뭐. 옛날 가정 부인이 전문적인, 전문직에 종사 하실 수는 없는 거니까.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적십자사에 하고. 그 당시 동사무소에서도 아마 신고를 받았을 거에요. 거기도 하고.

Q: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그런 거는 일체 없었어요. 정부도 그때는 어려웠고, 일일이 그런 전쟁 피해자한테 신경 쓸만한 그런 재정능력이 안됐다고 보고 우리가 또 그런 거를 요구한 적도 없고.

Q: 공무원이었는데 퇴직 처리라도?
A: 그런 것은 안되어 있어요. 지금 제가 나이를 먹고 그런 문제를 생각해 봤는데 우선 저희가 공식적으로 그걸 요구 했다던지, 정부에서 알아서 그걸 처리해줬다던지 그런 일은 없어요.

호적정리

<실종으로 정리>
A: 호적은 지금 실종처리가 돼서 재적이 됐어요. 그래가지고 1996년에 실종처리를 했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A: 우리는 연좌제 피해는 없었어요.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뭐 관으로, 관계로 진출한다든지 그런 시도를 한번도 안 해봤으니까 그리고 해외 나갈 때 그럴 때도 무슨 신원조회나 그런데 부친이 납북된 일로 장애가 됐다는 그런 얘기도 들어 본적도 없고, 그런 적도 없고 그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부에서 확실히 '이건 납북이다' 이렇게 아마 규정을 해놓은 게 아닌가 생각 되요.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 확인 및 유골 송환, 북한에 가족이 있을 시 상봉, 전쟁 납북자 상봉을 위한 특별법 제정, 정부가 납치 피해 가족을 돌아볼 것>
A: 아버님 연세로 봐서는 돌아가셨겠죠. 돌아가셨겠지만 그래도 자식으로서 그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사망 경위라도 알고 싶고, 거기에 혹시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있다면 그 가족을 만나 아버지가 거기서 어떻게 생활을 하셨는지도 듣고 싶고, 또 유해가 있으면 우리가 모셔오고도 싶고. 그것이 이제 우리정보를 통해서 북쪽에 요구하는 것이구요. 또 납북자 가족이 저희 뿐만 아니고 어려운 분들도 많잖아요. 그러면 우리 정부가 이분들을 위해서 해줘야 할 일이 좀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이것도 정부에 요구하고.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아버님에 대해 드는 생각은?
A: 12살 때 납북 당하셔서 헤어졌으니까 지금 56년 전 일이네요. 제가 일흔이 가까워 오니.
한가지 이제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님이 이제 저희를 위해서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 희생을 한 걸로 이 돌대가리가 이제 나이 먹어서(눈물) 죽을 날이 다 돼서 아버지의 뜻을 알아가지고 그것이 너무 이제 죄송스러워요.
특이 사항 &#8211; 13차 이산 가족 상봉에서 피랍자의 동생 가족을 만남
Q: 최근에 북한에 다녀 온 걸로 아는데 어떤 경로로 가시게 됐고, 누구를 만난 것인지?
A: 6.25전에 저희 집에 같이 살았던 작은아버지 가족을 만났어요. 저희 아버님이 장남이기 때문에 막내 동생을 데리고 있었던 건데 이름은 이주국이고, 당시에 화신 산업에서 선전부, 홍보 담당 일을 했어요, 서양 화가였어요. 전쟁이 나고, 아버지가 피랍된 후 이를 찾아 나섰다가 그 후에 소식이 없어서 집에서는 실종된 것으로 알고 혹시나 젊었을 때니까 의용군으로 끌려나가서 어디서 전사한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에서 이분의 가족이 나타난 거에요. 사실 이분의 생존 여부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사확인을 북측에 요구를 했는데, '그의 형제의 가족이 살고 있으니까, 이 분들이라도 만나겠느냐?' 해서 이제 만나게 된 거죠.

Q: 전혀 모르셨는데요?
A: 전혀 모르고 있었죠. 뜻밖이었어요. 이분은 이북에 1956년에 결혼을 해서 1983년쯤에 돌아가셨고, 그의 가족이 이제 함경도니 뭐 또 평안북도니 이런데 살고 있더라고요.

Q: 그 분은 어떻게 북한에 가셨대요?
A: 제가 6.25전쟁이 난 1950년에 행방불명 된 이후로 결혼하기까지, 즉 1950년에서 1956년에 사이의 행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 사이가 아버님하고 만났던 기간이기 때문에 중요한데, 북측의 이산가족들이 우리를 만나기 4일 전에 평양에 집결해서 교육을 받았고, 저희 가족은 특별히 또 불려 가서 질의에 대한 답변 내용을 미리 교육을 받을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 아버지의 행적이나 평양에서 함경도로 왜 쫓겨났는지 생활 형편 이런 거는 일체 얘기를 안 해요. 제가 건질 수 있는 건 1956년에 숙모하고 만나서 결혼했다는 것,
1965년에 평안남도 덕성군으로 쫓겨 갔다는 것, 1983년 쯤에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 그것 밖에 몰라요. 그 외에 세세한 것은 생전에 어떤 말씀 하셨는지, 평양에서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전쟁 때는 어떻게 해서 북쪽으로 건너오게 되셨는지 이런 거에 대해서는 일체 얘기를 못 들었어요.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Q: 다른 가족이라도 만나게 되니까 마음이 어떠셨어요?
A: 글쎄 그건 뭐 가족이 아니라도 그 쪽 사람들 만나면 눈물이 나요.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구나 이제 더 가슴 아픈 것은 그 쪽 사회에서 성분이 나쁘다고 함경도로 쫓겨 간 게 저희 아버지의 형제라는 이유, 연좌제로 그렇게 됐다면 우리로서도 참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죠.

Q: 이산 가족 상봉을 하게 된 느낌은?
A: 우리가 이 이산가족상봉과 관련해서 몇 가지 추정할 수 있는대요.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넣었는데 그 형제의 가족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버지의 기록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추정할 수 있고, 이분의 가족이 또 함경도니 그 변방으로 쫓겨난 게 북한 당국으로부터 연좌제로 성분이 나쁜 계층으로 판정을 받아서 산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Q: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A: 여기 우리 단체에서 늘 정부에다 하는 얘기에요. 6.25 민간인 납북자 문제는 전쟁과 관련 없는 민간인을 잡아간 것이기 때문에 엄연한 범죄행위이고, 따라서 이 문제는 북쪽에다 대고 떳떳하게 생사확인이라든지 돌아가셨으면 유해 송환을 요청해야 해요. 또 생존해 계신 분은 빨리 가족들한테 송환을 해야 하구요. 그러니까 이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도 우리 6.25전쟁 납북자 문제를 이산가족 상봉 계획에다가 포괄적으로 넣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따로 해결해야 될 문제로 생각을 하는 거고, 정부에도 계속 그렇게 요구하고 있어요. 제가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에 응하게 된 것은 전쟁 납북자 이름을 저쪽에 제시했을 때 반응이 어떤지를 보는 게 어떠냐는 정부의 권유로 제가 최초로 응하게 된 거였죠.

Q: 이번에 그 납북이라는 말을 사용해 행사에 차질이 있기도 했다던데?
A: 그것은 제가 첫날 가자 마나 단체상봉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녁때 만찬상봉이라고 있어요. 거기서는 기사가 어떻게 났는지 모르죠. 그런데 이튿날 일정이 아무 이유 없이 지연이 돼서 제가 통일부 직원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남측이 '납북'이라는 언론 보도를 해서 그렇게 된 거다라고 하더라구요. 저희 문제로 인해서 조금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았죠. 어쨌든 이번 일은 제 개인적인 문제라기 보다도 이번 이산 가족 상봉으로 인해서 6.25전쟁 납북인사의 문제가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게 하나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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