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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계윤찬 (증언자-계은찬)
이름: 관리자
2013-09-17 11:49:29  |  조회: 2135
2006. 11. 29 채록
061129A 계 윤 찬 (桂允燦)

피랍인
생년월일: 1933년 10월 6일생
출생지: 평북 선천군
당시 주소: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 291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10일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학생
학력/경력: 광운 전자고 2학년 재학
직계/부양가족: 조부모, 부모, 삼촌, 6남매.
외모/성격 : 준수한 외모, 체격이 좋은 편.

증언자
성명: 계은찬(1938년생)
관계: 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1950년 8월 초 내무서원이 집으로 찾아와 피랍인이 국군과 내통했다며 트집을 잡고 연행했고,함. 당시 전자고교생이던 피랍인이 사용하던 실습용 무전기와 안테나, US트렁크를 문제 삼았음.음
-1957년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이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통보 받았으나, 이후 연락 두절없음.
-가족들은 20여 년간 담당 형사가 있어 늘 감시를 당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서신왕래 및 상봉

“모리스 무전기도 있지, 안테나며 US트렁크도 있고 하니 그것을 트집을 잡아 내무서원이 와서 데려간 거죠. 우리 집 금호동 앞에 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국군하고 내통하는 걸 봤다면서 그렇게 얘기가 시작됐어요. 말이 안되는 게 무전기도 모리스 부호 실습용이었고, 안테나도 그저 뉴스나 들으려고 설치했던 거지, 그게 뭐 무전기랑 연결된 것도 아니었는데.”

“1957년도에 대한적십자사가 납북자 신고 받은 것을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이북으로 보냈죠. 그래서 57년도에 북한에서 3차에 걸쳐 생존자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했어요. 거기 1차 발표에서 이름하고 나이하고 원적, 고향만 나와 있었어요. 거기에 계병렬 삼촌하고, 계윤찬 저희 형님 함자가 나란히 있더라고요. 그래서 생존해 계신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죠.”

○ 직업 및 활동

<광운 전자고 2학년생, 무전통신에 능했음>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학교만 다니셨는데, 그 당시 저희 형님이 무전모리스부호 있죠? 그 중에서도 영어 모리스에 능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아버님이 담임선생님을 만나시니 그러셨대요. 납치당해간 것도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요.



○ 납북 경위

<1950년 8월 초 내무서원과 인민군이 집으로 찾아와 피랍인이 국군과 내통했다며 트집을 잡고 연행함. 당시 전자고교생이던 피랍인이 사용하던 실습용 무전기와 안테나, US트렁크를 문제 삼음.>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형은 체격이 좀 큰 편이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납치된 경우는 드물었는데, 저희 친척인 6촌 작은 아버지도 같은 고등학생 2학년 동갑이었는데, 이불을 들춰보고 그 분은 나이가 어리다고 어린애인줄 알고 이불을 덮고 갔고, 저희 형님은 체격도 큰데다가 6.25때만 해도 일반 가정에 라디오를 두고 사는 집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당시 구리 철선을 벗겨 그것을 거미줄처럼 마름모형으로 만들고, 막대기를 십자가로 해서 매달아 놓고, 그것을 광석 라디오로 해서 뉴스를 듣곤 했어요. 그걸 인민군들이 보고 '국군하고 내통했다'고 이렇게 시작이 된 거죠. 6.25나던 해 여름, 8월에 인민군들이 저희 집의 안테나를 보고 들어와서 방을 다 뒤졌는데, 방 안에는 모리스 부호 무전기가 있었고, 선하고 연결되진 않았어요. 실습용이니까. 똑같은 거죠. 그게 있었고, 또 우리 넷넷째 작은 아버지가 해병대 소대장이었는데 그 전에 해군에 있을 당시 국방색으로 된 작은 US트렁크가 있었어요. 그러니 모리스 무전기도 있지, 안테나며 US트렁크도 있고 하니 그것을 트집을 잡아 내무서원이 와서 데려간 거죠. 우리 집 금호동 앞에 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국군하고 내통하는 걸 봤다면서 그렇게 얘기가 시작됐어요. 말이 안 되는 게 무전기도 모리스 부호 실습용이었고, 안테나도 그저 뉴스나 들으려고 설치했던 거지 그게 뭐 무전기랑 연결된 것도 아니었는데.

문_ 납치 과정에서 폭력은 없었나요?
답_ 특별히 위협을 가하고 그런 건 없었고 그냥 형님만 데려간 거죠.



○ 납치 후 소식

<1957년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이북에 생존해 있다고 통보 받았으나, 이후 연락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그 뒤로 소식은 없었고, 1957년도에 대한적십자사가 납북자 신고 받은 것을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이북으로 보냈죠. 그래서 57년도에 북한에서 3차에 걸쳐 생존자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했어요. 거기 1차 발표에서 이름하고 나이하고 원적, 고향만 나와 있었어요. 거기에 계병렬 삼촌하고, 계윤찬 저희 형님 함자가 나란히 있더라고요. 그래서 생존해 계신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 이후에는 없죠. 지금 보니 강원도 원산에서 두 분이 사셨더라고요.

문_ 당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을 것 같은데?
답_ 그럼요. 그건 말로 다 할 수 없죠. 제가 당시 열두 살 때니까 그 밑에 동생은 잘 몰라요. 그러니 저희 아버님, 할머니와 저처럼 그리워하고 애처로워하지는 못하죠. (눈물) 95년도인가 KBS에서 실향민을 위한 방송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 때 출연도 하셨어요. 그때 영상만 봐도, 그 그리움이라는 것은 말로 못하죠. (울먹)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는데, 약주 드시면서 동생하고 맏아들을 생각하며 새벽까지 지새우고 하던는 적이 많았어요. 특별히 말을 했다기 보다는 안타까움에 한 맺혀서 흘러간 옛 노래도 부르시고, 큰 아들, 막내 동생 이름 부르시면서 우셨죠.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직장생활활 하시며 생계를 꾸려감.>

답_ 저희 아버지는 서울 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죽 계셨어요. 그러는 와중에 1964년도에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게 됐고, 내 여동생이 초등국민 학교 선생으로 발령을 받고. 그래서 그 때부터 생활고가 해소되기 시작한 거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그 당시 적십자사가 퇴계로가 있었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정전되고 나서 적십자사에서 신고하라고 해서 제가 중학교 모자 쓰고 거기 가서 신고를 했죠. 그 다음담에 대한적십자사에 1989년에 신고를 또 했고. 95년도인가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질 쯤 해서 제가 또 상봉 신청을 해서 총 세 번 신고를 했어요.
그리고 2006년에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회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명단으로 적십자사에 의뢰를 했는데, 다른 신청자가 저보다 나이 많으신 신청자 분들이 많아 저희는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그런 것은 없었고.



○ 연좌제 피해

<20여 년간 담당 형사가 있어 늘 감시를 당함, 특별히 공적,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이 없어 연좌제 해당사항은 없었지만, 신원조회 등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까다로운 검증을 받아야 했음.>

답_ 정전되고 나서 금호오(호?)동 시절부터 한 20여 년간 저희 집 담당 형사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제가 감시인지도 몰랐는데, 당시 군사 혁명 시절에 간첩 사건이 많지 않습니까? 저희 6남매가 다 학교를 다닐 때니 집에는 저희 어머니만 계셨는데, 집으로 찾아 와서는 '혹시 이북에 납치돼 간 두 분이 집으로 연락이 오면 지체 없이 신고하라'고 부탁하고 가고, 간첩 사건이 신문에 나지 않을 때에도 찾아와서 '주인 양반은 지금 어디 다니냐? 큰 아들은 학교 졸업하고 어디 다니느냐?' 물었어요. 20년 동안 담당 형사가 있었어요.(중복) 이사를 가게 되면 그걸 또 인계를 해 주는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혜화동으로 가니까 거기도 담당 형사가 왔더라고요. '금호동에서 오셨죠?' 하고. 그 다음에도 (집안사람들이 다 일하러 나가고) 낮에 집에는 할머니하고 저희 어머니밖에 없는데 오셔서는 '지금 주인 양반은 학교 잘 다니시냐? 큰 아들은 건설회사 잘 다니고 있느냐?' 물어보고 가곤 했어요.

문_ 취업이나 해외여행의 제약은?
답_ 특별한 제약은 없었고요. 제가 75년도에 중동으로 출국을 하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신원 확인하는데 보름이면 되는데 저는 한 달 반이나 걸리더라고요. 연유를 물어보니까 납북 가족에 대해서는 사상 검증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군에 있을 때도 그 당시는 ROTC가 생기기 전에 학도보단기병이라고 해서 대학 재학 중에 군대를 가면 18개월 근무하는 건데, 저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고, 부대는 그 이듬해 전방으로 배치되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중대장 말씀이 이북에 납북 이산가족이 있는 병정들은 전방에 배치를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야 제대로 해당사항은 안됐지만, 그런 일도 있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넷째 작은 아버지(계병도)가 5.16혁명 때 해병대 중령으로 근무하다가 박태준 회장님하고 포항 종합 제철 창설 멤버로 비서실장인가 할 적에 정보부에서 나와서 둘째 작은 아버지 사진을 보이면서 이 사람을 아느냐며 몇 가지를 물어보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 포항에서 간첩 사건이 있기는 했거든요. 어쨌든 그것을 제외하고는 작은 아버지는 사상은 투철하고 하니 더 이상 의심받지는 않으셨죠. 그 외에는 저희는 정치적으로 가담한 적도 없고, 제가 대학 다닐 때도 데모 한 번 안하고 그랬으니. 만일 군 대령에서 승진하려고 했다면 몰라도, 평범한 가정이니, 사상은 또 확실한 거고. 특별히 불이익을 당한 것은 없어요. 저야 공과대학 나와 엔지니어니 (감시가 있다 해도) 그냥 별 의식 안하고 살았어요.



○ 호적정리

<정리함>

답_ 호적은 정리했죠. 다 제적을 했어요. 그게 꽤 오래됐는데 정전되고 나서 50년대 후반인가에 했어요. 사망이라고는 아니고 납북이라고 돼있는가 그랬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피랍인 명예 회복>

답_ 우선 생사확인, 현재까지 과연 생존해 계신지, 계시다면 어디에 계시는 지 주소라도 알아서 서신 연락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건 더 바라지도 않아요. 만나는 것은 지금 남북한이 화해한다고 금방 되는 일도 아니고. 국제적으로 복합적으로 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만나면 좋겠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아요). 지금 벌써 이산가족 상봉도 북핵 문제 문제 때문에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중단했잖아요. 그러니 못 만나더라도 생사확인하고, 서신교환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저쪽 체제 유지상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것 같고.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부모님이 형님을 많이 그리워하셨겠네요.
답_ 저희 어머니는 치매로 2001년에 돌아가셨어요. 저희 아버지가 12월 21일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3일 만에 돌아가시고 그래서 같이 합장을 했어요. 아버님도 건강하셨는데 체중이 많으셔서 쇠퇴하기 시작하시더니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는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문_ 술을 많이 좋아하셨다고 했는하셨는데?
답_ 술로 사셨죠. 제 막내 여동생이 붓글씨를 잘 쓰는데 아버지가 읊은 시를 족자장으로 만들어 뒀어요.

“애달픈 柄珍 심정”
고향에 있는 아들생각 동생생각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여름날
살뜰이 기르지도 못하고 배불리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한 너의 숙질
떠나간 지 어언 40여 성상 어이하여 돌아올 줄 모른단 말인가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이 심사 쓰라린 가슴에 멍이 들었네.
날개 있는 새라면 날아가 보련만
기약 없는 만날 날 기다리다가 지친 몸 원한 품고 떠나가긴 원통 하구나
한 많은 이 세상 운명의 장난 치곤 너무 가혹 하구나
눈물의 상봉을 애태워 기다리며 잘 있느냐
윤찬아 병렬아 아들딸 잘 낳고 잘 살고 있겠지 보고 싶구나.


문_ 형님과의 기억 있으세요?
답_ 당시 워낙 어려울 때니 특별한 추억은 없어요. 그냥 집안에서 같이 고생하고. 저희 아버님 말씀이 (눈물) '제대로 먹이지도 못 하고 입히지도 못한 게 한이 된되다'면서 돌아 가셨죠.

문_ 형님에게 하고 싶은 말?
답_ 형님, (눈물) 형님하고 작은 아버님하고 잡혀가신 이후에 저희 집안은 6.25때 파편 하나 맞지 않고 온 가족이 무사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2001년도 2월 21일, 그리고 3일 뒤인 23일에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연세가 여든 아홉, 어머니 연세가 아흔 셋이었습니다. 두 분이 평생 동안 형님하고 작은 동생을 기리며 한을 품고 늘 슬퍼하시다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텔레비전을 보시면서 한없이 온 가족이 울었습니다(울음). 형님,. 형님이 납치당해 가신 이후 저희 집안 식구들은 진해로 피난을 갔는데, 병도 삼촌이 도와주셔서
잘 지냈어요. 환도 이후에 저는 진해에서 중학교를 계속 다녔고, 서울에 와서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 회사를 다녔어요. 그리고 75년도부터 중동 동남아를 다니면서 그런대로 저희 많은 식구들, 밑에 여동생 시집 장가 다 보냈고, 어머니 아버지를 편안히 모셨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장남 역할을 하느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할머니는 1987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형님과 병렬 삼촌이 강원도 원산시에 사셨다는 것을 2005년 여름에 알았습니다. 아직도 거기에 살고 계시는 지. 아무쪼록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서로 건강하게 부디 안전하게 생존해 계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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