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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조남주 (증언자-조증선)
이름: 관리자
2013-09-17 11:47:09  |  조회: 2701


2006. 11. 17. 채록
061117A 조 남 주 (趙南柱)

피랍인
생년월일: 1911년 12월 7일
출생지: 함남 북청군 북청면
당시 주소: 서울 성북구 안암동 104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11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미 8군 운송부 근무
학력/경력: 평산 소학교 졸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
외모/성격: 운동(축구, 스키, 댄스 등)을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 일어와 중국어도 유창함.

증언자
성명: 조증선(1930년생)
관계: 장녀
증언 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해방 후 북한에서 지주계급에 속해 고통을 겪다가 월남한 후,서울로 이남 해 미 8군 운송부에 근무했던 피랍인은 1950년 8월 17일경 자택으로 찾아온 보안서원에 의해 피랍됨.연행됨
- 반공단체였던 서북청년단 임원이자 미군부대에서 근무했으므로던 행적으로 사상범으로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고 가족 증언.이후 소식 없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정부가 공산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납북문제 해결의지를 보여줄 것,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가족에게 전후 납북자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



“해방이 되고서는 우리는 한국에 왕이 정치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공산당 만세' '공산당 만세'하고 전부 써 붙여 있기에 놀랬어요. 그런데 다음에는 기독교인을 반동분자로 취급하고, 친일파는 물론이고, 지주 계급을 처단하고 그랬는데, 우리는 거기에는 해당이 안 됐지만, 아버지가 장손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이 있었죠. 당시 장손은 동네에서는 왕의 위치거든요. 머슴 살던 사람이 출세하는 시대니까.””

“(전쟁 전 북한상황) 소련군들이 해방되고서는 많이 내려왔는데, 밤에 바깥에 나가면 총을 겨누면서 가진 것 다 내놓으라는 거예요. 소련 사람들이 처음에 자기네 나라 죄수들을 다 풀어놔서 한국으로 나온 거예요. 그 사람들이 시계고 돈이고 다 빼앗는 거야.”

“ 아버지가 납치된 것은 서북 청년회 가입한 것 때문에 그렇죠. 미군 부대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그 사람들은 미군 부대 다닌 것을 미군을 도왔다고 생각하니까.”

“(전쟁이 나고) 인민군들이 피난 가는 사람들을 잡아들였어요. 반동분자라고 피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국군 비행기가 와서 삐라를 뿌리는 데 그걸 보면 '피난 가가라'고 하그러고. 인민군들은 피난 가면 붙잡아서 잡아들이고 하니, 떠날 수도 없고 거기서 그냥 그렇게 있는 거예요.”

○ 전쟁 전 북한 상황

문_ 본적이 함경도인데 언제 월남이남 하셨는지?
답_ 해방되고 3년 후에 월이남 했어요. 북한에서 살기 어려우니까 나온 거죠. 북한은 먹을 것을 삼칠제로 했는데, 가장 수확량이 높은 집을 표본으로 뽑아서 전체에 적용했고 농사지은 것의 7할 정도를 가져갔을 거예요. 원래는 3할을 세금으로 내는 제도인데, 실제로는 반대였어요. 그러니 다 가져가고 먹을 게 없었죠. 우리 엄마가 청진에 가서 대두박도 사다가 밥에 섞어 먹고, 죽도 쒀 먹고. 호박죽, 무죽도 써먹고. 콩죽이 제일 나은 음식이었죠. 노인네들은 좁쌀 조금 넣어 만든 겨죽을 드시더라고요.

문_ 전쟁 전부터 제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까나보죠?
답_ 일제 때 공출하고 그랬지만, 그 때 보다 더 심했어요. 해방 후에. 일제 때는 우리가 흥남에 살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시골에서 야미장사를 하며 쌀을 구해서 먹고 그랬는데, 해방 되고서는 공출하라고 동네 애들(국민 학생, 중학생)에게 동네를 돌아다니며 '공출하라'는 독촉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사람을 정신적으로 압박을 한다고 할까 그렇게 했어요. 먹을 게 첫째 없고, 또 우리 아버지가 장손이니까. 우리는 해방 전에는 아버지가 흥남에 살면서 개인 사업을 하다가 전쟁이 심하고 폭격이 무서우니까 고향(북청면)으로 돌아왔온 거였어요. 얼마 안 있다가 해방이 됐는데, 우리 삼촌은 징용 갔다가 돌아왔고. 동네에서 징용 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오고 그런 시점이었어요.

그렇게 해방이 되고서는 우리는 한국에 왕이 정치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공산당 만세' '공산당 만세'하고 전부 써 붙여 있기에 놀랬어요. 그런데 다음에는 기독교인을 반동분자로 취급하고, 친일파는 물론이고, 지주 계급을 처단하고 그랬는데, 우리는 거기에는 해당이 안 됐지만, 아버지가 장손이라는 이유로 어려움이 있었죠. 당시 장손은 동네에서는 왕의 위치거든요. 머슴 살던 사람이 출세하는 시대니까, 그 사람들이 아버지를 포함한 외지에서 온 사람 세 사람을 지목을 해서 '일제 때 이 사람들이 동네 청년들을 밀고해서 감옥에 들어갔다'고 누명을 씌었어요. 그렇게 자아비판을 시키고, 밤새 둘러싸고 공격을 했어요. 아버지는 장손이고, 또 동네에서 좀 제일 괜찮게 살았거든요. 결국 공격당했던 그 사람들은 한 사람씩 동네를 떠나고, 우리 아버지가 맨 마지막까지 남았어요.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에게 집중을 해서 막 때리는 사람도 있고, 공격을 하고 그랬죠. 우리 아버지는 '절대 그런 적 없다'고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공산당에서는 목표가 조금 나아 보이는 사람을 처단하기 위해 공작하는 것이거니까. 그렇게 아버지가 시달리다가 이남으로 혼자서 넘어왔어요. 그게 해방되고 2년 쯤 지났을 거예요.

그 당시 해방이 돼서 김일성 장군이 온다고 동네 사람들이 마중 간다고 갔던 사람들 얘기가
김일성이 새파란 청년이더라고. 일제 때 신출귀몰하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을 했다고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는 밤에는 회의를 한다면서 사상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새벽 두 시까지 주민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시켜요. 아무튼 토론회라고 해서 그러는데 조금 거슬리는 사람들은 자아비판 시킨다고 총공격을 했어요. 요새 말로 왕따를 시키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고통 받게끔 만들고 그랬어요.

또 소련군들이 해방되고서는 많이 내려왔는데, 밤에 바깥에 나가면 총을 겨누면서 가진 것 다 내놓으라는 거예요. 소련 사람들이 처음에 자기네 나라 죄수들을 다 풀어놔서 한국으로 나온 거예요. 그 사람들이 시계고 돈이고 다 빼앗는 거야. 나는 뺏긴 사람들 얘기를 들었지.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후퇴할 적에 먹을 게 없어서 집집이 다니며 빌어먹고 그랬는데, 그 후퇴하는 사람들로 소련 사람들은 자기네 총 쏘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맞히느냐 안 맞히느냐? 그냥 쏘면 못 맞추고 렌즈에 대고 쏘면 딱 맞추고. 그러니 나물 캐던 여자들도 총을 쏘니까 나물 캐다가 혼비백산이 돼서 도망가고. 여하튼 그 소련 사람들이 굉장히 해악을 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죄수들이 아니고 장교들이고 좀 괜찮은 사람들이 나왔는데 그런 사람들은 점잖고 그랬어요.

그리고 우리가 있을 때는 검은 통, 흰 통을 놓고 투표를 하는 거예요. 거기 검은 통, 흰 통을 옆에다 놓고서 보안서원이 앞에 있는데, 찬성을 하면 흰 통에, 반대하면 검은 통에 (투표용지를) 넣는 거예요. 입후보자는 위에서 지정해 내려온 한 사람이고. 그러면 누가 보안서원 앞에서 검은 통에 넣겠어요. 다 흰 통에다 넣지요. 그리고 우리가 나온 다음에는(이남 후) 완전히 국가에서 땅을 소유해서 개인 재산은 전혀 없다고 그랬어요.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 찾으러 서울에 갔다가 아버지가 나와서 미군 부대 수위로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우릴 데리고 남하했어요. 할머니와 삼촌들은 그냥 거기 있고 내 동생들과 어머니 막내 고모는 나왔죠.



○ 직업 및 활동

<미 8군 운송부 근무>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미군 부대 수위로 있다가 나중에 운송부에 계셨어요. 포스트 엔지니어라고 거기서 트럭 기사들이 짐을 나를 때, 그것을 관리 감독을 하는 직책에 있었는데 그러다가 6.25가 난 거죠.



○ 납북 경위

<해방 후 북한에서 서울로 월이남 해 서북청년단에 가입하고, 미군부대에 근무 중이던 피랍인은 1950년 8월 17일경 자택으로 찾아온 보안서원에 의해 연행됨.>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나는 6.25나기 전 해에 결혼을 하고 1950년 8월 31일에 아이를 낳았놨는데, 소식을 알리러 사람을 보냈더니 아버지가 납치가 되셨대요. 안암동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납치되고, 서북 청년회에 들었던 다른 사람도 같이 잡혀갔는데 그 사람은 나온 거예요. 추측하기로는 그 사람은 그냥 회원이고 우리 아버지는 조금 간부를 했나 봐요. 그리고 그 사람이 정치보위부로 들어가서 '우리 아버지가 권해서 가입했다'고 말했나 봐요. 그래서 그 사람은 나오고 우리 아버지는 사상범으로 잡혀갔나 봐요.

문_ 서북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나 봐요?
답_ 왜냐하면 아버지가 여기(남한) 나와서 돈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고 하니까 사흘 밤낮을 파고다 공원에서 굶으며 노숙을 한 거예요. 그 때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렇게 굶어도 자유가 좋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리고서 찾아간 곳이 서북 청년단이었대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거기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거기서 지청천인가 하는 장군을 만났는데 '잘 오셨다'면서 미군 부대에 취직을 시켜줬대요. 그러니 서북청년단에 가입을 하게 된 거죠. 사실 아버지는 평안도 쪽엔 관련이 없는데, 그저 이북에 사셨고, 이북에서 나왔고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뜻에서 가입한 거죠.

문_ 납치 상황이 어땠는지?
답_ 아침에 집으로 보안서원이 왔더래요. 와서는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간 거죠. 그 때는 이미 반동분자라는 정보를 누구에게 듣고서 집으로 찾아와서 데려간 거죠. 잠깐 얘기가 있다고. 그건 뻔한 거지. 날짜를 자세히는 모르는데, 8월 17일 쯤으로 알고 있어요. 처음에는 지서인가에 갔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단체로 끌고 갔다가 중간에 죽였겠지. 자기네에게 쓸모 있는 의사라든가 하는 사람이야 데려 갔지만, 우리 아버지 같은 사상범이야 중간에서 다 처치했겠죠. 그 때 신카나리아 그분도 끌려가다가 못 가겠다고 하니까 중간에서 못 가겠다 하니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쳐서 반공호에 쓰러져 있다가 깨어나서 살아 여기 왔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 우리 아버지도 당시 총알도 아깝다고 그랬다니까 구덩이 파 넣고 묻었을 거예요. 아니면 개머리판으로 기절시켰던가 그냥 묻었던가 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요.



○ 납치이유

<반공단체였던 서북청년단 임원이자 미군부대에서 근무했던 행적으로 사상범으로 체포됨>

답_ 서북 청년회 가입한 것 때문에 그렇죠. 미군 부대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그 사람들은 미군 부대 다닌 것을 미군을 도왔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때 나중에 수복 후에 들었는데 거기 사람들 묻힌 데를 구덩이를 파서 확인했는데 아버지는 없었대요. 안암동 뒷산에는 없었대요.



○ 납치 후 소식

<없었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그 후엔 아무 소식도 못 들었어요.



○ 당시 6.25때 상황?

답_ 우리 집은 6.25 때 강가 언덕위에 집이 있었는데, 양쪽으로 총을 쏴서 벌집처럼 구멍이 났어요. 노량진에 살았었고, 주인 양반은 교통부에 다녔었고. 나는 그날(6.25) 한강에서 빨래를 했어요. 내가 스물 두 살이었고, 뗏목 위에서 빨래를 했는데, 위에서 비행기가 막 공중전을 해요. 하나는 몸뚱이가 있고 꼬리가 두 개 있고 날개가 있는 비행기인데 그게 미군 수송기란 소릴 나중에 들었어요. 그리고 전투기 하나는 이북 비행기고. 당시 내자 호텔인가 하고, 용산, 김포 비행장 세 군데에 폭탄을 떨어뜨렸대요. 나는 그 때 공중전 하는 걸 태평하게 쳐다봤는데 잠자리 똥 싸듯이 검은 점이 떨어지는 게 탄이었나 봐요.

남편은 회사에서 전날 밤을 새고 새벽에 퇴근해서 왔고. 다음 날 길에 보니까 길에서 '휴가 나온 장병들은 돌아오시오' 하면서 종이 마이크 대고 막 소리 지르고, 군인들이 트럭에 막 타요. 휴가 나왔던 군인들이. 그러니 저녁때는 아무튼 군인들이 손을 흔들고 군가를 부르며 전투 일선으로 가는 거예요. 그 때까지도 몰랐죠. 그랬는데 뉴스에서 북에서 쳐들어 왔는데 우리 국군이 싸워서 후퇴시키고 있고 어쩌고 하면서. 당시 호외도 돌리고 했어요. 또 뉴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수도는 사수할 겁니다' 하는 방송을 계속 되풀이 해요. 그래서 그것만 믿고 있었는데, 밤에 갑자기 불이 환해지면서 공기가 들어왔다 나왔다 하고 문이 들썩 거리며 터지는 폭탄 소리가 나는는 데, 그게 한강 다리 끊는 소리더라고. 시어머니가 '저 불 보라'고 그러고, 우리 주인 양반은 서울 사수수 할 거라니까 걱정 말고 마시라고 주무시라 그러고 그랬어요. 철교하고 인도교하고 두 번을 그러더라고요.

우리 친척 중에 형사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피난 가자고 해요. 그래서 비가 오는데 짐을 대충 싸서 관악산으로 갔어요. 저는 만삭이니 많이 가져갈 수도 없고 쌀 한 말 이고, 솥단지를하고 가지고 갔죠. 관악산 중턱에 피난민들이 있는데 아침에 밥을 해 먹고 꼭대기로 올라갔어요. 거기 절이 있는데 사람들이 잔뜩 그리로 들어갔는데,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전쟁을 하고 있고, 국군들이 절간으로, 관악산 계곡 능선 쪽으로 오더라고. 그런데 이 사람들 사기가 뚝 떨어져 있고, 피난민 사이에 인민군이 섞여 와서 포위를 하니까 국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전선이 자꾸 남쪽으로 가는 상황이었죠. 그러다 먼저 산에서 내려간 사람들이 '아래는 괜찮다'고 하니까, 우리도 집에 먹을 것도 좀 있고,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다시 집으로 내려왔죠. 와 보니 국군들이 전사해서 길에 누웠는데 퉁퉁 부어있더라고.

총소리가 가끔 핑핑 나고 집들은 구멍이 펑펑 났어요. 우리 집으로 내려왔더니 집은 포격을 맞아 기둥은 빠져서 지붕은 반은 쓰러지고 한 쪽은 붙어 있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 시누이 네로 가서 살면서 폭격을 하면 반공호처럼 된 지하실에 가서 숨어있고, 낮에는 나무를 갖고 와서 밥 해먹고 그랬죠. 다니다 보면 길에 송장 셋이 쓰러져 있던 게 사흘이 되니 물이 흥건하고 뼈만 있고 그래요.

그 때 또 밤에는 인민군들이 피난 가는 사람들을 잡아들였어요. 반동분자라고 피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국군 비행기가 와서 삐라를 뿌리는 데 그걸 보면 '피난 가라'고 그러고. 인민군들은 피난 가면 붙잡아서 잡아들이고 하니, 떠날 수도 없고 거기서 그냥 그렇게 있는 거예요. 밤에 또 라디오를 들으면 간첩이라고 잡아들이는 거예요. 우리 남편도 라디오를 듣다가 잡혀갔는데 '이거는 먼 거리는 안 들리고 여기 근처만 들리는 거다'고 해서 다행히 나왔어요. 그러다 남편은 먹을 게 없으니 다시 직장(교통부)에 나갔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배우자가 장사를 하면서 고생해서 자녀를 기름>

답_ 우리 어머니가 장사를 했지요. 당시 성냥이 귀하니 영등포에서 성냥을 사서 다리로, 배로 다니며 그걸 팔아서 그럭저럭 먹고 산 거지요. 1.4후퇴 때는 다 대구로 피난 갔죠. 어머니는 거기서 또 장사하시고. 동생 하나 데리고 사셨는데, 동생이 결혼하고 나중에 암으로 죽고, 어머니는 다시 우리 집으로 오셔서 96세까지 사시고. 지금 돌아가신 지 5,6년 되셨지.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했죠. 신고는 지서에 했죠. 어머니가. 또 납치자들 투쟁 기록을 신고하라는 종이가 와서
거기다 신고를 했죠. 아버지가 서북 청년회 가입해서 납치된 것을 써서 보냈죠. 납치 일자는 정확히 몰라 대충 23일 쯤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 17일로 썼더라고요. 또 자유당 때 남산에 있던 적십자사에서 편지라도 왕래한다 해서 내가 가서 신고했죠.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어떤 사람은 (도움을) 받은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 아버지에겐 그런 건 없었어요. 나중에 우리 어머니는 중풍에 걸려 고생을 하셨죠.



○ 호적정리

<사망신고 하지 않음사망 정리 안함>

답_ 그대로 있어요. 사망 신고도 안하고. 그 때는 주민번호도 없을 때인데, 주민등록번호 그게 수복 후 1-2년 있다가 생겼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주민 번호도 없어요. 6.25전에는 가호적을 썼어요. 북한이 원적이고 서울은 가호적. 아버지 납치된 것은 납치라는 양식이 없다면 그냥 재이북 이라고 써놓더라고. 그렇게 이북에 있는 것으로 해놓고는 납치라고는 안 해 주더라고.



○ 연좌제 피해

<없음>

답_ 그거는 없었죠. 우리가 수복 후에 들어가 살았던 집 주인이 일본서 대학을 나왔다 던가 그랬는데 그 사람이 사상이 달라서 북한으로 갔어요. 그래서 외사촌 시누이 집에 가 있었는데, 그 사람 영향을 받아 제가 6.25때 좀 부역을 했어요. 그랬더니 수복 후에 나를 '가자'고 해서 잡아들였어요. 그래서 묻길래 나는 "우리 아버지가 6.25때 서북 청년회에 들었다가 납치당했다. 그리고 미군 부대 포스트 엔지니어였다" 그랬더니 괜찮더라고. 나는 빨갱이라고 하면 이를 간다고 했더니 보내줬어요. 우리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난 괜찮았던 거죠. 내가 책을 하나 냈는데, 통일된 독일을 우리나라에 비교하면서 썼는데. 우리 아버지가 부역을 해서 갔다면… 저거 하겠지만(흐느낌) (그렇지 않아요).



○ 정부에 바라는 말

<정부가 공산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납북문제 해결의지를 보여줄 것,,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가족에게 전후 납북자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

답_ 바라는 것이 요즘 사람들 미군 나가라 어쩌고 하는데 우리는 6.25를 겪어봐서…, 공산당이 어떻게 한다는 것을 이북에서도 겪어봤고, 전쟁도 겪어 봤어요. 또 3개월 동안 (북한에) 사는 동안 자유라는 것은 없고 생지옥인 걸 알아요. 언론의 자유가 있나? 행동의 자유가 있나? 우리가 이북에서 나온 다음에 북한 소식 들으면 토지가 완전히 국가 소유가 되고. 6.25 때도 동네 부역자들이 나와서 집에 감이 몇 개인지도 세고 하나도 손대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집안의 모든 것이 국가 소유였어요.

그런데 나중엔 울타리 안에는 개인 소유래요. 미국 국적을 가진 우리 친척이 (북한에) 갔다 와서는 이런 얘길 하는데, 이제는 울타리 안의 것은 자기가 먹어도 되니까 거름 줘서 잘 되게 하고, 바깥 것은 잘 되건 말건 소용없는 거예요. 그 할아버지가 이북에 갔을 적에 걸어가도 충분히 갈 거리인데도 양쪽에 당원이 앉아서 (마중 나온 가족들은 못 타게 하고) 돈을 받아가며 벤츠를 타고 같이 갔대요. 그리고는 집에 새끼줄 쳐놓고 동네 사람들은 못 들어오게 하고 가족들만 딱 만나게 하고 그랬대요. 미국 국적 가진 사람들은 이북에 들어가도 됐으니까요. 한 3-4년 전에 이야기예요

6.25가 북침이니 어쩌고 하는데, 사실 이승만 박사가 북침을 하겠다고 말은 했어요. 그렇지만 실제로 쳐들어 온 것은 북한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북한, 자유당, 군사 정권, 또 지금 노무현 정권도 겪어 봤지만, 북한을 찬양하고 북한 공산당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게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이론적으로 얼마나 천국 같아요? 그렇지만 평등한 거지를 만드는 것이지거지, 그게 천국은 아니에요. 중국, 소련이 평등한 거지를 만들었다가 이제는 자유 경쟁 시대로 왔잖아요. 북한이 왜 먹을 것이 없어 굶겠어요? 우리네들 살 때는 그래도 거기서 잡곡이든 뭐든 다 먹고 살았는데, 지금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건 거기서 농사 지어봤자 다 뺐뺏기고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정도의 양식만 받아 먹으니까 누가 자기가 나서서 힘들게 밤새워 지키고 정성 드려 농사를 짓겠어요? 정부 강제로 시켜야 되잖아요. 모범적으로 사상적으로 날뛰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사람은 안 되는 거죠.

물론 여기도 부정부패가 많고, 빽이 좋아야 한다고도 하지만, 이북에서처럼 그렇게 먹을 게 없고, 개밥보다 못한 것을 먹고 사는 사람은 없어요. 옥수수 껍질이나 빻아 가루를 내 먹지 먹을 게 없는 데 어떻게 해요. 실제로 겪어보면 자유도 없고, 이것은 노예야. 자유를 맛 본 사람은 절대로 못 살아요. 그러니 여기서만 북한을 찬양하고 북한식으로 들어 엎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바꿔야 돼요. 계급이란 것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나눠지는데, 대학생부터는 부르주아 계급이고 고등학생 이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에요. 거기는 머슴 살던 사람이 출세하는 거예요. 여기서 대학이라도 나왔으면 그 사람들한테는 부르주아에요. 그러면 그 사람들에겐 타도할 대상이에요. 타도가 뭐에요?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붉은 깃발이란 게 뭐냐면 사람을 죽여 피로 물들이는 것이에요. 그 사람들은 신이 없다고 믿으니까 사람 죽이는 것은 잘 하는 거라고 믿는 거예요. 여기서는 사람을 몇 명 죽였다 하면 사형을 시키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전쟁에서 수만 명을 죽였다 하면 영웅으로 치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 젊은 사람들, 6.25를 겪지 못한 사람은 '형제끼리 왜 그러냐? 같은 동포다'라고 하지만, 6.25때 총을 겨누고 한 사람들이 동포였지, 외국 사람이 우리를 그렇게 한 게 아니거든요. 밀고를 하고 ‘반동이다’라고 고발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그리고 6.25 때 그 사람들은 같은 형제라도 사상이 틀리면 죽인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우리가 '같은 동포니 악수를 하고 합해야 한다. 투표를 해서 연방 정부를 해서 그 다음에 느슨한 통일을 해서 투표를 해서 대통령을 뽑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공상에 불과해요. 그 사람들에겐 목표가 적화통일 외엔 없어요. 지금 폭탄 만들어 놓고는 '쌀 가져오라'고 협박을 하잖아요. 그리고 '미군이 나가라 그러면 너희는 우리 꺼다' 하는 거지.

정부가 지금까지는 납북된 어부들 처리해준다고 하는데, 6.25때 납북된 사람들도 억울해요.
그런데 정부가 의지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이 사람들은 북한과 친해야 하는데, 이 북한에서 반동분자를 붙잡아 처단했는데, 우리가 반동분자를 옹호할 수 있느냐? 이런 사상이 있어 처리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거는 국가에서 책임을 유기하는 거예요. 국가의 정신이 틀려서 그렇다고, 국가가 좌경화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6.25 납북자도 응당 요즘 납북자들과 적어도 같은 수준으로 줘야지, 그 사람들 지금까지 고생하고 참아온 세월이 있는데, 정부에서 예산이 없다고 모른 척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요즘 사람들은 해 주고, 과거 사람들은 내 버려두는 것은 직무 유기라고 생각해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하나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영혼 구원해 주세요’ 하는 게것이 제 기도죠. 항상 기도해요.
아버지. 아버지를 만난다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눈물) 아버지가 제 몸을 물려주셔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저와는 보람도 관계없지만 제 살아 생전에 (흐느낌)

항상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고 제가 또 죽기 전에 유언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잘 가꾸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 원한을 풀어드리지도 못하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아버지 흔적을 남기고 싶어 비석을 모셨고, 사진을 어머니 유골과 같이 묻고, 꽃도 심었어요. 봄에 개나리 진달래가 피면 아버지 구경하시라고. 아버지, 원한을 푸시고 이제 편안히 주무시고, 부디 어머니와 함께 천국에 가세요. 저희들은 하나님 덕분에 아무 걱정 없이 노후에 잘 살고 있습니다. 저도 머지않아 내일 모레면 80이 되고, 또 더 살지는 모르지만, 제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를 기념하는 일에 쫓아다닐 겁니다.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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