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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전봉빈 (증언자-유희영,전태희)
이름: 관리자
2013-09-17 11:47:52  |  조회: 3396


2006. 11. 21. 채록
061121A 전 봉 빈 (田鳳彬)

피랍인
생년월일: 1908년 9월 16일
출생지: 평양
당시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30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7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치안담당 국회전문위원,
학력/경력: 평양고보, 경성제대 졸업/공무원(지방 국장), 대구대학 초대학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4녀
외모/성격: 키 약 170cm 미남형, 온화하고 사교적.

증언자
성명: 1.유희영(1915년생) 2.전태희(1942년생)
관계: 1.배우자 2.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피랍인은 치안담당 전문위원으로 대한민국 초대 법제 정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가족 증언.함.
-전쟁이 나고 인근 친척집에서 피신해 있던 중 1950년 8월 7일경 피랍인이 잠시 집을 들른 틈을 타 세 명의 정치보위부원이 자택으로 찾아와 연행해 감
-피랍인과 함께 있었다는 탈출자 강태윤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피랍인은 자택에서 연행된 후 국립도서관 자리의 정치보위부에 수용됐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후송, 며칠 후 묶여 38선을 넘어감. 이후 고향 풍기로 찾아온 한 국군포로에 의해 피랍인이 압록강변 근처 강계에서 납치인사들과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소식 교환, 피랍인 명예 회복

“당시 계동의 병원 의사도 하나 붙잡혀 갔어요. 그래서 그 병원에 잡혀간 사람들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피랍인)부인들이 모이곤 했어요.”

“화신백화점 지하실에 이틀 있다가 그 다음에 서대문 형무소에 며칠 있다가, 밤에 다 끌어내다 놓고는 이북으로 끌고 간 거죠. 그런데 그 강태윤이란 사람이 우리 영감하고 한 데 묶여서 갔는데, 폭격이 나길래 같이 도망가자고 하니까 우리 영감이 '최후까지 따라가야 살아 있다가 가족을 만난다. 가다가 잡혀서 총살당해 죽으면 안 된다'고 해서 갔는데 거의 38선 넘어 간 것 같아요. 결국 강태윤이란 사람은 폭격이 난 틈에 도망을 왔고, 우리 영감은 붙들려 간 거죠.”

“국군포로 한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 사람 말로는 당시 압록 강변의 강계라는 민간인 마을에 납북인사를 한 집에 대여섯 명씩 수십 명을 수용을 했대요. 거기에 나무를 주우우러 갔는데, 국군포로들은 군복을 입으니 표시가 나잖아요. 그러니 납북인사들이 손짓을 해서 와 보라고 한 거야. 가 보니 노인들인데 사람들이 굉장히 똑똑하더래. 그 분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묻길래, 영주라고 했더니 마침 아버지가 장기를 두다가 나오시더래. 그러면서 영주면 나를 알겠냐고, 출마했던 누구라고 하시면서, 지금 휴전 협정에서 포로 교환을 할 테거니까 이북에서 회유를 하더라도 꼭 고향에 가라고 충고하시면서 '혹시 피난을 가면 내 아버지가 월남하셔서 풍기에 계실지 모르니까 만나거든 내가 여기에 있다' 고 전해달라고 하더래요.”


○ 직업 및 활동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지방에서 국장을 하다가, 미군정 시대가 되면서 대구대학(現영남대) 초대학장을 맡음, 1947년경 서울로 상경해 국회에서 치안담당 전문위원이 됨, 대한민국 초대 법제 정비에 크게 기여함>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전태희) 경성제대를 나오셔서 일본고문 시험에 합격하셨어요. 그래서 스물여덟에 군수가 되셨어요. 경북 영양군수, 성주군수, 안동 군수 하시면서 해방을 맞았어요. 그리고 대구 도청으로 가셔서 지방국장 하셨죠.

문_ 군수활동 외에 외부 활동을 하셨나요?
답_(전태희) 안동에서 해방을 맞고, 대구에서 지방국장을 하셨는데, 미군정 당시는 일제시대 때 관리를 한 경우 친일파로 많이들 몰았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국장을 그만두시고) 대구 대학을 설립하셨어요. '지금은 영남 대학교가이 됐는데 거기서 초대 학장을 하셨죠. 그러다 1947년쯤에 ‘10월일 폭동’이 일어나서 좌익고 하니까 빨갱이 천지가 돼 버린 거예요. 그러니 서울은 치안이 되는데, 지방은 불안하다고 해서 학장을 관두고 서울로 오신 거예요. (서울 오셔서는) 아버지는 내무 치안담당 국회 전문위원을 했어요. 당시 전문위원이 많지 않았어요. 차관보급이죠. 그 때는 우리나라 법제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라, 일본법이긴 하지만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감사를 많이 하고 수정도 하시느라 굉장히 바쁘셨어요. 그러니까 법제 정비를 하는 데 행정위원은 물론 국회의원도 그만한 실력도 없으니, (아버지가) 국회 법안을 많이 통과시켜서 안정을 시켰어요. 헌법 이후 민법, 상법, 행정법 등 법제를 완성시키는 그 일을 하셨어요.

문_ 아버님이 많이 바쁘셨어요?
답_(유희영) 그 때 전문위원으로 있다가 1950년 5월에 국회의원에 출마를 했다가 안 되고, 6.25가 났죠.



○ 납북 경위

<전쟁이 나고 정부 요인들과 함께 열기차로 남하하던 중 가족이 걱정돼 용산역에서 하차, 집에 들렀다가 이후에는 한강교 폭파로 남하가 어려워짐. 인근 친척집에서 피신해 있던 중 1950년 8월 7일경 피랍인이 잠시 집을 들른 틈을 타 세 명의 정치보위부원이 자택으로 찾아와 연행해 감.>

답_(유희영) 6.25 난리가 나니까 자꾸 집으로 (남편을) 잡으러 오곤 했어요. 그래서 안암동 친척집에 가 있었는데, 폭격피해가 많이 나니 집을 돌아보려고 왔어요. 와서는 하룻밤 자고 간다는 게 그만 이튿날 아침 7시에 붙잡혀 갔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조금 기분이 이상해서 대문 밖에 나가보니까, 저쪽에서 세 사람이 뛰어 오기에 겁이 나서 집에 들어와서 문을 걸고 있었죠.으니, 문을 두드리고 열라고 하더니 (들어와서는) 자는 남편을 붙들어 갔어요. 우리 집에는 세 사람이 들어왔었어요.

답_(전태희) 제가 조금 보충해서 말씀드리면, 1950년 5월 10일에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출마하셨다가 낙선을 하셨어요. 연고가 평양이고 대구인데, 영주에서 출마를 하셨기 때문에, 낙선을 하셨어. 그리고 한 달 있다가 6.25가 났거든요. 그 때 마침 신성모 국방장관의 비서하던 분이 우리 삼촌 되는 분이에에요. 그분도 경성제대 출신 고문판사 하시던 분인데, 아버지가 전화를 해 본 거예요. '전쟁이 난 게 맞느냐?'고 물으니 '맞습니다. 그러니 형님 내려가세요. 우리들도 내려 갑니다‘ 라고. 그런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했다고. '정부가 안 내려 갈테니 동요하지 말라고' 그 방송을 내가 아버지 손을 잡고 광화문 중앙청 앞에 갔다가 들었던 기억이 나요. 어쨌든 당시 아버지는 차관보급이니 전선 패스(무료로 아무데나 갈 수 있는 열기차승차권)를 갖고 계셨는데, (삼촌이) '정부 요인들은 몇 시에 용산역에서 출발을 하니 그리로고 나가시라'고 해서 어머니에게 이별을 하고 용산에서 기차를 타셨어요. 타셔서 아는 분들이랑 사소한 안부를 해 가며 있었는데, 같이 타고 있었던 국회 전문위원 정진동이라는 분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영등포역에 와서는 '잠깐 다녀 올게께' 하고 나가고 기차는 떠났대요.
처음에는첨엔 화장실에 갔나 보다 했는데, 아버지는 그 길로 북아현동 집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냥 내려가시지 왜 오셔서 이런 일을 당하셨는지 원망을 많이 했는데, 내가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애를 낳고 가정을 꾸리다 보니 이젠 알겠더라고요. 나라도 도망 못 간다 이거야. 막내가 두 살이고, 큰 누나가 열한 살이니, 거기다 공무원 생활하던 사람이니 부인에게 모두 맡겨놓고 도망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리고는 한강다리가이 잘리고, 서울 안암동 이모네 집에 피신해 계시다가 폭격이 심해져 왔어요. 언제 한 번은 북아현동 뒷 별채에다 아버지와 반공호도 같이 팠어요. 또 한옥이니 독에다 앨범이니 사진이니 졸업장이니 중요한 것을 다 넣어 묻고 그랬어요. 내가 어렸지만 남자이니 아버지를 옆에서 도왔다구. 그렇게 피신해 계시다가 서대문 지역이 완전 불바다가 될 정도로 폭격을 맞았다는 그 소리를 들으니 우리집이 걱정이 되셨을 것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밤에 오신 거죠.

문_ 피랍 당시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 주신다하면?
답_(전태희) 아버지가 잡혀가신 날이 8월 7일이었는데 저는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어서 고 하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죠. 그런데 하루는 아침이 굉장히 맑은 날이었는데, 일어나서 나가보니 식모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아 골이 나서는 왔다 갔다 거려요. 그래서 '어머니 어디 가셨냐?'고 물으니 모른다는 거야. 그게 뭔고 하니, 내무서든지 정치보위부인지 아버지를 잡으러 왔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를) 안 보내시려고, 자꾸 말을 걸고 (시간을 지연시키며) 사싸인을 보내신 거야. 그 때 아버지는 사랑방 별채에서 운동화도 머리맡에 두고 자고, 또 앞집은 국군장교 출신 집이라 서로 믿고 서로 도망가자고 담을 헐어두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 식모, 미련한 사람이 어머니가 시간을 끄는 동안 눈치를 채고 아버지에게 살짝 가서 도망가시라고 해야 되는데 그걸 안한 거야. 그러니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거였어. (결국 아버지는 잡혀가고) 어머니는 '어디로 가냐, 나도 데려가라'며 따라갔을 거라고. 그 사이 나는 깼는데, 식모는 야단을 맞았으니 볼멘소리를 한 거지.



○ 납치 후 소식

<피랍인과 함께 있었다는 탈출자 강태윤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피랍인은 자택에서 연행된 후 국립도서관 자리의 정치보위부에 수용됐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후송, 며칠 후 묶여 38선을 넘어감. 이후 고향 풍기로 찾아온 한 국군포로에 의해 피랍인이 압록강변 근처 강계에서 납치인사들과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함>

문_ 잡혀서 어디로 갔는지?
답_(유희영) 당시 계동의 병원 의사도 하나 붙잡혀 갔어요. 그래서 그 병원에 잡혀간 사람들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피랍인)부인들이 모이곤 했어요. 그러다 하루는 폭격을 틈 타 도망쳐 온 사람이 있다고 모이라 길래 가봤더니 강태윤이란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이 말하기를 맨 처음엔 을지로 국립도서관에 수용 돼 있다가 한 이틀 지하실에 갔다가, 그리고는 다른 데로 데려가곤 했대요. 그러니까 서울 시내에서 몇 번을 옮기고, 화신백화점 지하실에 이틀 있다가 그 다음에 서대문 형무소에 며칠 있다가, 밤에 다 끌어내다 놓고는 이북으로 끌고 간 거죠. 그런데 그 강태윤이란 사람이 우리 영감하고 한 데 묶여서 갔는데, 폭격이 나길래 같이 도망가자고 하니까 우리 영감이 '최후까지 따라가야 살아 있다가 가족을 만난다. 가다가 잡혀서 총살당해 죽으면 안 된다'고 해서 갔는데 거의 38선 넘어 간 것 같아요. 결국 강태윤이란 사람은 폭격이 난 틈에 도망을 왔고, 우리 영감은 붙들려 간 거죠.

문_ 당시 잡혀가신 분을 찾으러 다녔는지?
답_(유희영) 열한 살짜리 큰 딸을 데리고 국립 도서관에 가보고 했는데, 알고 봤더니 거기서는 이틀 밖에 안 있고 다른 데로 갔다더라고요.

답_(전태희) 그러니까 수감된 장소를 정확히 모르니까,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 가보고 한 거죠. 그런데 그 때 우리 집에서 선거를 치르고 나니 돈이 없었을 거예요. 경성방직 사장이었던 김성수씨가 선거비용을 쓰라고 광목을 한 차를 주기도 했지만, 결국 빚을 졌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끼니를 위해 어머니는 시집올 때 가져왔던 옷감, 패물 등을 팔면서 산 거죠. 어머니 일과는 나와 누나 데리고 다니면서, 그걸 팔아서 쌀 좀 사고, 그리고는 마포로 어디로 아버지 시체 찾으러 다닌 거죠. 그러다가 계동에서 납북 인사 가족들이 모여서 소식을 주고받는다고 하니 거기 나가시게 된 거죠. 거기에 강태윤이라고 마침 아버지와 같이 끌려가던 분이 탈출해서 가족들에게 얘기를 해 줬는데 어머니가 직접 그 얘기를 들으신 거예요. 그 때 '아 서울에서 개죽음은 안 당했구나' 생각한 거죠.

답_(유희영) 우리가 12월에 대구로 피난을 갔다가 아홉 달을 살고, 풍기에 사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8월에 풍기로 갔어요. 아들이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을 하게 되면서 서울에 와서 살았죠.

문_ 계동에서 들은 소식 외에 또 다른 소식은 없었는 있는지?
답_ (전태희) 제공권이 남한과 미군에 있으니 얘들북한군은이 낮에는 못가고, 밤에만 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폭격이 심해지면 '숨으라'고 다 했다가, 그 다음에 다시 정렬해서 또 가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 강태윤씨는 오라기를 풀고 같이 도망가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가다가 개죽음 하겠다 싶고, 왜냐하면 총을 쏘니까. 여기까지 데려 온 걸 보면 죽이지는 않겠다 싶어서 우선은 가고 보자고 한 거고, 이 사람은 탈출을 한 거죠. 그러니 서울에서 죽지진 않으신 걸 알았죠. 우리는고. 그 다음에 풍기라는 곳에 피난을 갔어요. 그 곳은 평양에서 할아버지가 피난해 오신 곳으로 이북사람들이 많았다고요. 우리는 처음에 대구로 피난 갔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 풍기로 간 거예요.
그런데 한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 사람은 국군포로였어요. 당시 압록 강변의 강계라는 민간인 마을에 납북인사를 한 집에 대여섯 명씩 수십 명을 수용을 했대요. 거기에 국군포로가 나무를 주우러 간 건데, 국군포로들은 군복을 입으니 표시가 나잖아요. 그러니 납북인사들이 손짓을 해서 와 보라고 한 거야. 이 사람 말로는 노인들인데 사람들이 굉장히 똑똑하더래요. 그 분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묻길래, 영주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장기를 두다가 나오시더래. 그러면서 영주면 나를 알겠냐고, 출마했던 누구라고 하시면서, 지금 휴전 협정에서 포로 교환을 할 테거니까 이북에서 회유를 하더라도 꼭 고향에 가라고 충고하시면서 '혹시 피난을 가면 내 아버지가 월남하셔서 풍기에 계실지 모르니까 만나거든 내가 여기에 있다' 고 전해 달라고 하더래요.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이 소식을 전하러 왔던 거예요. 그래서 강계까지도 안전하게 가신 걸로 보지요. 군인이름은 잘 몰라요. 나중에도 그 사람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종래 누군지 알 수 없었어요. 그 이후에는 소식을 모르죠.



○ 남은 가족의 생활은?

<처가의 도움과, 원래 있던 재산을 소진해 가며 배우자가 어렵게 생계를 꾸려감.>

답_(유희영) 저의 친정 동생이 많이 도와줬어요. 친정 동생이 우리 식구 여섯을 3년을 데리고 있었고, 또 내가 바느질을 하니까 동생이 '점포하나 사 줄 테니 해 보라'고 해서, 그 때 동생이 12만원 주고 가게를 사줬어요. 그래서 기술자 둘을 두고 바느질을 몇 해 하다가,
딸이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직장에 가고 해서 그렇게 산 거죠. 그리고 하숙집도 좀 해보고.

답_(전태희) 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죠. 누나는 대학에 가보지도 못했고, 여동생들은 중퇴를 하고, 나와 막내 동생만 졸업을 했죠. 그리고 또 아버지가 경북에서 관리 일 하시면서 전임가거나 가면서 받은 송별금 같은 것을 저축을 해서 영주에 계속 땅을 사 두셨다고요. 평양에도 재산이 많아요. 등기부등본 같은 것을 애지중지 갖고 있다고. 찾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다 이북에 있으니 아무것도 못하는 거지. 평양에 호텔도 갖고 있고, 상가도 17개나 있었어. 하지만 그거야 하나도 의미가 없고, 남한에 아버지가 봉급생활하면서 사놓고 했던 것을 나중에 우리가 요긴하게 썼지. 남한에 있던 땅문서 등은 어머니가 다 관리하고 계셨지.

문_ 그래도 잘 보관하셨네요. 다른 분들의 경우 폭격 등으로 분실된 경우가 많던데?
답_(전태희) 말도 마요. 우리 1.4 후퇴 때 피난을 가는데 고리짝 30개를 들고 서울역 1등 대합실에서 탄약핵 실은 차로 내려갔다고. 그런데 거기에도 제 1차로 소중하게 가져간 게 아버지 고보와 대학 졸업장, 고문 패스 합격증,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트렁크 하나에 등기부 등본 같은 그런 것을 그렇게 들고 다녔어. 제 기억에 북아현동 현관 돌 밑에 사진도 다 묻고 책도 다 묻고 했는데, 피난 가기 전에 다 수거를 했어요. 그러다보니 아버지는 관리할 때 자료가 인민군들에게 발각되면 안 되니까 다 태우자고 했는데, 어머니가 당신이 보관하겠다면서 못 태우게 한 거야. 그래서 우리 집에 앨범도 다 있어요.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계동에 다니실 때 납북된 사람 인적 사항 등은 기록을 했지. 계동에 있는 납북자 가족 연락소에서. 당시 부인들이 많이들 했어. 그리고 적십자사에 했어.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없지 뭐.


○ 호적정리

<사망처리 함>

답_ 정리가 돼 있지. 작년에 실종 신고를 신청하고, 선고를 8개월 후에 받아서 제사를 하죠.
그래서 생일에 돌아가신 걸로 기념하고는 제사를 하죠. 그동안 도리가 아니지만 천수가 다 돼 돌아가셨다 생각하면서도, 분해서 (정리를 못했었어).



○ 연좌제 피해

<가족들의 신원조회가 까다로운 것 외에는 큰 피해는 없었음.>

답_(전태희) 다행히 우리 집엔 그런 건 없었어. 내가 공군을 가서 중위로 전역을 했는데 하급 장교라서인지 그런 걸 받지는 않았어. 또 나는 기밀 자료를 다루는 정보 부대에 있었어. 그러면서도 박해는 안 받았는데 내가 오히려 피해가기도 했지. 중앙정보부에 갈 수 있었는데도. 거기는 이북이라도 기관원들끼리는 알 수가 있어. 그러면 공작을 하기 위해 나에게 접선을 할 거라고. 내가 해외에 나가서 활동한다든가 하면. '자네 아버지 만나게 해 줄 테니 가자'고 할까 봐 내가 중앙정보부는 안 간 거야. 마침 외삼촌이 김형옥씨나 소위 8기들하고 다 동기야. 의사지만. 그러니 김형옥씨가 중앙정보부 부장할 때도 삼촌이 인사시켜 다 알지만, 그 쪽으로는 안 가고 제대해 버리고 말았지.

문_ 동에서 감시당한 적은 없는지?
답_(유희영) 아니.

답_(전태희) 감시는 없었는데, 외국에 나갈 때 신원조회가 까다롭게 잘 안 되는 거야.
나는 국내 영업을 하고 해외에 자주 나갈 여건은 아닌 직업이었고,
매부들은 해외에 나갈 길이 많았는데 종종 걸렸다고.
그러니 매부들이 장인어른에 관한 거니까 얘긴 못해도 굉장히 힘들어했지.
사망신고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안 했거든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소식 교환, 피랍인 명예 회복>

답_(전태희) 저희가 이미일 이사장과 (문제 해결을 위해) 어렵게 일하고 있는데, 이게 실현성이 있을까 하면서도 곰같이 하고 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러면 정부도 정부다운 일을 해야지. 이런 정부가 어디었딨어요? 노무현 정부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위정자 이승만 정부부터 대통령, 각료, 지식인, 사회 지도자들이 뭘 하고 있었느냐고.. 그게 어떻게 양식 있는 지식인이고 지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이북도 솔직히 인정을 하면 돼요. ‘중앙 정부가 서울에 있었으면 요인도 서울에 있었을 거고. 공산주의 체제가 나빠서 다 월남해서 인력이 없어서 그랬다. 사실 우리가 잡아갔다. 그러나 이제 화해하는 입장에서 우리 윗세대가 잘못한 거 인정하자’고. 그러면서 최소한 소식이라도 전하게 해 보자는 건데 왜 못하냐 이거야. 그래서 나는 이 적십자나 통일부 담당자들의 발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르는 것인지. 또 이북도 맞는 얘기면 이해할 거 아니야. 소식 좀 전해주자는 거고, 이제 다 늙은 사람들 내려가겠다면 보내주고.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을 일인데, 그걸 왜 안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특히 그 일을 맡고 있는 이 일을 맡고 있는 정부 담당자들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해야 한다고.

문_ '압록강변의 겨울'을 6.25납북인사 가족회에 소개해 주셨는데, 평소에 납북관련 서적에 관심이 많으셨나 봐요?
답_ 제가 포항에서 근무할 때인데 신문을 보다보니 '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책, 더구나 납북인사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하려고 조종했던 조종관을 인터뷰해서 쓴 책이 나왔다 길래 책방에 며칠을 기다려 본 거예요. 그래서 찾아 봤더니 꽤 상세히 나와 있어요. 주로 정치인들 위주로 쓴 것이거지만, 납북경로, 몇 차에 걸쳐 어떤 방법으로 갔다는 것거. 초기에는 차로 가다가 공습이 심해지면 걸어가든지 밤에만 가든지. 어디를 경유해 갔는지. 또 거기서도 이북사람들과 김일성이 하고 지위확보를 위해 정치적 결성을 했던 것 거. 독립촉성회 같은 것을 하면서 피나게 신변을 지키면서 싸웠던 것을 절절히 봤다고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죽었다든지. 그런데 불행히도 그 책에는 아버지가 소개되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행정관료였고, 낙선 후에 변호사 개업을 하려고도 했고, 또 경남 지사로 발령될 것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행정관료이긴 했지만, 사실 아버지는 굉장히 정치적 인물이었어요. 아버지는 경성제대 고문판사를 했으니, 상당히 초기에 패스를 했어요. 그러니 후배들이 따랐어. 아버지가 지방 국장을 하고 있다가 해방 후에 사람들이 자꾸 친일파로 몰고 가니까, 집어 던지고 나와서 대구대를 만드시니까 경성 제대 졸업하고 금방 군수 되고 했던 후배들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선배님 저도 강의하게 해 주세요' 한 거야. 신현확학, 백남옥, 박일경 다 들어 있어요. 그렇게 있다가 아버지가 잡혀갔단 말이에요. 그러니 서울에서 한 번 난리가 난 거예요. 서울 수복하고 나서, '전봉빈이 잡아가게 한 사람이 누구냐? 누가 고발했냐?'며 국회에서 떠든 사람들이 다 아버지 후배였다고. 그게 뭐냐 하면 소위 정치적 그룹이었어. 어머니 얘기에 의하면 열흘이 멀다 하고 수십 명씩 집에 와서 먹고 그랬다는 거야. 전부 고문 판사 한 사람들로 선배를 따라 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이게 TK가 된 거예요. YS가 대통령이 되는 시점에 신현확학씨가 TK의 대부로 알려져 있으니, 조선일보 기자가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TK의 대부로 알려져 계신데' 라고 말문을 여니까, 신현확학씨가 '내가 대부가 아니라 잡혀간 전봉빈이 대부다' 라고 했다고요. 이 분은 내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국가로서도 대단히 아까운 사람이에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남편 생각 많이 나셨시는지?
답_(유희영) 할 수 없죠 뭐. 애들 기르려니 모르고 살았죠. 애들이 착해서 말도 잘 듣고 크게 힘 안 들었어요. 내 동생도 많이 도와주고, 딸들이 여학교만 나오고는 사무실에 다니면서 돕고 해서, 바느질 하는 것도 돕고. 풍기에 7년 살 때는 거기에 피난 온 사람이 많았는데 직조공장이 많았다고. 그러니 우리도 기계 갖다 놓고 했지.

문_ 남편 만나면 하고 싶은 말 없는지?
답_(유희영)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답_(전태희) 이제 슬픔이 끝에까지 왔고, 한이라는 것이 지나쳐서 이젠 한도 없는 거지. 그런데 우스운 게 실종 선고 됐다고 딸이고 사위들에게 전부 첫 제사를 모신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 꿈에 나타난 거야. 아버지가 이북에 있는 여자라며 데리고 왔더래. 그래서는 '그 동안 미안해서 못 왔다'고 사과를 하더래. 책에도 그런 것들이 나오지만, 거기서는 소위 (그쪽) 정치학을 시키려고 결혼 시키고 애를 낳게 했다고. 초기에 여자를 붙일 때는 식모로 붙이고, 그 때는 감시하려고 했어. 그리고 결혼을 시키면서도 감시를 했다고. 하지만 인간이 부대끼고 사니까 부부가 된 거지, 사실 처음에는첨엔 그렇지 않다고. 그러니 아버지도 재혼을 했을 거라고. 또 하길 바라고.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와 얘길 하는데 '이북에 만일 자식이 있으면, 막내 동생보다 서너 살 아래일거다. 그 사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들어보고 싶어)' 이런 얘기를길 하는 거지.

문_ 어머니께서 평소에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시던가요?
답_(전태희) 사실 우리가 슬퍼할까봐 그런 내색은 안하셨지. 그러나 속으로 많이 끓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게 어디 한두 번이었어요? 이산가족 찾기다 뭐다 해도 남의 일로 운운 거지 뭐. 정작 내 슬픔은 잃어버리고. 우리는 할 수가 없으니까.

문_ 아버지와의 기억은 많으세요?
답_(전태희) 아침에 학교 가 다가 신발주머니가 없어 칭얼대다가 아버지한테 한 번 맞은 기억이 나. 아버지가 원래 때리는 분이 아닌데 그 때 기분이 안 좋으셨는지 그런 기억이 있고. 또 6.25났을 때 방송 들으러 중앙청 앞에 나를 데리고 갔던 거. 나는 왜 그걸 듣는지 몰랐는데 아버지가 심각하게 듣고 계셨어. 또 전쟁 나던 첫날., 민관식이라는 아버지의 경성제대 대학동기가 있었어. 그 집에 나하고 둘이서 피신을 했어. 집에서 이부자리를 들고 갔었어. 그런 기억들이 있어.

문_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하고픈 말?
답_(전태희) 아버님, 제 슬픈 마음을 어떻게 표현을 하겠어요? 그러나 저보다 아버님의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우리는 그래도 어머니 밑에서 형제라도 있고, 또 옆에 친척도 있고 한데(눈물). 아버지는 아무도 없었잖아요. 명절이라든지 또 우리 또래 애라도 보면 얼마나 마음맘이 아프셨어요. 내가 슬픈 것 이상으로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또 돌아가셨다 해도 그 때는 오죽했을지(흐느낌). 그건 저만이 아닐 거예요. 납북되신 분 어떤 분이든 간에 어린 사람이 납북이 됐든, 나이가 많으신 분이든, 지위가 높든 낮든 다 오죽했겠어요. 저의 아버지만이 아니고 여기 가족들은 서로 위로하며 살아도 그분들은 혼자 가셔서 그 절박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그 생각만 하면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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