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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종령 (증언자-이성의)
이름: 관리자
2013-09-17 11:44:46  |  조회: 3483


2006. 11. 7. 채록
061107A 이 종 령 (李種齡)

피랍인
생년월일: 1909년 7월 29일생 (음력)
출생지: 황해도 금천군
당시 주소: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10번지 2호
피랍일: 1950년 8월 1일경
피랍장소: 서울시 장충동 (자택 인근 은신처)
직업: 변호사
학력/경력: 서울 고등법원 판사, 청주지방법원 검사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5녀
외모/성격 : 강직하고 곧은 성격, 작은 키

증언자
성명: 이성의(1948년생)
관계: 5녀 막내딸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피랍인은 황해도 출생으로 해방 전 법조인으로 발령받아 남하, 서울지방법원과 청주지방법원 판검사를 거쳐 전쟁 직전에는 서울에서 개인 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 업무를 맡고 있었음.
-전쟁 직후 가족들을 두고 멀리 피난할 수 없어 집 근처 장충동 쪽의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다가 7월 초경에 집을 나간 이후 소식 없음,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피랍인과 함께 수감되었던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피랍인이 써 준 쪽지를 전해 주어 피랍 사실을 확인함.
-거주지 감시 등 피랍인 자녀 및 배우자의 취업 과정에서 신원조회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아버지가 (피난) 가시려고 보니까 우리집은 애들이 너무 많고, 엄마는 너무 바깥세상을 모르고 하니 맡겨 놓고 혼자 가시기가 너무 발이 안 떨어져서 못가셨대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추이를 살펴보시려고 했는데, 당시 근처 장충동 쪽에 법원 쪽 변호사 판사가 많이 살았대요. 그래서 그 근처에서 숨어 계시면서 삿갓, 모자 쓰고 집에 한 번씩 들렀대요.”
“공무원이었고, 판검사였고. 사회 인사니까 납치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가 밀고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고.”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랬어요. "나 죽으면 너희가 내 가슴을 한 번 열어봐라"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울음).”

“큰 오빠는 전쟁 때, 군대보다는 경찰이 덜 위험하다고 해서 경찰로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납치당하셨다 하니까 배속이 전투 경찰로 바뀌어졌대요. 그러면서 지리산 토벌대로 보내졌대요. 군대보다 더 위험한 곳이죠.”
“아버지 판사 친구 사무실에 가서 '소식을 알려 달라, 좀 내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그쪽 세상도 좋은 세상인데 왜 그러냐’면서 안 만나게 해 주더래요. 그러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 사람은 이미 이북에 가고, 수원에 살던 그 사람 부인이 엄마를 찾아와서는 자기는 ‘남편이 빨갱이인 줄 몰랐다’면서 막 울고 그랬대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랬어요. 나 죽으면 너희가 내 가슴을 한 번 열어봐라”


○ 직업 및 활동

<황해도 출생으로 해방 전 법조인으로 발령받아 남하, 서울지방법원과 청주지방법원 판검사를 거쳐 전쟁 직전에는 서울에서 개인 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 업무를 맡고 있었음>

문_ 황해도 출생인데 언제 남하했는지?
답_ 해방되기 전에 고등고시 보시고 판사 임용이 되셔서 서울에 오셨어요. 그게 해방되기 전이라고 했는데 얼마나 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문_ 직업은?
답_ 당시는 판사와 검사를 같이 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에 기록을 찾아보니 퇴직할 때는 청주지방법원 검사로 퇴직하셨더라고요.

1950년 1-2월쯤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하셨다고 했어요.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 때는 검사를 하셨는데, 아마 사건을 맡은 것을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판결을 안 하셨나 봐요. 그래서 청주지방 검사로 부장 검사로 좌천이 되셨어요. 거기서 1년인가 근무를 하셨대요. 그 당시는 애들하고 가족이 모두 옮길 수가 없어서 아버지만 가셔서 관사에서 생활을 하셨는데 나중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서울로 오셔서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하신 것 같아요.

문_ 학력은?
답_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나오셔서 재판소에서 서기를 보시면서 고시공부를 계속 하셨나 봐요. 마지막 고등고시를 볼 때는 일본에서 시험을 봤는데 1등은 일본 사람이 하고, 당시 아버지가 2등을 했대요. 그래서 서울에 발령을 받으신 것이거고. 그게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화 됐었다고 들었어요하더라고요.

문_ 그 외 활동은?
답_ 다른 활동은 안 하신 것 같아요. 법원에만 다니시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셨대요시고 그랬대요.



○ 납북 경위

<전쟁 직후 가족들을 두고 멀리 피난할할 수 없어 집 근처 장충동 쪽의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다가 7월 초경에 집을 나간 이후 소식 없음, 이후 서대문 형무소에 피랍인과 함께 수감되었던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피랍인이 써 준 쪽지를 전해 주어 피랍 사실을 확인함.>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아버지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우리가 아들 둘에 딸 다섯, 7남매였어요. 아버님은 변호사 개업을 막 하신 터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셨대요. 우리 어머니는 거의 바깥일을 모르시고 살림만 해서 심지어 시장 볼 때도 돈을 다 잃어버리고 해서, 아버지가 꼭 같이 시장도 보시고 했대요. 그러다가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서 쌀을 사러 나가셨대요. 을지로의 시장에엘 갔는데, 시장이 좀 이상하더래요. 다 문을 안 열고. 쌀을 달랬더니 쌀은 없고, 보리쌀밖에 없다고 해서 그거라도 달라고 해서 싣고 왔대요. 그런데 법원에서 누가 연락이 와서 전쟁이 난 것거 같으니 피하시라고 다 같이 피난 가는 방법이가는 게 있으니 그 때 같이 가시라고 전갈이 왔었대요.

그런데 아버지가 가시려고 보니까 우리 애들이 너무 많고, 엄마는 너무 바깥세상을 모르고 하니 맡겨 놓고 혼자 가시기가 너무 발이 안 떨어져서 못가셨대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추이를 살펴보시려고 했는데, 당시 근처 장충동 쪽에 법원 쪽 변호사 판사가 많이 살았대요. 그래서 그 근처에서 숨어 계시면서 삿갓, 모자 쓰고 집에 한 번씩 들렀대요. 그렇게 왔다 갔다 했는데 그 당시 우리 큰오빠가 서울법대 2학년이었어요. 그 아들도 군대를 가야 하니까, 하루는 아버지가 오셔서 군대로 보내지 말고 경찰로 보내라 했대요. 그러면 좀 덜 위험하다고 해서. 그래서 자원해서 경찰로 갔죠. 그러다가 7월 초 어느 날인가는 새벽에 오셔서는 경비가 너무 너무 심해 나다닐 수가 없다면서 '당분간은 못 올 것 같다. 좀 뜸해지면 오겠다' 하시고 나갔대요. 그리고는 소식이 없는 거예요

당시 아버지 법원에 같이 계셨던 판사 분이 계신데 집이 수원에 있어서 우리 집에 가끔 기거하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이 좌익이빨갱이었였대요. 그래서 그 분이 아마
밀고를 한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러고 나가셔서는 한 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누가 집을 찾아와서는 자기가 지금 형무소에서 나오는 길인데, 영감님(아버지)이 서대문 형무소에 있다면서 아버지가 주신 쪽지를 전해줬대요. 그래서 그 쪽지를 받고 엄마랑 큰 오빠는 서대문 형무소로 매일 면회를 하러 갔는데 결국 한 번도 못 만나셨대요.

그리고 좌익쪽빨갱이라는 아버지 친구 사무실에 가서 '소식을 알려 달라, 좀 내 보내 달라'고 그랬더니 '그 쪽 세상도 좋은 세상인데 왜 그러냐?'면서 안 만나게 해 주더래요. 그러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 사람은 이미 이북에 가고, 수원에 살던 그 사람 부인이 엄마를 찾아와서는 자기는 ‘남편이 빨갱이 인 줄 몰랐다’면서 막 울고 그랬대요.



○ 납치이유

<피랍인은 법조인으로서 사회 엘리트 계층이었고, 또한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지인의 밀고가 있었음>

답_ 그냥 공무원이었고, 판검사였고. 사회 인사니까 납치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가 밀고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고.



○ 납치 후 소식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막내 삼촌이 종로에서 자동차 부품 계통 가게를 하고 계셨는데, 정보 계통 사람이 거길 드나들었대요. 그 분이 '살아계시는 것 같다'는 얘기는 했다고 하는데, 그게 진짜인지는 확인할 수 없고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 말씀은 못 살아계셨을 거라고 해요. 아버지가 워낙
성격이 강직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주택 매매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 속에서 피랍인의 큰 딸이 미용실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짐. 장남은 제대 후 파출소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얼마 안 돼 이름 모를 병으로 사망, 자녀 둘은 전쟁 중 연백에 있는 외가에 보냈다가 휴전선이 확정되면서 돌아올 수 없게 되었고, 한 명은 폭격 중에 날아온 총을 맞고 피살됨. 결국 피랍인의 배우자와 3자매만 살아남아 어렵게 가정을 꾸려감>

답_ 아버님 계실 때는 아버님이 검사도 하시고 변호사도 하고 했으니 사는 건 괜찮았죠. 우리가 을지로 7가에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꽤 컸대요. 그래서 처음 변호사 개업했을 때는 그 집 응접실을 사무실로 썼다고 하더라고요. 한쪽을 집을으로 하고. 그랬는데 서울 수복 되고 나서 큰 오빠가 이렇게 큰 집을 살아서 뭐하냐고 해서 그것을 팔고 북아현동 쪽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 집보다 몇 배나 작은 집으로요. 그런데 당시에 부동산이 얕보고 잔금을 안 줬나 봐요. 혼란 시기라 그랬겠지만, 말하자면 사기를 당한 거죠. 우리 엄마가 매번 거길 왔다 갔다 하면서 돈 받으러 다녔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북아현동에 이사 와서는 엄마가 '내가 숨이 답답해서 못 살겠다'며 매일 나가서 골목에 자리 펴 놓고는 동네 아줌마들하고 얘기하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이제 생계를 걱정해야 되는데, 우리 어머니는 돈을 버는 재주가 없었어요. 그러니 뭘 해도 안 되고, 하려고 생각도 못했어요. 그 때 우리 큰 언니가 미용기술을 배워서 미장원을 하면서 살았어요. 언니가 재주가 좋아서 미장원이 잘 됐어요. 그래서 그 때는 그렇게 어렵게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우리 큰 오빠는 전쟁 때, 군대보다는 경찰이 덜 위험하다고 해서 경찰로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납치당하셨다 하니까 배속이 전투 경찰로 바뀌어졌대요. 그러면서 지리산 토벌대로 보내졌대요. 군대보다 더 위험한 곳이죠. 그래서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을 하고 거기서 경위로 진급을 하고 서울로 올라온 거예요. 복학을 해야 하는데 못하고 결국 6.25 끝나고 북아현동 파출소 소장으로 부임을 했어요. 당분간 근무를 하게 된 거죠. 그러다가 큰 오빠가 학교를 다시 가려고 하던 중에 이름 모를 병에 걸렸어요. 당시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입원을 했었는데, 거기서 몇 달 있다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내가 막내니까 내 손을 잡고 북아현동 길을 넘으면 서대문이거든요. 거기를 넘어 오빠 문안가고 밥해 날랐던 기억이 나요. 우리엄마가 울며 다녔겠죠. 그렇게 어느 날 우리 큰 오빠 돌아가시고. (눈물). 우리 친정어머니가 정말 기가 막히셨겠죠. 오빠만 살아 있어도 아버지 대신으로 삼겠지만 오빠가 이름도 모르는 병으로 돌아가셨으니. 그 때 파출소에서 장례를 다 치러 줬어요.

그리고 둘째 언니와 내 바로 위의 오빠가 있어요. (6.25 직후에) 우리가 쌀을 못 사서 식량이 없었어요. 대신 생전 먹지도 않는 보리쌀 밥을 해주니까 작은 오빠가 너무 밥을 안 먹더래요. 그래서 우리 엄마가 얘가 죽게 생겼으니 둘째 언니를 딸려서 연백에 있던 외갓집에을 보낸 거예요. 당시는 휴전선이 정식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연백도 왔다 갔다 하던 때래요. 보내고 좀 지나서 애를 데리러 갔더니 그렇게 안온다고 하더래요. 밖에서 노는 걸 데려와서 붙잡고는 가려고 하는데 안 가려고 떼를 쓰더래요. 그걸 보고 우리 할아버지도 며칠 있으면 철도가 개통될 테니 그 때 데리고 가라고 해서, 그냥 두고 온 거죠. '며칠 있다가 데리러 오마' 하면서요. 그런데 그 다음날인가에 38선이 그어지고, 연백이 이북으로 통합된 거예요. 그렇게 생이별을 한 거죠. 우리 오빠는 이강의(1944년생)이고, 둘째 언니는 이 정숙(1938년생)이에요.

그렇게 두 명은 이북에 있고, 큰 오빠는 돌아가시고, 딸 넷이 남은 거예요. 그런데 내 위에 강의 오빠, 그 위에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전쟁이 나고 아버지 납치되고 나서 집 앞마당에 있다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 언니는 이름이 '이 지자'예요. 그래서 딸 셋이 남았죠.

나는 어려서 잘 몰라도 우리 엄마가 힘드셨겠죠. (울먹임) 그리고 우리 큰언니가 고생을 많이 하고, 우리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까. 그러니까 일곱 남매에 어머니 아버지, 대식구지만 평화로웠을 가정이 완전히 풍비지 박산이 난 거죠. 그래서 지금 생각엔 아버지가 이북에 가셔서 거기 있는 아들딸을 만나셨을까 의문이고, 그 애들이 아버지가 이북에 잡혀온 왔는걸 알기나 할까 궁금하고 그래요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랬어요. "나 죽으면 너희가 내 가슴을 한 번 열어봐라"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울음).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우리 할아버지가 서울에 계셨는데, 할아버지가 적십자사에 신고를 하셨더라고요. 적십자사에 신고 된 필체가 할아버지 것이에필체예요.

문_ 북한에 외가 쪽 주소가 있는데 이산가족 신청은 안 해 보셨는지?
답_ 언니들이 하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작은 언니도 학교 다니면서 감시를 받고 해서 그 놈들이 또 나중에 어떻게 해코지를 할지를 몰라서. 그래서 언니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싫어하나 봐요. 내가 그냥 내 이름으로 신청을 하긴 했는데 나는 나이가 어리니 차례도 안 돌아오는 것 같고. 그렇더라고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정부의 배려 등은)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그 전에 아버지 동료였던 홍순엽씨가 몇 번 물어오곤 했었대요. 그래서 큰 언니 결혼할 때 청첩장을 드리러 찾아간 적이 있었대요. 그 분하고 그렇게 연락한 이후로는 그 외엔 관련된 사람이 돌아봐 준다거나 이런 건 전혀 없고요.

나중에 알게 된 얘기는 당시 오제도 검사(공안 검사)가 우리 아버지 뒷조사를 많이 하셨대요. 당시 아버지 동료였던 분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그래서 오제도 검사가 우리 아버지를 많이 괴롭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오제도 검사를 좀 나쁘게 얘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아버지는 그런 (좌경 사상의) 흔적이 없으니까.



○ 호적정리

<행방불명으로 정리>

답_ 아버지 호적은 그대로 있어요. 우리는 호적 정리를 못했어요. 아들도 없고, 누구를 호주로 할지도 모르겠고, 주소도 을지로 7가 10번지에 그냥 그대로 있어요.



○ 연좌제 피해

<거주지 감시, 피랍인 자녀 및 배우자의 취업 과정에서 신원조회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음>

답_ 제가 대학 졸업하고 외무부 조약과에 잠시 임시 직원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여자는 정식 공무원을 내 주지 않아서 거의 다 임시직적이었어요. 그런데 신원조회를 해야 한다 해서 서류를 마련해서 냈는데, 한 달이 지나도 신원조회 통과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조약과 사람들이 농담으로 “미스 리 뭐 있는 거 아냐?”하고 그랬어요. 나는 그 때만 해도 무슨 소리인지 감을 못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납북됐고, 오빠가 이북에 있다' 그런 것이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됐나 봐요. 그런데 큰 오빠 친구가 인하대 법대 교수로 계셨는데, 이분이 외무부에 들렀다가 우연히 내가 조약과에 있는 것을 보고, 조약과 과장을 만나 얘기하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때 우리 집 얘기를 하셨나 봐요. 어쨌든 그 이후 조약과 과장이 어떻게 했는지 며칠 후에 신원 조회가 겨우 떨어져서 거기 임시직에 좀 다녔었어요.

우리 언니도 국민 학교 교사인데 우리 언니 신원조회도 어려웠어요. 그래도 어떻게 임용은 됐는데, 학교에 가끔 형사가 온대요. 와서 근황을 물어보고 그랬대요. 또 우리 동네 북아현 파출소에서도 이미 다 아는지 우리 집 주위를 가끔 빙빙 돌아본다고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또 결정적인 것은 제가 결혼하고 우리 남편이 공무원 임용할 때 잘 안됐어요. 거기는 임시직도 아니고 신원 조회를 좀 엄하게 하는 데라서 결국 신원조회가 안 떨어져서 결국 못했어요. 옛날 중앙정보부 계통인데 거기는 친족하고 처가까지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걸려서 안됐어요. 3월부터 근무하기로 했는데 6개월이 지나도 발령이 안 나서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런 게 걸린 거예요. 찾아가서 서류를 보니 빨간 줄이 쳐있고, 그래서 그 때 기록을 보고 우리 아버지가 검사로 퇴직하셨던 걸 알았어요. 전까지는진 판사로 퇴직했다고 생각했는데.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답_ 우리는 집안이 완전히 풍비지 박산 되어 살아왔으니까,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는 오래 못 사셨을 것 같다, 애들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하시면서 돌아가셨는데, 정말 아버지가 어떻게 사시다 돌아가셨는지. (울먹) 애들은 만나보셨는지, 정말 어떻게 사셨는지 그런 것이거라도 알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 산소를 지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황에 있는데, 아버지나 아이들 소식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빨리 그런 소식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 어머니도 정리를 해 드릴텐데 싶고. 이 정부가 너무 그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무심하고. (눈물).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지. 생전 불러보지도 못했던 아버지인데 엄마나 언니들이 하는 얘기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출근하시면 구두에다 대고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시라고 인사했다는 얘기를 어머니가 늘 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들고, 동네에서 애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면서 뛰어가는 것을 볼 때 내가 "엄마, 우린 왜 아버지가 없어? 아버지가 뭐야?"하고 물어보기도 했다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할 때, 정말 '아버지를 한 번 불러 봤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래서 제가 아버지 대신 시아버지 모시면서 참 잘했어요. (눈물) 제가 아버지한테 못한 것을거 시아버지한테 한 걸로 아버지 알아주시고, 이 다음에 저 세상에서 가서 아버지를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때 맘껏 아버지라 부르고 같이 살기를 바라겠습니다.



○ 하고 싶은 말

답_ 나는 여기 가족회가 생기고, 또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아픔을 나누고, 이렇게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준 회장님과 우리 이사님들께 너무 감사하고, 피를 안 나눴지만 동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고 내가 여력이 안 돼 못하지만, 정말 여력만 되면 가족회회장님, 원장님 하는 일 도와서 좀 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이런 저런 일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이 많아요. 고. (울먹) 예전에 집안사람들이 우리 아버지에 대해 '어디 내놔도 빈틈없고, 큰 일을 할 사람인데' 하고 얘기하는 얘기를 하시곤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때를 못 만나 뜻을 못 펴신 것 같아요.고. 이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신데 싶고,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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