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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1회 1962. 3. 29
이름: 관리자
2005-10-05 13:57:30  |  조회: 2803
첨부 : 19620329-3.pdf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歲月 1

이름 : 관리자 번호 : 18
게시일 : 2001/01/03 (수) AM 10:02:51 (수정 2001/01/26 (금) PM 01:55:35) 조회 : 106

1962년 3월 29일 동아일보중...


죽음의 歲月 ①


拉北人士 北韓生活記



속았던 赤道觀光길
暗黑의 險路 强制로 끌려 千里..
거듭된 拉致行列
더위속 强行軍...물도안주고



이 수기는 六·二五당시 납북되었다가 최근 다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온 趙澈(당시 50)씨가 재북 당시 목격한 사실 또는 들은 사실과 기록을 통하여 알게된 납북저명인사들의 생사 및 현재 살아있는 납북저명인사들의 실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이 수기에는 납북된 정치인, 법조계인사, 종교계, 예술계, 학계 등 근 五백명에 달하는 인사들의 실태가 기록되어있다. 특히 趙씨는 납북저명인사들로 구성된 소위 「在北平和統一促進協議會」에 관계한 일도 있는 만큼 납북인사들의 동태에 대하여는 비교적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다.

趙씨의 간단한 약력을 소개하면 왜정 때 중국에 망명 重慶임시정부에서 활약 해방 후 귀국하였다가 六·二五때 피납 在北平和促進協議會 교육대학 교원 괴뢰상업성 부장 등을 역임한바 있는데 현재는 內外問題硏究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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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침략군이 서울에 들어 온 지도 이미 한 달이 지난 七월 하순 어느 날 이미 해는 기울었으나 불을 끼얹은 듯한 더위는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도 가시지를 않았다. 때마침 서울시청(당시 공산괴뢰들의 기관서사용) 에서는 趙素昻, 吳夏英, 安在鴻, 金奎植 등 協商流로 알려져 있는 거물급 정객과 金時昌, 李升基등 저명한 의사 과학자들 약 80여명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모여서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괴뢰중앙당 조직간부로 서울에 파견되어 있던 金天明이 쌍권총을 차고 나타났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마른 편인 40대에 들어선 金은 『여러분을 갑자기 이렇게 모시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수도 平壤의 건설상을 구경시키려는 것입니다. 우리 북반부는 지난 五년동안에 인민민주주의 정권에 의하여 눈부신 발전을 하여왔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건설상을 구경하고 곧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자는 카랑카랑하게 쇳소리가 나는 목청으로 이렇게 또박또박 여러 사람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순간 모여선 인사들 사이에는 먹물과 같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쥐 죽은 듯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 날밤 9시쯤 연로한 인사들은 소련제 「스리코타」에, 정정한 사람들은 군용 「추럭」에 노나타고 캄캄한 서울거리를 빠져 靈泉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옷은 입고 나온 그대로 누구하나 어디로 떠난다는 소식마저 가족들에 알릴 길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무서원이 소련제 「찝」차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 가족에게 『잠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선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고만 셈이었다.

이것이 납북의 서곡(序曲)이오 죽음의 행렬의 시발(始發) 이었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으랴?

安在鴻만은 이미 이것이 마지막 길이 될 줄을 각오하였는지 무겁게 입을 다문 채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하염없이 북으로만 뻗은 캄캄한 길, 폭격을 피하여 「라이트」를 끄고 가기 때문에 차의 속도는 굼벵이 같이 느렸다. 거기에다 폭격 때문에 길이 모두 엉망이었고 어둠을 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는 공산침략군의 대열이 길을 꽉 메우고 있어 때로는 교통이 차단되어 몇 시간씩 한증막 같은 차속에서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밤새 달리다가 동이 훤히 트면 근처 마을인가에 분산되어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자고 또 밤이 되면 북쪽으로 차는 달렸다.

그래도 이처럼 제一차로 끌려간 납치인사들은 도중에 고생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대우가 나은 편이었다고 할까?

8월 달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납북이 강행되었다. 그들은 우선 민의원 정부 최고급관리들을 납치한 다음 소위반동분자로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실, 중앙청 지하실, 각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 중이던 崔奎東, 高元勳, 崔麟, 玄相允, 李光洙, 金東元, 孫晋泰, 明濟世등 一백여명을 도보로 밤중을 이용하여 靈泉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고 갔다.

날이 새면 민가나 국민학교 교실에서 잠을 재우고 밤이 되면 강행군을 계속시켰다. 물론 이중에서 환자나 고령자들은 간혹 군용 「추럭」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밥이란 끼니마다 주먹밥 한 개씩, 반찬이라곤 날 된장 뿐이었다.

이들은 십 여명 또는 二십여명씩 반을 짜서 책임자 一명에 三명내지 四명의 무장한 내무서원을 뒤딸게 했고 시간마다 꼭꼭 점호를 하기 때문에 도망이란 그대로 생명을 내어 건 모험이었다.

특히 崔奎東, 高元勳, 등 극심한 신병으로 고통을 받은 노인들은 타는 듯한 목을 적셔보려고 물을 청했지만 감시원인 내무서원은 『노인네들은 반동분자란 말이야. 그러니 죄값으로 고생을 해봐야지…물은 없수다』 하고 호통만치는 것이었다. 오직 당(黨)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무식한 이들이고 보니 상대가 누구 건 알바 아니었다.

이들에 이어 끌려간 것이 종교가들이었다. 南宮赫, 吳澤寬, 方勳, 具滋玉 등 一백여명의 거물급 종교인들이 꼭같은 방법으로 북으로 끌려갔다. 특히 이들 종교인들에 대한 내무서원들의 학대는 극심하였다.

이처럼 납치된 인사들은 그 해 8월 20일쯤까지 평양에 모두 도착하였다. 이 때까지는 납치 인사 중 희생자가 한 명도 없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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