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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2회 1962. 3. 30
이름: 관리자
2005-10-05 14:00:55  |  조회: 2064
첨부 : 19620330-3.pdf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歲月 2

이름 : 관리자 번호 : 19
게시일 : 2001/01/05 (금) AM 10:23:49 (수정 2001/01/26 (금) PM 01:38:52) 조회 : 59

동아일보 62년 3월 30일자에서..

죽음의 歲月 ②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長壽燃 말아피우고
不屈의 宗敎人들 讚頌歌 復唱으로 反抗
破寂삼아 이잡아 競走도 시켜


西平壤 고노골 조그만 二층건물인 인민병원에 수용된 協商派 및 자진 출두한 인사 四십여명은 그래도 비교적 자유로이 외출도 할 수 있었다. 이 속에는 국회 「뿌락치」사건 주모자들인 金若水, 盧鎰煥, 李文源, 金沃周 등 몇 명도 같이 끼여있었다.

비밀로 파견된 당간부 金日成대학 교수 등에 의한 세뇌(洗腦) 교육이 시작되었다. 「맑스」,「레닌」주의 이론, 정치경제학, 金日成연설집 소련 및 중국 공산당사 등이었다. 이런한 일과가 끝나면 납치 인사들은 맞은 편 언덕에 올라가 옷을 홀랑 벗어 가지고 이를 잡고 낮잠 자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폭격이 심할 때는 보잘것없는 방공호에 틀어 박혀 종일 꼼짝도 못하고 업디어있는 때도 있었다.

남달리 이가 끓어 밤낮 긁적거리기만 하는 尹琦燮은 이를 여러 마리 잡아 가지고는 趙素昻 등이 보는 앞에서 경주를 시켜 이가 재빨리 남쪽을 달려 내려가면 아마 우리가 곧 서울로 돌아가게 되는가 보다고 좋아하고 북쪽을 가게되면 공연히 짜증을 부리는 바람에 괴로운 중에도 웃음판이 벌어지곤 하였다.

비밀리에 파견된 당간부들은 곧 이들에 대하여 세밀한 자서전을 쓰게 하였다. 아버지 대로부터 시작하여 부모 형제, 일가친척, 친구에 관한 얘기까지 상세하게 써야하기 때문에 보통 십여일씩 걸려야만하였다. 金奎植, 趙琓九는 신병으로 누워있었으므로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당간부가 받아써야만하였다.

그러나 趙素昻은 몇 시간만에 자서전을 대강 써치우고 말았다. 이때 당간부가, 『趙선생은 특히 정치적 활동도 많았으니 남보다 더 쓸 것이 많을 텐데, 더 구체적으로 다시 써야하겠습니다』 하고 애매한 점들을 지적하며 다시 쓰기를 청하였다.

이때 趙素昻은 『그까짓것 그 정도로 갈겨썼으면 될게 아닌가?』이렇게 한마디로 넘겨버리자 다시 쓰라고 애를 먹이기 시작하였다. 성화에 견디다 못해 趙素昻은 화가 치밀어 『자서전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현실이 문제지. 과거를 따지기 전에 현실을 더 바로 보게.』하고 그냥 자서전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이들 중 가장 「영웅적」으로 자서전을 장황히 늘어 논 것은 嚴恒燮이었다. 그는 자기와는 관련도 없는 일까지 아는 척하고 써놓았던 것이다.

피납인사 일행이 특히 곤란을 받은 것은 담배였는데 그래도 이들은 질이 낮은 장수연을 한 통씩 배급받아 종이에다 말아 피우곤 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곤란을 느낀 것은 음료수 문제였다. 오직 샘물에 의존해 있는데 무더위로 갈증이 심해 물을 서로 자꾸 찾는 바람에 일하는 식모가 물을 잘 주지를 않자 嚴恒燮은 손찌검을 하는 소동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협상파 및 자진 출두한 저명인사들을 平壤건설상을 구경시킨다고 속여 납치해간 괴뢰들은 다음으로 소위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은 저명인사들을 8월20일 서울로부터 도보로 야음을 타서 끌고 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끌려간 孫晋泰, 崔麟, 玄相允등 저명인사들은 西平壤 제 一八인민학교에 수용되어있었다. 三백명 가량 수용돼있는 이곳은 내무서 경비대에 의해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역시 이들 인사에 대하여도 당간부에 의한 공산주의 강의가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강의를 할 때마다 玄相允, 崔麟, 鄭寅普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눈을 꾹 지려 감은 채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하도 그러는 통에 강의를 하던 당간부는 『눈을 좀 뜨시오.』하고 여러 번 독촉을 하였으나 묵묵부답,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어떠한 질문을 해도 『모르겠다.』는 한마디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간부들은 하나의 회유책으로 『반성을 하고 조국통일에 직접 간접으로 협력하면 포섭할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도 하였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니뭐니 해도 내무서에서 가장 두통거리가 된 것은 제 一차로 납치된 五십여명의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平壤 三십리 못미처 中和면 일대의 농가에 분산 수용되어있었는데 매일같이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경비원들이 혹 「광신(狂信)병자」라고 호통이라도 치면 오히려 완강히 대항하여 나서곤 하는 것이었다. 하도 젊은 경비원들이 노인들을 가지고 욕설을 퍼붓기 때문에 具滋玉이 점잖이 타이르자 『반동분자에겐 어른이 있을 수 없단 말야, 우리의 원수들이니까!』하고 젊은 경비원이 핏대를 올리며 대드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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