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관리자
2013-09-16 10:45:42 | 조회: 3120
051021A 김추성 / 2005. 10. 21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추성), 사진2(증언자:김동진)
피랍자
성명: 김추성
생년월일: 1889년 7월 28일(경기도 강화 출생)
당시 주소: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관청리 681번지
피랍일: 1950년 9월 14일
피랍장소: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관청리 681번지
직업: 미 8군 ASCOM 근무(前 강화경찰서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1녀
외모 및 성격 : 비만한 체격, 고지식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동진 (1937년생)
관계: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발발 직후 미 8군 ASCOM 근무 중이던 김추성은 가족이 거주 하던 강화로 피신하던 중 1차로 연행돼 서울에서 인민재판을 받음. 다행히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9월 14일 이백겸을 비롯한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찾아와 재산 압류 스티커를 붙이고 김추성을 연행, 20일 정도 인근 공장에 감금 했다가 맥아더 상륙 소식이 들리자 단체로 북송됨. 피랍자는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었을 뿐 아니라(미국 시민권자), 이전에는 사재를 털어 강화 경찰서장을 하며 치안 유지에도 힘씀. 지방 유지로 민간인으로서는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던 인물이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및 명예 회복
“주일날 새벽에 6. 25가 났는데 그 다음날 밤새도록 차가 오는 거에요. 뭔가 했더니 미국사람들 가족이 그리로 다 집합을 하는 거야. 그니까 대전 위쪽으로는 부평 ASCOM 집합을 해가지고 대전 밑으로는 부산으로 집합해서 일본 상선인가를 불러서 인천에 있는 미군 사람가족 부산에 모인 가족들 모두를 일본으로 실어가요. 우리 아버지 보고도 당신은 여기 남으면 죽는다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강화에 가족이 있다고 못 가신다고 하시고 (강화로)오신 거에요.”
“그 해가 우리 아버님 환갑이야. 이 놈들이 정치 보위부라고 딱 들어와가지고 우리 아버지 잡아가고, 재산 몰수, 장이고 뭐다 다 딱지 붙었어요. 딱지에다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더라고. 이 백겸 강화 정치 보위부 부장인가 그런가 봐. 이 후 하도 잡아간 사람이 많으니까 강화 감옥소에 가두지 않고 공장에 잡아다 넣고, 한 20일 거기 가둬 뒀나 봐요. 그런데 인천에 맥아더가 상륙을 하는 바람에 다 끌고 나간 거에요”
“우리 아버지는 강화의 초대 경찰 서장을 했어. 우리 아버지는 참 억울한 죽음이라고. 다른사람은 퇴직금 타고 월급 타고 일했는데, 우리아버지는 내 돈 들여 서장 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그냥 미군부대 다녔음 붙들려가진 않지. 그런데 그 서장 때문에 붙들려 간 거랑 다름없지”
납북 경위
<전쟁 발발 직후 미 8군 ASCOM 근무 중이던 김추성은 가족이 거주 하던 강화로 피신하던 중 1차로 연행돼 서울에서 인민재판을 받음. 다행히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9월 14일 이백겸을 비롯한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찾아와 재산 압류 스티커를 붙이고 김추성을 연행, 20일 정도 인근 공장에 감금 했다가 맥아더 상륙 소식이 들리자 단체로 북송됨>
A: 내가 부평 애스컴 관사에 아버지랑 같이 있는데 주일날 새벽에 6. 25가 났는데 그 다음날 밤새도록 차가 오는 거에요. 뭔가 했더니 미국사람들 가족이 그리로 다 집합을 하는 거야. 그니까 대전 위쪽으로는 부평 ASCOM 집합을 해가지고 대전 밑으로는 부산으로 집합해서 일본 상선인가를 불러서 인천에 있는 미군 사람가족 부산에 모인 가족들 모두를 일본으로 실어가요. 우리 아버지 보고도 당신은 여기 남으면 죽는다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강화에 가족이 있다고 못 가신다고 하시고 (강화로)오신 거에요. 그 당시 교통수단이 없어서 목선을 세를 내서 그 배를 타고 강화에 오셔서 내려서 오는데 밤중인가 새벽에 인민군에게 붙잡힌 거야. 강화에 내려서 집에 내려오는 중간에 잡히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강화에서 소식이 왔는데 우리 아버지가 경찰 서장이셨기 때문에 권총을 가지고 계셨어. 강화 일변에서 8.15 해방 나고 자동차 타고 다닌 건 우리 아버지 밖에 없어요. 미군 차 끌고 다니신 거고 또 사냥총을 가지고 계셨어. 평소에 우리 집엔 미국측 군정 관계 사람이 많이 왔었어요. 사냥도 하고 업무상으로도 오고 나는 조그마니까 권총이 있었는지 뭐가 있는지 모르죠. 근데 사람들을 통해서 권총이 나오고 해서 아버지 갇힌 걸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감옥소에 갇혔다가 서울로 다 붙들어 갔다구요. 강화 유지들, 제가 알기론 홍제룡이란 사람이 군수였어요. 그런 사람, 그 유지들을 다 잡아서 서울로 갔는데 우리아버지는 인민재판에서 죄 없다고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해서 왔어요. 그런데 이 노인네가 잠시 말미를 준 걸 모르고 나는 죄 없다고 했다고 그냥 있었던 거에요. 그 때 내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간 놈도 내가 알아요. 강화 13면인데 부름면이라고 있는데 거기 지방 빨갱이. 인민군은 들어와가지고 남한 사람들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 지방빨갱이들 그 사람들이 끌어가고 죽이고 갖은 지랄 그 사람들이 다 했어요. 우리가 보기에 인민군은 신사지 이 얘길 왜 하냐면 지금 강정구 교수인가 그 사람 나오는데 이 새끼가 죽일 놈이라. 그런 걸 모르는 거라. 인민군이 내려와서 그렇게 나쁜 짓을 했으면 이해가 가요. 승전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도 안 그러고 강화, 인천, 서울 그 지방빨갱이들이 다 잡아가고 죽이고 그랬다구. 그러니까 강정구가 나쁜 놈이라고. 아 내가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맥아더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쑥대밭이 된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맥아더가 나쁜 놈이라고 그럽니까? 이번 그걸 보고서는 굉장히 마음에 분통을 느껴요. 우리 아버지는 서울로 잡혀가서 인민재판 받고서 내려오셨는데 강화에 사신 게 아니지. 한 달인가 집에 잠깐 계시다가 자꾸 도망가라 해서 도망가셨어요. 동네 남의 집으로.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고지식한 양반이라 난 인민재판에서 죄 없다고 했다고, 그래서 난 집으로 간다고. 그러다가 추석날 붙들어 갔어요. 그 해가 우리 아버님 환갑이야. 50년 9월 몇 일이에요. 그렇게 잡아갔는데, 이 놈들이 오더니 정치 보위부라고 딱 들어와가지고 우리 아버지 잡아가고, 재산 몰수, 장이고 뭐다 다 딱지 붙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떻게 아느냐면 딱지에다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더라고. 이 백겸 강화 정치 보위부 부장인가 그런가 봐. 이백겸이란 놈이 잡아갔어. 그래가지고는 강화 감옥소에 갇히지 않고 하도 잡아간 사람이 많으니까 공장에 잡아다 넣고 한 20일 거기 갇혀 계셨나 봐요. 그런데 인천에 맥아더가 상륙을 하는 바람에 다 끌고 나간 거에요. 그리고는 한강 그리로 건너갔어요.
Q: 북송 될 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
A: 사람과 부모자식과의 관계가 무섭나 봐. 우리 아버지가 강화 공장에 갇혀 계시다가. 산업조합이라고 방직, 광목 짜는 공장 거기 창고에다 강화 유지들 전부 붙잡아다 놨거든요. 그런데 1차로 끌려간 사람은 우리 아버지하고 같이 이북으로 끌려가고 2차로 끌려간 사람은 인화성에서 다 쏴 죽였어요. 2차는 그 다음날 간 거지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니까 괜히 놀러 나가고 싶어 나갔는데 비행기가 뜨더라고.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갔는데 저녁 네 다섯 시 무렵이었는데 그 때 감옥소로 붙들어 간 사람들을 이북으로 끌고 가요. 끌고 가는데 폭격하고 난리를 치니까 이북 애들은 비행기 뜨니까 '방공'이라 그래요. 그렇게 해서 다 흩어져 숨었다가 호루라기를 부니까 다 기어 나와. 강화에 큰 길이 있거든요. 그리로 다 나오는 거라. 그래서 나도 그리로 가봤더니 아 우리 아버지가 가네. 그래서 "아버지" 했더니 니가 왜 여깄느냐고 하셔서 내가 그냥 놀러 나왔다고 하니까 "나 며칠 있다가 돌아올 테니까 가서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하시더라고. 근데 우리 아버지가 체격이 크고 뚱뚱하고 했는데 그 때 각각이 쌀을 반 가마씩 지게 했대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처음엔 안 시키더래요. 그 당시 60넘으면 많이 죽었어요. 당시 우리아버지는 61세니까 처음엔 안 시켰는데 나중엔 우리 아버지도 짊어지고 가셨다고 하더라구요. 중간 중간에 살아나온 사람이 몇 있었어요.
납치이유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었을 뿐 아니라, 전직 강화 경찰서장을 하는 등 지방유지로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던 인물이었음>
Q: 당시 직업이 무엇이었나요?
A: (미 8군 ASCOM 근무함) 우리아버지가 16살에 미국에 들어갔어. 확실한 건 모르겠는데 아마 41년도인가 2차 세계 대전 나기 1년 전에 나왔대요. 그래서 우리아버지는 미국 시민권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나와 있으니까 일본 놈 들한테 주목을 받아 직장도 못 다니고 놀고 있었어요. 해방이 됐는데, 우리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 정치자금을 됐어요. 주위에 있는 사람이 이승만을 찾아가라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치사하다고 안 갔대. 정치 자금이라하면 오시면 여비라든지 숙박비 같은 걸 댔나 봐요.
Q: 전직 경찰서장을 하셨다고 하셨죠?
A: 자세하게는 모르는데 이게 우리 아버지 경찰 서장한 근거다 강화의 초대 경찰 서장….
우리 아버지는 참 억울한 죽음이라고. 남은 퇴직금 타고 월급 타고 일했는데 우리아버지는 내 돈 들여 서장 하다가 그냥 미군부대 다녔음 붙들려가진 않지.그런데 그 서장 때문에 붙들려간거랑 다름없지
납치 후 소식
<개성을 넘어 갔다는 소식 외에는 전무함>
A: 그래서 어디까지 간 거를 아냐면 개성서 100리를 더 들어간 거를 알아요. 왜냐면 거기까지 갔다가 도망 나온 사람이 있거든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특이해서 뚱뚱하고 키가 좀 큰 편이에요.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이 뚱뚱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어요. 못 얻어먹어서. 근데 우리 아버지는 뚱뚱했거든요. 그래서 누구시냐고 했더니 금방 알더라구요. 그 분이 우리아버님이라고. 그래서 거기까지 간 거는 알아요. 그 사람이 38선에서 100리까지 갔다 돌아왔대요. 거기까지 간 걸 아는데 우리 어머니는 또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시체를 찾으러 갔는데 송학산을 쭉 올라간 거에요. 사람들이 올라가는데 미국군인들이 내려 오더라구요 우리어머니가 그 당시만해도 50대인데 여자니까 좀 떨어졌을 것 아니에요. 지네(미국인)들이 공산당인가보다고 쏴 버리라고 하더래요. 시체 찾아간 사람들을. 근데 우리 어머니가 영어를 해요. 그래서 아니라고, 우리는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간 사람들 시체를 찾으러 왔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미군)이 당신이 어떻게 영어를 아느냐고. 우리 어머니가 하와이 원주민이에요. 그래서 한국사람이지만 하와이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40-50명 간 사람 다 살았어요. 거기까질 내가 얘기하는 건데 거기서 못 찾고 왔어요. 그 넘어간 뒤로는 사셨는지 죽었는지 모르죠. 그리고 찾을 수가 없대요. 죽이면 한 구덩이에 죽였기 때문에 엉망이래요. ‘
Q: 그 외 찾으려는 노력은?
A: 강화에 한창 6.25 때 공군 정보대가 있었어요. 그 당시 그게 재밌는 얘긴데 가면 여기 비밀을 거기 말해줘야 살지 그러니까 이중간첩이 되는 거지. 여기처럼 자유롭지 않은 동네에 이상한 사람 가봐요. 금방 신고를 하지. 왜냐면 그 당시 모르셨겠지만 마누라가 남편신고하고 자식이 부모신고하고 그럴 때 라고. 이북놈들은 그래요. 그런데 그거 신고 안 해보세요. 아무리 해도 제까닥 잡히지. 근데 공군 G2가 (강화에 왔는데 이북을 가래요.그 당시 꽁보리 밥 먹고 할텐데 거기 가니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줘요. 그래서 가봤는데 아버지 이북 있으니까 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원을 했어요. 15살에 이북을 가겠다고. 강화가면 강 하나만 건너면 이북이거든요 거기서 2,3일 있더니 밤중에 깨우더라구요. 그러더니 가래. 이북으로. 나는 그냥 하는 건 줄 알았거든. 그 때 나갈 때 3명이 갔는데 너는 이쪽으로 너는 가운데로 너는 이리로 가라 해요. 그 때 다들 각자 메세지를 줘요. 너는 이걸 알아오고 너는 저걸 알아오라고. 나는 삼팔선에서 백 몇 십 리 되는 데에 금천이라고 있어요. 거기 가서 어디 부대가 있고 어디 인민군 주요 시설이 있고 그걸 알아오래요. 어 그래서 조금 걸어가는데 막 신호탄이 올라오고 아 못 가겠어. 15살짜리가. 못 가겠다고 배쪽으로 다시 왔어요. 이 새끼가 이런 새끼가 있냐고 비겁하게. 저 신호탄 올라오는 거 보라고. 아 나는 못 가겠다 했더니 포박이 더 심해요. 돌아왔다고. 그런데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정보대 대장을 찾아가셨어. 우리아들 3대독자요. 거기 가면 죽을 텐데 제발 모르고 그랬으니 살려달라고. 그랬더니 대장이 그래요. 만에 하나라도 안 갔으면 할 수 없고 만일 안 갔으면 돌려보내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밤중 2시 3시에 다시 가는데 나는 본대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살았어요. 근데 그 당시 간 사람들이 많이 못 돌아 왔어요.내 친구 한웅이 형이 있는데 우리보다 한 두어 살 많은데 걔도 가서 소식이 없어요. 근데 언젠가 납북 어부라든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그래요. 강화가면 이한식이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전하라고 그래요. 그땐 사실 아버지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한 건데, 모르고 한 거니까 결국 우리 어머니 때문에 (살아 돌아왔다)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토지개혁 이후 재산을 몰수 당하고 어려운 생활을 함, 이후 장남은 가난으로 인해 폐결핵으로 고생함>
A: 아주 뭐 재산몰수 다 되고 우리 할아버지가 땅이 좀 있었는데 우리가 왜 망했냐면 조봉암이 때문에 다 망했어 토지 개혁되는 바람에 전부 토지 (잃고) 토지가 모두 소작인 한테 갔어. 땅값은 어떻게 하냐면 조금씩 조금씩 나눠서 받았어. 그거 개값이지. 토지 몰수 됐지. 말도 못해요. 한 가지 이상한 게 우리는 사는 거 밥을 굶다시피 하니까 근데 사람 인정 이란 게 참 메말라요. 우리 소작농 하는 사람이 매년 쌀 3/2는 자기가 갖고 3/1은 우리 줬는데 토지개혁 후로는 쌀 한 톨 없어요. 고생 무진장 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것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 어렵고 못 먹어서 고등 학교 때 폐가 약했어요. 폐병. 우리 친구들도 다 못 먹어서 그런 거에요. 우리어머니 고생은 말도 못해요. 안 해 보신 거 없지요 그래도 우리 어머니도 자존심 있어서 누구한테 달라고도 안 해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통역 같은 건 못하고 하우스 메이트를 했어요. 식모 같은 거죠.
Q: 6.25 당시 피나는 안 가셨나요?
A: 우리 아버지가 강화 경찰서장할 때 불의는 못 봐도 강화에 부자가 있는데 고재섭이라고. 화전면이 제 2의 모스코바에요. 그렇게 빨갱이가 많았어. 그 사람이 강화 경찰서에 갇혔는데 그 때 우리아버지가 경찰 서장을 하셨는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별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훈방을 했어요. 그랬더니 6.25가 나서 1.4후퇴를 했잖아요. 우린 피난 갈 여력이 없지 근데 누가 찾아와서 고재섭씨가 사모님 모시고 나오라고 해서 왜 날 모시고 오라고 했냐고 하니까 나는 강화 경찰서장했던 김추성씨한테 은혜를 입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내가 1.4후퇴하는데 사모님 모시고 나가겠다고 해서 나, 우리엄마,내 동생 다 데리고 나가서 충청도까지 피난 갔다 왔어요.
연좌제 피해는?
<신원조회를 받긴 했으나 신원을 보장하는 간부급 지인들이 있어 특별한 피해는 없었음>
A: 신원조회 이력서를 내는데 그 땐 안전기획부에서 다 조사하잖아요. 우리 해군들도 조사를 해요. 해군정보부에서. 근데 그 아주 더러운 게 우리가 13주 훈련 받는데 한 10주되면 쫓겨가요. 사상에 걸려서. 아버지가 납북됐든지 이북으로 갔던지 형이 갔든지 하면. 다행히 저는 군대에서는 괜찮더라구요. 그런데 장성한 사람이 되어가지고 직장엘 들어갈라고. 인천 시청에 들어가려고 넣었어요. 발령이 안 나는 거라. 다른 사람은 발령이 나는데. 왜냐고 했더니 아버지가 이북에 납치당했는데 이북 가서 뭘 하시는 줄 아냐 그거에요. 그렇게 발령이 안나요. 그래서 경찰에 높은 사람 보증을 서서 그렇게 직장에 들어갔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신고고 뭐가 있어요? 강화에서 우리 아버지가 납치돼 간 건 어린 아이도 다 아는데 우리아버지가 스타일이 좋아요. 미국 할아버지 해가지고. 우리 아버진 다 알아요.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또 어떻게 아냐면 초대 경찰 서장이기 때문에. 강화에서는.
Q: 정부에서 퇴직금이라도 없었는지?
A: 퇴직금 같은 것도 없어. 전쟁인데. 경찰서도 우리 아버지 논밭 팔아서 했다니깐. 우리 엄마가 그래요. 강화 경찰서에서 우리 아버지한테 은혜를 입은 부하가 있을 거 아녜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장님은 공덕비라도 해야겠다면서 우리 어머니한테 올라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싫다고 하셨어.
Q: 제대로 신고한 거는?
A: 그때 이북으로 납북된 사람 신고를 하라고 하더라고. 근데 먹기도 힘든데 신고가 어딨어요. 그런데 신고가 돼 있더라고. 우리 고모가 했나 봐. 그런데 이름이 틀리게 나왔더라고. 신고한 이름이. 다른 건 보면 맞는 건데 이름이 틀려요. 우리아버지가 나무 목변에 다른 추자인데 가을 추자를 썻더라고. 추성. 이게 아닌데 했더니 그 당시에 저거 해서 그런 식으로 된 것 같다고 제가 정정해서 바로 한 거에요. 월간 조선 가서 신고했어요.
호적 정리
<실종으로 정리>
A: 아휴, 그거 하느라고 말도 못해요. 그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예수 믿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나한테 준 땅은 언제든지 돌아와요. 왜냐면 우리 아버지 땅이 있는데 모르죠. 풍비박산 나서 했으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데 어느 날 직장에서 신문을 보는데 거기 우리 아버지 이름이 나오더라구. 밑에 광고같이 된 거에 우리 아버지 이름이 나와요. 땅이 도로로 들어갔대. 그러니까 찾아가라 이거야. 언제까지 찾지 않으면 정부에 귀속시키겠다고 해요. 그 당시 한 2백 만원 됐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아 그러니까 실종신고를 해야 되잖아요. 그것도 법원에 해서는 돈들이고 그래서 실종 신고해서 찾았어요.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확인 및 납북자 명예 회복>
A: 그리고 사실 난 부정적이에요. 지금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주 유명한 사람 작가나 이런 사람 많잖아요. 이광수씨 이런 사람들 다 잡혀갔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온 조선 사람들이 다 안다 이거야. 그 사람들이야 어딜 가든 다 알지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야 강화에서나 알아주지 누가 알아 주냐고. 어디 가서 죽여도 그냥 몰라. 우리 아버지가 지금 벌써 백 몇 살이야. 그러니까 살았다는 건 생각도 안 해요. 돌아가셨어도 그 당시 한 몇 년 사시다 가셨겠지 오래 사신 것 같지도 않아. 난 기대도 않아. 다만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물론 그것도 엉터리겠지만 대한민국 노무현이가 이런 건 얘기 안하고 헛된 거만 하니. 난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미국 사람들 자기 민족이라면 열불을 가리지 않고 쫓아 다닙니다. 시체라도 찾으려고. 근데 이(정부는) 말도 못하잖아. 바랄 거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내 나이도 70이니 더 할 것도 없고 난 그래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자기 먹고 살라고 그런 거긴 하지만 지금도 우리 손주한테 그래요 “야 ! 네 할아버지는 바보 중에 상 바보다 그 당시 월급 줄 돈도 없는데, 네 할아버지는 땅 팔아서 경찰서 운영했어.” 그랬더니 우리 손주새끼들이 뭐라는 줄 알아요? 웃어요 웃어. 그러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야 돌아가셨으리라 생각되니 그 뭐 상관도 않고요. 이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생사나 확인해서 만날 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김 추성이란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납북됐으니 결과적으로 순국 한거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냥 대통령이 그거나 (얘기)해 달란 거에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 아버지가 보고 싶지는 않으셨어요?
A : 살다 보니까 삶의 여유가 있어야 그런 생각도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그리고 납북돼서 1950년 9월에 붙잡혀 갔으니 이제는 살았다는 소망이 하나도 없어요.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추성), 사진2(증언자:김동진)
피랍자
성명: 김추성
생년월일: 1889년 7월 28일(경기도 강화 출생)
당시 주소: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관청리 681번지
피랍일: 1950년 9월 14일
피랍장소: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관청리 681번지
직업: 미 8군 ASCOM 근무(前 강화경찰서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1녀
외모 및 성격 : 비만한 체격, 고지식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동진 (1937년생)
관계: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발발 직후 미 8군 ASCOM 근무 중이던 김추성은 가족이 거주 하던 강화로 피신하던 중 1차로 연행돼 서울에서 인민재판을 받음. 다행히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9월 14일 이백겸을 비롯한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찾아와 재산 압류 스티커를 붙이고 김추성을 연행, 20일 정도 인근 공장에 감금 했다가 맥아더 상륙 소식이 들리자 단체로 북송됨. 피랍자는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었을 뿐 아니라(미국 시민권자), 이전에는 사재를 털어 강화 경찰서장을 하며 치안 유지에도 힘씀. 지방 유지로 민간인으로서는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던 인물이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및 명예 회복
“주일날 새벽에 6. 25가 났는데 그 다음날 밤새도록 차가 오는 거에요. 뭔가 했더니 미국사람들 가족이 그리로 다 집합을 하는 거야. 그니까 대전 위쪽으로는 부평 ASCOM 집합을 해가지고 대전 밑으로는 부산으로 집합해서 일본 상선인가를 불러서 인천에 있는 미군 사람가족 부산에 모인 가족들 모두를 일본으로 실어가요. 우리 아버지 보고도 당신은 여기 남으면 죽는다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강화에 가족이 있다고 못 가신다고 하시고 (강화로)오신 거에요.”
“그 해가 우리 아버님 환갑이야. 이 놈들이 정치 보위부라고 딱 들어와가지고 우리 아버지 잡아가고, 재산 몰수, 장이고 뭐다 다 딱지 붙었어요. 딱지에다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더라고. 이 백겸 강화 정치 보위부 부장인가 그런가 봐. 이 후 하도 잡아간 사람이 많으니까 강화 감옥소에 가두지 않고 공장에 잡아다 넣고, 한 20일 거기 가둬 뒀나 봐요. 그런데 인천에 맥아더가 상륙을 하는 바람에 다 끌고 나간 거에요”
“우리 아버지는 강화의 초대 경찰 서장을 했어. 우리 아버지는 참 억울한 죽음이라고. 다른사람은 퇴직금 타고 월급 타고 일했는데, 우리아버지는 내 돈 들여 서장 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그냥 미군부대 다녔음 붙들려가진 않지. 그런데 그 서장 때문에 붙들려 간 거랑 다름없지”
납북 경위
<전쟁 발발 직후 미 8군 ASCOM 근무 중이던 김추성은 가족이 거주 하던 강화로 피신하던 중 1차로 연행돼 서울에서 인민재판을 받음. 다행히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9월 14일 이백겸을 비롯한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찾아와 재산 압류 스티커를 붙이고 김추성을 연행, 20일 정도 인근 공장에 감금 했다가 맥아더 상륙 소식이 들리자 단체로 북송됨>
A: 내가 부평 애스컴 관사에 아버지랑 같이 있는데 주일날 새벽에 6. 25가 났는데 그 다음날 밤새도록 차가 오는 거에요. 뭔가 했더니 미국사람들 가족이 그리로 다 집합을 하는 거야. 그니까 대전 위쪽으로는 부평 ASCOM 집합을 해가지고 대전 밑으로는 부산으로 집합해서 일본 상선인가를 불러서 인천에 있는 미군 사람가족 부산에 모인 가족들 모두를 일본으로 실어가요. 우리 아버지 보고도 당신은 여기 남으면 죽는다고 같이 가자고 했는데, 강화에 가족이 있다고 못 가신다고 하시고 (강화로)오신 거에요. 그 당시 교통수단이 없어서 목선을 세를 내서 그 배를 타고 강화에 오셔서 내려서 오는데 밤중인가 새벽에 인민군에게 붙잡힌 거야. 강화에 내려서 집에 내려오는 중간에 잡히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강화에서 소식이 왔는데 우리 아버지가 경찰 서장이셨기 때문에 권총을 가지고 계셨어. 강화 일변에서 8.15 해방 나고 자동차 타고 다닌 건 우리 아버지 밖에 없어요. 미군 차 끌고 다니신 거고 또 사냥총을 가지고 계셨어. 평소에 우리 집엔 미국측 군정 관계 사람이 많이 왔었어요. 사냥도 하고 업무상으로도 오고 나는 조그마니까 권총이 있었는지 뭐가 있는지 모르죠. 근데 사람들을 통해서 권총이 나오고 해서 아버지 갇힌 걸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감옥소에 갇혔다가 서울로 다 붙들어 갔다구요. 강화 유지들, 제가 알기론 홍제룡이란 사람이 군수였어요. 그런 사람, 그 유지들을 다 잡아서 서울로 갔는데 우리아버지는 인민재판에서 죄 없다고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해서 왔어요. 그런데 이 노인네가 잠시 말미를 준 걸 모르고 나는 죄 없다고 했다고 그냥 있었던 거에요. 그 때 내가 우리 아버지를 잡아간 놈도 내가 알아요. 강화 13면인데 부름면이라고 있는데 거기 지방 빨갱이. 인민군은 들어와가지고 남한 사람들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 지방빨갱이들 그 사람들이 끌어가고 죽이고 갖은 지랄 그 사람들이 다 했어요. 우리가 보기에 인민군은 신사지 이 얘길 왜 하냐면 지금 강정구 교수인가 그 사람 나오는데 이 새끼가 죽일 놈이라. 그런 걸 모르는 거라. 인민군이 내려와서 그렇게 나쁜 짓을 했으면 이해가 가요. 승전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도 안 그러고 강화, 인천, 서울 그 지방빨갱이들이 다 잡아가고 죽이고 그랬다구. 그러니까 강정구가 나쁜 놈이라고. 아 내가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맥아더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쑥대밭이 된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맥아더가 나쁜 놈이라고 그럽니까? 이번 그걸 보고서는 굉장히 마음에 분통을 느껴요. 우리 아버지는 서울로 잡혀가서 인민재판 받고서 내려오셨는데 강화에 사신 게 아니지. 한 달인가 집에 잠깐 계시다가 자꾸 도망가라 해서 도망가셨어요. 동네 남의 집으로.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고지식한 양반이라 난 인민재판에서 죄 없다고 했다고, 그래서 난 집으로 간다고. 그러다가 추석날 붙들어 갔어요. 그 해가 우리 아버님 환갑이야. 50년 9월 몇 일이에요. 그렇게 잡아갔는데, 이 놈들이 오더니 정치 보위부라고 딱 들어와가지고 우리 아버지 잡아가고, 재산 몰수, 장이고 뭐다 다 딱지 붙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어떻게 아느냐면 딱지에다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더라고. 이 백겸 강화 정치 보위부 부장인가 그런가 봐. 이백겸이란 놈이 잡아갔어. 그래가지고는 강화 감옥소에 갇히지 않고 하도 잡아간 사람이 많으니까 공장에 잡아다 넣고 한 20일 거기 갇혀 계셨나 봐요. 그런데 인천에 맥아더가 상륙을 하는 바람에 다 끌고 나간 거에요. 그리고는 한강 그리로 건너갔어요.
Q: 북송 될 때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
A: 사람과 부모자식과의 관계가 무섭나 봐. 우리 아버지가 강화 공장에 갇혀 계시다가. 산업조합이라고 방직, 광목 짜는 공장 거기 창고에다 강화 유지들 전부 붙잡아다 놨거든요. 그런데 1차로 끌려간 사람은 우리 아버지하고 같이 이북으로 끌려가고 2차로 끌려간 사람은 인화성에서 다 쏴 죽였어요. 2차는 그 다음날 간 거지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니까 괜히 놀러 나가고 싶어 나갔는데 비행기가 뜨더라고.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갔는데 저녁 네 다섯 시 무렵이었는데 그 때 감옥소로 붙들어 간 사람들을 이북으로 끌고 가요. 끌고 가는데 폭격하고 난리를 치니까 이북 애들은 비행기 뜨니까 '방공'이라 그래요. 그렇게 해서 다 흩어져 숨었다가 호루라기를 부니까 다 기어 나와. 강화에 큰 길이 있거든요. 그리로 다 나오는 거라. 그래서 나도 그리로 가봤더니 아 우리 아버지가 가네. 그래서 "아버지" 했더니 니가 왜 여깄느냐고 하셔서 내가 그냥 놀러 나왔다고 하니까 "나 며칠 있다가 돌아올 테니까 가서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하시더라고. 근데 우리 아버지가 체격이 크고 뚱뚱하고 했는데 그 때 각각이 쌀을 반 가마씩 지게 했대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처음엔 안 시키더래요. 그 당시 60넘으면 많이 죽었어요. 당시 우리아버지는 61세니까 처음엔 안 시켰는데 나중엔 우리 아버지도 짊어지고 가셨다고 하더라구요. 중간 중간에 살아나온 사람이 몇 있었어요.
납치이유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었을 뿐 아니라, 전직 강화 경찰서장을 하는 등 지방유지로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던 인물이었음>
Q: 당시 직업이 무엇이었나요?
A: (미 8군 ASCOM 근무함) 우리아버지가 16살에 미국에 들어갔어. 확실한 건 모르겠는데 아마 41년도인가 2차 세계 대전 나기 1년 전에 나왔대요. 그래서 우리아버지는 미국 시민권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나와 있으니까 일본 놈 들한테 주목을 받아 직장도 못 다니고 놀고 있었어요. 해방이 됐는데, 우리아버지가 이승만 대통령 정치자금을 됐어요. 주위에 있는 사람이 이승만을 찾아가라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치사하다고 안 갔대. 정치 자금이라하면 오시면 여비라든지 숙박비 같은 걸 댔나 봐요.
Q: 전직 경찰서장을 하셨다고 하셨죠?
A: 자세하게는 모르는데 이게 우리 아버지 경찰 서장한 근거다 강화의 초대 경찰 서장….
우리 아버지는 참 억울한 죽음이라고. 남은 퇴직금 타고 월급 타고 일했는데 우리아버지는 내 돈 들여 서장 하다가 그냥 미군부대 다녔음 붙들려가진 않지.그런데 그 서장 때문에 붙들려간거랑 다름없지
납치 후 소식
<개성을 넘어 갔다는 소식 외에는 전무함>
A: 그래서 어디까지 간 거를 아냐면 개성서 100리를 더 들어간 거를 알아요. 왜냐면 거기까지 갔다가 도망 나온 사람이 있거든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특이해서 뚱뚱하고 키가 좀 큰 편이에요.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이 뚱뚱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어요. 못 얻어먹어서. 근데 우리 아버지는 뚱뚱했거든요. 그래서 누구시냐고 했더니 금방 알더라구요. 그 분이 우리아버님이라고. 그래서 거기까지 간 거는 알아요. 그 사람이 38선에서 100리까지 갔다 돌아왔대요. 거기까지 간 걸 아는데 우리 어머니는 또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서 시체를 찾으러 갔는데 송학산을 쭉 올라간 거에요. 사람들이 올라가는데 미국군인들이 내려 오더라구요 우리어머니가 그 당시만해도 50대인데 여자니까 좀 떨어졌을 것 아니에요. 지네(미국인)들이 공산당인가보다고 쏴 버리라고 하더래요. 시체 찾아간 사람들을. 근데 우리 어머니가 영어를 해요. 그래서 아니라고, 우리는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간 사람들 시체를 찾으러 왔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미군)이 당신이 어떻게 영어를 아느냐고. 우리 어머니가 하와이 원주민이에요. 그래서 한국사람이지만 하와이에서 태어났거든 그래서 40-50명 간 사람 다 살았어요. 거기까질 내가 얘기하는 건데 거기서 못 찾고 왔어요. 그 넘어간 뒤로는 사셨는지 죽었는지 모르죠. 그리고 찾을 수가 없대요. 죽이면 한 구덩이에 죽였기 때문에 엉망이래요. ‘
Q: 그 외 찾으려는 노력은?
A: 강화에 한창 6.25 때 공군 정보대가 있었어요. 그 당시 그게 재밌는 얘긴데 가면 여기 비밀을 거기 말해줘야 살지 그러니까 이중간첩이 되는 거지. 여기처럼 자유롭지 않은 동네에 이상한 사람 가봐요. 금방 신고를 하지. 왜냐면 그 당시 모르셨겠지만 마누라가 남편신고하고 자식이 부모신고하고 그럴 때 라고. 이북놈들은 그래요. 그런데 그거 신고 안 해보세요. 아무리 해도 제까닥 잡히지. 근데 공군 G2가 (강화에 왔는데 이북을 가래요.그 당시 꽁보리 밥 먹고 할텐데 거기 가니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줘요. 그래서 가봤는데 아버지 이북 있으니까 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원을 했어요. 15살에 이북을 가겠다고. 강화가면 강 하나만 건너면 이북이거든요 거기서 2,3일 있더니 밤중에 깨우더라구요. 그러더니 가래. 이북으로. 나는 그냥 하는 건 줄 알았거든. 그 때 나갈 때 3명이 갔는데 너는 이쪽으로 너는 가운데로 너는 이리로 가라 해요. 그 때 다들 각자 메세지를 줘요. 너는 이걸 알아오고 너는 저걸 알아오라고. 나는 삼팔선에서 백 몇 십 리 되는 데에 금천이라고 있어요. 거기 가서 어디 부대가 있고 어디 인민군 주요 시설이 있고 그걸 알아오래요. 어 그래서 조금 걸어가는데 막 신호탄이 올라오고 아 못 가겠어. 15살짜리가. 못 가겠다고 배쪽으로 다시 왔어요. 이 새끼가 이런 새끼가 있냐고 비겁하게. 저 신호탄 올라오는 거 보라고. 아 나는 못 가겠다 했더니 포박이 더 심해요. 돌아왔다고. 그런데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정보대 대장을 찾아가셨어. 우리아들 3대독자요. 거기 가면 죽을 텐데 제발 모르고 그랬으니 살려달라고. 그랬더니 대장이 그래요. 만에 하나라도 안 갔으면 할 수 없고 만일 안 갔으면 돌려보내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밤중 2시 3시에 다시 가는데 나는 본대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살았어요. 근데 그 당시 간 사람들이 많이 못 돌아 왔어요.내 친구 한웅이 형이 있는데 우리보다 한 두어 살 많은데 걔도 가서 소식이 없어요. 근데 언젠가 납북 어부라든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그래요. 강화가면 이한식이 살아있으니까 그렇게 전하라고 그래요. 그땐 사실 아버지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한 건데, 모르고 한 거니까 결국 우리 어머니 때문에 (살아 돌아왔다)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토지개혁 이후 재산을 몰수 당하고 어려운 생활을 함, 이후 장남은 가난으로 인해 폐결핵으로 고생함>
A: 아주 뭐 재산몰수 다 되고 우리 할아버지가 땅이 좀 있었는데 우리가 왜 망했냐면 조봉암이 때문에 다 망했어 토지 개혁되는 바람에 전부 토지 (잃고) 토지가 모두 소작인 한테 갔어. 땅값은 어떻게 하냐면 조금씩 조금씩 나눠서 받았어. 그거 개값이지. 토지 몰수 됐지. 말도 못해요. 한 가지 이상한 게 우리는 사는 거 밥을 굶다시피 하니까 근데 사람 인정 이란 게 참 메말라요. 우리 소작농 하는 사람이 매년 쌀 3/2는 자기가 갖고 3/1은 우리 줬는데 토지개혁 후로는 쌀 한 톨 없어요. 고생 무진장 했어요.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것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 어렵고 못 먹어서 고등 학교 때 폐가 약했어요. 폐병. 우리 친구들도 다 못 먹어서 그런 거에요. 우리어머니 고생은 말도 못해요. 안 해 보신 거 없지요 그래도 우리 어머니도 자존심 있어서 누구한테 달라고도 안 해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통역 같은 건 못하고 하우스 메이트를 했어요. 식모 같은 거죠.
Q: 6.25 당시 피나는 안 가셨나요?
A: 우리 아버지가 강화 경찰서장할 때 불의는 못 봐도 강화에 부자가 있는데 고재섭이라고. 화전면이 제 2의 모스코바에요. 그렇게 빨갱이가 많았어. 그 사람이 강화 경찰서에 갇혔는데 그 때 우리아버지가 경찰 서장을 하셨는데 얘기를 들어보니까 별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훈방을 했어요. 그랬더니 6.25가 나서 1.4후퇴를 했잖아요. 우린 피난 갈 여력이 없지 근데 누가 찾아와서 고재섭씨가 사모님 모시고 나오라고 해서 왜 날 모시고 오라고 했냐고 하니까 나는 강화 경찰서장했던 김추성씨한테 은혜를 입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내가 1.4후퇴하는데 사모님 모시고 나가겠다고 해서 나, 우리엄마,내 동생 다 데리고 나가서 충청도까지 피난 갔다 왔어요.
연좌제 피해는?
<신원조회를 받긴 했으나 신원을 보장하는 간부급 지인들이 있어 특별한 피해는 없었음>
A: 신원조회 이력서를 내는데 그 땐 안전기획부에서 다 조사하잖아요. 우리 해군들도 조사를 해요. 해군정보부에서. 근데 그 아주 더러운 게 우리가 13주 훈련 받는데 한 10주되면 쫓겨가요. 사상에 걸려서. 아버지가 납북됐든지 이북으로 갔던지 형이 갔든지 하면. 다행히 저는 군대에서는 괜찮더라구요. 그런데 장성한 사람이 되어가지고 직장엘 들어갈라고. 인천 시청에 들어가려고 넣었어요. 발령이 안 나는 거라. 다른 사람은 발령이 나는데. 왜냐고 했더니 아버지가 이북에 납치당했는데 이북 가서 뭘 하시는 줄 아냐 그거에요. 그렇게 발령이 안나요. 그래서 경찰에 높은 사람 보증을 서서 그렇게 직장에 들어갔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신고고 뭐가 있어요? 강화에서 우리 아버지가 납치돼 간 건 어린 아이도 다 아는데 우리아버지가 스타일이 좋아요. 미국 할아버지 해가지고. 우리 아버진 다 알아요.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또 어떻게 아냐면 초대 경찰 서장이기 때문에. 강화에서는.
Q: 정부에서 퇴직금이라도 없었는지?
A: 퇴직금 같은 것도 없어. 전쟁인데. 경찰서도 우리 아버지 논밭 팔아서 했다니깐. 우리 엄마가 그래요. 강화 경찰서에서 우리 아버지한테 은혜를 입은 부하가 있을 거 아녜요.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장님은 공덕비라도 해야겠다면서 우리 어머니한테 올라왔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싫다고 하셨어.
Q: 제대로 신고한 거는?
A: 그때 이북으로 납북된 사람 신고를 하라고 하더라고. 근데 먹기도 힘든데 신고가 어딨어요. 그런데 신고가 돼 있더라고. 우리 고모가 했나 봐. 그런데 이름이 틀리게 나왔더라고. 신고한 이름이. 다른 건 보면 맞는 건데 이름이 틀려요. 우리아버지가 나무 목변에 다른 추자인데 가을 추자를 썻더라고. 추성. 이게 아닌데 했더니 그 당시에 저거 해서 그런 식으로 된 것 같다고 제가 정정해서 바로 한 거에요. 월간 조선 가서 신고했어요.
호적 정리
<실종으로 정리>
A: 아휴, 그거 하느라고 말도 못해요. 그것도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예수 믿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나한테 준 땅은 언제든지 돌아와요. 왜냐면 우리 아버지 땅이 있는데 모르죠. 풍비박산 나서 했으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는데 어느 날 직장에서 신문을 보는데 거기 우리 아버지 이름이 나오더라구. 밑에 광고같이 된 거에 우리 아버지 이름이 나와요. 땅이 도로로 들어갔대. 그러니까 찾아가라 이거야. 언제까지 찾지 않으면 정부에 귀속시키겠다고 해요. 그 당시 한 2백 만원 됐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아 그러니까 실종신고를 해야 되잖아요. 그것도 법원에 해서는 돈들이고 그래서 실종 신고해서 찾았어요.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확인 및 납북자 명예 회복>
A: 그리고 사실 난 부정적이에요. 지금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아주 유명한 사람 작가나 이런 사람 많잖아요. 이광수씨 이런 사람들 다 잡혀갔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온 조선 사람들이 다 안다 이거야. 그 사람들이야 어딜 가든 다 알지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야 강화에서나 알아주지 누가 알아 주냐고. 어디 가서 죽여도 그냥 몰라. 우리 아버지가 지금 벌써 백 몇 살이야. 그러니까 살았다는 건 생각도 안 해요. 돌아가셨어도 그 당시 한 몇 년 사시다 가셨겠지 오래 사신 것 같지도 않아. 난 기대도 않아. 다만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물론 그것도 엉터리겠지만 대한민국 노무현이가 이런 건 얘기 안하고 헛된 거만 하니. 난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미국 사람들 자기 민족이라면 열불을 가리지 않고 쫓아 다닙니다. 시체라도 찾으려고. 근데 이(정부는) 말도 못하잖아. 바랄 거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내 나이도 70이니 더 할 것도 없고 난 그래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자기 먹고 살라고 그런 거긴 하지만 지금도 우리 손주한테 그래요 “야 ! 네 할아버지는 바보 중에 상 바보다 그 당시 월급 줄 돈도 없는데, 네 할아버지는 땅 팔아서 경찰서 운영했어.” 그랬더니 우리 손주새끼들이 뭐라는 줄 알아요? 웃어요 웃어. 그러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야 돌아가셨으리라 생각되니 그 뭐 상관도 않고요. 이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생사나 확인해서 만날 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김 추성이란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납북됐으니 결과적으로 순국 한거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냥 대통령이 그거나 (얘기)해 달란 거에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 아버지가 보고 싶지는 않으셨어요?
A : 살다 보니까 삶의 여유가 있어야 그런 생각도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그리고 납북돼서 1950년 9월에 붙잡혀 갔으니 이제는 살았다는 소망이 하나도 없어요.
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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