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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상덕 (증언자-김정육)
이름: 관리자
2013-09-16 10:53:12  |  조회: 3362


051125A 김상덕 / 2005. 11. 25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상덕), 사진2(증언자:김정육)

피랍자
성명: 김상덕 (金尙德)
생년월일: 1892년 12월 10일 (서울 출생)
당시 주소: 서울 중구 필동 3가 28-31
피랍일: 1950년 7월 12일경
피랍장소: 서울 중구 필동 3가 28-31
직업: 국회의원(반민특위 위원장), 서울 경신고교 교장
직계가족/부양가족: 자녀 1남 1녀
외모 및 성격 : 온유하나 때로 엄격하고 소신이 뚜렷함.

증언자
성명: 김정육(1935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6. 25전쟁 3일이 지나기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고 서울에 거주하던 피랍자는 우선 돈화문 근처 친척집으로 피신, 필동 자택에 자녀 둘은 그대로 두고, 딸을 통해 소식을 주고 받고 생활함. 7월 경 내무서원들이 자택을 압수 수색하던 과정에서 과거 함께 거주했던 헌병 경찰이 숨겨뒀던 권총이 발견되어 피랍자의 장남인 김정육이 연행 돼 모진 고초를 겪고 쓰러져 집으로 귀가함. 피랍자가 이를 전해 듣고 잠시 집으로 왔다가 곧바로 정치 보위부 사람들에게 잡혀 감. 최근 민족 21 기자를 통해 평양에 묘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 피랍자는 당시 국회의원(반민특위 위원장), 서울 경신고교 교장을 했고, 과거 독립 운동가로서의 업적이 인정받아 1990년 서훈을 받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정부가 생사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납북자 가족들의 절박함을 알고 북한과의 고도의 기술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줄 것




“정치 보위부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끌고 와서 아버지를 바로 데려갔어요. "이북에도 친일을 처단하는 사업들을 했었고,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모시겠어요" 이러면서.”

“민족 21일 당시 편집장으로 있던 분이 이북 허락을 받고 이북에 촬영을 갔어요. 그래서 묘역 전체 사진과 아버지 묘지 사진을 찍어왔어요. 거기 보니 4월 28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돼 있어서 일단은 우리가 그것을 확인했다고 보고 그 날로 제삿날을 옮겼어요”

직업 및 활동

<동경 유학 중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고 2.8독립선언을 거행, 체포되어 복역 &#8211; 만주로 망명 항일 독립 운동 &#8211; 해방 직전 임시 정부시절 문화 부장 등으로 활동 &#8211; 1945년 귀국 입법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제헌 국회 의원 당선 &#8211;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경신고교 교장을 겸직>

A: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2.8독립선언이 동경 유학생을 주축으로 YMCA에서 세계 만방에 대한 민국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11분이 주동을 하셨는데 아버님이 그 중 한 분 이세요. 2.8독립선언은 대한 민국 독립을 선언하고 이 선언문을 세계 열강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다 보냅니다. 그 다음에 일본에 있는 도조 내각 수반을 비롯해 각 장관들 및 지도급 인사들에게 이 선언문을 다 띄워 보냅니다. 일본 심장부에서. 집회를 채 마치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연행을 당하죠. 그래서 거기서 주동했던 11분 모두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아버지도 옥고를 치르고 난 다음에 바로 만주로 망명을 갑니다.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가 만주로 이동을 하고 거기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을 보면 지성천 장군, 김동삼 선생, 그리고 김좌진 장군 이 분들하고 같이 독립 운동을 하다가 나중엔 분열이 됩니다. 이것을 통합시키려다가 실패를 하고 만주를 일본이 석권하면서 결국 만주에서의 활동을 접을 수 밖에 없었죠 그 당시 아버지는 남경에 계셨는데 신혼 초기 때 아버지가 일제에 쫓기면서 10년이 넘도록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다가 만주에서 어머니와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중 청년 총 대표로 장기석 총통을 만나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장 총통으로부터 지휘도를 증정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실했어요. 6.25때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이 차압 당하면서 우리는 쫓겨납니다. 9.28수복되면서 들어와보니까 집이 난장판이 되고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데 그 때 그 칼을 잃어버린 게 두고 두고 아쉽고, 또 김구 주석 저격 당시 아버지가 근처에 계셨어요. 급보를 받고 가서 김구 주석을 안았는데 그 때 흥건하게 피로 젖었던 양복을 집에 계속 뒀었어요. 그 양복을 잃어버린 것도 매우 아쉬운 부분이에요.
그리고 임시정부가 일본에 쫓기면서 전전하다가 중경에 정착을 하고 중경 임시 정부 시대가 오는데 그 때 아버지가 임시정부 문화 부장을 하십니다. 해방 직전에는 임시정부 각료로 계시는 신분으로 해방을 맞게 됩니다.
귀국해서 우리 나라를 남쪽에서 수립하려고 하니까 근거가 없어요. 그래서 그 근거를 만들려고 있던 것이 미군정하에 있는 과도기 입법 회의 입니다. 거기 아버지가 입법위원으로 위촉 받아 입법 활동을 하시고, 거기에서 나온 돈으로 제헌 국회 의원 총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서 당선이 되고, 제헌 국회에 들어가서 헌법 기초 위원에 선임됩니다. 그리고는 우리나라 헌법 기초를 만드는 데 참여하셨습니다.
헌법이 완성되고 기초 질서가 정비되면서 친일 처리를 위한 국민 여론이 들끓어서 반민 특위가 구성됩니다. 이 때 아버지께서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선출되셔서 친일 처벌 활동을 합니다. 당시 경찰 간부들이 많이 연루가 되었거든요. 저촉되는 정도가 아니라 악질 친일 경찰이었어요. 우리나라 애국 지사들을 모진 고문으로 사지에 몰아넣고 그것을 밟고서 일제 시대 파격적인 승진을 했던 여러 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꼭 잡아 넣어야 할 사람들이고 이 일을 하던 중에 중부 경찰서에서 백주 대낮에 헌법 기관을 쳐들어와서 전부 완전히 밟아버렸거든요. 당시 활동했던 특경대, 조사관들이 심한 구타를 당해 아직도 후유증을 겪고 있는 분이 현재도 살아계세요. 그렇게 해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어요. 그런데 이것의 책임을 경찰 쪽으로만 돌리는데 그렇게 하기 전에 이박사의 의지와 지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박사가 이것을 해체하기 전에 극비리에 반민특위 관사를 밤에 찾아 왔었어요. 아버지하고 단판을 하러. '이 사람들을 좀 풀어주고 특위 활동을 좀 살살 하고 대충 마무리 지어다오' 이런 거에요. 이것을 특위활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거든. 아버지가 단호하게 거절을 합니다. (이박사가)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아주 분위기가 경직됐어요. 아버지께서는 사전 연락을 받고 우리에게 방안에 들어가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어요. 반민특위 위원장실을 경호하는 무장경찰 네 명이 있는데 이 경호원들은 전부 외곽으로 몰고 그 당시 경무대 경호팀들이 집안을 깔아버렸어요. 그렇게 응접실에서 단판을 했는데 결국은 (이박사의 뜻대로)안 되고, 이 박사는 마지막 시도가 안되니까 그 때 특위의 결심과 각오를 확인한 거죠. 아버지의 확고한 의지를 내보였으니까. 그렇게 돌아가고 바로 며칠 뒤 5월말쯤에 쳐들어 온 거에요. 다 의도 된 거죠.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또 그 당시 아버지가 경신 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있었어요. 황해도의 대지주 김홍양 형제분들의 도움으로 운영하던 것이었는데 그게 38선이 놓이면서 (지원이)차단되니까 경신 학교가 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처음엔 김규식 박사가 교장으로 있다가 연세와 건강 문제로 아버지가 후임으로 오도록 강력히 추천해서하신 거였는데 지금처럼 후원이 쉽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겨우 꾸려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경신 학교에서 아버지의 공을 인정해서 교장 겸 설립자로 분류해 놓고 있더라구요. 그러한 일들을 하시다가 얼마 있다가 6.25사변이 나고 아버지가 납북 된 거죠.
당시 시대 상황

<6. 25전쟁 3일이 지나기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고 서울에 거주>
A: 서울 필동 반민특위 관사에 있을 때 였는데, 6.25가 나고 3일만에 서울이 적화됐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대통령 특별 담화가 라디오를 통해 나갔어요. 그걸 들어보면 한 쪽에는 쳐올라 가고 있고, 우리가 곧 반격하니 도망하지 말라. 서울을 사수하고 나(대통령)도 여기 있겠다. 정부를 믿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내용의 대통령 육성 방송이 나와요. 이것을 서울 시민이 믿고 있는 무렵, 이박사는 벌써 남쪽으로 갔어요. 그러니 '상황이 안 좋으니 피난 떠나라'고 했으면 이렇게 납북 인사가 많지는 않았을 꺼에요. 그런데 일국의 치안을 맡고 있는 치안 총 책임자 내무부 장관도 납북됐단 말이에요.
납북 경위
<전쟁이 나고 피랍자는 돈화문 근처 친척집으로 피신, 필동 자택에 자녀 둘은 그대로 있으면서 딸을 통해 소식을 주고 받음. 7월 경 내무서원들이 자택을 압수, 수색하던 과정에서 6.25전에 거주하던 헌병경찰이 숨겨뒀던 권총이 발견되어 피랍자의 장남인 김정육이 연행돼 모진 고초를 겪고 쓰러져 집으로 귀가, 이를 전해 들은 피랍자가 잠시 자택으로 왔다가 곧바로 정치 보위부 사람들에게 잡혀 감>
Q: 피신은 하셨나요?
A: 대책을 세울 겨를도 없이 서울이 적화되면서 아버지는 급히 돈화문 근처 친척집으로 피신을 했어요. 아무래도 여기서 상당한 위치에서 활동을 했으니까 신변의 위협을 느끼죠. 가족들도 빨리 아버지를 피신시키려 했었고. 그래서 피신하고 계신 동안 남자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갈 위험이 있어서 하지 않고, 당시 여고생이었던 누나가 왔다갔다하면서 집안에 일어나는 소식을 전하고 받아오고 했어요. 한 한달 정도 피신하고 있다가 나 때문에 집에 들어오시다가 들어오자마자 바로 들이 닥친 거에요. 정치 보위부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끌고 와서 아버지를 바로 데려갔어요. "이북에도 친일을 처단하는 사업들을 했었고, 훌륭한 일을 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시 모시겠어요" 이러면서.

Q: 왜 아버지가 집에 다시 오셨나요?
A: 그 당시 우리 집에 젊은 사람들이 좀 있었고, 과거에 반민특위 경남 조사관을 했었던 당시는 헌병 소위이었던 신 윤씨라는 분이 우리 집에 있었어요.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보복이 두려우니 그 사람이 군을 들어갔어요. 보병학교를 나오고 소위로 임감될 때 아버지께 부탁을 하더라구요. 신변 안전을 위해 헌병 장교로 추천해 주십사 하고. 그렇게 인연이 돼서 헌병 소위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6.25 직전에 가지고 있던 권총 오발로 부상을 입었어요.헌병 경찰을 했지, 부상이 있어 전투 총상으로 오해 받으니 (인민군이 알면)바로 즉결 처분 감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남쪽으로 빠졌는데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총을 숨겨 놓고 간 거에요. 전에 우리가 총이 문제가 될까 봐 걱정이 돼서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봤었는데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그냥 있었죠 또 우리집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어요. 집이 크다보니까 더러 하숙형태로 고려대에 다니던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람 고향 친구들이 전쟁이 나고 하숙집에들 쫓겨나오니까 우리집에들 모여있다가 가고 그러더라구요. 우선 이런 상황이 있었어요. (전쟁나고) 처음에는 인민군들은 서울에서 인심도 얻어가면서 분위기 좋게 있었어요. 그 다음에 낙동강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고 하면서 상황이 점점 달라지더라구요. 바로 그 무렵, 하루는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차압딱지를 붙인 거에요. 6월 28일에서 20일쯤 지났을 무렵이에요. 딱지를 붙이고, 필요한 옷가지와 일부 취사 도구를 빼고는 전부 손도 못 데게 다 부셔버렸어요. 그리고 응접실에 있는 응접 셋트를 한 쪽 구석으로 몰아버리고 문을 잡그고. 그런데 이걸 모는 과정에서 ‘탈카닥’ 하고 권총이 떨어진 거에요. 신윤이란 사람이 거기다 그걸 숨겨둔 거에요. 그 때 그게 딱 나오면서 젊은 사람들이 안에 들락 날락하기도 했지, 반동 의심을 하고는 고대에 다녔던 분이랑 저랑 둘이 파출소에 끌려가서 큰 곤욕을 치뤘어요. 끌려 들어가서 한 일주일 만에 풀려났는데, 모의를 할 근거도 없고 권총 숨겨놓은 사람은 헌병 장교였다고 실토를 했어요. 만약에 (신윤씨가) 함께 숨어 있었다면 불지도 못했을 텐데 우리 계산에 이미 남쪽으로 피했으니 (신변위협이 없고), 거기다 반민특위를 하다가 보복이 두려워 신변 보호를 목적으로 군장교로 간 거다라고 했더니 그게 이해가 된 거에요. 나오니까 내가 몸에 열이 나고 하더라구요. 파출소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작은 병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주사를 맞고 집에 가서 뻗은 거에요. 이걸 누나가 얘길 안 했어야 되는데 상황을 아버지에게 말을 했어요. 그러니 아버지가 일제 시대 피신해 다니면서 늦게 얻은 아들 하나인데, 이것이 어찌 될 까봐 (집으로)낮에 몰래 들어오신 거에요. 몰래 어떻게 한 걸 걔들은 금방 알아요. (아버지가 집에 오셨을 때) 우리가 깜짝 놀랐어요. 빨리 가시라고. 아버지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하셨지만 걔들이 그런걸 따질 리가 있나요. 그래서 금방 다시 집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지프차가 닥친 거에요.일단 잡혀가시니까 백방으로 알아봐도 알 수가 없어요. 급하니까 당시 부의장이셨던 김약수씨에게 찾아갔는데도 전혀 도움이 안 되요. 그게 끝입니다. 우리는 성북서쪽으로 가서 매달렸는데, 거기서도 전혀 알 길이 없고. 그게 7월 하순입니다.

납치 후 소식

<납치 이후 소식은 없다가,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아버지가 벽동에서 위해 됐다는 사실을 들음, 이후 민족 21 기자를 통해 평양에 묘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

Q: 이후 연락이나 소식은 없었는지?
A:.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북으로 납북 되셨는데 어디서 어떻게 되신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어요. 근데 고향에서 군수를 했던 분이 조총련 대회를 통해 들었다면서 아버지가 벽동에서 해를 당했다 그러시더라구요.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아주 슬픈 얘기였죠. 아버지 고향에 가보면 아버지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군민들이 ‘사적비를 세우자’ 해서 세운 아버지 사적비가 있어요. 김상덕 지사라고 해서 사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사적비 밑에 기록된 글을 보면 벽동에서 위해됐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확하지 않고, 요 근래 납북 인사들 중에도 임정 요인들, 남한에서 상당한 위치에서 활동했던 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요. 아버지도 4월 28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왔고. 지금까지는 부모님 돌아가신 날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음력 9월 9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민족 21일 당시 편집장으로 있던 분이 아버지 관계로 인터뷰를 하러 오셔서 저와 친하게 됐는데, 그 분이 이북 허락을 받고 이북에 촬영을 갔어요. 그래서 묘역 전체 사진과 아버지 묘지 사진을 찍어왔어요. 거기 보니 4월 28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돼 있어서 일단은 우리가 그것을 확인했다고 보고 그 날로 제삿날을 옮겼어요. 평양 외곽에 (묘지가)있는데, 한 번 가보려고 여러 방법으로 알아보고 있는데 갈 뻔 하다가 잘 안되고 있어요. 걔들이 무리한 돈 요구를 하더라구요.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

<가장 피랍 후, 고아가 된 1남 1녀의 자식들은 친척들이 돌봐 줄 상황이 되지 않아 전국을 떠돌며 힘겹게 생활함>

A: 6.25사변 때 누나와 나하고도 헤어지고 나는 당시 연고지라면 고향하고 외갓집인데 거기 있을 형편이 못돼서 전혀 연고 없는 데서 떠돌게 되고 누나는 다행히 서울시 부시장 비서로 채용이 됐어요. 누나는 그래서 안정이 돼 있었고, 나는 미성년자에다가 학생 신분이었는데 요즘 같으면 아르바이트라도 하겠지만 그것도 어렵고, 힘들게 전전했거든요.

Q: 피난은 가셨어요?
A:. 우리가 서울에서 소개(疏開)하게 된 것은 강제에 의해서에요. 우리는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니까 우리 집을 지키려고 했지만, 차압딱지를 붙이고 했어요. 걔들은(인민군) 우리하고 달라서 봐 준다거나 인정이 없고 나가라면 가야 해요. 그래서 지금 태릉 근처 어디로 가 있다가 9.28 수복되면서 바로 (집으로)들어왔어요.우리 집이 사변 날 때 쌀이 7되 있었는데 가져갔던 그 양식은 금방 떨어졌고, 당시 패물을 양식으로 물물 교환하고들 했는데 우리 집엔 그런 게 없고 삼베가 있어 가지고 나갔는데 그것은 교환도 잘 안되더 라구요.
그래서 저 멀리로 나가서 일주일 만에 닭도 싫어한다는 호밀로 바꾸어 빻아서 수제비를 해 먹으면서 연명을 했어요. 9.28이 될 때까지. 그 뒤로는 경상도 쪽으로 내려가서 전전하고. 누나하고도 헤어지고. 나중에 우리 자형되신 분이 경남 삼천포에 살았는데 이 분이 나를 데려가서 삼천포에서 있으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형편은 안 되고, 그 무렵에 내 친구와 조건이 맞아서 그 친구가 학비를 대고, 나는 공부를 하고 이름은 그 친구 이름으로 대학 시험을 치고, 사진은 내 사진을 붙이고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공직 생활할 때 학력이 되고. 그런데 그 때도 대학을 못 마칩니다. 그 친구 집에도 불행이 닥쳐서 하루아침에 어려워지더라구요. 나를 밀어줄 형편이 못 되니 결국 대학도 중도 포기를 했죠. 그리고 직장은 그 당시 마땅한 직장도 흔치 않을 때였고, 그리고 내가 융통성이 없어요. 그 당시 내가 잘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박통시절에 곽상훈씨라고 대통령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권력을 가졌던 분이 계셨어요. 부산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인사차 찾아갔었죠. 아버지를 잘 아셨던 분이라 나를 보고는 아버지 생각을 하시며 잘 있었냐고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그 분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하는데도 그냥 인사만 하고 돌아왔어요. 주변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답답하다 하더라구요. 한마디만 해도 되는데 그러지를 않으니. 그 외에도 아버지 동지들이 상당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많았는데 찾아갈 생각도 못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내를 치료로 한 번 제대로 못해주고 보냈죠. 그런 식으로 전전했어요. 나중엔 건축 일에 뛰어들었어요. 조립식 건물 쪽 일용직으로 일단 1670원 받으면서 있었어요. 거기서 열심히 기술이 배워서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소장을 하고 건축 현장을 지휘하는 것 까지는 했죠. 그 이후로는 조금 안정되게 근무를 하고 그러다가 88년에 집사람이 심부전증으로 쓰러져서 내가 옆에 있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공직을 떠나고 그 다음은 컴백 하려고 해도 나이가 걸렸어요. 그러니 이 고지식한 사람이 뭘 할 수를 있어야죠. 그러면서 마침 동아 일보에 아는 사람이 있어 지국장을 하면서 살다가 금년 초에 그만 뒀어요. 그리고 아내를 보냈죠.

Q: 이 후 누님은 어떻게 사셨어요?
A: 누나도 많이 불행하세요. 30대 중반에 남편 잃고 애만 다섯인가를 데리고 엄청 고생하면서 사셨어요.

정부의 지원

<전혀 없다가 1990년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받고 연금을 보조 받음>

Q:신고는?
A:. 신고는 누나가 서울대 부시장 비서로 근무할 시절에 적십자사에 신고를 했어요. 그게 누나 이름으로 기록이 돼 있더라구요. 그리고 납북 인사 가족 협의회가 있는 걸 얼마 전에 알고 바로 찾아와서 신고를 했죠..

Q: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다른 독립유공자 가족과 달리) 나같은 경우는 (아버지가) 납북 인사로 분류되서 포상 서훈도 못 받았어요. 그러다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앞으로, 국가 보훈처
처장 앞으로 계속 청원을 하고 진정을 넣어서 1990년에 서훈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 국가 유공자,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서훈이 있은지 한참 후였죠. 그리고 나니까 좀 연금 같은 혜택을 받게 되더라구요. 그 전까지는 전혀 (없었죠). 그걸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는데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은 3대가 망했어요.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에요. 그 사람들 돈을 탐하는 것도 없었고, 이 박사가 초기에 세를 꺾어 버렸고 가산탕진하고 일제 시대 때 감시와 불이익을 자식들이 받았고 그러니 교육이 될 리가 없죠. 그러면 사회의 대우받고 들어갈 수도 없는 거고 (망하지)않는 게 이상한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늦게 얻은 덕택으로 내 자식은 대학을 나오고, 걔는 자력으로 잘 해서 독립운동가 가정이 망하는 게 2대까지로 끝날 것 같아요. 다행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Q:연좌제 피해는?
A:. 우리가 자라날 무렵엔 연좌제가 있었어요. 없다고 해도 불이익을 많이 당했다고요.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어딜 들어가 있어야 연좌제 불이익을 받지, 들어가지를 못하고 연좌제 기간 동안에는 전전하고 방황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다행히(없었죠). 그게 납북인사가 여기서 가령 농사나 짓고 노동이나 하고 했으면 그 사람들이 납치해 갔겠어요? 대한민국에 기여한 사람을 그 사람들이 선택해서 데려간 거거든요. 이 많은 불행을 연좌로 몰아서 자기들은 빠져나갔단 말이에요. 잡혀간 사람이 잘못된 걸로 몰아간 거 아니에요.다행히 1990년대부터 그게 없어졌죠. 그러나 그래도 조심했죠.

호적정리

<미정리 >

A: 못했어요. 아버지 호적 정리를 하려니까 이제는 해야 할 텐데 지금 호적이 조금 어지럽게 돼 있어서 이걸 정리를 좀 하고, 민족 21에 나왔던 것(묘비 사진 등)을 근거로 하려고 해요. 아버지가 아직 사망 신고는 안 돼 있는 형편이에요.

정부에게 바라는 말

<정부가 생사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납북자 가족들의 절박함을 알고 북한과의 고도의 기술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줄 것>
A: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몰라도 지금 주무시는 곳, 돌아가신 날짜 까진 알았어요. 절박한 것은 면했고, 그렇지 못한 납북인사 가족들은 생사확인도 않되요. 지금 (그 분들이) 어디에 주무신지도 모르고. 그렇게 납북 인사 문제는 정말 절박한 것이에요. 정부가 이 문제를 풀려면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될 거에요. 더구나 이북은 합의가 됐던 것도 뒤집어 버리기 일쑤니까, 기분을 건들 수도 없고 고도의 기술과 인내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면 어려운 작업인데 이것을 기술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겠어요. '6.25 납북인사'라는 말을 굳이 고집하지 말고 적당한 수사를 통해서 그 사람들의 비위를 건들지 않는 쪽으로 우회를 한다든가 반드시 납북 인사 가족들의 절박한 것을 풀어주는 것은 필연이고, 반드시 정부가 해야 하는 거니까 잘 접근해서 (좋은)결론을 도출해 줬으면 좋겠어요. 정부도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전혀 내몰라라 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꼭 풀어내야겠다는 집념도 안 보인다는 말이에요.그걸 정부에서 강한 집념을 가지고 하면 방법이 나올 겁니다.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나중에 묘비를 가신다면?
A : 일단 보니까 소주가 약간 곡선을 이룬 병이 있어요. 그걸 차고 가서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으니까 아버지한테 잔을 한 잔 올리고 그 다음부터는 글쎄요.

Q: 아버님께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A :. 아버지 어머니 영정사진을 닦고 할 때 꼭 마음으로 말하고, 또 일어나다가도 아버지 어머니 하고 말하고 그래요. 전에는 음력 9월 9일날, 명절날이 그렇게 절실하고 그래요. 특히 9월 9일은 서글프고 절실하고.. 돌아계신 날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날이니 그랬죠. 워낙에 두 분이 또 불행하게 돌아가셨으니 마음이 아프고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그래요. 항상 죄송하다는 거죠. 주로 아버지 모셔오지 못하고 해방된 지가 얼만데 아직도 어머니 찾을 능력이 없으니…. ‘불효 자식 용서해 달라’고 거의 가 그런 얘기들이에요. (음력 9월 9일: 중앙절, 기일(忌日)을 모르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날)

Q: 앞으로의 계획은?
A : 아버지, 어머니 영정 사진도 좀 괜찮게 작업을 하고,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동안에 불효를 덜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Q: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신 거에요?
(해방 전, 중경에서 병으로 사망)
A : 어머니 묘를 찾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내가 어렸으니까 기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 귀국하기 전 아버지가 저와 누나를 화상산으로 데려갔던 기억이 나요.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고 가셨어요. 그 때가 네 살이었는데 생생해요.어머니 묘가 있는 곳 밑에는 뛰어 놀 수 있는 터가 있어요. 거기서 뛰어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더니 꽃을 좀 꺾어오래요. 화상산에 노란 꽃들이 피어있어요. 그걸 어머니 묘소 앞에 놓고 절을 시키더라구요. 글이 새겨져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그게 귀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거에요. 그 뒤에 조동걸 박사팀이 화상산을 찾아 갔는데 거기 그 꽃이 있는 게 기사에 나옵니다 사진을 찍어 신문에 났는데 그걸 보고 내가 가슴이 떨렸어요. 이 꽃을 거기서는 국화라고 하지 않아요 차우센화 조선화라고 불러요 독립 운동을 하다가 독립을 보지 못하고 2억 만리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영을 기리기 위한 꽃, 우리도 조선화라고 했어요. 지금까지는 어머니한테는 대단한 불효를 한 건데 내가 힘이 닿지 않으니 어떻게 해요. 이제는 내 아들도 성장을 했고, 자기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제 내가 빨리 아버지 어머니 찾는 일이 여생을 장식하는 나의 대업이에요. 그것을 착착 준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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