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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박성우 (증언자-박두곤)
이름: 관리자
2013-09-16 10:48:41  |  조회: 2740


051028A 박성우 / 2005. 10. 28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박성우), 사진2(증언자:박두곤)

피랍자
성명: 박성우(朴性宇)
생년월일: 1919년 4월 15일(경북 상주 출생)
당시 주소: 서울 용산구 용문동
피랍일: 1950년 7월 추정
피랍장소: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직업: 제 2대 국회의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7남매
외모 및 성격 : 유화적이고 화술이 좋음.

증언자
성명: 박두곤(1933년생)
관계: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대한 민국 제 2대 국회 의원으로 대한 잠사회 중앙위원, 대한 농민회 중앙위원을 역임, 상주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피랍자는 서울 용문동 처제 집에 거주 하던 중 6.25를 맞음.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을 못 하고 서울에 있다가 세 명의 북한 조직원이 찾아와 잠깐 물어볼 말이 있다며 데려 간 뒤 소식 없음. 최근 적십자사에서 피랍자가 1956년 북한에 있는 남북 촉성회에 있다가 협동농장으로 옮겨졌다는 공문을 받음. 한편, 2005년 7월 27일 동아 일보를 통해 평양에 있는 62기 묘지에 1954년 2월 4일자 서거가 씌인 묘비 발견, 그러나 두 자료 사이에 연차가 나서 확실한 사망일 확인이 어려움.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6.25당시 거짓 방송으로 국민을 기만한 것에 대한 사죄, 납북자 생사확인, 유골 및 생존자 송환 및 특별법 통과를 통한 납북인사 명예회복





“한강 폭파한 사람 길을 막은 사람 그러다가 약빠르게 돌아선 사람은 애국자가 되고, 이 나라 정부를 믿고 국가를 믿고 대통령 믿고 어리숙하게 애국하던 사람은 서울에 갇힌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지난 반세기 죄가 없으면서 죄인이 되고 가난의 형벌, 명예의 형벌을 받고.”

:”동아 일보에 평양에 62기 묘지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62기 제일 마지막에 사진도 없이 아버지 묘비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은 출생하고 이런 게 나와있는데 우리 아버지 묘비에는 박성우 선생 이름하고 밑에 1954년 2월 4일 서거라고만 쓰여 있었어요. 그 묘비가 찍힌 사진을 보고 종이 짝 하나지만 많이 울었습니다”

직업 및 활동

<대한 민국 제2대 국회 의원, 대한 잠사회 중앙위원, 대한 농민회 중앙위원을 역임, 상주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

납북 경위

<제 2대 국회의원으로 서울 용문동 처제 집에 거주 중이던 피랍자는 잠시 인천에 갔다가 6.25를 맞아 급히 국회로 돌아옴. 이후 곧바로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을 못하고 서울에 있다가 세 명의 북한 조직원이 찾아와 잠깐 물어볼 말이 있다며 데려 감>
A: 따라가셨던 아저씨 한 분이 돌아왔거든요. 그때 피랍 당시는 같이 안 있어서 몰랐지만 6월 24일인가 토요일에 인천에 아는 분이 있어서 갔어요. 거기서 6.25를 맞은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 혼자 다시 급히 국회로 돌아오니까 이미 국회는 없어지고, 또 시골서 국회의원 되어서 왔으니 아버지는 어떻게 됐든 우리나라 대통령 이승만 박사 말을 믿고 라디오 들으니까 시민들 안심하라 하지 그러니까 우왕좌왕 하다가 한강 다리 끊어지고 그러다 보니 못 넘어오셨죠. 이모에게 들은 얘기로는 어느 날 민청 단원인지 북한 조직원들이 ‘잠깐 물어볼 말이 있으니 동행합시다’ 해서 와이셔츠 바람으로 고무신을 끌고 가셨다던가 그래요. 세 사람 정도가 왔더래요. 그 때 뭐 이모가 정치적으로 식견이 있는 분이 아니라서 소속이나 신분증을 구체적으로 물을 수도 없는 거고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해요. 7월경인데 정확한 날짜는 모른대요.
납치이유

<2대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때문>

A: 국회 의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에 있었으면 우리 가족이 숨겨주고 도망할 길을 마련해 줬을 텐데, 혼자 정보의 차단, 대한 민국 정부가 내보내는 전파 방송을 믿은 우직한 촌스러움 때문에 납치된 건데. 만약 우리 가족이 서울에 있었으면 절대 납치 안됐을 겁니다. 아버지는 절대로 사상적으로 저쪽이 아니고, 아버지의 막연하게 들은 정견발표나 연설을 보면 이승만 개인은 그렇게 숭배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때 우리나라의 반공에 대해서는 투철한 의지를…. 절대로 사상이 불순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결국 그러니까 정부를 믿고 국가를 믿고 대통령 믿고 (피난)안 간 사람들이 한강 폭파 때문에 넘어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책임은 만약에 피난할 길이 여러 개 있는 데 안 가고 붙잡혀 갔다면 그건 한 50%는 납북이냐 월북이냐 의심을 해야 되죠. 그런데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사람을 저쪽에서 뽑아서 데려갔는데 어떻게 그들이 빨갱이입니까? 그러니까 폭파는 하나님이 한 것도 지하공작원도 아니고 우리나라 국가가 한 것 아닙니까? 한강 폭파한 사람 길을 막은 사람 그러다가 약빠르게 돌아선 사람은 애국자가 되고, 이 나라 정부를 믿고 국가를 믿고 대통령 믿고 어리숙하게 애국하던 사람은 서울에 갇힌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지난 반세기 죄가 없으면서 죄인이 되고 가난의 형벌, 명예의 형벌을 받고.

납치 후 소식

<풍문으로 50년대 후반 협동 농장에서 봤다는 소식 이외는 전무하다가 최근 들어 적십자사에서 박성우씨가 1956년 북한에 있는 남북 촉성회에 있다가 협동농장으로 옮겨졌다는 공문을 받음. 이후 2005년 7월 27일 동아 일보를 통해 평양에 있는 62기 묘지에 1954년 2월 4일자 서거가 씌여진 박성우씨의 묘비 발견>

A: 소식 없었다. 단 하나 상주에 조 모씨가 간첩으로 넘어와서 50년대 후반에 자수를 했는데 직접 우리가족을 불러 이야기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풍문에 아버지를 협동 농장에서 봤다.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다 라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오히려 내가 철이 들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활동을 하면서 아버지한테 노크가 오기를 바랬어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나를 간첩으로 만드는 거겠죠. 노크를 하면. 그러나 노크가 없는걸 보면 돌아가시지 않았나 싶어요. 이북에서 어떻든지 아버지를 이용을 할 텐데 그 이용을 하지 않는 걸 보면 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렇지 않은가 싶어서 일찍 돌아가셨으리란 심정을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죠

Q: 당시 적십자사 등에 신고는 하셨나요
A: 적십자사에 대해서는 저는 불신을 많이 갖고 있어요. 왜냐면 우리나라 적십자사가 과연 무엇을 했나 하고. 그 때 57년도에 우리 가족회(현재 가족회의 전신)에서 만든 자료가 결국은 적십자사 창고에 곰팡이가 쓸어 사장된 것 외에는 아무 결과가 없었다 그러니까 적십자사를 믿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도 믿지 않고 그렇기에 어디에 호소할 것인가 그래서 일체 거기에 대해 함구하다가 최근 들어서서 언론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과 포옹하던 뒤에는 생쥐도 드나들 수 없던 문이 조금은 열려서 왕복을 하니까 적십자사에 대한 불신보다 가는 아버지에 대한 생사, 조치 등을 알아보려고 노력을 했죠. 노력해본 결과 동생이 상주에
소속된 단체 이름으로 아버지에 대한 생사여부를 질의했더니 56년도에 남북 촉성회 인가 하는 조직에 있다가 57년도에 아버지가 저쪽 정책에 대해 수긍을 하고 따라 주고 했다면 협동농장에 가지 않으셨을 텐데 조금은 그 쪽 정책에 비판적이었으니까 징역택으로. 안 그러면 왜 국회의원을 협동농장으로 보내겠어요? 가서 좀 반성하라 그거 아니겠어요. 그런 공문을 정식으로 받은 일이 있죠.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조직체에서 아버지에 대한 공문을 받은 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죠.

Q: 최근 묘비가 확인되었다고 하던데?
A: 7월 27일 동아 일보에 평양에 62기 묘지가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것을 보고는 기자와 연락을 했더니 기자가 민족 21 기자를 소개해줘서 거기서 사진을 입수했어요. 아버지가 62기 제일 마지막에 사진도 없이 묘비. 그 묘비에는 이름하고 다른 사람은 출생하고 이런 게 나와있는데 우리 아버지 묘비에는 박성우 선생 이름하고 밑에 1954년 2월 4일 서거라고 씌여 있었어요. 그 묘비가 찍힌 사진을 보고 종이 짝 하나지만 보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대한 적십자사에서 보낸 아버지의 57년에 협동 농장에서 간 것과 묘비에 새겨진 서거 연도와 맞지도 않고 또 여태는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아들이 묘비를 보고 가족으로서 참배를 해야 되겠다 해서 통일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썼어요. 그랬더니 그냥 노력하겠습니다. 귀하의 딱한 사정에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라고 답변서가 왔어요. 그것도 장관이 직접보지도 않고 과장 선에서 정결 돼서 답변이 왔습디다. 그것은 아무 희망적인 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답변을 듣고 무척 실망했고 실은 거기 가서 술 한 잔 놓고 꽃 한 송이 바치고 절을 한다 한들 한이 풀리겠습니다만은 그래도 죽기 전에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Q: 아버님이 납북 당하시기 전 가정 형편은 어떠셨어요?
A:.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시골에서는 중농 정도, 아버지 계실 때는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살 정도로의 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가시고 난 뒤로는 제일 나이 많은 사람으로는 20살 누나와 내가 18, 그 밑에 총총히 동생들, 아직까지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젖먹이 7남매에게 6. 25란 참사 때문에 가난이 들이닥쳤죠

Q: 그러면 아버지 납치 후 가족들의 생활은?
A: 누님이 여자사범에 들어가서 4년하고는 정교사 자격증을 따서 학교 교편 생활하기 시작했어요 누님이 받는 월급으로 7남매 겨우 살고 그럼 나는 무슨 돈으로 서울대 갔느냐 하면 완전히 독학으로 들어가서 아르바이트해서 고학하고 그렇게 했죠. 그러다 보니 머리 좋은 동생들 두하(동생)은 중학교도 옳게 못나왔어요. 수필가 박순애(동생)도 중학교 겨우 나왔어요. 전부다 조금만 뒷받침됐으면 대학 민국에서 내로라할 싹들이 초기에 좌절되고 꺾이고. 그래도 능력이 있으니까 노력해서 이제 겨우 개성을 살려서 살고 있죠. 만약에 6.25라는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국가나 정부에서 조금만 옥석을 가려서 이 사람은 정말 사상 있는 요주의인물이다 이 가족은 그렇지 않다 그 가족에 대해 조금만 지원을 해 줬더라도... 비단 그러한 가족이 우리 가족에게만 국한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모든 납북 인사 가족이 그 중에 혹시 몇 퍼센트의 예외는 있겠지만 거의가 똑같은 처지를 겪지 않았나 생각한다.

Q: 많이 어려우셨나봐요
A: 계속 어려웠죠. 지금도 어렵죠. 어머니 제가 공대를 나왔지만 농사를 잘 지어요. 왜냐면 어머니 혼자 고생하실 때 어머니를 그냥 둘 수 없어서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많이 지었어요. 그 때 어머니하고 함께 농사지은 덕분에 지금 내가 정년퇴임하고 시골 내려가서 농사에 대해서 알고 있죠

연좌제 피해

<친척의 승진, 직계 자녀들의 해외 유학의 어려움 및 정부의 감시 등으로 괴로움을 겪음>

A: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자형이 경위에서 끝냈어요 왜냐면 납북인사의 사위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이 딱히 증명할 것은 없지만 또한 그렇게 정권이 어수룩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사촌 형이 경찰 전문대학 나오고 경찰서장하고 총경에서 끝이었어요. 그 사람들 능력은 경무관 치안관까지 될 수는 있지만 단 하나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Q: 연좌제 피해가 심했었나봐요?
A: 대한 민국 국회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 제헌 국회위원이면 자기들 선배 아닙니까.자기네들 대선배들이 초대 2대 합쳐서 거의 60여명 되는데 지금 생사도 모르는데 전혀 엉뚱한 일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그 전에 우리나라 보안법이 아주 서슬 푸르고 하던 군사독재시절에 어땠겠어요? 가족들은 입도 뻥긋 할 수 없었죠. 제가 공무원시절에 독일에 건축에 대한 기술수준향상을 위해 독일에 연수를 간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때 금성통신에서 날 독일에 보내주려 추진을 했는데 그 때 금성 통신 직원이 나에 대한 신분을 체신부 이사급이상 8사람의 도장을 받아서 제 여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 아버지가 납치된 신원특이 가족이기 때문에. 호적에 빨간 줄은 안 그였지만 그것 이상으로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았어요. 외형적으로 사찰을 받았다던가 조사를 받았다든가 하는 것은 내 행위가 없으니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괄적으로 납치된 가족은 그 사람이 색깔이
빨갛건 파랗건 노랗건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아무리 대한민국에 충성스러운 가족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빨갱이 가족처럼 불리한 대우를 받고 눈에 보이지 않는 탄압을 받고…. 보세요. 하나의 국가 공무원을 외국에 한 번 내 보낸다고 이사급 이사 여덟 사람 이상의 도장을 받아야 대한 민국을 떠날 수 있는 체제하에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대학 다닐 때 가족회 부회장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 아들 다섯을 다 외국에 유학을 보냈어요. 그래서 나에게도 '두곤이도 머리를 봐서는 한국에서 공부하면 제약도 많고 그러니, 여비까지 나오는 스칼러쉽을 얻어줄 테니 시험을 봐서 합격하라' 해서 그래서 MIT공대 풀스칼러쉽을 얻는 데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못나갔어요. 왜? 납북자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만약 그 때 스칼러쉽을 얻어서 다녀왔으면 대한민국 유명한 건축인이 돼 있었을 거에요. 그때부터 가슴에 반골의 싹이 튼 거죠. 직접 거리 나가서 손을 흔들며 (머리에)투쟁이라고 쓰진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반골정신, 국가 공무원 할 때도 위에서 오는 지시를 고분고분하기보다는 내 나름대로 거역하고 소신껏 일을 한 것이 출세에도 지장이 있었고, 성격 형성에도 뭘 좀 타협을 하고 같이 화합을 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있는 반골 정신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성질이 돼 버린 거에요

호적정리

<미정리>

A: 호적정리를 할 수가 있나요? 호적에는 돌아가신 날을 명기해야 하는데 돌아가신 날이 명기 없는 호적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감히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막연하게도 확인한 지금에도 호적정리가 되지 않은 것은 만약 이북에서 만들어진 서거 일시가 진실된 것이라고 확인하기 이전에는 아버지의 서거일자를 54년 2월 4일로 할 수 없고 그래서 통일부 장관에게 아버지의 서거된 날짜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자식 된 도리를 하겠습니까 물었지만
그거 하나도 밝히겠다는 일언반구의 답변이 없었다.

정부의 노력

<없었음>

정부에게 바라는 말

<6.25당시 거짓 방송으로 국민을 기만한 것에 대한 사죄, 납북자 생사확인, 유골 및 생존자 송환 및 특별법 통과를 통한 납북인사 명예회복>

A: 시골서 국회의원이 되셔서 단신으로 오셔서 정보에 대해서도 캄캄하고 같은 이웃도 없고 믿는 것은 방송, 언론 매체들이나 조갑제 선생이 쓴 기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이것은 국가에서 책임질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질 정부가 도망을 가서 방송 테이프를 틀어놓고 시민들을 기만하고 벌써 이미 미아리가 점령됐는데도 의정부에서 반격을 한다는 거짓 방송을 하면서 시민들의 동요를 막겠다는 그 목적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국가에서 책임을 지고 국가에서 거기에 대한 사죄라든가 지금 사죄할 사람은 다 죽어 없어졌지만 그래도 명백히 국가가 유지되어 오니까 잘했건 못했건 인정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 이후 억울하게 붙잡혀간 사람들의 심적 고통이라든가 불명예스러운 대접이라든가 이런 한이라도 풀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또 국회든 정부건 대통령이건 제일 첫째로는 생사확인, 가족들이 제일 궁금하게 생각하는 생사확인. 저는 그나마 생사는 막연하게나마 확인된 셈이지만 거기 목말라 있을 겁니다. 둘째는 돌아가셨으면 유해송환. 그리고 생존해계신 납북자가 있으면 남쪽으로 넘어오는 걸 원하는 사람에겐 보내주시고 여기서 그것을 추진하시고. 이 쪽에서 장기수를 보내주듯이 저쪽에서도 보내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6자 회담을 통해서든지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서든지 문제를 처리해주시고, 그 다음에 가족회에서 제시한 6.25 납북인사 가족에 대한 명예회복에 대한 법률안을 빨리 통과시켜 주시고, 그리고 협의회를 대표한 사람을 비례대표제 국회의원으로 해줘서 국회에서 우리의 발언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부탁이고 바램입니다.

Q: 답답한 것이 월북이라고 정부에서 생각하는 건데요?
A: 그게 바로 키 포인트입니다. 저쪽에서는 그 때 당시 김일성이 ‘이남인사 모셔오기’ 그것이 표현은 ‘모셔오기’ 라고 했지만 표현은 그렇더라도 결국은 ‘잡아가기’ 아닙니까? 이쪽에서 요즘 보면 '김일성의 모셔가기’ 였습니다' 라고 (수긍)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정부의 태도가. 만약 납북얘기를 하면 모든 것이 그 동안 쌓은 남북화해무드가 다 깨지는 것처럼 내일 모레면 이북에서 핵폭탄을 터뜨릴 것 같은 겁을 지레 먹고 그게 참 안타깝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저쪽에 비위를 맞춰주지 않아도 망할 건 망하고 사라질 것은 사라집니다. 물론 6.25를 겪지 않은 지금 세대들이 참사 이후의 고통을 어떻게 알겠어요? 모르니까 민족끼리니 우리끼리니 조금 좌경사상을 갖고 날뛰고 대한 민국 정부가 부추기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가족은 어디 가서 호소를 하겠습니까? 그나마 적십자사라는 것도 독자적인 도덕적인 의지를 갖고 행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시녀처럼 하고 있으니 거기도 기댈 곳이 없고 안타깝기 짝이 없죠.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하고 울부짖을 뿐이고 거기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버지 아버지 저 두곤입니다. 60년을 아버지를 부르면서 지내왔어요. 아버지” 그럴 수 밖에 없죠
1950년대 납북자 가족회 분위기

<56년도 현재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회의 전신인 가족회가 종로에 생겨 청년, 주부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납북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를 만들었음. 그렇게 만들어진 자료는 대한적십자사로 보내졌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이 창고에 방치됨>
A : 56년도인가에 현재 가족 협의회와 비슷한 종로 2가 장안빌딩 2층에 가족회가 있어서 찾아갔었어요. 납북 당시에 아버지나 내 남편, 우리 형이 어떻게 잡혀갔나를 실향조사를 합디다. 그 때 가서는 맨 처음 조사대상자로 가서 기록했다가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들이 전부 여자들이 일하고 있길래 딱해서 저도 시간 나는 대로 가족회 일을 도와주고 그랬죠. 그 때 왜 이런 자료를 만드느냐 무슨 가치가 있느냐 물었더니 휴전 협정을 하고 나서 이북 대표가 “우리는 전쟁 때 남한 인사를 한 사람도 납치한 일이 없다. 그 사람 스스로가 우리 체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체제에 동의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시고 왔지 납치한 일이 없다” 라고 했을 때 이쪽에서는 반론할 만한 자료가 없었대요. 그래서 반론할 자료로 만들었는데 결국은 대한 적십자사 창고에서 어디서 사장이 됐는지 그 이후 죽도록 가족들에게 실향보고를 들은 것이 아무 빛을 바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이라도 빛을 보게 하려고 여기 이미일 이사장님이 애쓰는 모습이 딱하고 대견스럽고 그렇다.
Q: 당시 가족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A : 그 때 오늘 여기서 조사하는 것처럼 나이, 6.25사변 당시 납치된 경위. 어떻게 해서 납치된 건지, 이것이 스스로 넘어간 것이 아니고 붙잡혀 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자료를 만들려는 목적이 거기에 있으니까 거기에 맞는 보충 자료 설명 증언 등이 수록이 됐죠. 그 때 가족회는 회비도 없었고, 요즘은 그래도 회비라도 조금씩 걷고 또 우리 이사장님이 사비를 많이 털어서 가족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때는 제가 대학교 졸업반 때인데 저도 뭐 돈도 없었고 그래서 가서 양식에 글을 못쓰는 가족이 오면 대필해 주고 하는 작업을 했어요. 그 일을 계속 해줬죠. 그것이 다 기한이 돼서 끝나고 그 때 변영로씨가 아마 적십자사 총재인가였는데 거기 제출하는 것으로 끝을 냈죠.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재미가 있었어요10년도 안됐고, 살아계시리란 믿음 때문에 일들이 참 재밌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희망이 없어요. 나라 되어가는 꼴을 보니 희망도 없고. 우리 가족 협의회 이미일 이사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딱하고. 그때는 가족회 직원도 꽤 많고 나처럼 동조하는 대학생도 있었고, 젊은 대학생들 와서 북적거리고 아주머니들 전부다 열심히 일하고, 그 때 생각하면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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