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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최용주 (증언자-최도완)
이름: 관리자
2013-09-16 10:55:47  |  조회: 2310


060103A 최용주 / 2006. 1. 3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최용주), 사진2(증언자:최도완)

피랍자
성명: 최용주
생년월일: 1920년 7월 23일생(서울 출생)
당시 주소: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장화장리 224의 4호(現 서울 성동구 자양동)
피랍일: 1950년 8월 하순
피랍장소: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
직업: 양곡 배급소 운영, 대한 청년단 총무부 부장, 조병욱 박사 비서관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6남
외모 및 성격 : 건장한 체격, 활동적이고 사교적임

증언자
성명: 최도완(1940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이 발발하자 피랍자는 피신하려 했으나 한강 다리가 끊겨 남하하지 못하고 7월경 납북자의 친가로 들어옴. 이미 나머지 직계 부양 가족은 암사동에 있은 처가로 피신한 상태였고 피랍자가 들어오기 전 7월 7,8일쯤 친가에는 자택이 있던 미아리 부근 청년들이 찾아와 가족들을 협박하고 총기로 몰살시키겠다며 겁을 줌. 피랍자는 다시 효자동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 한 달쯤 머물다가 다시 주변 좌익 청년들에게 발각돼 8월 중순 경 연행되어 간 이 후로는 소식 없음. 피랍자는 장교 군사 교육을 받았고, 당시 정치 지도자 조병욱 박사의 비서관으로 활동했음, 또한 집안이 부르주아 출신이라 인민군의 지탄의 대상이 됐으리라 추정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전쟁 종결 및 납북자 생존 확인






“소위 말해서 공산 세력들이 제일 싫어하는 세력이 부르조아지 않습니까?
우리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살았죠.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 네 분이 붙잡혀 가셨는데 그 중에 두 분은 잘 산 죄로 잡혀 가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이거(인터뷰)하지 말란 거야. 지금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며 날 야단치시는 거에요. 너도 손주가 있는데 나중에 이런 걸 기록으로 남겼다가 잘못돼서 그것이 얘들한테 누가 되면 어쩌냐고.”

직업 및 활동

<미아리에서 배급소를 운영하면서 성북구 대한 청년단 총무부 부장, 조병욱 박사 비서관 등 정치활동에도 참여, 1950년 초에는 방위 사관학교를 수료함, 당시 가정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음>

Q: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A: 우리 아버지는 한학을 주로 하셨고, 경성 전기 중학교를 다녔어요. 그리고 사변 당시에 뭘 하셨냐면, 왜정 말기에는 식량을 배급했어요. 식량 뿐만 아니라 고무신, 학생들 운동화, 교복, 설탕, 광목 이런걸 모두 국민들에게 배급제를 했어요. 그 배급소를 허가 맡아서 예전 미아리 지금 길음 부근에서 1943년도부터 6.25당시까지 그 일을 계속했어요. 한편으로는 서울시 성북구 대한청년단 총무부 부장을 역임했고 그 수행 중에 1950년 국회 선거가 있을 때 조병욱 박사의 비서관을 하면서 정치 활동에도 관여를 하셨어. 그 때 조박사의 권유로 지금의 온양의 민간인들로 구성된 방위 사관 학교라는 군사 교육 기관이 있었어요. 거기를
몇 주 동안 교육을 받으면 방위 소위라는 계급장을 부여하면서 졸업과 동시에 예편을 시켰어. 그 때 당시 위태위태 했으니까. 나라가 위기 상황일 때는 다시 재소집을 해서 현역으로 돌려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게 했었는데, 그 방위 사관학교 입교한 사람 대부분은 대한 청년단 단원이면서 간부인 사람들이 주로 전국적으로 교육을 받았어. 우리 아버지는 제 2기생으로 1949년 초 겨울 쯤 수료하고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

Q:가정 형편은?
A: 가정 형편은 소위 말해서 공산 세력들이 제일 싫어하는 세력이 부르조아지 않습니까?
우리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살았죠.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 네 분이 붙잡혀 가셨는데 그 중에 두 분은 잘 산 죄로 잡혀가셨어요.

납북 당시 상황

<전쟁 직후 피신하려 했으나 한강 다리가 끊겨 남하하지 못하고 7월경 납북자의 친가(현재건국대 근처)로 들어옴. 이미 나머지 직계 부양 가족은 암사동에 있은 처가로 피신한 상태였고 납북자가 들어오기 전 7월 7,8일쯤 친가에는 자택이 있던 미아리 부근 청년들이 찾아와 가족들을 협박하고 총기로 몰살시키겠다며 겁을 주었음. 최용주는 더 이상 친가에 머무르지 못하고 곧바로 처가로 갔다가 다시 효자동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 한달쯤 머물다가 다시 주변 좌익 청년들에게 발각돼 8월 중순 경 연행되어 감. 이 후로는 소식 없음>

Q: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6월 25일 발발되고 6월 27일 어머니하고 어린 동생 셋하고, 당시 우리집 일을 돌봐주던 20세 정도의 형과 같이 보따리를 싸서 모든 살림 가재를 두고, 금방 전쟁이 끝날 줄 알고 전부 못질 하고 그냥 나왔어요.그리고 나서 우리 친가 쪽이 지금 건국대 근처인데 거기를 지나서 외가댁이 있는 암사동으로 피난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뚝섬 벌판쯤 오니까
오후 한 서 너시 경에 벼락치는 소리가 나는 거에요. 첨엔 몰랐는데 그게 한강 광진교를 폭파시킨 거에요. 그래서 강을 못 건너고, 그 때부터 지금의 잠실강 광나루강을 왔다갔다 하면서 강을 건너려 하는데 피난민은 많지, 배는 없지 헤매다 며칠 후 야매배를 타고 건너 갔단 말이야. 그랬는데 7월 7,8일경에, 그 때면 사변이 일어난 지 2주도 안되는 시점에 우리 친가 쪽으로 우리가 살던 돈암동 미아리 쪽 괴뢰 집단 세력이 우리 아버지를 붙들러 친가 쪽으로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 당숙 할 것 없이 온 가족을 마당에 동그랗게 앉혀놓고 총을 겨누고 '최용주를 찾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식구를 몰살시키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 죽창을 가지고 시골 광 같은 데를 쑤시는 거야. 거기 숨었나 하고….
그럴 때 우리는 외가댁으로 갔는데 거기까지도 이 세력들이 수시로 밤이고 낮이고 때도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혹은 말을 타고 붙들러 오는 거야 그러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이 항상 긴장 상태야. 동네 아이들이 동네 어귀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우리 집으로 와서 알려줘요. "야 괴뢰군들 온다 빨리 도망가라" 해요. 그러면 그 연락만 받으면 나하고 내 동생은 밤이고 낮이고 뒷동산 소나무 밑에 숨어있다 나오고 그런 것이 석달을 그런거야.
우리 아버지는 7월 중순 쯤 친가에 나타나셨어. 우리 친가에서는 기절 초풍을 해서 '어딘데 여길 왔느냐?'고 했더니 도망가려고 했는데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가질 못하고 노량진에서 잠실 거기까지 피해서 오는데 일주일이 걸렸다는 거야. 그러고는 '야 여기서 빨리 피해라 대엿새전에 널 잡으려고 생난리를 치고 갔다' 했더니 거기 있지도 못하고 또 바로 밤길을 강을 억지로 건너서 우리가 있는 당신 처가로 오신 거야. 그것이 7월20일 경이란 말이지. 그렇게 이 양반이 다 왔는데 동네 빨갱이가 벌써 낌새를 차리고 자꾸만 자수하라며 우회하고 조우하고 이러는 거야. 그러니 여기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말이야. 그런데 그 때 마침 육사 9기를 졸업하고 당시 현역 중위였던 외당숙이 당신 본가에 숨어있었는데 우리 아버지 하고 만나서 '야 여기서 이렇게는 동네 빨갱이 때문에 더 숨을 수 없으니 차라리 서울로 들어가자. 그게 안전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가족들을 시켜 서울에 숨을 곳을 마련하게 한 거야. 그래서 아버지는 당신의 외사촌 누나뻘 되는 친척집이 있는 효자동으로 가기로 했고, 외당숙은 무교동 쪽으로 가기로 했단 말이야. 그래서 일단 무사히 그 쪽으로 안착을 했어요. 그렇게 한 달쯤 거기 머물다가 너무 한 곳에 오래 있는다 싶어서 다른 옮길 곳을 알아보다가 미처 장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나가는 동네 청년에게 발각이 되서 며칠 후 아침에 괴뢰군들이 와서 연행돼 갔다는 거야. 효자동에서. 그것이 8월 하순이야. 그 때부터 소식이 없는 거야. 그 때 거기가 종로 관할이니까 종로 경찰서가 아니면 서대문 형무소야. 그래서 종로서에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봤더니 없다 이거야. 그러면 서대문 형무소야. 거기는 줄을 대려니 도저히 안돼서 소식을 못 듣고 거기로 잡혀갔을 것이라 이렇게 추정만 할 뿐이지. 그 후로부터는 오늘까지 소식이 없는 거지.
Q:당시 몇 명이나 찾아왔다고 하던가요?
A: 동네 빨갱이 한 사람이랑 총 맨 사람 괴뢰군이지. 보안서인가 인민서인가 그 세력이지. 내가 듣기로는 한 서너 너댓 명이 아침 식사 전에 찾아왔다고 그래.

Q: 다른 가족 분들도 납치를 당했다던데??
A: 그 분들 중 한 분은 신익희 선생과 죽마고우 사이로 정치 자금도 대시고 했는데 소위 말해서 잘 살았다는 벌로다가 연행되셔서 소식이 없으시고, 그 분은 김종택씨인데 나의 큰 외할아버지이야. 또 한 분은 우리 아버지의형님인데 '동생 찾아내라. 그러면 너는 풀어주겠다' 해서 우리 큰아버지는 최용근씨인데 연행되는 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집을 거의 업혀왔어요. 그러면 일단 풀어준 상태니 그 때 도망을 가야 하는데 너무 맞아서 몸을 추스리려 할 때쯤 다시 잡아가서 그 다음부터 행방 불명이에요 . 그 분도 7,8월 쯤에 잡혀 가신거지. 그리고 또 한 분 우리 어머니의 6촌인가 8촌 오빠 되는 분인데, 그 양반도 잘 살았다는 거로 그냥 이유 없이 잡아가서 행방불명 된 거야.

납치이유

<장교 군사 교육을 받았고, 정치 지도자 조병욱 박사의 비서관으로 정치 활동도 했음, 또한 집안이 부르주아 출신>
A: 그랬는데 7월 7,8일경에, 그 때면 사변이 일어난 지 2주도 안되는 시점에 우리 친가 쪽으로 우리가 살던 돈암동 미아리 쪽 괴뢰 집단 세력이 우리 아버지를 붙들러 친가 쪽으로 왔었는데, 그러면 이걸 봤을 때 납치되신 분들은 초창기부터 명단에 의해서 아주 지명수배를 해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하는 세력도 있고 또 나 중에 막판에 무작위로 끌려간 사람도 있고 했어.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나이도 적은데 왜 그렇게 1차에 지명 수배를 받을 만큼 걔네들이 붙잡으러 그렇게 애를 썼는가를 내가 분석해보면 우선 장교 군사 교육을 받았죠, 또 우리나라 정치지도자 조병욱 박사의 비서관이죠 그네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르조아 출신이죠. 그러니까 그 세력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거지. 그래서 그러지 않았을까.
납치 후 소식

<납북되던 중 도망한 청년을 통해 평양 인근까지 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고, 이 후에는 전무함>

Q: 찾아보려는 노력은?
A : 찾아볼 길이 없지. 이것은 분명히 사상적으로 다른 괴뢰군이 잡아간 게 분명한 데 찾아 볼 도리가 없어. 소식이 없었지. 전해들은 건 있었어. 1950년 1.4후퇴 직전에 우리집에 어떤 남자가 왔드래. 여기가 아무개씨 댁 아니냐 해서 그렇다 했더니, 나도 이 양반하고 같이 끌려 가다가 평양 근처에서 탈출하자 했더니 우리 아버지는 여기에서 도망하다 잡히면 즉결 사형인데 어떻게 그러냐 좀 더 기회를 봤다가 나중에 더 좋은 기회를 택하자 해서 겁이 나서 못 왔고, 당신은 도망했단 말이야. 그래서 만일 성공하면 우리 집이 어디니까 거기까지
무사히 간 걸 전해 달라 했대요. 그래서 그걸 전해주러 어떤 젊은이가 다녀갔다는 거야. 그게 다지. 그러니까 당해 년도에 평양 근처까지 간 것은 들은 거지.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배우자와 자녀들은 모두 납북자의 처가에서 생활함. 다행히 토지가 많아 농사를 지으며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음>

A: 6.25당시 석 달 동안 우리는 외가집에 있었고, 1.4후퇴 때는 우리 친가는 모두 충청도 쪽으로 피난을 갔지. 그러다 전황을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한 명씩, 두명 씩 서울로 데려오셨어. 그 때 당시 우리 아버지께서 조박사의 비서관을 했었다고 했는데, 피난을 갔다가 조박사가 돈암동 집에 들어오셨단 말이야. 근데 다른 간부들은 문안을 오는데 유동 최용주가 없단 말이야. 특히나 애정을 베풀었는데 안 오니 이 양반이 우리 집에 비서관을 보냈어. 못 가 뵌 것은 납치돼서 그랬다 했더니 '어떻게 그렇게 불행하게 됐느냐' 하시면서 우리 집을 보면 아직 애들이 올망졸망, 핏덩이도 있고 하니까 '내가 도와줘야 하지 않느냐? 애기아빠가 나한테 한 은공을 봐서도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러니 어르신네를 찾아 뵙겠다' 했어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찾아 뵙고 '괜찮다고 (도움은) 사양하겠다' 하셔서 대신 그 때 인사치레로 쌀 두어가마 받은 건 있지.(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안 계셔도 생활에 큰 타격은 없었어요. 물론 집안이 괴뢰군 때문에 재산이 많이 망가지고 빼앗기고는 했지만 식구들이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은 덜 받았지. 친가에는 우리 큰아버지 자식들도 많고, 어렵고해서 우리가족은 외갓집에 살았어요. 외할아버지가 애를 많이 써주셔서 나는 지금도 우리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친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생각해요. 농토가 많이 있어서 인부들을 사서 농사를 지으며 그렇게 살았지.

Q: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A : 어머니는 당시 스물 아홉인데 청상과부로 수절하시며 우리 4형제를 기르셨지. 그래서 지금 여든 넷이신데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이거(인터뷰)하지 말란 거야. 지금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며 날 야단치시는 거에요. 너도 손주가 있는데 나중에 이런 걸 기록으로 남겼다가 잘못돼서 그것이 얘들한테 누가 되면 어쩌냐고. 그래서 우리어머니는 내가 (상황을)여쭈어봐도 대답을 안 해줘요. 아버지가 괴뢰군에 잡혀갔다고 해서 우리가 불이익을 겪거나 한 건 없었어요. 그렇지만 혹시나 어떻게 될까 봐 어머니는 직접 당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이걸 하지 말라는 거에요.그래 사실 나도 망설여지긴 해요.

Q: 어머니도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셨나요?
A :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앞에서는 한 번도 내색을 안하셨어. 나도 한 번씩 아버지 생각나면 (눈물이 나고) 이런 데 어머니는 오죽하셨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자식들에게 한 번도 안 보이셨어요. 그러니 우리 외갓집에서는 우리 어머니를 여자로 안 보고, 호걸 호남으로 보셔. 한 번도 내색 없이 오로지 애들만 생각 하면서 사셨으니까.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신고 안했어요. 당시 어른들이 다 아는데 신고는 뭘 믿고 하느냐. 신고해서 온대면 한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는 네 분 모두 신고 안하시고 외가 친척 아저씨 되는 그 분만 그 댁에서 적십자사에 한 걸로 알아.

Q: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지금까지 없지. 왜냐하면 지금까지 없는게 아니라 지금 6.25 사변이 끝났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전쟁이 끝나야 김정일이 처단되고 저 정부가 붕괴되고 명실상부한 자유 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이 됐을 때 정리차원에서 이걸 하자고 할텐데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달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야.

호적정리

<미정리>
A: 그 얘길 하면 또 눈물이 나. 나 우리 아버지 호적정리 안했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호적 번호는 없어. 내가 지금까지도 제사다운 제사를 못 지내. 그래서 내가 우리 아들보고 야 우리 할아버지가 아직 생존해 계실 수도 있다. 그러니 할머니 돌아가시고, 내가 죽으면 니가 내 호적 정리를 할 때 할아버지 것도 해라고 했어요. 돌아가신 것도 모르면서 나는 못하겠어. 만일 이걸로 정부에서 호적정리도 안하고 있냐고 법에 저촉된다고 벌금일 내라면 얼마를 내든지 십년을 내든지 낼꺼야. 제사도 분명히 가신날을 모르니 당신 생일에 지냈어. 그런데 축문을 안해. 축문 없는 영정을 모시고 진설만 하고 조용히 절만 하는 거지. 그런데 한 10년 전부터 누가 생사를 모르는 분은 음력 9월 9일에 제사를 지내는 거라고 해서 그날로 옮겨서 하는데 여전히 축문을 안 읽어. 혹시나 하고. 이런 딱한 일이 있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정부에게 바라는 말

<전쟁 종결 및 납북자 생존 확인>

A: 먼저 헝클어진 정치 체계부터 다시 추스르고 6.25 전쟁을 휴전을 종전 시키는 차원에서 전범을 가려서 원칙대로 해결하면 이런 것들은 지엽적으로 실타래 풀리듯 풀리는 거야.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해결이 안되고, 지금 저들이 ‘민족’ 운운하며 허구에 찬 이야기만 하고 이에 부화뇌동해서 동조하는 우리 세력들이 한심하다는 말이야.

Q: 아버님에 대해 바라는 게 있다면?
A: 당신이 살아서 계신다며 모르지만 바램이 있다면 나는 당신의 유골을 찾는 것도 과분해 돌아가신 날짜만이라도 확인된다면 그 날 번듯하게 제례를 올려드리고 싶어. 그 이상은 욕심이야.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언제 아버지가 가장 보고 싶으셨는지?
A: 내가 결혼할 때, 내가 며느리를 얻을 때, 내가 손주를 봤을 때, 그러고 우리 아버지는 딸을 못 낳고 아들만 넷인데 내가 손녀딸을 봤을 때 그 네 번은 정말로 아주 (흐느낌) 그랬었지.

Q: 만나면 어떤 말을 하실는지?
A: 그냥 뭐 말이 필요하우. 글이 필요하우. 그냥 으스러지도록 안아드리는 것 밖에 더 있겠어? 이제 고만(흐느낌). 아버지 얘기 좀 그만하자고(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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