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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길용 (증언자-이태영)
이름: 관리자
2013-09-16 10:58:23  |  조회: 3193


060112A 이길용 / 2006. 1. 12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이길용), 사진2(증언자:이태영)

피랍자
성명: 이길용(李吉用)
생년월일: 1899년 음력 8월 15일(마산 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56
피랍일: 1950년 7월 17일경
피랍장소: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56(자택) 인근 노상
직업: 前 전 동아일보 기자(언론인)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 1녀
외모 및 성격 : 단신의 외소한 체격,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증언자
성명: 이태영 (1941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직후 1차로 연행되었다가 3일만에 풀려남. 주위에서 피신은 권했으나 워낙 강직한 성품이라 서울 자택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7일경 자택 인근 노상에서 끌려감. 피랍자 이태영은 前 동아 일보 기자로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세상에 알려짐. 체육계에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또한 정치 활동과 민족 운동에 힘썼으며 당시 다른 언론인들과 함께 그룹으로 비슷한 시기에 피랍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북한과 적극적이고 분명한 대화를 전개할 것, 또한 정부가, 젊은 세대가 납북 인사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기억해 줄 것을 바람







“이미 그 당시 배경은 북한 정권이 남한 내의 엘리트 그룹의 리스트를 모두 갖고 있었고, 그 수십만 엘리트 리스트를 놓고 그 중에서 추려서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 그 사람들을 활용하려는 지령이 이미 떨어져 있던 상태였어요. 그 사람들을 데려다가 교육하고 세뇌시켜 우리의 일꾼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같이 그 시기에 납북되신 분의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이미 그 당시 분야별로 언론인 중심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서울에서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구요.”
“우선 특정인 한 사람 얘기가 아니고, 많은 분들이 아주 우국 충정이 넘치는 이 나라의 애국지사에요 건국에 기여하신 분들이고, 정말 이 나라를 세우신 분들이나 다름 없는데 그 공을 이 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거. 물론 반세기 이상 흘러서 기억 속에 묻혀버렸다 하더라도 그 모든 분들의 광복 이전부터 정부 수립까지 엄청난 노력을 하신 분인데, 그 공을 정부마저 잊고 있다는 것이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하구요.”

직업 및 활동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배재 학당을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를 중퇴,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임시정부와 독립 운동 전개, 1921년 동아 일보에 입사,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세상에 알려짐. 이와 관련해 1991년 독립유공자로 인정 돼 애국장을 수여받음. 체육계에도 선구자적인 인물로 조선 체육회 상무 이사, 야구협회 부회장, 고려 육상 구락부 창설 등 각종 주요 경기 단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함, 납북 직전에도 ‘조선 체육사’를 집필 중이었음. 정치활동으로는 해방 직후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대의원, 한국민주당 조직부 차장을 맡아 함>

Q: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A: 세상에 가장 알려진 것은 동아 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가장 많이 알려지셨죠. 그것 말고도 신문기자가 되기 이전에 철도국에 근무하시면서 기미년 3월 1일, 3.1운동에 간접으로 참여하셨어요. 전단을 수송하는 책임을 맡아서 임시정부와 (같이) 하시다가 체포가 돼서 그 때부터 형무소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그 때부터 이런 저런 활동(창씨 개명 반대, 일장기 말소 사건 등)으로 모두 여섯 차례나 형무소로 연행되셨어요.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동아 일보에 복직하셨지만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해직되셨고, 6. 25전쟁 중 납북되기 전까지의 활동은 대체로 언론 활동, 단체 조직을 통한 민족 운동 이었죠. 또 체육계에도 거의 선구자라고 할 만큼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조선체육회 상무 이사, 야구협회 부회장, 또 고려 육상 구락부를 창설하시기도 했고, 각종 주요 경기 단체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셨고, 또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대회를 많이 만드셨어요. 동아 일보가 중심이 된 활동에는 항상 선봉에 서서. 그 당시 주임기자가 한 명 밖에 없으니까 거의 모든 활동을 하셨다고 봐야죠. 그래서 체육계에 큰 영향을 미치셨는데 특히 납북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방대한 자료의 ‘조선 체육사’를 집필하시다가 완성을 못하고 납북되셨어요

Q: 아버님 이름으로 된 상도 매년 수상한다던데?
A: 1889년 창설된 한국 체육기자상이 있는데 이길용 체육기자상이라 제정하면서 체육 언론인의 대 선배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으로서 기자상을 만들어서 지금 17년 째 해마다
시상을 하고 있죠.

Q: 서훈은?
A: 사실은 납북인사에 대해서는 훈장을 수여하지 않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습니다. 왜냐면 납북 인사 중 일부 북한 정권에 협력한 분도 있고 거기서 활동한 것이 확인이 안 됐기 때문에 하지 않다가 조만식 선생을 계기로 독립 훈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아버님도) 독립유공자로 인정이 되어 국가보훈처에서 독립 운동한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사료를 발굴해 내서 건국 훈장, 애국장 말하자면 추서하신 거죠. 그래서 1991년에 건국 훈장을 받았습니다.

Q: 정치 활동도 하셨나요?
A: 사실은 납북되신 원인 중에 하나가 정치 활동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광복 이후 나라가 참 혼란에 빠져있을 당시 참 많은 언론인 출신 지사들이 많았는데 한국 민주당의 주축을 이뤘던 분들은 동아 일보 출신들이 많았어요. 또 그 밖의 민족 지도자들과 뜻을 같이해서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대의원도 하셨지만 한국 민주당에 조직부 차장으로 창당에 참여하셨어요. 그것은 그 당시도 좌익, 우익의 대립이 있었는데 우익 쪽에 서서 민족 운동을 이끌어갔던 분들이 (한민당에) 앞장섰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나중에는 반탁운동과 연관이 됩니다만 그런 정당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셨던 것이 납북의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Q: 평소 아버님께서 늘 주장하시던 정신이 있다면?
A:. 그 분은 아주 강직하신 분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정의파란 것을 알 수 있어요.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안 하셨던 분이셨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알게 모르게 가르치신 것은 '의롭게 살라' 였어요

납북 경위

<전쟁 직후 1차로 연행되었다가 3일만에 풀려남. 주위에서 피신은 권했으나 워낙 강직한 성품이라 서울 자택을 지키고 있다가 7월 17일경 자택 인근 노상에서 끌려감>

Q: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주변에 친지, 언론인들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대표적으로 이 완구 선생이라는 분이 있는데, 아버지와 한 마을에 사셨고 죽마고우처럼 지내셨던 분입니다. (아버지가) 6.25전쟁이 터지고 처음에 연행되어가셨다가 사흘 뒤에 풀려나셨어요. 그래서 그분이 아버지께 즉시 피신할 것을 권고 했어요.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그러나 아버지는 민족운동을 했지만 민족 앞에 부끄러운 일이 없는데 내가 왜 피신하느냐며 집을 지키셨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정치 보위부 사람들은 항상 몇몇 리스트를 놓고 추적하고 주시하던 중 여러 가지 사실들을 찾아내서 7월 17일 자택에서 가까운 노상에서 납치해 간 거죠. 그 뒤로는 전혀 알 길이 없구요.

납치이유

<다양한 정치 활동과 민족 운동에 힘썼고, 동아 일보 기자 출신으로 다른 언론인들과 함께 그룹으로 비슷한 시기에 납북됨>
A: 이미 그 당시 배경은 북한 정권이 남한 내의 엘리트 그룹의 리스트를 모두 갖고 있었고, 그 수십만 엘리트 리스트를 놓고 그 중에서 추려서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 그 사람들을 활용하려는 지령이 이미 떨어져 있던 상태였어요. 그 사람들을 데려다가 교육하고 세뇌시켜 우리의 일꾼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지금도 북한은 일꾼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 당시는 워낙 북한에는 인재가 없는 상황이에요. 거의 서울 중심으로 인재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평양 쪽에 민족지도자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 엘리트 그룹을 북한 정권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납치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같이 그 시기에 납북되신 분의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이미 그 당시 분야별로 언론인 중심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서울에서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구요. 또 같이 납북되신 분들을 보면 춘원 이광수 선생, 같은 동아 일보에 계셨던 교육자이신 황신덕 여사 이런 분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가신 것으로 봐서 의도적으로 그룹을 나누고 시기를 같이 한 것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납치 후 소식

<여러 방법(국제 기구, 인맥)을 통해 알아봤으니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음>

Q: 찾아보려는 노력은?
A: 많은 노력을 했죠. 그런데 전쟁 직후에는 전혀 확인할 길이 없었고, 또 그 당시는 분위기가 납북이냐 월북이냐 말이 많았고. 또 한가지는 대한민국 정부가 색안경을 갖고 있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북한 정권에 협조했을 것이다. 가서 뭘 하고 있는 지도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계속 납북 인사 가족들을 관찰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좌제 리스트에도 올려놓고 해서 나중에는 나서서 알아보기도 어렵습니다. 납북 인사들의 생사확인은 상상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알 길이 없는데 겨우 채널이 있다면 예를 들어 간첩이 내려올 때 확인해 본다거나 하는 것인데 당시 이수근이라는 기자 출신의 간첩이 내려왔어요. 그 사람을 통해 확인해봐도 안됐고, 그 밖의 평양을 방문하는 국제 기구 인사를 통해서, 국제 기구를 통해 알아봐도 전혀 확인이 안 되더라구요. 최근엔 우리나라 정부의 정동성 당시 체육부 장관에서 공식 문서를 전달해서 알아봐달라고 요청했는데도 확인이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판단으로는 또 주위 분들 의견을 종합해 보건 데 납북 과정에 무슨 사고가 있었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는 것이죠.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납북자의 모친, 배우자, 5남 1녀의 자녀가 서울 자택에서 피난 가지 않고 계속 살았음. 배우자 역시 애국 부인회를 했다는 이유로 연행, 고문을 받았고, 자녀 역시 배재중 5학년 당시 우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폭행 및 정신적인 피해를 겪음. 또한 경제 형편이 넉넉치 않아 자녀들이 모두 고등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고, 살림을 줄여가며 근근히 생활함, 이후 자녀들이 취업을 하면서 형편이 차차 나아짐>

Q: 어디에서 거주했는지?
A: 내가 출생지가 서울 성북구 성북동 56 번지인데 그 집을 못 떠나고 있었어요 왜냐면
집안에 고령이신 할머니도 계셨고 어린 동생도 있었고 피난을 갈 수도 없는 입장이고 또
죄 지은 것이 없는데 피난 갈 이유가 없다고 해서 6.25전쟁이 나고도 그렇고 1.4후퇴 때도 피난을 안가고 그 집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지켰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전쟁의 상처를 입고
피해를 많이 입었죠. 특히 대한 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거 등등으로 인해서 완전히 우익으로 몰리고 북한 정권으로부터 말도 못하는 핍박을 받았죠.

Q: 생활 형편은?
A: (아버지가)오랜 세월 기자 생활하셨지만 가정에 큰 도움은 안된 것 같구요. 6.25 때야 우리 뿐 아니 모두가 고생한 거니까, 끼니를 걸러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 그것은 다 똑같은 사정이죠. 그러나 납북 인사의 경우 가장을 잃었기 때문에 어린 자녀에게는 수입을 기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가장을 잃었으니 먹고 살 것이 막막한 거죠. 그 당시는 가제도구나 부동산을 팔려 해도 잘 안되고 결국은 살림을 줄여가면서 근근히 이어올 정도였죠. 그렇다고 정부가 지원을 해줄 형편도 못되고, 정부는 당시만 해도 냉랭했어요. 그러다가 뒤늦게 명단도 작성하고 보호 대책을 세운다고 말로만 떠들었을 뿐이고 실제로 보호해준 건 없어요. 그렇게 말도 못하게 궁핍한 생활을 대부분의 납북 인사 가족들이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우린 또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피해를 많이 입은 편이었어요.어머니도 연행돼서 3일 동안 심한 고통을 당하셨어요. 애국부인회 지부장을 맡았던 경험이 있어서 고생을 하셨고, 제 위에 형이 그 당시 배제 중 5학년이었는데 배제학교 우익에 서 있었다고 해서 고문을 당하고, 때에 따라서는 좌익 뿐 아니라 우익에서 피해를 당한 적도 있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죠. 물론 혼란한 전쟁 상황에서 누구나 겪는 고통이라고는 하지만 정신적, 재산상의 피해가 특히 컸죠. 그 당시 할머니, 어머니, 5남1녀가 남아 있었어요.

Q: 어머니가 주로 일을 하신 건가요?
A: 저희 어머니는 특별히 사업을 한 건 아니었고,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보험업무를 잠깐 하시기도 하셨고, 나중에 제가 20대가 되고 나서는 직업을 갖게 되고 생활고는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죠.

Q: 자녀들의 교육은?
A: 형제들이 공부를 모두 다 할 수는 없었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대학을 마치기도 하고
못 마치기도 하고 그랬죠.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신고는 동사무소에 한 적이 있고, 1956년도에 대한 적십자에서 일제히 조사를 했어요.
그래서 저도 적십자사에 가서 (기록을 돕는) 봉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 신고가 되고 기록이 남았죠. 피해자 조사가 전혀 안된 상황이었으니까 피해실태를 전부 개인 카드를 만들어서 납북 과정, 분위기, 가족들의 상황 등 이런 것들을 만드는 작업이었죠. 거기서 납북인지 월북인지도 어느 정도 기록, 확인이 됐죠. 그렇게 확인만 하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끝이었죠.
사실은 적십자사가 자료 조사를 했을 때 그것을 정부가 받아서 또 조사를 하고 노력을 해야 했는데 정부는 경황이 없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런 노력을 못했어요.

Q: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그렇다고 정부가 지원을 해줄 형편도 못되고, 정부는 당시만 해도 냉랭했어요. 그러다가 뒤늦게 명단도 작성하고 보호 대책을 세운다고 말로만 떠들었을 뿐이고 실제로 보호해준 건 없어요.

호적정리

<미정리>
A: 안됐어요. 안 한 이유는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연좌제 피해

<없었음>

A: 우리 경우는 아버님이 북한 정권에 대한 협조했다는 확인이 안 된 상태였고, 내 개인이 기자 생활을 일찍 시작하면서 신분 보장이 됐고, 또 주위 분들의 도움도 있었고 해서 연좌제에는 크게 해당이 안됐습니다. 자유롭게 활동을 했고, 나중에는 포상도 받고 했으니 비교적 납북인사 가족들 중에서는 행운인 편이죠.

정부에게 바라는 말

<북한과 적극적이고 분명한 대화를 전개할 것, 또한 정부가, 젊은 세대가 납북 인사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기억해 줄 것을 바람>
A: 우선 특정인 한 사람 얘기가 아니고, 많은 분들이 아주 우국 충정이 넘치는 이 나라의 애국지사에요 건국에 기여하신 분들이고, 정말 이 나라를 세우신 분들이나 다름 없는데 그 공을 이 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거. 물론 반세기 이상 흘러서 기억 속에 묻혀버렸다 하더라도 그 모든 분들의 광복 이전부터 정부 수립까지 엄청난 노력을 하신 분인데, 그 공을 정부마저 잊고 있다는 것이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하구요. 하물며 이러한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때로는 그 사실마저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요). 최근 어느 여당 국회 의원 한 분이 저한테 문의를 해왔어요. 남북 공동사업으로 이길용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하고 싶다고. 좋은데 그 이전 확인을 좀 해달라고 했더니 북한에 가봤더니 확인할 길이 없더라 그래도 사업은 계속 하자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북한이 무슨 명분으로 이 사업에 참여하느냐. 우리가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그 국회의원에게 얘기를 했어요.저는 그런 현실, 평양 정권과 대화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거기하고 무슨 합작을 해보겠다는 일부 정신 나간 사람들의 생각도 한심스럽고 또 과거를 잊어버리는 국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죠. 젊은 세대들이 이를 기억해주고 살려주고 해주길 바라는 거죠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아드님께서는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A: 나는 경향신문에서 시작해서 한국, 중앙일보까지 아버님이 하신 세월보다는 더 길게 기자생활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운동부를 창설하신 주임 기자니까 저도 주위 권고도 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체육부 기자를 해서 은퇴할 때까지 시종일관 했습니다. 그렇게 33년의 기자생활을 통해 부끄럽지만 한국일보, 일간 스포츠, 중앙일보, 중앙 경제 신문 체육 부장을 비교적 오랜 시간 했습니다. 그 마음은 아버님이 다 이루지 못하신 것을 내가 이어야겠다는 책무로 생각한 거죠. 그래서 좋고 싫고를 떠나 의무감으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대만족을 합니다.

Q: 은퇴 하실 &#46468; 아버님께 어떤 말이 하고 싶으시던가요?
A: 자랑스럽게 이뤄놓은 건 없지만, 그래도 뜻을 어느 정도 받들었다 생각하구요. 아직 한이 다 풀린 건 아니지만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만들고, 전기를 출판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세상에 알리고, 탄생 백 주년 되던 해 동아 일보사 주최로 전시회를 하면서 20세기 한국 스포츠 100년이라는 책을 만들어냈는데 하나의 중요한 자료로서 과거의 6.25이전에 아버님께서 쓰시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보안해서 책을 만들어 세상에 알릴 수 있어 참 보람 있게 생각합니다. 또 제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국제대회에 여러 번 갔었는데 서울 올림픽 때는 내가 중앙일보 취재 본부장을 했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태극기를 들고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양정모 선수였어요. 그 때 그 (수상)현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아버님 생각이 났어요. 그 때 가까이서 손기정 선수도 “당신 아버님 생각이 난다”고 하시더라구요. 내가 우승했을 땐 나는 태극기가 없어 못 달았는데 양정모 선수를 보니 본인도 다 통쾌하다며 울분을 다 풀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 아버님이 생각난다는 말을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어느 정도 할 도리는 했는데 지금까지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은 생사 확인 못하고 유해를 찾지 못하고, 따라서 묘소를 만들지 못하고, 이 세 가지가 숙제이면서 가슴 아픔으로 남아있어요. 기념비를 만든다고 흉상까지 다 만들어 놓고도 장소를 정하지 못하고 유해를 찾아 묘에 모실 때까지는 기다리려고 하는데 과연 우리세대에 이뤄질 것인가 우리가 눈을 감기 전에 이뤄질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요.

Q: 유해라도 모시면 어떤 말을 하실는지?
A: 가족이 사실은 건강하게 당당하게 뭘 좀 이뤄 놨어야 하는데 이루지 못한 점 부끄럽죠. 일찍이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그러나 다만 아버님의 뜻을 잇기 위해 노력을 했고, 직업적인 것을 떠나서라도 세상에 아버님의 뜻을 알리고 또 그 길을 따르려고 노력을 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말씀 드리고 싶고, 그런가 하면 또 끝까지 모시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요. 아무래도 하늘 나라에서 이 얘기를 들으신다면 반쯤은 애썼다고 이야기해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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