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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동환 (증언자-김영식)
이름: 관리자
2013-09-16 11:03:11  |  조회: 3179


060114A 김동환 / 2006. 1. 14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동환), 사진2(증언자:김영식)

피랍자
성명: 김동환(金東煥) / 아호:巴人
생년월일: 1901년 9월 27일생(함경북도 경성군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피랍일: 1950년 7월 23일
피랍장소: 정치 보위부
직업: 문인, 출판인. 작사가 (前 동아일보, 조선 일보 기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1녀 / 동거녀, 자녀 2녀
외모 및 성격 : 단정한 외모, 온화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영식(1933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당시 최정희와 돈암동에서 동거 중이던 피랍자는 전쟁이 발발하자 본가가 있던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 들어와 피신함. 7월 23일 대학 동기였던 황청송이 찾아와 ‘최정희도 문학가 동맹에 가입했으며 정치 보위부에 자수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며 자수할 것을 권유, 피랍자는 친구 황청송과 함께 집을 나간 후 청친동 소재 모처에서 최정희와 만나 함께 을지로 입구 소재 정치 보위부에 자수차 출두했다가 납북됨. 유명한 문인이었으므로 북한의 인재 모셔가기의 일환으로 보이고, 피랍인의 평소 넒은 인맥을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추정됨. 피랍자 파인 김동환은 우리 나라 최초 서사시 ‘국경의 밤’을 내고 세간에 알려서 문인으로 활동하며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임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 확인, 사망 시 유골 송환 및 생존 시 상봉, 납북자 명예회복





“함경북도 경성에서부터 아버지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던 황청송 이란 친구 분이 찾아와서 자기는 자수를 해서 자유로운 몸으로 생활을 한다고, 아버지에게 정치 보위부에 자수하라고 권유 했어요. 북한을 반대하고 대한 민국을 도운 사람이니 일단 반동문학이다 반동작가다 해서 자수를 하라니 어버지는 어머니에게 '잠깐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가신 거에요”

“한국 비평 문학회라는 데에서 펴낸 '납,월북 문인 그 후' 이런 책이 나왔는데 여기에 보면 '이광수, 김동환, 김억 등은 미쳐 피난을 못해 납북 당한 뒤 갖은 고초를 겪다 비운에 사라졌거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문인들이다. 김억은 58년 초 파인 김동환은 같은 해 12월에 평북 철산 지방 집단 수용소 등으로 각각 추방된 사실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래서 이들의 나이나 북한정권의 형태로 보아 생존은 어려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와요”

직업 및 활동

<북선일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하다가 우리 나라 최초 서사시 ‘국경의 밤’을 내고 세간에 알려서 문인으로 활동함. 월간 종합지 삼천리, 삼천리 문학, 만국 부인 등의 출판 활동을 하며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 했음. 1938년 이후부터 친일적인 글을 실어 문제가 되기도 함. 그 외에도 ‘산 너머 남촌에는’ 등의 시가 작곡자들에 의해 가곡이 되어 여러 곡이 현재 남아있음>

A: 아버님은 여기서 중동 중학교를 마친 후에 일본 동경에 있는 동양 대학교의 문화학과에 다녔어요. 3학년 때에 관동 대지진이 나서 교포들이 비참하게 많이 희생을 당한 것을 보고 여러 가지로 큰 쇼크를 받아서 바로 귀국을 했어요. 그래서 함경북도 경성에 거주하면서 신문사에서 잠깐 일을 봤어요. 함경북도 소재 경성일일 신문에 조선 문판 기자로 그 처음 사회생활을 했지요. 거기서 한 1년 정도 있다가 동아 일보로 오셔서 사회부 기자로 한 10개월을 근무하다가 그만 두고, 그 다음에 조선일보에 와서 한 2년 반정도 근무를 하셨지요. 그래서 기자생활은 통상 한 5년 조금 넘게 하신 걸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를 할 당시 1922년 2월 22일에 조선 가요협회라는 게 생겼어요. 건전가요의 보급을 위해 문인과 음악인 들이 회합을 해서 만든 것인데 작가들은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시를 많이 쓰게 하고, 음악인을 작곡을 하고, 당시 아버지는 홍보 팀장이셨어요. 당시 아버님의 시가46명의 작곡가에 의해 가지고 가곡이 됐어요. 그 중에 10편 정도는 대중 가요 구요. 알려진 것으로는 '산 너머 남촌에는' 이 있고, 그 외에도 81개의 악보가 남아있어요.

일반적으로 가장 아버지가 알려진 분야는 문학분야인데 동아일보에 계실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인 국경의 밤을 내셔서 그때부터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시작활동을 하셨죠. 1926년 6월에 월간 종합잡지 삼천리를 만들어 내셨어요. 1942년 1월까지 통권 152권의 잡지를 냈어요. 그러다가 대동아전쟁이 나면서 일제에서 이 잡지가 좀 문제가 있다고 이름을 바꾸라고 강요를 해서 할 수 없이 잡지명을 대동아로 바꿨어요. 그리고 1943년까지 3권을 더 냈어요. 당시는 일제 치하 무단정치시대. 문화정치표방시대를 거쳐 친일강요시대에 접어들던 때에요. 제가 보기에는 1938년부터 다소 친일적인 성향의 글들이 잡지에 자꾸 들어갔고, 대동아를 만들 때에는 한번만 우리 한글로 하고, 두 권은 일본어로 잡지를 발행했는데 내용 자체도 그렇고 다소 그 친일적인 성향이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거 말고도 본인이 문인이었기 때문에 삼천리 문학이라는 문학잡지를 만들었어요. 그 건 두 집만 나오고 폐관이 되고, 여러 가지 여권운동이던지, 직업생활 등 특이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을 해서 그걸로 만국부인이라는 여성잡지도 한 권 내셨어요. 경영난 때문에 더는 못하고 삼천리에 끼어서 한 게 있죠.

일제 시대 때 문인은 대국민 홍보부대로 총독부에서 동원을 많이 했어요. 지원병을 모집할 때 연설을 하게 하든지 가두모금, 채권 판매 등에 아버지도 거기에 끼인 거죠. 해방 직후 당시는 그 격앙된 국민 심리가 친일파는 모두 혼 내야 한다던 때이니 아버님이 큰 타격을 받고 늘 불안해 하셨어요. 본인이 친일파에 낙인이 찍혔다는 것 때문에 활동의 제한을 받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그 후로는 조선 민주당의 대변인 같은 일을 하시다가 후일에 1948년에 석간삼천리라고 또 잡지를 또 냈어요. 6.25발생 될 때까지 통권 20권을 내면서 거기에 시,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쓰신 게 주된 생활이셨어요. 그 때는 그 일제 하에 못 썼던 어떤 내용들이 많이 거기 실렸어요. 원래 아버지는 좌익 하고는 관련이 없는 거고, 우익 에서도 친일 전적 때문에 상대를 안 해주니까 그냥 있었던 거죠. 반민 특위가 구성되고는 아버님은 50년 2월 28일에 자수를 했어요. 8월 달까지 형무소에 있으면서 공판을 받았는데 공판 내용을 보면 '당신은 민족주의자고, 일본유학시절부터 그런 계통에서 일을 보고 한 사람인데
왜 친일을 하게 됐느냐?'라는 질문에 '잡지를 내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랬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건 아버지가 잘못 하신 거죠.

납북 경위

<전쟁 당시 최정희와 돈암동에서 동거 중이던 피랍자는 전쟁이 발발하자 본가가 있던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 들어와 피신함. 7월 23일 대학 동기였던 황청송이 찾아와 ‘최정희도 문학가 동맹에 가입했으며 정치 보위부에 자수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며 자수할 것을 권유, 피랍자는 친구 황청송과 함께 집을 나간 후 청친동 소재 모처에서 최정희와 만나 함께 을지로 입구 소재 정치 보위부에 자수차 출두했다가 납북됨>
A: 저희 집은 본가로 종로구 청운동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전쟁 당시 동거자인 최 정희 여사와 돈암동에서 살았어요. 당시에도 매달 생활비는 보내 주셨어요. 그러다가 6.25가 나니까 아버지가 곧바로 우리 집으로 온 거에요. 안방에만 계셨는데 바깥 소식을 모르니 대단히 불안해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는 분들을 통해 생활비를 조달하는데 정신이 없었어요. 납북 당시의 상황은 아버지는 종로구 청운동 57-11번지 우리 집에 계시다가 제가 학교에 간 사이에 함경북도 경성에서부터 아버지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던 황청송 이란 친구 분이 찾아와서 얘기를 한 거에요. 자기는 자수를 해서 자유로운 몸으로 생활을 한다고, 아버지에게 정치 보위부에 자수하라는 거였어요. 북한을 반대하고 대한 민국을 도운 사람이니 일단 반동문학이다 반동작가다라는 명분으로 자수를 하라니 어머니에게 '잠깐 좀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가신 거에요 그것이 50년 7월 23일이었어. 그 이후는 최 여사의 자서전에 보면 최 여사가 청진동에서 아버지를 만나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옛날 국립 도서관 자리인 정치 보위부에 같이 갔대요. 가니까 최여사는 거기 좀 있으라고 하고 아버지만 데리고 나갔대요. 최여사가 깜짝 놀라서 '자수하면 그 자유스러운 생활을 보장 해준다고 하더니 무슨 소리냐?' 하니까 '좀 알아볼게 있다'며 아버지를 데리고 갔고 그 후로는 최여사도 모르는 거에요.
Q: 당시 아드님도 열 일 곱이면 의용군으로 잡아가고 그럴 때인데 문제는 없었는지?
A: 처음부터 의용군으로 잡아가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전쟁 나고 한 20일 지나서였을 거 에요. 한번은 내가 다른 일 때문에 시내에 나왔다가 들어 가려는데 큰 길가에서 보니 젊은 사람들을 막 모아가지고 그 근처에 학교로 데리고 가는 거에요. 뭔가 이상하다 낌새가 들어서 나는 골목길로 해서 집으로 얼른 왔고 우리 식구는 인근에 아는 분 집 마루밑에 숨었어요. 그래서 피할 수 있었죠.

납치 이유

<유명한 문인이었으므로 북한의 인재 모셔가기의 일환으로 보임, 또한 친일 활동 전적이 있으므로 이를 완전 청산하려거나 피랍인의 평소 넒은 인맥을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추정>

Q: 납북된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A: 북한이 한국의 인재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어서 필요할 때에 홍보도 시키거나 협상 때 어떤 대상으로도 쓰려고 한 거죠. 또 기술자에 경우는 북한이 낙후된 기술을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위해서 데리고 갔다고도 하더라구요. 어쨌든 뚜렷하게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고, 특히 납북인사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지시를 해가지고 잘 모셔 오도록 했다고 그러더라고.

Q: 아버님이 원래는 북한 출신이잖아요?
A: 쟤들은 무슨 향리 출신을 따지는 거보다도 아버님의 제일 핸디캡이었던 친일문제였다고 생각해.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우리 남한하고 달리 철두철미하게 했거든. 그리고 아버지가 글도 잘 쓰셨지만 아는 사람이 많아, 그러니 그런 면에서도 어떤 포섭 대상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Q: 아버님이 북한에 가서 특별히 어떤 문학 활동을 하신 게 없는데?
A: 조철씨가 쓴 글을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이 반성문도 쓰게 하고 작품도 하게 하고 많이 강요를 했었대요. 그런데 아버님의 경우는 불편하다고 하면서 그걸 늘 거부 했대.

납치 후 소식

<62년도 귀순 인사 조철씨의 납북인사 관련 기록, 69년 한국 비평 문학회의 ‘납, 월북 문인 그 이후’ 기고, 박계주씨가 확인한 ‘납북한 조선인 인명사전’을 통해 피랍자가 1961년까지는 생존한 것으로 확인>

Q: 이후 연락이나 소식은 없었는지?
A: 89년도 10월 21일 한국 비평 문학회라는 데에서 펴낸 '납,월북 문인 그 후' 이런 책이 나왔는데 여기에 보면 '이광수, 김동환, 김억 등은 미쳐 피난을 못해 납북 당한 뒤 갖은 고초를 겪다 비운에 사라졌거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문인들이다. 김억은 58년 초 파인 김동환은 같은 해 12월에 평북 철산 지방 집단 수용소 등으로 각각 추방된 사실까지는 확인되었으나 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그래서 이들의 나이나 북한정권의 형태로 보아 생존은 어려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와서 그래서 여기서 아버지가 58년도 12월까지는 생존해 계셨다는 내용을 확인을 한 거죠.
그리고 62년도에 재북 평화통일 위원회에 있다가 남한으로 다시 귀순 한 조철씨가 몇 백명의 납북된 사람, 월북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을 해 놓은 것도 있어요.
또 하나는 순애보를 쓴 소설가 박계주라는 분이 밝힌 내용이 자기가 그 61년도에 일본에 갔을 때 보니까 저널사라는 데에서 발간한 '남북한 조선인 인명사전'이 있었대요. 그것을 보면 납북된 사람이나 월북된 사람들, 그 당시에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북한 사이드에 수록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아버지 이름을 확인을 했다는 거에요. 그러니 적어도 61년까지는 김동환이가 북한에서 생존해 있었다는 것으로 그분이 얘기를 해 줬던 거죠.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

<피랍자의 처가 야채 장사 등을 하며 자녀를 교육 시킴>

A: 아버님이 일찍 떠난 후에는 어머님이 청량리, 왕십리 쪽에서 나물을 캐서 시장에서 팔고 그러면서 근근히 살았어요. 나중에 논산에 피난 갔을 때는 어머니가 시장통에서 그 야채를 파셨구요. 고추 가루도 팔고. 당시는 장사가 잘 돼서 나와 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이 후 서울에 복귀했고 우선 청운동 집을 팔아 가지고 어려운 대로 지냈어요. 그러다가 내가 대학을 나온 후에 바로 취직을 해서 생활을 뒷바라지 했죠.

정부의 지원

<없었음>

Q: 신고는?
A: 어머님이 하셨지. 56년에 적십자사에 신고했어. 나중에 어머니가 79년 10월 21일날 납치인 등록 증명원 이런 걸 받았다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알려 달라고 주소가 바뀐 것까지 알리고 나름의 준비들을 하셨어요.

Q: 정부의 지원은?
A: 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은 안 했고, 한국에서는 북한을 괴뢰집단이라고 국가로 안 봤으니까 협상의 길이 막힌 거지.

연좌제 피해

<없었음>

Q: 연좌제 피해는?
A: 연좌제의 경우는, 내 경우는 그 나는 별로 해당이 안 된다고 보는데 그 내가 공직을 있었어. 그래서 내 경우는 아버님이 납북됐다는 것 때문에 조직에서 어떤 얘기를 들었거나 불이익을 당한 것은 없었어.

호적정리

<실종 처리>

A: 어머니가 80년도에 아버지를 실종선고를 냈어요.
일반 실종이기 때문에 5년 후에는 사망한 것으로 법적으로 처리가 된다고.
그러니까 1950년 7월 달에 실종이 되었으니까 그 5년 후인 1955년도에는 아버지가 사망으로 법적이 처리가 된 거지. 나는 그것도 몰랐는데 실종신고를 하게 되면 어떤 재산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그 재산이 양도가 될 수 있잖아. 저작권도 그렇고.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보다는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는 생각이 더 간절히 있어서 할 수 없이 다시 실종신고 취소 청구소송을 냈어. 결국 아버님은 현재 호적상에 호주로 있고, 실종했던 것이 취소됐다 하는 것으로만 기재가 되어 있지.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 확인, 사망 시 유골 송환 및 생존 시 상봉, 납북자 명예회복>

A: 이제 내가 개인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잘 떠오르지 않아요. 내가 한 10년을 뛰어 봤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참 어렵구나.' 싶었어. 다만, 지금 이 6.25전쟁 그 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서 납북인사들의 가족들이 일심동체가 되어서 생사를 확인해 달라든지, 살아있는 사람은 송환을 해달라든지, 또한 명예 회복을 위한 어떤 조치를 해달라든지 하는 이런 요구사항을 하고 있으니 나는 회원 자격으로 그분들의 그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그리고 납북인사 문제는 정전 협정 속에도 한 항목으로 들어가 있는 거거든.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야? 50, 53년도부터 52년도를 지금까지 끌어 온 건데 요즘에도 핵 문제 등등 해서 이런 것들 때문에 자꾸 뒤로 밀려서 안타까워. 내 하나의 꿈이 있다면 내 생존 시에 납북한 문제가 원만히 해결이 된다면 뭐 북한에 방문들 갈 꺼 아니야? 그 때 나도 수용소에 가 봐서 아버님의 행적을 찾고, 혹시라도 어디라도 묻혀 있으면 뼈라도 갖다가 나는 어머니 유언대로 합장을 하고 싶어요. 또 지금은 어머니 묘 비석 한 쪽에 그 사망날짜는 '59년 7월 28일에 북한에 납북' 이런 식으로 매듭을 지었지만 내가 만일 앞으로 아버님의 뼈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가져 와서 다시 정식으로 뼈를 묻어 합장 묘를 다시 만들 것이고, 그 비석도 몇 일 날 그 기록에 의해서 사망했다 하는 것을 수정을 할 생각이에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아버지의 생애는 대단히 뜻 있는 삶이었어요. 좀 아쉬운 부분이 있긴 있지만 어쨌든 아버지는 그 격동의 그 시대 속에서 희생을 다한 지식인 중에 한 사람이다라고 자식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이 들수록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아버지
지금 북녘 땅 어느 산자락에 누워 지나 온 운명의 길을 회상하고 계십니까?
일제 강점기, 그 수난의 20년대에 당신은 홀연히 나타나셔서
민족의 거칠은 숨결과 정서를 담아 시를 만들었지요
6.25사변은 아버지의 납북으로 이어졌고, 아들은 진한 아픔을 안고 사는 고아가 되었지요
해바라기 되어 기약 없는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리면서요
아버지 품속에서 잠들던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라
문득 떠오르는 아버지 모습 귀 익은 그 낮은 목소리에 아들은 금새 울보가 되지요
아~ 파인
내 아버지에게 드리는 존경과 애모의 정은 크고 깊고 긴 아름다운 추억의 강이 되어
영원으로 도도하게 흐른다.

- 파인 탄생 100주년에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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