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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규찬 (증언자-유언지)
이름: 관리자
2013-09-16 10:52:41  |  조회: 2665


051209A 이규찬 / 2005. 12. 9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이규찬), 사진2(증언자:유언지)

피랍자
성명: 이규찬
생년월일: 1925년 12월 9일(경기 안성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피랍일: 1950년 8월 경
피랍장소: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직업: 동국대 사학과 4년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녀
외모 및 성격 : 활발하고 애주가(별명:안성 막걸리)

증언자
성명: 유언지(1924년생)
관계: 배우자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동국대 사학과 4년에 재학 중이며 호국대 단장으로도 활동했던 피랍자는 6.25 전쟁 직후 안성 고향집에 피난 생활을 하다가 8월경 이웃 피난민들과 동태를 살피러 서울로 상경, 당시 재학 중이던 동국대학교에 갔다가 붙잡힘. 잠시 자취방에 들러 아내에게 쪽지를 남기고 기다리고 있던 인민군 두 명에게 연행되어 간 후로는 소식 두절, 그 이후 의정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고향에 내려와 있던 동생(이규선)도 의용군으로 붙잡혀 감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및 생존 시 상봉










“형하고 아우하고 다 없어지니까 9.28 수복하고 나니까 우리를 빨갱이로 지목하더라고. 우리 시아버님은 당시 이장을 했고, 빨갱이 아니고 결백한 민주주의거든. 그랬는데도 아들 형제가 하나는 인민군가고 하나는 행방 불명이니까 오해를 받았어.”

“종합 청사에 가고 했지. 그 때만 해도 다리가 안 아팠어. 신고를 해서 찾을 수 있으면 찾으려고. 나만 단독적으로 찾아달라는 게 아니라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 하는데 껴 붙여서 만나게 해 달라는 의지 하에 종합청사를 몇 번을 찾아갔어. 가서 실갱이도 했지. 통일부 장관 있는데를 못 들어가게 해. 나 좀 들어가서 통일부 장관 만나서 얘기 좀 해야겠다고 하니까 못 들어가게 해. 실갱이 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그랬어.”

납북 경위

<피랍자는 6.25 전쟁 직후 안성 고향집에 피난 생활을 하다가 8월경 이웃 피난민들과 동태를 살피러 서울로 상경, 당시 재학 중이던 동국대학교에 갔다가 붙잡힘. 잠시 자취방에 들러 아내에게 쪽지를 남기고 기다리고 있던 인민군 두 명에게 연행되어 간 후로는 소식 두절, 그 이후 의정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고향에 내려와 있던 동생(이규선)도 의용군으로 붙잡혀 감>

A: 왜정 때 고등학교 다니다가는 군인으로 가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어. 그러다 해방이 되고
다시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졸업하고 대학교를 갔지. 6.25나던 해가 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억지로 고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닌 거야. 동국대 사학과. 신설동에 자취방을 얻어 살았어.
나도 처음에 와서 같이 살다가 5개월 정도(50년 1월에서 5월까지) 잠깐 같이 살다가 시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전보가 왔어. 그걸 받고 애를 데리고 내가 시골을 내려갔어. 갔더니 시아버님이 대단히 아프셔. 그런데 그 때가 모를 심을 때더라고. 모 심느라고 난리지 시아버지 아프지 그래서 내가 서울로 다시 올라오질 못했어. 그랬는데 6.25가 났다고 하더라고.
그 때 시골에는 전화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인간 대 인간으로 장에 다녀오면 뉴스를 듣는데 6.25 사변이 나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온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해 난 어린 애를 데리고 간다니까 시댁에서 못 가게 하더라고. 서울에 가지도 못할 때고. 그러고 있는데 (남편이) 사흘 만에 내려왔다고. 어떻게 왔냐고 하니까 미아리 고개로 (인민군이) 밀려 내려 온다고 해서 일단 다리를 건넜다는 거야. 큰 애를 서울에 두고 왔었는데 그 애를 데리고. 그래서 영등포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집을 찾아가서 자다 보니 밤에 새벽에 한강 다리를 끊더래. 그래서 놀래서 나와서 애를 업고 걸어오는 데 이틀 만에 시골을 들어왔더라고. 그러고 있으니 서울서 피난민이 몰아 닥치고 어느 정도 잠잠해 지니까 피난민들이 서울을 다시 간대요. 그러니까 이 사람도 간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모두 못 가게 했어. 지금 서울 가서 뭘 하려고 하느냐고 학교도 휴교했을 텐데 하면서 가지 말라고, 우리 할아버지, 시아버지 모두들 못 가게 하니까 안가고 있었어. 그러다 8월 달에 또 아는 사람들이 서울을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하니까 (남편이) 또 서울을 간대요. 나는 적극 반대를 했지. 그랬는데도 간다고 하니까 말릴 수가 있어? 활동하는 것도 없었고 그냥 집에 있을 때였어. 첨에 집에 와 있으니까 집에 자꾸 조사를 오더라고. 서울서 온 피난민 조사. 빨갱이들이 자꾸 와서 뒤져보고 조사를 해 가고 그러더라고. 그러면 없다고 숨어있고 그랬었어. 그러다 서울 가는 사람들이 보리쌀 이며 들고 갈 땐데 자기도 가면서 내가 사흘이면 온다고, 오늘 가서 쉬고 내일이면 온다고 하면서 쓰봉에다 와이셔츠 하나 입고 맨 손으로 그 이네들 쫓아서 서울을 간 거야. 그렇게 갔다가 올 때가 됐는데도 안 오니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우리 시아버지가 서울을 찾아 올라 갔어. 그러더니 그 이튿날에 내려오셨더라고. 그래서 "애비 만나보셨어요?" 하니까 " 응. 만나봤어. 저기 뭐 거기 있더라" 해요. 그래서 "아니 자리가 있지, '거기' 가 어디에요?" 했더니 " 아 그냥 남산 밑에 있더라" 해. 그러니까 나한테 거짓말을 하신 거야. 못 봤다고 하기는 그러니까. 나는 반신반의 하다가 영 소식이 없고 해서 애들을 업고 서울로 간 거야. 우리 친정 당숙모가 마침 가길래 같이 가자고 해서 시골서 애를 데리고 어딜 가냐고 못 가게 하는 걸 나는 그냥 나섰어. 가서 살던 신설동으로 가보고, 학교를 가보고 하려고. 그런 생각에서 서울을 왔지. 오다가 폭격을 만나고 죽을 고생 다 하면서 똑딱배 타고 한강을 건너고 그렇게 왔는데 오니까 있기는 뭐 있어. 아무것도 없지. 보따리만 싸서 우리 방에다 놓고. 그래서 내가 그걸 열어보니 거기에다 편지한 장을 조그맣게 놓고 갔어. '집에서 안 올걸 괜히 왔다'는 내용 이야. 그리고 '기약 없은 상봉 일을' 하면서 조그맣게 접어놨더라고. 마지막 말도 그게 다여. 이세상에 없지.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된 경우냐고 물어보니까 (애 아빠가) 와서 하루 저녁 자고 시골을 간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보따리를 싸더래요. 그래서 보니까 애 옷하고 내(아내) 옷만 싸더래. 그래서 양복 같은 걸 싸야지 왜 그런걸 싸냐고 했더니 "나는 또 해 입으면 되지만 우리 안 사람은 옷을 못해 입으니까요" 하더래. 그 땐 시집살이 하던 때니까. 그렇게 싸 놓더니 "할머니 기왕 왔으니까 학교 좀 다녀 올께요." 하고 아침 먹고 가서 영 안 오더니 점심이 지난 담에 오더래.
(할머니가) 대문간방에 사니까, "할머니"하고 들어오더래. 그러고 뒤를 보니까 인민군이 두 명 왔더래. 할머니 키보다 더 큰 총을 메고 서서는. 아마 자기 방에 가서 뭐 조금 써 놓고 가려고 온 모양이야. 그랬는데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 소리 지르더래. 그러니 할머니 보고 "제가 안 내려가면 우리 애 엄마가 올 거니까 오거든 밥이라도 해 먹여서 바로 내려가라고 해 주세요. 여긴 있을 때가 못돼요. 저는 갑니다." 하더래요. 어딜 가냐고 했더니 밖에 사람이 있다고 해서 할머니가 방에서 나가보니 인민군이 빨리 나오라고 그래요. 그리고는 "이 다음에 살아서 오면 할머니 은혜 꼭 갚을께요" 그러더래요. 여태 할머니 손도 안 잡아봤는데 그 땐 할머니를 껴 안고 흐느껴 울더래요. 그 때 인민군이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대문을 열어 젖히니까 인사만 하고 나갔대요. 나가니까 한 사람은 앞에 서고 한 사람은 뒤에 서서 가운데다 (남편을) 세우고는 세 사람이 가는데 신설동에서 돈암동 가는 길이 있는데 그리로 해서 청량리 쪽으로 가드래. 그리고서는 인편이고 풍문이고 아무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어..

A:(남편 납치 후)시골을 내려갔더니 그 사람의 내막을 모르니 행방 불명으로 처리가 되고 공산패로 나갔다고 하대. 우리는 사실 시골에서 유지인데 공산패가 되겠어? 그러다가 우리 시동생이 하나 있는데 의정부 고등학교 다니다가 시골 와 있을 때였거든. 그 사람을 의용군으로 잡아가더라고. 빨갱이 시대 때. 동네에서 청년 8명이 잡혀 갔는데 두 사람만 살아오고 우리 시동생은 못 돌아왔어. 그러고는 그 사람도 끝이여. 이 규선.

납치이유

<당시 동국대 사학과 4년에 재학 중이었고, 호국대 단장으로 활동함. 집안은 안성 지역 유지였음>

A: 호국대 단장이었어. 학생들 지휘하고 그런 거라 그러대. 시가행진한다고 해서 나가보니 앞에서 지휘봉 들고 지휘하고 그러더라구

납치 후 소식

<소식 없음>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자의 아내가 5년 정도 시댁(안성)에서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상경, 재봉일을 하며 자리를 잡고 딸 둘을 양육함>

A : 첨엔 시골서 농사짓고 살다가 나는 기운이 없어 농사를 못 짓겠더라고. 그래서는 애들 공부도 못 시킬 것 같더라고. 시동생 시누가 많은데 우리 애들 애비도 없는 걸 공부시켜 달랠 수 있겠어? 그래서 내가 결단을 했지. 농사를 지어봐야 소득이 없겠다 싶어서 무작정 서울을 왔어.(남편 납북 5년 후) 서울 당숙 집에 찾아가서 며칠 있다가 남대문, 동대문, 아현 시장이며 여기 저기 시장을 돌아보다가 돈암동 시장엘 가 봤어. 그런데 장사를 할래도 밑천도 없고, 난 배운 게 바느질 밖에 없어. 그래서 바느질 하는 사람들 모인 데에 가서 "여기서 시다 좀 해 보면 안 될까요?" 하니까 나 옷 해 입은 걸 보다가 "(입고 있는)그 적삼은 누가 했어?" 물어. 그러니 "제가 했어요" 했더니 그날부터 일을 하라고 해서 시다를 했어. 그 집에서 자고 아침 저녁으로 국수 사먹으면서 시다를 하다가 바느질을 하게 됐어. 그렇게 남의 집 3년을 살다가 틀 하나를 샀어. 그래서 재봉틀 놓고 바느질 하면서 돈 벌어서 우리 애들 (서울로)데리고 왔지. 그때부터는 애들 학교 보내고 했지.

연좌제 피해

<서울 수복 후 피랍자의 동생(이규선)도 의용군으로 잡혀가고 남편이 행방불명 되는 바람에 좌익으로 오해를 받았으나 주민들이 증명해 주어 큰 피해나 문제는 없었음>

A: 별로 피해는 없는데 그 당시에 형하고 아우하고 다 없어지니까 9.28 수복하고 나니까 우리를 빨갱이로 지목하더라고. 우리 시아버님은 당시 이장을 했고, 빨갱이 아니고 결백한 민주주의거든. 그랬는데도 아들 형제가 하나는 인민군가고 하나는 행방 불명이니까 오해를 받았어. 그러나 근처 주민들이 ‘그건 오해다’ 고 증명을 해 줘서 피해 같은 건 없었어.

호적 정리

<양아들 유산 문제로 사망으로 정리함>

A: 우리가 장남이라서 내가 딸만 둘이 있으니까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를 시켰어. 그래서 그 애를 내가 고등학교까지 가르치고 군인 다녀와서 취직하고 결혼 시키고 있는데 시골에 땅이 있었어. 할머니 할아버지 다 돌아가셨으니까. 그걸 내 앞으로 해야 되는데 내가 귀찮다고 그걸 그 아들에게 주려고 하니까 그게 안되더라고. 남편을 6개월 동안 신문에다 실종 신고를 내고 소식이 없으면 사망으로 처리가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하고 나서야 시골의 땅을 그 아들 앞으로 해 줬어. 그 때 된 거야. 그런 이유가 없으면 지금까지도 (사망 신고 안 하고) 그냥 있을텐데….
.
정부의 노력

<전혀 없었음>

Q: 찾으려는 노력은?
A: 그 때는 그런 제도도 없었고, 대한 적십자사를 한 번 찾아가봤더니 아직 뭐가 없다고 해서 그만 뒀어. 그러다 매스컴을 타니까 그 때는 대한 적십자사와 통일부에 (신고를) 다 했어. 그랬는데 회신이 없어. 그런데 통일부에서 편지가 오더라고. 이러저러해서 신고해서 언제까지는 (북한 주민 접촉 승인이)유효하다는 답장이 오더라고. 근데 요즘은 내가 아파서
잘 하지도 못하고 해 봤자 소용도 없고. 또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으로 전화를 해 보면 그렇게 냉정해. 자기네들끼리 권력 있는 사람들이나 (상봉을) 하는 것 같아. 우리 같은 사람은 쳐다도 안 봐

Q: 통일부에도 여러 차례 찾아 가셨다면서요?
A: 종합 청사에 가고 했지. 그 때만 해도 다리가 안 아팠어. 신고를 해서 찾을 수 있으면 찾으려고. 나만 단독적으로 찾아달라는 게 아니라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 하는데 껴 붙여서 만나게 해 달라는 의지 하에 종합청사를 몇 번을 찾아갔어. 가서 실갱이도 했지. 통일부 장관 있는데 못 들어가게 해. 나 좀 들어가서 통일부 장관 만나서 얘기 좀 해야겠다고 하니까 못 들어가게 해. 지키는 사람이 있으니까 실갱이 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그랬어.

Q: 정부의 지원 같은 것은?
A: 없지. 10원어치도 없지.

정부에게 바라는 점

<피랍자 생사 확인 및 생존 시 상봉>

A: 정부에서 이산 가족 상봉 한다 어쩐다 말만 떠 벌이지 깊이 들어 있는 걸 수색하고 탐정을 해서 찾아내서 상봉 시켜줄 생각을 안하고 그저 권력 있고 빽 있고 그런 사람들만 추려서 상봉 시켜주는 것 같아. 내 맘에는. 물론 그렇게야 안 하겠지 나라에서 하는 거 공평하게 하겠지 그렇게 모순되게는 안 하겠지만 나 혼자 짧게 생각하기는 그런 거 같아. 그러니 광범위하게 좀 더 확대를 해서 없는 사람 있는 사람 다 (상봉을) 해주면 좋겠어. 그러면 혹시 그 사람도 해당이 돼서 올 수도 잇고 소식이라도 듣지 않을까 싶은 바램이지. 누구한테 도움을 바랬으면 좋겠다 이런 건 없어. 그냥 사는 데로 살다 가면 되는 거지 뭘 도움을 받겠어?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지금은 이제 괜찮아. 마음도 정신도 다 묻었으니까. 전에는 매일같이 만나길 원하고 만나봤으면 했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 땅속에 묻은 거나 같아. 죽은 걸로 일단락했으니 보고 싶지도 그립지도…. 여보 어쩌고 하고 싶지도 않아. 옛날엔 보고 싶어서 달이 환해도 잠을 못 자고, 여름에 모시 하나 입고 나갔으니 얼어 죽진 않았나 걱정하고 구두 소리만 나도 대문간에 뛰어나가보고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 아주 늙고 병들고 하니까 정신도 병이 들었나 봐. 뭘 몰라. 지금은 남편 생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고, 본의는 아니지만 나를 버리고 간 사람이니 지금 와서 세월이 오십 몇 년이나 흘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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