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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정인보 (증언자-정양모)
이름: 관리자
2013-09-16 10:53:52  |  조회: 2869


051215A 정인보 / 2005. 12. 15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정인보), 사진2(증언자:정양모)

피랍자
성명: 정인보 (鄭寅普)
생년월일: 1893년 5월 6일 (서울 출생)
당시 주소: 서울 남산동
피랍일: 1950년 7월 30일경
피랍장소: 서울 남산동 자택
직업: 국학자. 역사학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4남 3녀
외모 및 성격 : 안온한 성품

증언자
성명: 정양모(1934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발발 3일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고 계속 서울에 거주하던 중 6월 28일경 포항을 경유해 올라 온 세 명의 인민군이 자택을 방문, 감시를 시작함(전쟁 이전 주요 인사들의 감시 계획이 철저했을 것으로 추정됨), 전쟁 전 인천 형무소에 간첩으로 수감 중이던 사위(홍명희씨의 아들)가 찾아와 북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돌아감, 다음날 일개 소대가 찾아와 집을 몰수하고 피랍자는 등창이 심해진터라 지인의 도움으로 인근 지역에 거주하면서 자녀들을 1차로 피신시킴, 7월 30일경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끌려 감 당시 문교부에 다녔던 장남은 일단 석방되고 피랍자는 국립도서관 건물 지하에 수감된 이후는 소식 두절. 최근 지인을 통해 평양에 묘비가 있음이 알려짐. 피랍자는 국학자 및 역사학자로 또한 그의 다양한 업적이 인정되어 1992년 건국 훈장이 수여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에 대한 모든 경위를 밝혀 국민에게 사죄하고, 그 후손들을 위로할 것




“이 대통령이 사기치고 거짓말 했다는 말이야. 상황이 이러니 일단 피신해라 힘을 모으자는게 아니고 아주 간곡하게 ‘안심하라고 곧 탈환한다고’. 그리고는 이 대통령하고 가까운 사람만 추려서 도망 간 거야. 그러니 강직한 인사, 우리 아버지처럼 비판하는 인사는 다 버리고 갔지. 국가를 보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하는 건데 그 많은 애국자, 역사학자, 과학자를 다 버리고 갔으니 나라 꼴이 바로 되나? 국가의 인재를 30만이나 끌려가게 한 것이니 이대통령의 죄가 망극한거지”

“납북 인사 가족을 돌보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 뭘 해준다는 건 상상도 못해. 또 납북 인사는 서훈을 한 일이 없어. 왜냐면 그 사람들 믿어야 되는데 그 사람들이 가서 부역했는지도 모르고, 여기 서훈했다가 만일 그 사람들이 김일성 대학 교수했다 이런 소리 나올까 봐 겁나서 서훈도 안 했어.”

직업 및 활동

<피랍자 정인보는 한학자이며 교육자, 민족사학자로 국혼 환기운동을 전개함. 시대일보와 동아 일보 논설위원, 만주 상해에서 독립운동, 연희 전문 이화여전 교수, 전 국학대학 학장, 대한민국 건국 준비사업 참여, 초대 감찰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조선의 얼’의 중요성을 강조했음>
A: 그 어른은 국학자라고 해요. 한국에 관한 학문, 역사, 한문학자, 역사학자라고 하고, 또 한글 연구도 그 어른으로부터 비롯됐다고들 하죠. 아무래도 학자니까 성격은 안온하고 그 대신 자기가 옳다고 하신 부분에서는 아주 주산 같다 그래요. 예를 들어 사람 사는 도리를 안 하는 사람에겐 아주 엄격하고, 사람 사는 도리를 하는 사람에겐 아주 부드럽고 그러셨죠. 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니까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왜 일제에게 침략을 당했는가? '를 고민한 분이죠. 그래서 나라가 망한 원인을 상고사부터 쭉 따져서 우리의 근본은 뭐고, 우리의 정통성은 뭐고,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흘렀는가를 책을 쓰셨는데 동아일보에 왜정시대에 연재를 했어요. 결국 끝까지는 못하시고 고대사에서 끝이 났는데 거기에 그 양반이 주장한 것은 '내 정신을 지키면 우리가 남한테 침략 당할 리 없다. 우리가 우리 정신을 빼앗겨서 그렇게 됐다. 그러니 상고사 때부터 우리의 정신을 끝까지 찾아서 지켜야겠다' 하신 거지. 그 양반이 그걸 우리의 '얼'이라 했어. 일제 시대에 그걸 쓸 땐 잡혀갈 각오를 하고 글을 썼죠. 그렇게 해서 일제에서 다시 독립해야 한다는 계몽, 교육에 전렴하셨죠.
또 젊었을 때는 만주 상해에서 동지들과 조직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다시 오셨어요. 그러고 나서는 연희 전문학교 교수를 하셨어요. 그 양반은 보통 열 살, 스무 살 연배가 친구야. 워낙 학문이 높아서. 연전 교수를 20대에 하시다가 일제가 학교에 침투하니까 그 날로 연전을 그만두셨어요. 일제하고는 일체 타협도 안하고 전혀 상종도 안 한다는 게 그 양반 주장이니까. 그렇게 연전에 사표를 내고 집에서만 은둔 생활을 하셨어요. 어렸을 때 보면 늘 약병, 약봉지를 가지고 다니셨어요. 그리고 늘 자리보전하고 계셨어요. 그리고 밖에서 누가 오면 얼른 돌아 누우시고 약병을 올려놓고 했어요. 왜냐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형사고 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까 방안에 못 들어오게 '편찮으셔서 나갈 수 없다'고 했지. 많은 사람들이 살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친일인 척을 했거든. 물론 마음을 내 주진 않았지만. 그데 이 분은 척도 하기 싫다라는 거였거든. 결국 해방 때까진 그렇게 생활이 곤궁하고 어렵게 산 거지.
그 와중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2차 대전이 일어났는데 일제의 감시 때문에 창동으로 이사를 갔어. 송진우 선생, 김병로선생, 벽초 홍명희 선생도 거기 살았어. 창동에서도 비참하게 살았어. 수입이 없으니 끼니도 없었고, 그러다 방제원 선생이 밤에 몰래 와서 "전쟁이 심해지니까 왜놈들이 요인을 암살하려고 하는데 선생님 이름이 첫 번째로 있다"고 해서 전라도 익산으로 몰래 피신을 했어. 윤석원 선생이 그 양반 제자인데 산골에 우리 살집을 지어줘서 해방될 때까지는 거기 살았지. 그러다가 다시 서울 올라가서 흑석동에 적산가옥을 빌려 살았어. 광복 직후 아버님은 미리 서울에 오셔서 민중 위원회라고 여기서 남아서 절개를 지키신 분들을 모셔서 정부 수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해 정부와 논의하는 단체인데 거기서 민주 위원을 하셨어요.
그 다음에는 국학을 연구하시는 분이니 지금 독립문 근처에 있는 전문대학을 국학 대학으로 승격 시켜고 학장이 되셨어요. 그 때 뜻있는 청년들이 거길 많이 갔어요. 그렇게 국학 대학을 궤도에 올려놓고 그만 두셨어요.
그리고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 그 때 이승만 정권이 자랑하려고 했겠지. 이 어른이 천하에 강직하고 재물에 욕심이 없는 분이시니까 ‘이런 분을 감찰원장 지금 말하면 감사원장을 시키면 비리는 처음부터 없겠어’하고, 그 어른을 불렀는데 이것을 과연 해야 하는가 고민도 많이 하셨죠. 원래 옛말에 선비는 격동기에 세상에 안 나간다는 말이 있듯이 왜냐면 자칫하면 자기도 격동에 휩쓸려 진흙탕에 빠질 수 있으니까 가족들도 말리고 했는데 그 어른이 나라가 생겼는데, 내 나라 내정부가 나를 부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며 감찰원장을 하셨어요. 아무래도 초창기에 나라 살림을 하려면 비리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 분은 요만한 비리도 용인을 안 하셨던 분이거든. 그래서 그 때 검사관들한테 "(감찰을 나가서)차 마시는 건 물로 담뱃불도 빌리지 마라" 했던 분이야. 그렇게 조봉암 농림부 장관 탄핵하고, 이명신 장관도 탄핵하고. 그러니 정부 수립하자마자 장관들을 막 탄핵하니 대통령이나 정권 실세들이 곱게 볼 리가 없지. 그렇게 느끼시고는 사표를 내셨어요. 그만두시면서도 아버지는 재직시절에도 신문에 기고를 많이 했지만 "관리가 부패하지 않도록 생활을 안정시켜줘야 한다" 이런걸 주장하셨어요.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우리가 창동 살 때 벽초하고도 자주 만나고, 송진우 선생하고도 밤에 자주 만나셨어. 그러다 벽초 아들과 누이와 사돈을 맺었어. 그 때 창동서 아들을 낳고 둘째를 낳는데 해방이 된 거에요. 그 이후 벽초는 서울 사직동에 살았는데 그 양반은 사회주의 운동을 했어. 왜놈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하나였지만 한 분은 민족주의자이고 한 분은 사회주의자이니 소원하게 된 거지. 그러다 남북 협상을 하니까 많은 사람이 함께 북한에 갔었어. 그리고 다 돌아왔어. 그 때 김구 선생은 공산주의를 반대했고, 벽초 선생은 좀 사상이 다르니 거기(북한에) 남았지. 그 때 둘째 아들인 우리 매부가 내려와서 그 가족이 그 쪽으로 다 넘어갔어요.
그런데 사변 나기 전에 그게 참 비극인데, 우리 둘째 매부가 간첩으로 넘어와서 붙잡혔어. 그래서 재판을 받고 인천 형무소에 수감이 된 거야. 그러니 얼마나 비극이야. 장인은 민족 진영의 위대한 학자고 그 쪽은 공산주의가 되어 여기 남파 간첩이 되어 붙잡혀서 인천 형무소에 잡혔으니. 그러니 아버님은 가실 수가 없지. 철저한 분이니까. 그래서 어머니하고 누이가 옷을 싸서 가는 걸 봤어요.
당시 시대 상황

<6. 25전쟁 3일이 지나기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의 거짓 방송을 믿고 서울에 계속 거주>
A: 그리고 6.25가 났어요. 우리는 이 대통령의 방송을 철썩 같이 믿었어. 한강 다리 끊기는데 나중에 보니 진해에서 방송했다고 했어 국민 여러분 절대 안심하라고. 우리의 용맹한 국군이 곧 탈환해 진격해서 서울은 아무 문제 없다고. 그래서 난 이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며 국민을 속인 거 거든. 그렇다면 국민에게 정확하게 알렸어야지. 우리 국군이 아무 힘이 없다. 대포도 탱크 한대도 없다. 저쪽은 탱크가 수백 대고 대포도 많으니 상대가 안되지.그리고 그 때 내무 장관이 이제 안정됐다고 경찰에게 총을 다 뺐고 곤봉을 줬었거든 민중의 지팡이라고. 그리고 그 분들 휴가 보냈을 때 쳐들어왔거든. 무인지경이지. 상대가 안 되는 거야. 저기서 탱크가 오면 국군이 용감했지. 트럭에다 폭탄 다이너마이트 설치해서 타고 부딪혀. 그럼 그 놈이 멈칫 하다가 사람은 죽고 그런 거지. 그런 상황이거든. 그런데 이 대통령이 사기치고 거짓말 했다는 말이야. 상황이 이러니 일단 피신해라 힘을 모으자는게 아니고 아주 간곡하게 ‘안심하라고 곧 탈환한다고’. 그리고는 이 대통령하고 가까운 사람만 추려서 도망 간 거야. 그러니 강직한 인사, 우리 아버지처럼 비판하는 인사는 다 버리고 갔지. 국가를 보위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하는 건데 그 많은 애국자, 역사학자, 과학자를 다 버리고 갔으니 나라 꼴이 바로 되나? 지지부진할 뿐이지 국가의 인재를 30만이나 끌려가게 한 것이니 이대통령의 죄가 망극한거지.
납북 경위

<6월 28일경 포항을 경유해 올라 온 세 명의 인민군이 자택을 방문, 감시를 시작함(전쟁 이전 주요 인사들의 감시 계획이 철저했을 것으로 추정됨)- 전쟁 전 인천 형무소에 간첩으로 수감 중이던 사위(홍명희선생의 아들)가 찾아와 북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돌아감- 다음날 일개 소대가 찾아와 집을 몰수-등창이 심해진터라 지인의 도움으로 인근 지역에 거주- 자녀들을 1차로 피신시킴- 7월 30일경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끌고 감 &#8211; 당시 문교부에 다녔던 장남은 일단 석방- 국립도서관 건물 지하에 수감시킨 이후는 소식 두절>
A: 회동에 적산가옥을 얻어 살고 있던 때 6.25를 맞았는데 보니까 비행기가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우린 국군 비행기인 줄 알았더니 인민군 비행기야. 우리는 잠자리 비행기라고 있는데 그것 밖에 없고 그 쪽은 아주 우수한 전투력을 갖췄으니 어린애하고 어른싸움이고 싸움이 안돼. 그러니 물밀듯이 들어왔지. 근데 보니까 어떤 사람이 그 어른이 걱정돼서 왔어요.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인민군들이 막 쳐들어 옵니다" 그게 벌써 28일인데 국군이 (도망하려고 민간)옷을 달라고 그러고 야 이거 큰일났구나. 그때서야 (상황을)안 거야. 대포 소리 나면 국군이 진격하는 줄 알고 국군을 믿었던 거지.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앞에 가봤더니 붉은 기 들고 인민군들이 왔다 갔다 하더라고. 그런데 그날 오후 3시에 수상한 놈 3명이 왔어. 여자와 남자 둘이. 자기들은 북에서 정치 보위부 특수 공작대인데 선생 댁이 넓어서 좀 써야겠다고. 걔네들은 요인이 어디 살고 누가 감시하기로 다 짜고 내려 온 거야. 그러니 잡혀갈 사람은 다 체크하고 내려 온 거야. 마구잡이로 온 게 아니고. 그리고 그놈 들이 그러더라고. 우리는 군대 따라 온 게 아니라 포항으로 해서 왔대. 지금처럼 간첩세상이나 똑같해. 그 때부터 우리를 감시하는 거야. 그러고 나서 그 어른이 궁금하시니까 밖에 나가보려고 하면 벌써 선생님 큰일난다고 하시니 어디 나갈 수도 없어. 그런데 마침 등창이 났어. 그래서 촌보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거야. 걔들은 계속 우리를 감시하고 그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우리 매부가 왔어. 인천 형무소를 깨고 탈출 한 거야. 왔는데 보니 사람 눈에 살기가 돌더라고. 아버님한테 절을 하고는 고급세단을 타고 갔어. 하는 얘기가 "장인은 우리 인민 정부에 협력하셔야 합니다" 라며 한 참 얘기를 하시더라구. 아버님이 "너는 유물론자고 나는 유심론자인데 수화부동인데 어찌 그리하겠느냐"하니 "장인이 절개를 지키는 건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민 정부에 협력 안 하시면 반동입니다" 그러더라고. 예전에는 아버지에게 정말 잘 하던 사위였는데 저쪽에 가더니 딴 사람이 돼서 온 거야. 그리고 그 다음날 인민군이 따발총을 들고 일개 소대가 집에 왔어. 그러고 그 놈들이 와서 하는 얘기가 너희는 반동이니까 나가라고 해. 그 땐 재산이 집밖에 없지. 나갈 때가 없잖아. 근데 아버지 친구 박계양씨라고 낙원동에서 이비인후과를 하셨는데, 그 분이 노인이 돼서 병원을 그만두고 이사를 가서 병원 하던 텅 빈 집에 가서 있었던 거지. 그 때 아버지는 병환이 심해져서 어머니가 주야로 간호하고 고약 사다 바르고 아는 의사가 와서 치료하고 했지. 그런데 7월 10일인가 쯤에 아버지가 우리 형제를 부르시더니 나는 지금 촌보도 움직일 수 없으니, 나는 어쩔 수 없다. 너희들이라도 피신하라 하셨어. 그 땐 어려서 우리가 지각이 없었던 거지. 씨는 남겨야 되지 않겠냐며 시흥 큰집으로 가라고 하셔서 누이하고 떠난 거야. 큰형, 어머니와 막내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떠났어요. 그러고 우리는 소식을 모르지. 시흥 가서도 동네에서 알면 안되니까 뒷방에서 우리가 숨어살고. 이상한 기미만 보이면 낮에는 주로 사랑방 마루 밑을 파고 다섯 사람이 거기 살았어요. 다 짓무르고 허리도 이상해지고 그렇게 석 달을 살았지. 그런데 하루는 여기 곧 습격할지 모르니까 더 이상 숨겨주지 못한다 하셔서 밤에 우리가 나갔어요. 그 때가 수복될 때쯤인데 산속에서 이틀인가를 꼬박 굶다가 바로 서울로 왔어요. 서울은 시체 더미야. 서울 시내 빌딩마다 시체가 꽉 찼어. 그러다 남산동 집으로 왔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구요. 7월 30일쯤 어머니가 동생 데리고 예전에 살던 내수동에 맡겨 두었던 아버지 고의 적삼을 찾으러 가셨대. 아버지가 피고름이 너무 낭자하니까 옷을 바꿔드리려고. 근데 그 사이에 그 놈들이 잡아 간 거야. 마침 우리 큰 형님이 집에 들렀는데 아버지를 잡아간단 말이야. 그랬더니 "너도 같이 가자"고. 우리 큰 형님도 문교부에 편수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였거든. 그렇게 예전 국립 도서관 붉은 벽돌 삼층집 지하로 모두 데려갔어. 구자옥 선생도 거기 같이 계셨다 하더라고. 첨에는 그 놈들이 잠깐 내무서로까지 가시자고 했대. 그러더니 그리로 가서는 그만이야. 우리 큰 형님에겐 "너는 내일 다시 오라"고 하더래. 근데 아버지가 눈짓으로 오지 말라는 표시를 하셔서 형님은 도망갔고. 그게 어머니도 아버질 본 게 마지막이죠. 지하실에 요인들을 몇 백 명 갔다 넣은 거지
납치 후 소식

<납치 이후 소식은 없다가, 3년 전 지인으로부터 묘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 최근 평양으로 묘를 이전한 것까지 전해 들음>

Q: 이후 연락이나 소식은 없었는지?
A: 그게 공산주의 입니다. 홍명희 선생이 부수상까지 하고 큰 아들은 국회부의장까지 했고 그런 혁혁한 투사지. (아버지는) 그 사돈인데도 그런데 소식을 몰라. 부모 자식을 고발해서 죽이는 게 공산당이니. 전혀 알 도리가 없지. 우린 전혀 몰랐어. 돌아가신 것도 나중에 신문보고 62년이니까. 그 때는 안 믿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절에도 가시고 점 치러도 가시고. 평생 그러다 가신 거야. 다녀오시면 아버지 분명이 살아계신다면서 봄 가을이면 옷을 풀 해서 걸어놓으시고. 그리고 몇 년 동안을 진지를 솜 보자기에 싸서 아랫목에 넣어 두시고. 그러면 아버지가 맑고 명랑한 소리로 멀리서 "문 열어라" 하시며 오신다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렇게 믿고 계셨어요.

Q: 찾아보려는 노력은?
A: 우리야 수가 없어요. 백방으로 알아봐야 아는 수가 없어요. 나중에 장기영 선생이 한일의원연맹에 가서… 그 때 저쪽 사람도 온 모양이야… 듣고는 ‘돌아가셨다’ 해요. 그게 거의 20여 년 전인데 그 들은 날짜가 10월 이십 몇 일이라 그 날짜로 제사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걔들(북한)이 세워놓은 비문에는 10월 9일로 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사를 몇 일에 지내야 될지 고민하고 있어요.

Q: 묘비가 있다는 소식은 언제 들으셨어요?
A: 묘비가 있다는 것은 이미 예전에도 알았어. 3년 전 연세대 김도향 교수라고 역사학자 그 분이 연락이 와서 '위당 선생 묘가 북한에 있다'고 인터넷에서 보고 전해줬어요. 그게 3년 전인데 요즘 평양으로 다시 옮겨서 지금 새로 해 놓은 그래. 그러니까 묘가 있다는 것은 3년 전에 알았고, 예전에 핸더슨이란 서양 사람이 나한테 20여 년 전에 자기가 의당 선생 묘를 봤다고 하더라고. 그런 얘길 듣기만 했어요. 그러나 이걸 보고도 워낙 약하셔서 돌아가셨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 허무하지.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형편 가운데 생활함>

A: 우리 형제들 다 못나서 아버지도 피신 못 시켜드리고…. 우리 바로 위의 형도 6.25때 소대장을 했는데 나가자마자 죽었어. 소대장은 그 때 소모품이라고 했어. 그래 인제 아버지 그렇게 되시고 누이도 없고 형도 죽고 그렇게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어. 참 허무한 거죠. 허무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데 그 때는 울 데도 없어. 남의 집 얹혀 사는데 어떻게 울어.
그러니까 우리 가족들은 전부 학교 졸업이 늦었어. 왜정시대 놀고, 해방 이후 놀고…. 둘째 형님이랑 막내가 연세대를 다녔는데 6.25전부터 백박사가 전부 등록금이 댔어. 그 어른이 등록금을 못 대니까. 그래서 둘째 형님은 20년 만에 졸업했고, 우리 누이도 10년 만에
문리대를 졸업했고 다 늦었지 뭐. 우리는 가난하게 사는 게 이골이 나서 가난한 게 불편하지는 않아. 내가 박물관장 할 때도 누가 찾아와서 선생님 "겨울에 좀 뜨뜻하게 사셔야죠. 찾아온 저희가 불편합니다. 그러니 뇌물이 아니고 저희가 난로 하나만 놓게 해주세요" 하는데도 “우리는 내성이 붙어서 이렇게 사는 게 맘이 편하다” 해요

Q: 6.25 전쟁 때 피난은 가셨어요?
A: 1.4 후퇴 되기 전에 이불보따리랑 짐을 싸서 서울역으로 갔어요. 근데 어떤 차를 타야 할지도 모르고 "저 차다" 하면 쫓아가고 했어. 나는 우리 짐을 던져서 혼자 타고, 다른 사람은 나중에 내려오고 그렇게 열흘 동안 내려가서 부산에 피난살이를 했죠. 부산에 거제리라고 시조 산소가 있는 곳인데, 종약 서장을 하신 어른 자실로 가서 살다가 피난을 마쳤고. 거기 있다가 우리 형님은 군대 가서 죽고 둘째 형은 경찰 토벌대로 가 있었고, 또 우리 큰 형은 6.25 전에 문교부에 있다가 소신이 있어서 시골서 평생 평교사만 하셨고, 그리고 우리 누이는 사변 당시 문리대 2학년이었는데 그 실력으로 동래 여고 선생을 했어. 살기가 어려우니 모두 생활 전선에 나가서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사변을 났어. 그리고 내 얘기지만 누가 "야 영도에 피난천막 고등학교가 생겼다" 해서 거기를 갔어. 그래서 나는 등록금도 없고 안 간다고 했다가 (반신반의로) 가니까 사흘 후에 오래. 교복도 없었는데 그래도 가니까 주르룩 앉으라 하더니 "야 정양모 너는 얌전하니 2학년, 까부는 너는 1학년" 그렇게 그냥 선생님이 학년을 정해줘서 고2가 됐어. 그러니 우리 동창들을 보면 우리가 29회인데 28,27회가 수두룩 해. 그렇게 다니다가 졸업은 서울 와서 했지.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국민이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정부의 지원

<전혀 없다가 1992년 건국 훈장을 받고 자녀 학자금 지원받음>

A: 우리 정부가 생각은 했겠죠. 그치만 정부 자체가 돈도 없고, 그 분들이 그 때 이승만 정권이 잘못한 것은 자기네 가까운 사람만 데려갔잖아. (잡혀간)그 인재들을 어떻게든 다시 모셔와서 국가 발전에 공헌을 해야 했는데 이승만 정권이 데리고 있는 사람도 넘쳐. 자리가 한정돼 있으니까. 그러나 데려오려고 노력은 안하고 기껏해야 소재파악이나 하고. 그래도 그 때는 그거라도 했단 말이야. 납북 인사 가족을 돌보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 뭘 해준다는 건 상상도 못해. 또 납북 인사는 서훈을 한 일이 없어. 왜냐면 그 사람들 믿어야 되는데 그 사람들이 가서 부역했는지도 모르고, 여기 서훈했다가 만일 그 사람들이 김일성 대학 교수했다 이런 소리 나올까 봐 겁나서 서훈도 안 했어. 그런데 우리는 다행히 김영삼 대통령 말기에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 위패만 그 분 묘지 동작동에 모셔놨어. 애국지사 묘 위패. 납북 당한 분 중에서 자기네가 피해 안 볼 사람에 한해서 국가에서 서훈을 했지. 그 때가 우리 애들 학교 들어갈 때인데 다행히 서훈된 자녀로 대학갈 등록금을 대줘서 아이들은 보조가 됐어. 그 이전에는 (도움 같은 건) 일체 없지.

연좌제 피해

<없었음>

Q: 신고는?
A: 우리는 사느라 정신 없어서 몰랐고, 보니까 우리 누이가 신고를 했네. 또 이 어른은 천하가 다 아니까 우리가 신고 안 해도 자기네들이 다 적어놓고 했어.

Q: 연좌제 피해는?
A: 우리는 연좌제 같은 건 없었어. 그 어른이 강직하고 죽어도 그 놈들에게 협력 안 한 걸 아니까 우리들에게 그런 건 없었어. 그러니까 우리 형님도 일찍이 경찰에 들어갔고 나도 대학 나와서 공군사관학교 장교를 했어요. 그 때도 아무 문제 없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은 억울한 분들도 많겠지. 그런데 다행히 우리는 괜찮았어.

호적정리

<미정리>

A: 우리가 (사망 사실을)알고도 차마 사망신고를 못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거지. 지금도 우리는 6.25때 행방 불명, 납북으로만 했지 사망 신고는 못하고 있어

정부에게 바라는 말

<납북 경위를 밝혀 국민에게 사죄하고, 그 후손들을 위로할 것>
A: 나는 이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6.25때 납북되신 분들은 전부 이 사회에 공헌한 분들입니다. 일제시대 왜놈한테 절개를 지키고 항일 투쟁 한 분, 또 학문으로, 기술적으로 다들 군인이면 군인, 경찰이면 경찰 국가에 모두 공헌한 분들이야. 그러면 그 분들에 대해 소식만이라도 알려주려고 정부가 했어야지.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그 분들 후손들을 위로해야지 참 그렇게 하는 분을 정부에서 잘못해서 납치당하게 한 것을 사죄하고, "얼마나 어렵게 살았느냐? 미안하다"는 말은 하고 넘어가야지. 근데 그 말 한마디 없이 여러 가지로 괴롭히고 지금 통일의 방해꾼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그러니 지금 보면 오히려 이 사회를 망친 좌파는 모두 투사고 열사고 국가에서 훈장을 주고 그런 분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은 그건 정부가 아니지. 나라라는 건 국민을 지키고 위로하는 게 나라지. 그것을 하지 않은 건 나라 된 것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이 정부에 기대할 게 없어. 옛날 정부? 정부란 건 계속에서 그 다음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그게 우리 정부 아니야? 이승만 정부 아니니 나는 상관없어 그건 말도 안되지.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그렇게 훌륭한 분들을 잡혀가게 해서 정말 죄송하다. 그 후손들을 찾아서 위로하고 확실한 명단 만들어서 혹 살아계신 분들 있으면 일일이 찾아서 가정에 모실 수 있도록 정부에서 우선적으로 노력을 해야지 그것도 안 하면 인간도 아니야.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가족들의 그리움은?
A : 아버지는 하늘이었어. 아버지 납북되시고 그 때 우리 6남매가 다 학생이었는데 뭐. 어머니는 그랬지. 너희들 모두 아버지 뼈 골 뜯어먹고 살았다고. 어머니는 틈만 있으면 물 떠넣고 기도하시고 염주 평생을 진지를 아침, 저녁으로 싸서 아랫목에 두고, 옷을 늘 만들어 풀에 다듬어 새 옷을 장만해놓으시고 그 돌아오신다는 일념으로 사신거지…. 우리가 한 10년 전까지 하루도 아버지 꿈을 안 꾼 적이 없어. 꿈에 아버지가 오셨어. 근데 그 어른은 담담해. 그렇게 꿈에도 진짜 그 어른이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어.

Q: 나중에 묘비를 찾는다면?
A : 그저 아버지 보고 싶다는 말밖에 못하겠어요. 그저 우리로서는 우리가 철이 없어서 아버님을 들쳐 업고 허리가 부러지더라도 어떻게든 산속으로 도주해서 아버님을 안전하게 모셨어야 했는데 그걸 못한 게 한이죠. 그렇게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했으니 그 불효가 이를 데 없지. 그리고 우리가 아버님만 바라보며 살았지, 우리가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해 드릴 생각을 못했지. 그게 죄송해서 아버지께 죄송하단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그래도 아버님은 우릴 보시면 '국운이 그래서 그랬지, 너희가 무슨 잘못이냐' 하실 꺼야.

Q: 앞으로 계획은?
A : 물론 지금 우리가 충주에 가묘를 모셨는데 어머니 돌아가신 데 옆에서 가묘를 했는데 죄송스런 얘기죠. 만일 기회가 닿으면 이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유해를 모셔 합장하는 것.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눕고 싶은 그 소원을 들어드리는 일을 해야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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