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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유연 (증언자-김성호)
이름: 관리자
2013-09-16 10:46:37  |  조회: 3437


051024A 김유연 / 2005. 10. 24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유연), 사진2(증언자:김성호)

피랍자
성명: 김유연(金有淵)
생년월일: 1899년 12월 2일 (황해동 옹진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1의10
피랍일: 1950년 8월 23일
피랍장소: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11의10
직업: 목사, 서울 신학교 교수(前 동아 일보 기자 및 경서 지국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2녀
외모 및 성격 : 마른 편. 깔끔하고 깨끗한 선비형, 의지가 강함

증언자
성명: 김성호(1930년생)
관계: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당시 목사와 서울신학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피랍자는 교회와 학교를 두고 떠날 수 없어 피난을 포기, 자택에 거주 중 8월 23일 사복을 입은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찾아와 지프차에 태우고 감. 당일 종교계인사 5명 정도가 함께 연행됨. 이후 동아 일보 연재 발표된 ‘죽음의 세월’이란 기고를 통해 피랍자가 북한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 지하 교회 목사와 연락을 취하다 발각, 다시 연행된 이후 다시 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전해짐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인권적 차원에서의 납북자 문제 해결








“우리 교단에 있던 지도층 5명이 내무소 혹은 보위부에 끌려가서 함께 수용되다가 같이 끌려간 거로 알고 있어요. 마포내무소로 끌려 간 것은 신학교 캠퍼스에 있던 분들이고, 저희 아버지는 바로 정치 보위부 요원들이 바로 끌고 간 거 같아요 동생 말로는 정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사람이 와서 끌고 갔으니까.”

직업 및 활동
<목사, 서울 신학교 교수(前 동아 일보 기자 및 경서 지국장>

A: 황해도 옹진에서 사시다가 1927년 경 서울로 오셔서 동아 일보 초창기 신문 기자를 하시고, 경서 지국장을 하시다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셨어요. 그리고 일제 시대 때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가 8.15 해방 후 서울 신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셨죠.

당시 시대 상황

A: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 거에요. 6.25를 알지 못하는 분들은. 8.15해방 후 5년 동안 6 25 전쟁이 터지기 전 까지 한국 사회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저도 그 때 중학교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공부는 못하고 매일 좌익 우익으로 갈라져서 싸우고 사회는 더 말할 것도 없죠. 싸우는 빈도나 도수가 얼마나 격렬했나 하면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는 뒷골목에서 거의 곤봉 들고 매일같이 싸웠어요. 머리 터지게 그러다가 죽은 학생들도 있고. 그러니 얼마나 그 시대에 좌우로 갈라진 사회 혼란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죠. 그런 가운데서 우리 한국 사회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북한에 의해 기습을 당하고 나서는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거라 생각을 하구요. 그리고 납북자 가족들이 입은 피해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납북 경위

<당시 목사와 서울신학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피랍자는 교회와 학교를 두고 떠날 수 없어 피난을 포기, 자택에 거주 중 8월 23일 사복을 입은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찾아와 지프차에 태우고 감. 당일 종교계인사 5명 정도가 함께 연행됨>

Q: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저는 아버님이 납북 당하시기 전에 6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 됐을 때 일시 피신하고 있다가 다시 집으로 왔어요. 우리 아버님이 기독교계의 요인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신변에 위험이 있을 것 같아 ‘남쪽으로 피난 갑시다’ 해서 그 때 마포 전차 종점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갔어요 그리고 배를 빌려 도항하려 했는데 아버님이 전차에서 내리시고 나서는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나는 못 갈 것 같다. 너나 피신하고 안전하게 만났으면 좋겠다.’ ‘왜 안 가시겠습니까’ 하니까 그 때 아버님은 신학교 교수로 있었지만 또 신공도 교회에 담임목사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신자들이 아직 저렇게 남아있는데 나를 아직도 의지하고 있는 신자들이 있는데 내가 저들을 내버리고 갈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신학교를 지켜야 될 의무가 있다. 왜냐면 교수들이 남아있어야 빼앗기지 않는데 교수들이 다 피신하고 나면 신학교는 공산당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빼앗기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가 지켜야 되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꺼다’ 라면서 오던 전차를 다시 타고 집으로 가신 거야. 그게 마지막입니다. 저는 충청도 예산 구만리에 아는 분이 있어서 잠시 피신했다가 아버님이 납치당한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올라와보니 정치 보위부로 끌려갔다고 해서 거기로 갔다가 현관에서 내가 또 잡힐 번 했어요. 그래서 또 피신했다가 미아리로 갔다고 해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그 후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못 들었죠.

Q: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A: 우리 집에는 어머니하고 동생이 남아있었는데 때마침 어머니가 양식을 구하러 집을 비운 사이에 정치 보위부 요원이 집을 포위했어요. 여자동생이 나이가 좀 어렸지만 그래도 중학교 다닐 때니까 다 목격을 했죠. 어떻게 잡혀가는 것을. 검은 지프차를 가져와서 집 앞에 대기시켜놓고는 문 열라 하더니 막 들어와서는 김유연 목사 어디 있나고 나오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고, 그 때 아버님은 동료 교수가 미리 와서 아무래도 위험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 중에 (그들이) 닥쳐 온 거에요. 그래서 동료교수는 방에다 숨겨놓고 우리 아버님이 혼자 현관으로 나와서 그 때가 여름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신던 것을 신고 맨발로 잡혀가셨대요. 그리고 숨어 있던 동료교수는 우리 아버지가 잡혀가는 틈을 이용해서 살아남았죠.

Q: 누가 납치해갔는지?
A: 그 때 우리 교단에 있던 지도층 5명이 내무소 혹은 보위부에 끌려가서 함께 수용되다가 같이 끌려간 거로 알고 있어요. 마포내무소로 끌려 간 것은 신학교 캠퍼스에 있던 분들이고, 저희 아버지는 바로 정치 보위부 요원들이 바로 끌고 간 거 같아요 동생 말로는 정복을 입은 사람이 아니라 사복을 입은 사람이 와서 끌고 갔으니까.

납치이유

<당시 종교계 주요인사였음>

Q:왜 납치됐다고 보시는지?
A: 납치이유는 당시 법조계, 정치계 주요인사를 모두 납치하라는 김일성 비밀지령에 의해 종교계 인사들도 계획적으로 납치를 했는데 그 때 개신교 목사들이 70명 가까이 납치 당했는데 그 중 주요인사 가운데 우리 아버님도 들어있어요. 나중에 정철씨 같이 수용소에서 탈출한 분의 증언에 의하면 기독교계 납치인사들 남궁혁씨나 송창근 목사 이런 분들하고 같이 중견인사 모두 납치 행렬에 끼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계획적인 납치 지령에 의해 잡혀간 것이지 어쩌다가 체포된 것은 아니죠.

Q: 계획됐다는 근거가 있는지?
A: 계획됐다는 근거는 그건 김일성 전집에도 나와있듯이 '남조선에서 인텔리(지성 지도층)를 데려와라 모셔와라' 좋은 말로 모셔오라고 했지만 그건 납치해오란 것이나 똑같거든요
그것은 우리가 넉넉히 짐작하는 것이 당시 북한은 인적인 빈곤이 있었잖아요. 주요 지도층 사람들이 북한에서 많이 월남을 했기 때문에 북한은 인적인 공백이 있었다고 봐요. 그러다 보니 전쟁을 통해서 북한정부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을 계획적으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납치했는데 데려가 봐서 이용 가치가 없을 때는 아주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또 변방으로 함경도 탄광 수용소 이런 데로 강제 이주를 시킨 것도 나중에 증거자료가 다 나온 것으로 그렇게 정확한 것으로 알 수가 있죠

납치 후 소식

<동아 일보 연재 발표 ‘죽음의 세월’을 통해 북한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 지하 교회 목사와 연락을 취하다 발각, 다시 연행된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짐>
A: 죽음의 세월이라고 하는 동아 일보에 연재됐는데 내외 문제 연구소라고 그 당시 중앙 정보부 산하 북한 정보 연구 기관 내외 문제연구소가. 거기 발표에 의해서 알았죠. 그것이 조철씨란 사람이 상해 임시정부 요원으로도 있었던 사람이고 그리고 한국에서 함께 납치된 사람이었고, 또 이 사람이 북한에서 영향을 행사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중요 납치인사 수용소에 식량을 감독하는 책임자로 있었어. 그래서 함께 납치 길에서 목격한 것, 납치인사들의 수용소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목격한 것을 메모한 것을 가지고 탈출을 해서 한국에 와서 증언록에 의해 정리된 납북인사 북한 생활기를 제목을 ‘죽음의 세월들’이라고 해서 중앙정보부 산하 내외문제 연구소를 통해 발표했으니 이것을 거의 정확하다고 보지. 주요 납북 인사들에 대한 정보는 그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납북인사 정보 자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아버지는 북한의 지하교회 목사와 비밀연락을 하다가 그나마도 거기에서 조용히 계셨으면 목숨이 조금 더 연명 됐을런지 모르지만 지하 교회 목사들하고 연락하면서 북한의 지하 교회 신자들하고 연락을 취했나 봐 우리아버지가 신의주에서도 목회를 하셨거든. 그 때 알던 목사였던 것 같아요. 그 두 사람하고 비밀연락을 한 것이 발각이 돼 가지고 수용소에서 별도로 정치 보위부로 연행된 후로는 나오지 못했어요. 다시는 수용된 목사들 납북인사들 캠프로 나오지 못하고 소식이 없어졌어요. 그거는 뭐 북한에서 정치 보위부로 끌려갔다, 또 거기 죄목이 주모자로서의 죄명이 있더라구요. 이것은 지하조직하고 연락한 주모자로 죄명을 쓰고 끌려갔다. 그걸 보면 바로 며칠 안에 벌써 고문당해서 돌아가셨거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Q: 북한에 다른 연고가 있었는지?
A: 그 당시 북한에서는 기독교는 다 말살됐고 다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한국의 저명한 목사들이 와 있다 하니까 수용소에 떡도 팔고 하는 할머니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할머니를 통해서 연락망이 생긴 거에요. 그래서 할머니를 통해 북한의 이런 목사가 아버님께 소식을 전한다 하면 아버님은 쪽지를 통해 전해주고 이걸 몇 차례 하다가 발견이 된 거에요.
북한에 끌려갔어도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시고 북한 지하교회 신자나 목사들하고 만나려 하시다 가신 걸 보면 그래도 그 때 나이가 50세거든요. 납북 증언에 의하면 그 다음 해니까 아마 51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을 합니다.

Q: 동아 일보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어떤 찾으려는 노력들을 했었는지?
A: 찾으려는 노력은 많이 했죠. 1차적으로 찾으려고 한 것은 1950년 12월 24일날 입대를 했거든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특수 부대에 입대를 했어요. 북파 공작원들 전시 1기라고 할 수 있어요. 최초로 무장 첩보요원으로 최전방에 배치돼서 전투를 했는데 그 때에 저는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정보부대니까 북한에 먼저 들어가서 혹시 납북된 분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 가지고 젊은 혈기로 위험한 부대지만 자원하다시피 입대해서 51년 여름 한창 더울 때 최전방에 많은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아버지 소식도 들어보려 했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러다 조철씨의 증언 듣고 나서는 포기를 했지요. 아버님은 돌아가셨을 것이다 포기하고 그래도 가족이 얼마나 아플까? 그 아픔을 같이 해 보자는 뜻에서 동참을 하게 됐고. 이사장으로도 몇 년 동안 봉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

<피랍자의 아내가 4남매를 양육하느라 고생함. 이후 장남이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마친 추 생계를 도와 살아옴>

A: 남아 있었던 가족은 어머니와 동생 셋이 남았고 나는 전방에 나가있었고 소위 1.4 후퇴때는 어머니하고 동생이 어디로 피난 갔는지도 몰랐죠. 그래서 제가 부산에 후방근무를 하게 돼서 부산에 와 가지고 우연히 만났어요. 그 때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죠. 길거리에서
그냥 거지처럼 살았으니까요. 그러면서 지금 살아남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렇게 가족과 부산에서 만나서 몇 년 살다가 서울이 환도가 된 후에 올라와서 제가 또 신학교 마치고 군목 생활하면서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 공부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거죠.

Q: 생활 형편은 어땠는지?
A: 교수로 있었지만 과도기였고 연금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교단에서 지원도 없었고 국가적인 차원의 어떤 보상도 없었죠. 그건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다들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겠어요. 바닥인생을 살았죠. 어머니가 고생하시면서 하루의 끼니를 위해서 살았던 안쓰러운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길거리에서 뭘 파시기도하고. 그걸 일일이 말할 수도 없을 정도니까요. 저는 일반 대학을 다니다가 아버님이 근무하시던 신학교에 전학을 했어요.
신학생으로 있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봤습니다. 그러면서 가족들 겨우 식생활 유지하면서 환도 후에 신학교 마치고 다시 군목으로서 그 땐 장교니까 월급을 받으면서 생활의 안정이 조금씩 되어 간 거죠.

호적정리

<장남이름으로 호주 승계함>

A: 호적정리는 했습니다. 행방불명으로 해서 하고 제가 호주 승계를 받았죠. 꽤 오래됐어요. 제가 호주가 되지 않으면 우리 동생들도 그렇고 좀 어려운 게 있어서요. 제가 호주 승계는 일찍 했습니다.

연좌제 피해

<없었음>

A: 연좌제 이런 것은 제가 해당이 안된 것이 제가 대한민국 육군 군목으로서 모든 심사를 거쳤고, 우리 아버님 하신 일이 사실 대한민국에 공을 했지 해를 끼친 게 없는 것이 객관적으로 인정이 되기 때문에 연좌제는 없었습니다.

정부의 노력

<없었음>

정부에게 바라는 말

<인권적 차원에서의 납북자 문제 해결>
A:. 저도 여기 이사장을 할 때 정 장관 만나서도 강력히 항의하고 구체적으로 우리 일을 추진해달라고 주문도하고 또 적십자사 총재들을 만나 그러한 타협도 해봤고 또 미국에 가서는 뉴욕에 있는 북한 대표부까지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우리 문제 좀 정부가 못하는 것을 민간 NGO차원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그런 의논까지 해봤는데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죠. 그러나 노력할 때까지는 노력했다고 생각하고, 미국에 있는 NGO들 특별히 쏠티 여사 같은 경우는 우리 납북인사 가족 협의회를 자기네들 인권 단체 안에 우리를 가입시켜줬어요. 그래서 우리가 같은 협의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미국에서 납북자, 북한 인권 관계에 대해 도움이나 모색할 때에 아마 협력이 되지 않을까? 아직은 구체적으로 가시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저러한 주문을 할 수 없지만 이미일 회장님이 열심히 수고해서 많은 자료도 발굴해놨고 정부차원 진전도 어느 정도 된 것 같고 또 법률안 상정도 굉장히 구체적으로 진전이 됐는데 아직까지 정부측에서 확실한 의지가 없어서 그런지 북한의 변화가 아직도 덜 돼서 그런지 몰라도 눈에 보이는 성과는 아직 답답한 것 뿐이지만 계속 문을 두드리면 언젠가는 문이 열리리라 그렇게 믿고.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그것이 사실은 평화 공존, 민족 공조 이런 거 자꾸 말하는데 저는 참 평화 공존도 좋고 민족끼리 돕고 통일 이룩하자 다 좋은 말이죠. 그런데 그게 인권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그건 가공적인 전혀 이뤄지지 않는 헛구호가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정부 대 정부, 경제협력의 관계 모두 사람 대 사람의 관계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응어리지고 원한진 사람들이 이렇게 한국에 많은데 그것을 땅에 묻어버리고 경제 협력 잘 해봅시다. 남북 통일합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도 이뤄지지 않을 뿐더러 국제사회에서도 웃음거리가 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자면 인권 차원의 문제, 납북자 해결문제 이런 것이 남북관계에서 최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지금까지도 주장해오고 있고 이것이 해결되기 까지는 평화공존이고 평화통일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이러한 응어리가 풀어질 수 있도록 북한도 우리의 문제에 대해 성의 있게 협조하고 우리 정부도 경제적인 원조할 때에 이런 인권 문제, 납북자 해결 문제를 반드시 연계해 가지고 강력한 주문을 해야지 북한의 태도에 따라 눈치 봐가며 그냥 명분만 내세우고 잘 될 겁니다 북한이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변명만 하는 것은 전혀 우리를 기만하는 일밖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납북자 해결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모두가 다 관심을 가지고 풀어야 할 아주 중요한 인권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문제가 한반도에서 풀려질 때에 국제 사회도 평화가 깃들은 지구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인데 한국정부가 이러한 과제를 재인식하고 정말 성의 있는 노력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부끄럼 없이 맑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려고 이제까지 노력해왔는데 아버님 앞에도 부끄럽고 혹시 하나님 나라에서 아버님 뵐 때 어떻게 살고 왔느냐 물으시면 ‘아버님처럼 살려고 했는데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 말 밖엔 없습니다.’ 아버님 짧은 생애였지만 위대하게 사신 분이셨습니다. 아버님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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