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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봉우 (증언자-유정옥,이소우,이상일)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6:22  |  조회: 2509


050525A 이봉우 / 2005. 5. 25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이봉우), 사진2(증언자:유정옥 이소우 이상일)

피랍자
성명: 이봉우(李鳳雨)
생년월일: 1924년 6월 9일(서울 출생)
당시 주소: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 농촌 진흥청 관사 사택
피랍일: 1950년 8월 21일
피랍장소: 수원시 서둔동 진흥청
직업: 농사시험장(농촌진흥청) 곤충계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모, 여동생. 배우자, 자녀 1남
외모 및 성격 : 키가 크고 건강함. 온순한 성격

증언자
성명: 1. 유정옥(1930년생), 2. 이소우(1942년생), 3. 이상일(1949년생)
관계: 1. 배우자, 2. 여동생, 3.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직후 가족 모두 화성군 봉당으로 가족이 피신함. 피랍자는 연구 자료들을 살피러 종종 당시 직장이었던 농사 시험장에 들르곤 함. 납북 당일도 동생 이소우와 수원 농사 시험관 관사에서 들러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인이었던 김호식 교수와 황 과장이 찾아와 함께 내무서로 가자고 해서 함께 나간 뒤 연락이 두절됨. 일주일 뒤 김호식 교수는 돌아 왔으니 피랍자와 황교수는 소식을 알 수 없음. 인민군이 피랍자의 측근을 이용, 회유하여 포섭하려는 의도가 사전에 진행된 것이 아닌가 추정됨. 피랍자는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곤충계 연구에 초석을 다진 인물이었고, 천주교 신자였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 확인





“김호식 교수와 화학과 황 과장이란 양반 두 분이 와서 ‘이선생 갑시다’ 하고 같이 나갔던 거에요. ‘오빠 어디가?’ 하니까 ‘잠깐 나갔다 올께’ 그러더라고. 내무서 간다고 그랬어요. 죄가 있는 게 아니라 때릴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김호식 선생은 갔다가 일 주일 후에 나오셨어요. 그런데 우리 오빠와 황 과장님만 아직까지 못 오고.”

“이북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질문도 있었어요. 서대문 경찰서에서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그랬더니 거기 연락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냐. 몇 번을 다그쳤어요.”

“이북에 갔다는 자체로 무슨 사상에 동조해서 간 걸로 주위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안되지. 우리는 억울한데, 국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아주 선량한 국민인데 그런 걸 나라에서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렇게 뒤집어 씌우면 안되지.”

납북 경위

<전쟁 직후 화성군 봉당으로 가족이 피신을 했는데, 피랍자는 연구 자료들을 살피러 종종 당시 직장이었던 농사 시험장에 들르곤 함. 납북 당일도 동생 이소우와 수원 농사 시험관 관사에서 들러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인이었던 김호식 교수와 황 과장이 찾아와 함께 내무서로 가자고 해서 함께 나간 뒤 연락 두절됨. 인민군이 피랍자의 측근을 이용, 회유하여 포섭하려는 의도가 사전에 진행된 것이 아닌가 추정됨>

Q : 6.25발발 직후에 어머님과 아버님은 어디 계셨어요?
A (유정옥): (화성군) 봉당. 피난 간데 가 있었어요. 바로 피난 갔어. 아버지는 사무실로 왔다갔다하고. 주소는 수원시 서둔동 진흥청. 옛날엔 농사시험장. 그곳에서 8월 21일날 그렇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Q 납치 당시 주위 사람들 누가 봤나요?
A (유정옥): 나는 그날 떠나는 것은 못 봤고. 고모님(이소우)이 혼자 보셨어요.

Q : 어떻게 데려갔다는 얘기는 들었나요?
A (유정옥): 포박해서 데려갔다는 것은 6년 후에 들었어요. 경찰서에서는 아마도 그랬을 거에요.

A (이소우): (잡혀간) 그 날은 두 분이 오셔서 갑시다 하더라고. 그게 바로 내무서를 찾아간 거였어. 내무서로 세 분이 스스로. 아마 뒤로 상당히 자술서를 쓰면 된다며 오라고 구슬르는 게 있었겠지. 그러니까 다 고상한 분들이니까 자술서만 쓰면 나올 줄 알고. 그런데 두 분이 다 선배시고 스승이시고 한데 (상황을 보니까 그분들도) 우리가 젊은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게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다 싶은 거에요. 오빠가 스스로 간 것도 아니고. (피랍된 그 날 오빠와 저는) 점심시간에 밥을 마주 먹고 겸상으로 먹고 있었어요. 그 때 김호식 교수와 화학과 황 과장이란 양반 두 분이 와서 ‘이선생 갑시다’ 하고 같이 나갔던 거에요. ‘오빠 어디가?’ 하니까 ‘잠깐 나갔다 올께’ 그러더라고. 내무서 간다고 그랬어요. 죄가 있는 게 아니라 때릴 이유가 없다고.

Q : 혹시 김호식 선생과 황 과장이란 분이 좌익 계통 사람이었는지?
A (이소우): 그 두 분은 이북에서 내려오셨어요. 천주교 신자라는 것, 처갓집이 좀 잘 산다는 것 그것 밖에 아는 건 없고, 그 두 분이 평양에서 뭘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김호식 선생은 갔다가 일 주일 후에 나오셨어요. 그런데 우리 오빠와 황 과장님만 아직까지 못 오고.

Q : 목격자이신데 납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세요?
A (이소우): 당시 전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고. 우리가 6.25 나고 이북에서 쳐들어왔다 하면서 피난가야겠다 했을 때 우리가 살았던 곳이 수원시 서둔동 농사시험장 관사에서 살았어요. 그곳에서 조카랑 올케랑 어머니랑 살았는데 수원 근처 봉담면에 일시적으로 피난을 갔어요. 모든 보따리를 다 쌌다기 보다는 얼마만큼 가지고 갈 만큼만 가지고 갔어요. (그곳에서 여기 농사시험장까지)20리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거죠. 오빠가 당시 27살이어서 곤충계 계장으로서 (연구들의) 시작을 처음 하시는 거에요. 아마 일본시대 때 여러 가지 해놓은 잔여물인 채집 나비, 여러 가지 벌레가 있었어요. 넓은 농대 밭에 보면 오빠가 커다란 전봇대에 있는 불 밑에 곤충들이 모여들어와 툭 떨어지는 것을 일일이 채집해 놓았는데요. 그것 때문에 오빠가 피난 가서도 그것이 잘 간수가 되는지 가끔 사택으로 오는 거에요. 가끔 들리는 어느 날 오빠랑 나랑 나왔단 말이에요.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오빠 가는 길에는 어디든 쫓아 다녔어요. 와서 같이 점심 먹고 있던 도중에 두 분이 와서 어디를 가자고 그러더라구요. 내무서로, 그 때가 낮 한 두 시 쯤 됐는데 그렇게 나가시고 영 집에 못 들어오신 거에요. 소식은 없었던 거에요.

납치이유

<공무원 신분으로 곤충계 연구에 초석을 다질 만큼 전문인이었고, 천주교 신자였다. 또한 처가가 큰 유지였음>

납치 후 소식

<소식 없음>

Q : 아버님을 찾으러 다니셨나요?
A (유정옥): 친정 고모가 여기 저기 한 달을 찾으러 다녔는데 가면 내일오라 모레오라 하면서 일절 만나지 못하게 해줘요. 그러면서 친정 고모한테 얘기하기를 옷만 가지고 오라 해서 옷만 전해주고 옷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몰라요.

Q : 가족회에 제출했던 생사확인증명서에 의하면 이후 소식에 관해 적으셨던데?
A(이상일) : 그 부분은 돌아가신 백부님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그런 얘기가 있더라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확인인 얘기고 6.25전쟁 발발 몇 년 후에 아는 분을 노상에서 만나셨는데 마침 그분이 연천 쪽에서 아버님이 포승줄에 묶여 가면서 점심을 먹는 것을 봤다고 했는데 직접 보지는 못하고 확실치가 않아 그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얘기입니다.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가족들이 대구, 부산까지 피난 갔다가 돌아와 농사시험장에서 내어 준 작은 사택에서 납북자의 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배우자와 자녀는 처가의 도움으로 하숙을 치면서 생계를 유지함. 배우자의 경우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병이 되어 힘겨운 나날을 보냄>

A (이소우) : 우리가 첨엔 사택에서 살았잖아요. 사택에서 사는 이유는 직원이 있어야 되는 건데 오빠가 납치돼서 이제는 거기에서 살수가 없잖아요. 한국적 인정으로 금방 나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6.25부터 6.7.8.9월 1월까지는 살았어요. 1.4후퇴 때 피난 가기 전까지는 거기에서 살았어요. 다 가져갈 수 없어서 묻기도 하고, 다들 피난 간 거지. 당시 다들 피난 가던 스타일로 갔던 거죠. 당시 동네에서 우리는 반동분자 가족이라고 다 죽이려고 그래서 아주 일찌감치 피난 가서 그나마 부산까지 가고 대구까지 가고. 그랬더니 갔다 왔더니 집도 없어지고. 그래도 워낙 인정이 있어서 조그마한 사택을 주더라구요. 그래서 거기에서 살았어요. 그 전에는 큰 집, 좋은 집이었다면 아주 조그마한 방 한 칸 짜리 내어 준 사택에서 나하고 우리 어머니하고 살았어요. 그때 다 같이 살면 누가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하고 어머니만 관사에서 살고 올케는 애 들쳐 업고 친정 가서 살고 오빠는 결혼해서 따로 살고. 우리 어머니, 나, 올케, 그리고 얘 넷이 남은 거죠.

Q : 배우자의 상황 대처?
A (유정옥): 말도 못했죠. 소식도 전혀 듣지 못하고. 나중엔 먹고 살기 위해서 연세대 식당에서 후에 일했고. 그 당시엔 몰라요. 그러고 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몰랐죠.

Q (이소우): 큰 오빠는 피난을 가버렸고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쫓아 다니면서 알아봐 주지. 올케는 19살에 시집왔어요. 그래서 그때 스물 밖엔 안됐는데. 그때 여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뛸 수완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 요즘 여자들처럼 못한다고. 그렇게 못 했을 거라고. 애도 있겠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고. 할 수 있는 게 큰 오빠인데 피난 가서 집에 아무도 없는 거야. 뵐 수 없는 거야. 그런 형편에 친정에 식구들이 있으니까 내무서도 찾아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때 큰 오빠가 동생 찾으려고 다녔고. 내가 얘기하는 것은 어머니나 큰 오빠한테 얘기들은 걸 단편적으로 얘기하는 거지. 큰 오빠가 그 사실도 많이 알지.

A (이상일, 이소우): 그 때부터 언니는 친정살이를 그렇게 하신 거죠. 친정 집이 잘 사니까 조카들 데리고 살게 되신 거죠. 친정도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고. 그러니 애들 학교도 다녀야 되겠고 하니까 심적 육체적 고생도 많이 하신 거죠. 그 때 황선생 부인 측에서 알선해서 식당에서 잠깐 일도 하시고. 그때는 같은 운명체 사람이니까 같이 식당에 일도 하고 했지. 또 워낙 건강이 안 좋았어요. 그때 수술도 하고. 다행이 친정에서 도와주셔서 산 거죠.

Q : 남편이 많이 그리우셨을 것 같은데.
A (유정옥) : 그래서 병이 났죠. 남편이 억울하게 붙잡혀 갔는데 병이 돼서 자궁 수술을 한 거에요. 젊었을 때 하혈을 하는 거에요. 그게 스트레스거든. 젊어서 그냥 다 드러내고 수술했어요. 참고 살려니까 억울한 것도 있고 분한 것도 있고.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오죽하면 우리 친정 어머니가 옛날에 시집가라고. 수술 하는 게 몸도 약하고 요새는 알아주지도 않지만 정절 지키고 아들 하나 키우고 살았다고 우리 경주 이씨 집안에서 환갑 때 표창장 줬어요. 그런데 선산이 있는데 할아버지 산소도 있는데 얘 아버지는 시신이 없으니까 산소도 없잖아.

Q :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A (이상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말이 안되겠지만 매년 5월 6월이 되면 뭔가 생각이 자꾸. 직접적인 아버님 얼굴이 생각이 나는 건 아니지만 사진을 보게 되고 여자로 치면 우울증이라나 6월이 매년 착잡한 우울한 생각이 듭니다.

호적 정리

<아들 이상일이 입대 전 부재자 신고 특별법을 통해 호주 승계함 >

A (이상일) : 이 (납북) 문제는 제가 성년이 되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군대 문제가 대두되지 않겠어요? 다른 분도 그렇겠지만 납치나 납북되신 분들의 호적상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군대 입대하면서 나이가 들어서 그때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5,16 혁명 후 부재자신고특별법이 있어서 그때 사망으로 부재자신고를 하면서 제가 호주가 되면서 군대를 가게 되었어요.

정부의 노력

<피랍자의 근무처에서 작은 사택 하나를 주어 피랍자의 어머니와 동생이 살았음. 그 외 피랍자를 찾으려는 노력이나 지속적 도움은 없었음>

Q : 납치 후 정부에 신고를 하셨나요?
A (이소우): 그건 어려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가 못했으면 직원들이라도 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Q : 적십자 신고는?
A(이상일) : 그때 했어요. 백부님, 저희 큰 아버님이 하셨어요. 그 후에 제가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면서 어떤 연결통로가 없나 싶어서 직접 적십자 사에 갔습니다. 자료가 있나 싶어서 찾아보려 했더니 직원들이 잘 몰라요. 이런 이런 자료가 있는데 하면서 젊은 담당 직원하고 쭉 찾아보니까 57년 보니까 행불자 신고 한 명단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을 하고 남북이산가족에 상봉신청까지 했습니다. 사실은 저희가 이산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아픔이 있는 거죠.

Q : 신고처리는 잘 됐나요?
A (이상일) : 일단은 서류상에는 제출되었고 한번은 국내 이산가족의 신고를 하다 보니까 몇 년 전엔가 강남 경찰서에 연락이 왔어요. 아버님 이봉우란 분이 국내 전산망에는 전혀 없더라는 그 연락은 받은 기억이 납니다.

Q : 도움을 받았던 부분은 있으신가요?
A (이상일): 그런 건 전혀 없지요. 이런 사람들의 제일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고생되던 부분이 이런 거였죠.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연좌제로서 경제적인 활동이나 사회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는 그런 명예회복이 빨리 이루어져서 조금이나마 상처를 씻어주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연좌제 피해

<항상 정부의 감시 속에서 살았고, 자녀가 사범대학에 입학하려고 할 때 자격 조건에 걸려서 진학을 할 수 없었고 공직 계통은 포기할 수 밖에 없어 심적으로 안타까움을 겪음>

Q : 정부에서는 어땠나요?
A (유정옥): 이북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질문도 있었어요. 서대문 경찰서에서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그랬더니 거기 연락하고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냐. 몇 번을 다그쳐요. 어떻게 오냐고. 수복 이후에 서울 올라와서 그런 거에요. 50년대말 60년초.

A (이상일): 이게 연좌제죠. 형사들이 근황을 파악하는 거에요.

A (이소우): 그런데 이북에 갔다는 자체로 무슨 사상에 동조해서 간 걸로 주위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안되지. 우리는 억울한데, 국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아주 선량한 국민인데 그런 걸 나라에서 도와주지 못할망정 그렇게 뒤집어 씌우면 안되지. 그렇게 많이 왔었어? 몇 번 왔었어?

A (유정옥):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두 번이나.

A (이상일): 수원에서도. 이사 갈 때마다 확인하고. 거처 옮길 때마다 나오고.

A (유정옥): 아범 학교 다니는 것도 고생이 말도 못하고. 사범대학 가는 것도 아버지가 그러니까 못 가고.

Q : 자세한 얘기?
A(이상일) : 그러면서 제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하려니까 사관학교를 한번 생각했었지요. 가사가 어려우니까 그런데 알아보니까 신원조회 관련해서 그런 불이익을 당하게 된 거죠. 그래서 사관학교는 꿈도 꾸지 못하고. 일반 대학 학과를 가게 된 거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 시 사관학교 지원하려고 알아보니까 일단 자격요건에서 안 되는 거에요. 행불자로 신고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던 거죠. 전 그 이후에 사회에 나오면서 공직자 생활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사기업에서 들어가서 생활 했지만은 그 이후에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접했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사회 선배께 간접적으로 들은 건데 80년대 초죠. 바로 전두환 정권 때에 정보기관에 있던 사람이 저를 위로해 줄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70년대까지는 살아계셨음 대접을 받으셨을 거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기억이 납니다. 80년도에 출장가면서 동남아시아 가면서 그 문제 가지고 체크 된 기억은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반공 교육은 받고 나갔습니다. 70년대 나갈 때 나쁜 사람, 사상이 그러면 사돈의 팔촌까지 걸린다면서요. 그런 건 없었어요.

Q : 이후 본인에게 정부의 감시는?
A(이상일) : 그거는 모르겠어요. 주위에 당시 감시하는 요원이니 그건 말할 수 없는 거고 그거는 직접적인 것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정부에게 바라는 점

<피랍자 생사 확인>

A (이상일) : 왜 아버지를 그렇게 억울하게 잃어버렸는데 어떤 방법으로든 소식을 알고 싶지 않겠어요? 5.6년 전에 남북인사가족이 이루어질 때 당시 납치당한 현장 쪽의 경찰서에 백방 수소문을 했는데 현업에 근무하시는 분으로는 전혀 기억도 못하고 자료나 근거가 될만한 일이 없더라구요. 남부경찰서까지 가서 그 당시 상황을 얘길 하고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보려니까 그 당시에만 해도 거의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답답하기 짝이 없는 거에요. 그리고 대한적십자사에 가서 명단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오늘이나 내일이나 통일이 될까? 또는 통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국자간의 생사확인만이라도. 1세대인 연세만 봐도 기간이 너무 짧지 않습니까? 명예회복도 좋고 다 좋지만 생사여부만이라도 확인이 된다면 제사도 못 드리고 그 동안 자식 된 입장으로 불효죠. 아버님 소리 한번 못 부른 게 어머니를 제일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겁니다. 저야 고생은 안 했죠. 어려운 가운데 어머님이 학비 대주시고 생활을 져주셨기 때문에. 자라는 동안은 큰 고생은 안 했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니까 자녀 둘 데리고 어머님 모시고 집사람하고 식구는 다섯 식구입니다.

A (이소우): 저는 왜 납북시켰는지 왜 끌어갔는지가 궁금해. 그 당시에 경찰 그런 것도 아니고 전 왜 데려갔는지 그게 제일 궁금해. 세월이 이렇게 지났으니 처나 자식들은 생사생사 하는데 난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래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야 일 처리를 하잖아요. 얘 말처럼 제사를 지낼 수 있나 산소를 있기를 하나. 너무나 이런걸 나라에서 도와 줘야 돼. 미국에서는 군인들 뼈도 찾아온다는데 그런 소식이라도 해오든지 해야지. 이거는 너무 억울하잖아. 난 우리 올케가 이렇게 억울하게 경찰서에 간줄 몰랐어. 같이 살면 힘들어서 따로 살아서 자세히 몰랐는데 왜 이렇게 억울하게 우리는 사람 잃어버려서 억울한데. 국가에서 위로를 못해줄망정 우리를 왜 괴롭혔어? 우리가 스스로 이북을 찬양하면서 올라간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간 건데.

가족에게 전하는 말

Q : 하고 싶은 얘기?

A(유정옥) : 진짜 이 날이나 올까 저 날이나 올까 항상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눈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함)

A (이상일): 아버님이라고 불러보고 싶은 거 뿐입니다. 아버님(울음).

A (이소우): (울음)글쎄 오래 살아서 납치만 안됐더라면 정말 행복한 가정 꾸려서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했을 텐데, 사실 오빠가 날 보고 ‘공부만 잘하면 영국에 옥스포드에 보내줄께 공부 잘해라 잘 해라’ 오빠가 늘 그랬잖아. 그래서 내가 옥스포드가 어디 있나 싶어서 영국까지 가 보았어요. 제가 옥스포드는 못 갔지만 보스턴 대학에 가서 공부한 건 오빠가 어딜 가서나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준 덕분인 것 같아요. 우리 상일이도 어렵게 그렇게 어렵게 자라서 자기가 성실하게 남한테 해주지 않고 오빠가 남들 사랑하는 것만큼 상일이도 사랑해서 그런지 자기가 하는 일 다 잘되고 손녀딸은 미술 공부한다고 주미는 사법고시 한다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녀석 잘 되도록 어디시든 지켜주세요. 언니 건강하게 그래도 끝까지 아들 곁에 있고 살도록 오빠가 밀어줘야지. 엄마는 2년 전에 가셔서 오빠가 아마 천당에서 만나셨겠죠. 천당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도 사는 날까지 잘 살고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오빠가 도와주세요. 하고 싶은 얘기 말로 하니까 좋네요. 어디 계시더라도 가족들이 다 즐겁게 산다는 거 그거 하나로 위로삼고 우리 상일이 끝까지 잘 돌봐주시고 손녀들 돌봐주세요(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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