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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윤기섭 (증언자-윤경자)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7:33  |  조회: 3088


050531A 윤기섭 / 2005. 5. 31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윤기섭), 사진2(증언자:윤경자)

피랍자
성명: 윤기섭
생년월일: 1887년 음력 4월 4일 (경기도 파주 출생)
당시 주소: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
피랍일: 1950년 8월초 경
피랍장소: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 (자택)
직업: 독립 운동가로 2대 국회의원 (옥중 당선)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녀
외모 및 성격 : 보통 키에 카이젤 수염이 인상적

증언자
성명: 윤경자(1942년생)
관계: 장녀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피랍자 윤기섭은 30여 년이 훨씬 넘는 기간 만주로 떠나 독립 운동하다가 해방 직후 귀국, 국학 대학 학장을 역임, 1950년 제 2대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된 상태 였음.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 계속 거주 중 8월경 사복을 입은 사람이 지프차를 몰고 와 잠시 나눌 얘기가 있다며 피랍자를 만나기를 요청, 인근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피랍자는 가족에게 금방 돌아오겠다면 그 사람과 나간 후 연락이 두절됨. 최근 책 죽음의 세월들, 동아 일보 기사 등을 통해 피랍자의 이북에서의 활동 및 사망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음. 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 촉진 위원회에 소속, 나름의 활동을 하다가 1959년 반동으로 몰려 숙청 당했다고 전해짐. 이후 1989년 국가에서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받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생사 확인 및 유골 송환, 정부 차원의 6.25납북인사 가족회 활동 지원, 국립 묘지에 제대로 비석을 세워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음




“우리 집 맞은 편 가게 앞에 군용 지프차를 세워놓고 어느 위에 하얀 남방을 입은 사복하신 분이 신문지를 둘둘 말아 쥐고 오셔서 아버지를 찾으셨어요. 인근에 있던 아버지가 돌아오셔서는 그 사람을 따라 나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언제 오시냐' 하니까 '잠깐 다녀오겠다. 늦으면 내일 오리다' 하시면서 가신 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소식이 없으니 어머니가 찾아나셨는데 그 때 여러 분들이 납북되셨더라구요. 김규식 박사 춘원 이광수씨 등 상해 임시 정부 핵심 멤버들을 모두 잡아 갔더라구요”

“이북에 가셔서는 그 쪽 치하에서 재북 평화 촉진 위원회를 만드셔서 아마 자기네 통일을 이루려 했든지, 아니면 그 분들을 이용해서 자기네 체제를 옹호하려고 했든지 아마 나름의 계획이 있었겠죠. 여하튼 거기 기록을 보면 그렇게 활동을 하시다가 반동 분자로 몰려서 나중에 숙청됐다고 남아 있어요.”

직업 및 활동

<30여 년이 훨씬 넘는 기간 만주로 떠나 독립 운동하다가 해방 직후 귀국, 서대문구에 거주, 국학 대학 학장을 하셨고, 옥중에 있을 때 1950년 제 2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상태였음>

Q: 아버님이 어떻게 지내오셨는지?
A: 광복회에서 뽑은 자료에 보면 아버지가 1908년 만주로 떠나셨어요. 아무래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면 사람을 먼저 만들어야 된다면서 만주로 망명하셔서 독립군도 양성하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셨어요. 해방이 45년에 됐고, 50년에 6.25가 났으니 우리나라가 혼란기였어요. 그 때는 아버지가 상해임시 정부 요인으로 상당히 중책을 맡아 일을 하셨어요.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이 활동 내용을 제대로 인정을 안 했고, (아버지는)일단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셨어요. 46년에 같이 활동하셨던 임시 정부 요인과 귀국을 하셨는데, 오셔서는 국학대학 학장도 하셨고, 또 납북됐을 당시는 5월 31일 서대문을 구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되셨던 때에요. 국회의원 당선 등록이나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계시다가 6. 25나고 바로 납북되셨으니까요.
경기 장단(長湍)사람이다. 1908년 안창호(安昌浩)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의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1920년 상해에서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과, 임시정부군무구(臨時政府軍務部), 임시편집위원장(臨時編輯委員長),상해거류민단(上海居留民團) 본구역의 위원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원의 군무처장(軍務次長)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총사(中韓國民互助社總社)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하였으며, 우리말 사용의 장려를 위한 연설회와 강연회를 통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즉 "일본에 의한 우리말이 전멸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 중의 여가에는 반드시 우리말을 익히도록 하라"는 요지의 강연을 7월 5일부터 시작하여 8월말까지 실시하였다..
1921년 11월 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연서로 독립청원을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1923년 5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해에서 조직된 협성회(協成會)의 단장으로 단원 150명과 임시정부를 옹호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2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피선되어 독립운동의 추진책을 강구하였고, 1926년 12월에는 임시정부의 국무원(國務員)에 선임되어 1935년까지 군무장(軍務長)등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3월 한국의 독립을 위한 혁명을 완수한다는 목적하에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4년 2월 한국혁명당 대표로 민족단체의 합류를 추진하여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였고,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의 당보부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3년 3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8&#8226;15광복 뒤 귀국하여 1946년 좌익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부의장&#8226;상임위원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맡았다. 1948년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이 되었으나, 6&#8226;25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다. 그 뒤 안재홍(安在鴻)&#8226;엄항섭(嚴恒燮)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1959년 북한 정권은 그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한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도서: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449~450. / 네이버 백과사전>
납북 경위
<전쟁이 나고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 계속 거주 중 8월경 사복을 입은 사람이 지프차를 몰고 와 잠시 나눌 얘기가 있다며 피랍자 윤기섭씨를 만나기를 요청, 인근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피랍자는 가족에게 금방 돌아오겠다면 그 사람과 나간 후 연락이 두절됨>
Q: 피난은 안 가셨나요?
A: 저희 아버지 주장은 직접 말씀 하신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평소 말씀이나 전력으로 봐서 내가 죄 지은 것이 없는데 왜 도망을 가느냐가 아니었겠나 생각해요. 이 분들은 좌우익을 떠나 오로지 독립을 위해서만 투쟁하셨던 분이라 국가에서도 민족지도라고 지칭을 했으니까요

Q: 만주에서 귀국 후 생활은?
A: 아버지는 그 당시 외국에서 몇 십 년 만에 왔으니 아무 생활근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랬는데 그 때 당시 고위직에 있는 어느 공무원이 (도와줬어요). 아버지가 그 분에게 '나는 농사꾼이다. 나는 땅이나 좀 주면 농사 지어서 먹고 살겠다' 하니까 그 때 당시 신한 공사 땅이라고 일본 사람들이 뺐어 쓰다가 두고 간 땅이 있었는데 그 분이 거기 땅을 4천 평 마련해 주셨다나 봐요. 너무 훌륭한 분이 너무 고생하고 사시니까 안스러워 보여서 간간히 쌀도 보내 주시고, 그 땅은 1년에 얼마씩 상환해 가는 조건으로 해 주셨어요. 당시 국가에선 (독립 운동과 관련해) 아무런 보상도 예우도 대책도 없었어요.

Q: 납북 경위?
A: 그 때는 제가 어렸고, 여름이라 아마 방학 때였나 봐요. 집에 있는데 우리 집 맞은 편 가게 앞에 군용 지프차를 세워놓고 어느 위에 하얀 남방을 입은 사복하신 분이 신문지를 둘둘 말아 쥐고 오셔서 아버지를 찾으셨어요. '선생님 뵙고 상의 드릴 게 있다'고 말씀하시니 우리 어머니가 '이웃에 볼일 보러 잠깐 가셨다'며, 저를 심부름을 보냈죠. 제가 찾아가서 '아버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동안 오시란다' 했더니 아버지가 오셔서 방에 들어가셔서 잠깐 이야기 하시더니 나오셔서 같이 따라 나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언제 오시냐' 하니까 '잠깐 다녀오겠다. 늦으면 내일 오리다' 하시면서 가신 게 마지막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소식이 없으니 어머니가 찾아나셨는데 그 때 여러 분들이 납북되셨더라구요. 김규식 박사 춘원 이광수씨 등 상해 임시 정부 핵심 멤버들을 모두 잡아갔더라구요. 납북 날짜는 정확히 기억 안 나고 8월경이었어요.

납치 후 소식

<직접적으로 소식을 들은 것은 없고, 최근 책 죽음의 세월들, 동아 일보 기사 등을 통해 윤기섭씨의 이북에서의 활동 및 사망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음. 납북 후 북한에서 재북평화촉진 위원회에 소속, 나름의 활동을 하다가 1959년 반동으로 몰려 숙청 당했다고 전해짐>
A: 이북에 가셔서는 그 쪽 치하에서 재북 평화 촉진 위원회를 만드셔서 아마 자기네 통일을 이루려 했든지, 아니면 그 분들을 이용해서 자기네 체제를 옹호하려고 했든지 아마 나름의 계획이 있었겠죠. 여하튼 거기 기록을 보면 그렇게 활동을 하시다가 반동 분자로 몰려서 나중에 숙청됐다고 남아 있어요.그런데 막상 현대사 실록 책에서 보니까 끝까지 거기서는 나름대로 예우를 받으셨나봐요. 거기서는 정부 산하 좋은 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구요.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

<배우자가 두 딸을 데리고 전라남도 친척 집으로 피난, 주변의 감시가 있어 산 속에서 은둔함. 그 때 납북자의 제가 양응남씨가 수소문해 가족을 찾아 작은 집을 마련해 주고 생활비를 간간히 조달해 주어 생활함. 어린 자녀들이 노점에 나가 장사를 하기도 하고, 공부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며 가족의 고생이 심함>

Q: 피난은 가셨어요?
A: 저희 어머니 고향이 전라남도인데 이모님 댁으로 피난을 갔어요. 피난 갔다가 아버지가 월북했네 어쨌네 말을 하니까 어머니가 무서워서 산 속에 가서 살고 있었대요. 그러니까 그 양응남이라 선생님(윤기섭씨가 국학 대학에 있을 당시 제자)이 수소문해서 우리를 찾아서
어머니께 방을 얻어 드리고 간간히 생활비 드리고 저는 그 댁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그랬어요. 그 시대에는 식생활 해결이 가장 어려웠잖아요. 어머니도 병환 중이시고 하니 어린 우리들이 노점에 궤짝같은 거 놓고 뭐 팔기도 하고 호구지책으로 살았기 때문에 저도 배움의 시기를 놓치고 사실은 공부도 못했어요. 어렵게 힘들게 힘들게 산 거죠.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다가 오늘에까지 온 거에요. 아버지가 서훈 받기 전에도 아버지 관련 자료(독립 운동 증거)가 독립기념관에 다 있었어요. 그러니 저희 이종 언니는 '너는 너희 아버지 독립 운동하고 하셨는데 보훈처가서 연금 달라 하라'고 그랬어요. 저는 뭐 생각도 안 해 보고 제가 달라해서 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미 자료가 다 있고 역사학자들이 아버지나 납북되신 분들의 공적을 알고 포상하려 했는데 납북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분들을 몰라라 하고 나뒀던 거라고 해요..

정부의 지원

<전혀 없다가 1989년 독립 유공자로 서훈을 받음>

Q:신고는?
A: 신고는 돼 있더라구요. 양응남씨라고 아버지께서 국학 대학 계실 때 아버지 제자 셨던 분인데 그 분이 어머니가 딸 둘 데리고 헤매고 다닐 때 방도 하나 얻어 주시고 저는 그 분 댁에서 애기도 봐주고 하면서 국민학교를 다녔거든요. 나중에 그 분이 목포로 전근가시면서 헤어졌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분이 적십자사에 신고를 하셨더라구요.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 그 분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더라구요.

Q: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생사확인을 신경 써서 알려 줬다든가 자기네들이 알아서 어떻게 해 주려는 의지는 조금도 안 보였으니까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Q:연좌제 피해는?
A: 피난 가 있을 때 이모님 댁 쪽이 피해를 받았다는 얘기는 있었어요. 크게 제재 받은 건 없었는데, 제 생각엔 윤기섭씨와 친척 관계니까 뭐가 연락 같은 게 있지 않았나 하고 좀 주의 깊게 본 정도였나 봐요..

호적정리

<독립 운동을 하느라 만주에 있는 동안 왜경의 감시가 심해 윤기섭씨는 호적에서 지운 상태였음. 이후 혼란기에 다시 신고 및 정리를 못했고 아직까지 불분명한 상태임>

A: 아버지가 젊어서 외국에 몇 십 년을 나가 계시는 동안에 문중에서 아버지를 (호적에서) 빼 버리셨나봐요. (독립운동 때문에)자꾸 왜경의 감시를 받고 하니까. 그리고 해방 후에 돌아왔지만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태라 모든 게 제자리를 못 찾은 거죠. 저도 아버지가 임시정부에서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상해 중경에서 났어요. 그래서 해방되고 (한국에) 나와서 아버지가 호적 정리를 하셔야 되는데 혼란기에 못하셔서 저도 고아처럼 아버지 없는 어머니슬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제가 나중에 결혼할 때도 문제가 되고 가족사가 좀 그랬어요. 그러다 나중에 일가 창립법에 의해 새 호적을 만들었어요. 딸만 셋을 두셨는데 막내 여동생은 6.25때 아파서 죽고, 여동생이랑 저랑 있었어요.

정부에게 바라는 말

<생사 확인 및 유골 송환, 정부 차원의 6.25납북인사 가족회 활동 지원, 국립 묘지에 제대로 비석을 세워줬으면 하는 바램이 있음>
A: 6.25사변으로 가족을 잃고 생사도 모르는 후손들이 애절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국가차원에서 발벗고 나서서 밝혀주고 최선의 방법이 있다면 이산가족 상봉처럼 생존자는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주시고, 또 돌아가신 사실이 확실하다면 그 분들 유골이라도 자녀들이 돌려 받을 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 꼭 해결해줬으면 좋겠구요. 지금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있지만 이것도 참 중요하고, 또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회를 우리가 민간 차원에서 하기보다는 국가에서 해야 하는 일인데 국가에서 좀 많이 관심을 갖고 애타는 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믿고 기다려 보겠습니다.
또 사실 현충일이나 국립묘지에 가면 89년도 대통령장을 받으시고 그렇게 훌륭한 업적이 인정됐지만, 위패를 무후 자손의 위패가 있는 곳 한 귀퉁이에다 모셔놨어요. 납북되신 민족지도자 영령해서. 난 사실 그것도 참 성의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분들 비석이라도 세워서 애국 애족할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그 분들의 공적을 알렸으면 좋겠는데 천대를 받는 거랑 다름없어요. 사실 이북에는 보면 크게 해서 업적도 쓰고 좋은 비석을 해 놓은 걸 신문에서 봤는데 여기서 그러는 건 사실 좀 섭섭해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제가 태어나서 몇 년 정도만 아버지를 불러보고 그 이후는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고 하니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무친 것은 많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냥 가슴에 삭히고 산 거죠.
말을 하려니 또 목이 메이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해 고군부투 하셨던 것이 많이 묻혀지고, 그래도 다행히 지금 후세에 그 이름은 훌륭하게 남기셨지만 좀 더 아쉬운 것은 아드님이 없어서 못난 딸로 인해 훌륭한 업적이 더 빛나지 못한 것이 참 애닳구요.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죠. 편이 쉬세요.(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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