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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정관만 (증언자-정학운)
이름: 관리자
2017-01-26 14:16:59  |  조회: 1349

2016. 9. 29. 채록


피랍인
생년월일: 1899년 8월 15일
출생지: 충남 공주군 장기면 도계리 204번지
당시주소: 충남 공주군 장기면 도계리 204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11일 (음력)
피랍장소: 충남 공주군 우성면 무성산
직업: 구장(현재의 이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3남 2녀
외모/성격:


증언자
성명: 정학운
관계: 아들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충남 공주에서 이장이었던 아버지는 해방 직후 인민위원장이 이끄는 모임과 대립 관계에 있던 모임을 이끌
고 있었는데, 갈등이 심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
• 전주로 피난 가다가 인민군이 먼저 주둔해 있는 것을 알고 돌아와 구례실에 있던 절로 가서 지내다 스님으로
부터 공주 무성산에 있는 한 집을 소개받아 가족이 피난을 가있었음. 그 때 친구가 내무서에 고자질을 하여
내무서원 두 명이 아버지를 잡으러 왔고, 근처 내무서로 붙잡혀 갔다가 다시 그날 대전으로 끌려감. 대전형
무소를 찾아가 보았으나 납북자를 찾지 못함.
• 이장으로 근무했다는 것과 군인 가족이라는 점이 납치 이유로 추측됨.

직업 및 활동
<충남 공주에서 이장이었던 아버지는 해방 직후 인민위원장이 이끄는 모임과 대립 관계
에 있던 모임을 이끌고 있었음>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저는 1938년 6월 22일생입니다. 납북자 되시는 분은 저희 아버지고요. 저는 정학
운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은?
답_ 생년월일은 모르고 아버지 성함은 정광만입니다.
문_ 아버님의 출생지와 전쟁 때 살던 곳은?
답_ 충남 공주군 장기면 도계리 204번지. 출생지도 같은 곳이에요.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답_ 직업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아버지가 그 당시 구장이라고, 지금의 이장을 보고 계셨
어요. 6·25 날 때까지. 해방 직후에 인민위원장이랑 대립을 하게 됐어요. 그랬는데 아
버지가 이겼죠. 아마 그래서 원한이 생겨나지 않았나. 출신 학교는 잘 모르겠어요.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답_ 저희 형제들이 누나하고 형 두 명하고 나하고 내 여동생. 그리고 아버님, 어머님.
문_ 납북자의 경력 및 사회 활동은?
답_ 아버지가 소재지에서 이장을 하셨으니까 제가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을 자주 갔다 왔
습니다. 해방 후에. 그러니까 뭐 하러 갔는 진 저도 모르고. 서울에 가서 귤을 사와서 먹
은 적도 있고. 우리는 시골이라 사실 서울하고 통신도 단절된 상태였거든요.
문_ 6·25전쟁 도발 전 당시 상황은?
답_ 아버지를 지지하는 모임이 있고 아까 이야기 한 인민위원장 모임이 있고 그래서 대
결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 모임에서 면의 모든 사항을 관장을 하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아버지 모임에 있는 사람한테 밤에 낫을 들고 둘
이 와서 죽이겠다고 울타리를 넘어 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에 그 양반이 그
걸 방지하기 위해서 서북청년이라는 사람을 자기 집에 두고 관리를 했어요. 그렇게까지
좌, 우의 대결이 심했었습니다.
문_ 피난은?
답_ 갔어요. 걸어서 전주까지 갔습니다. 전주에 가기 전에 벌써 인민군이 앞장서서 들어
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제 안 되겠다 해서 가던 길을 돌아 온 겁니다. 집으
로 오진 않고 전쟁이 났을 때 구례실에 있던 절에 가서 한 며칠을 있었는지는 몰라도 거
기에 있다가 피난을 갔어요. 그랬는데 절에 계시던 스님이 절대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된
다고. 그래서 공주 우성면에 무성산이라는 높은 산이 있어요. 거기 자락에 있는 어느 집
을 소개 받아 우리가 거기 가 있었죠.


납북 경위
<공주 무성산의 소개받은 집으로 가족이 피난을 가있었는데 친구가 내무서에 고자질을
하여 두 명이 아버지를 잡으러 옴. 근처 내무서로 붙잡혀 갔다가 그 날로 대전으로 끌려
감. 대전형무소를 찾아가 보았으나 납북자를 찾지 못함>


문_ 아버님의 납치 시기와 당시 증언자 나이는?
답_ 그건 모르겠어요. 납치하던 날은 지금 제사를 지내는 날이니까 그게 음력으로 7월
11일입니다. 1950년. 그 당시 저는 13살이었습니다.
문_ 납치 장소는?
답_ 아까 이야기한 무성산에 있으면서 산에 가면 감자 같은 거 캐서 먹으며 연명했던 거
에요. 온 가족이 다 있었는데 그 즈음에 아랫동네 내무서에서 아버지를 잡으러 온 거에
요. 친구가 고자질해서 잡으러 왔어요.
문_ 내무서원 몇 명이 아버님을 잡으러 왔나요?
답_ 두 명이 왔어요.
문_ 납치 당시 납치자가 한 말은?
답_ 당신 조사할 것이 있다. 그러면서 우성면에 뜸밭이라는 데 내무서가 있었는데 거기
서 아버지 주소를 알고 연락을 한 거에요. 그 날로 장기면에서도 두 명이 왔어요. 그래
서 인수가 된 거죠. 우리도 그 뒤를 따라서 집으로 왔죠. 우리 집이 내무서 밑에 있었어
요. 저녁에 어머니가 밥을 해서 가져다 드린다고 가서 아버지를 보기도 하고. 그 때는
아버지가 책상에 앉아서 조사를 받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집에 와 있는데 어머
니께서 아버지가 공주로 넘어간다고 가보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어리니까 지서 앞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까 인민군 하나가 내무서원 둘을 데리고 아버지
를 인솔해서 오는 거야. 우리는 어리니까 아버지 손을 잡고 있었어요.
문_ 납북자가 남긴 말은?
답_ 어머니하고 잘 지내라고…. 그게 마지막이었죠. 그렇게 수복이 되고 우리 집이 지서
밑이니까 친한 경찰들이 많았는데 그 당시 공주 경찰서 형사가 하는 말이 아버지가 그
날로 대전으로 넘어 갔다고 하더라고요.


납치 후 소식
<누나와 동네 사람들이 대전 형무소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함>


문_ 전쟁 중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답_ 동네 사람을 동원해서 달구지에 5일분 식량을 준비해서 대전형무소에 갔어요. 전
어려서 안 갔어요. 누나가 갔었지. 누나는 그 당시 17살이었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사람을 많이 죽였더라고. 거기에서 어느 정도 뒤졌는데도 못 찾았다고. 그 뒤로는 전혀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지만 그 당시 동네에서 반감이 생겼다던지 그러면
죽였어요 그냥. 코를 소처럼 뚫어서 동네를 끌고 다녔단 얘기도 있고.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안 했어요. 그냥 그날 저녁으로 공주로 넘어갔거든요. 그 이상은 우리는 몰라요.
문_ 아버님이 끌려가실 때의 반응은?
답_ 일절 반응은 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따라가시고 뒷짐 지고.
문_ 납치 방법은?
답_ 그냥 양쪽에 내무서원 있고 데리고 갔어요.
문_ 아버님이 어머님께 남긴 말씀은?
답_ 저는 모르죠, 어리니까. 어머니하고 단 둘이 말씀을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문_ 적십자사, 정부나 관청 등에 신고는?
답_ 형이 했어요. 지금 보면 납북자 가족에 나와 있습니다.
문_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답_ 그 당시엔 도움을 요청할 길이 없었어요. 공주에서 여자가 여성동맹위원으로 왔다
갔다 했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공주에 가서 보니까 없더라는 거지.
문_ 대전형무소까지 갔다는 이야기만 들으셨다는 건가요?
답_ 네. 그런데 다만 아까 말했지만 개인감정으로 서로 싸우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아버
지는 그런 일이 없이 대전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 상당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문_ 동네에서 아버님 외에 끌려가신 분은?
답_ 없었어요. 당시 아버지 동료들이 거기서 죽은 분이 두 명이 있었죠. 소방대장 했던
분이랑 또 한 분은 아버지 친구 되시는 분. 듣기로는 그 면에서 70명이 죽었답니다. 그
렇게 감정이 안 좋았던 거지.
문_ 탈출해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은?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심지어 저희 집에 그 동네 사람들을 잡아 놓고 방망이, 대창을 만
들어 놓고 저희 변소 옆에 있더라는 거야. 그걸 보면 그 사람들이 상당히 계획적으로 한
게 아닌가…. 그 사람들을 가뒀던 동네 사람들이 어떤 일로 풀려났다는 거에요 다. 친구
얘길 들어보면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내무서에서 동네 사람들을 잡아 온
거지.


납치 이유
<이장으로 있었던 것과 군인 가족이라는 점 때문에 반동분자로 여겨져 납북되었을 것으
로 생각함>


문_ 아버님의 납치 이유는?
답_ 글쎄, 지금 생각하면 당시 듣기로 아버지가 이장을 보고 해서 착취를 많이 당하지
않았느냐,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또 우리가 군인 가족이었습니다. 형은 지금
국군묘지에 있어요. 아무튼 군인 가족이라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고. 북한에서 보기에
반동분자라고 하는 거죠. 그 조수라는 사람이 은골이라는 데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사람
인데 그 사람이 내무서원으로서 조서를 작성했어요.
문_ 조서 작성하는 분위기는 어땠나요?
답_ 그냥 평범했어요. 아마 특별한 감정은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문_ 어머님이 식사 준비해서 가셨을 때 아버님과 대화할 수는 있었나요?
답_ 아뇨. 그냥 드리기만 했어요.
문_ 집을 비우라는 말은 아버님이 하신 건가요?
답_ 네. 저녁 드실 때. 다른 말씀은 없이 집을 비워 주라고….
문_ 현재까지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답_ 아버님을 신고한 사람에 대한 반감으로 형무소에 신고한 적은 있고 따로 찾으려고
노력한 건 없어요. 뜸밭이라는 데서 잡은 그 내무서원 서장은 형이 잡으러 가니까 도망
가고 없더랍니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사람들을 형이 몇 사람 찾아서 신고를 했죠.


남은 가족의 생활
<작은 형은 6·25전쟁 때 전사 통지를 받았고 어머니는 아버지 납북 후 두 달이 안 되어
돌아가시고, 나머지 자녀들이 어렵게 생활함>


문_ 형님은 살아 계신가요?
답_ 작은 형은 육군본부에서 6·25전쟁 때 전사 및 실종이라고 말하더라고.
문_ 아버님이 납치되실 때 형님은 이미 군대에 계셨나요?
답_ 네.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었어요. 가끔 전화도 하고 그랬죠.
문_ 형님이 언제 전사하셨는지는 모르시나요?
답_ 모르죠.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전사 통지가 왔죠. 아버지 어머님도 안 계셨을 때. 어
머님께서는 수복되기 이틀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님께서 잡혀가신 뒤 한두 달 사이에
돌아가신 거죠.
문_ 그 이후엔 어떻게 사셨나요?
답_ 지금 그걸 얘기해서 뭐 하겠습니까? 저는 아버지 일이라면 다 쫓아다닐 생각입니다.
문_ 그러면 2남 2녀만 남으셨는데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셨는지?
답_ 큰형도 군대에 갔거든요 이후에. 전투하다가 부상당해서 돌아가셨지. 그래서 우리
는 우리끼리 자랐던 거야. 누나, 여동생하고. 지금 여동생은 대전에서 살고 있고 누님께
서는 병으로 누워 계세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오히려 유가족이라고 큰형이 잡으러 다니고 그랬지. 수복 후에
향토방위군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그 모임의 일원이 되어서 잡으러 다녔지. 아까 말
했지만 동네에 죽은 사람의 사촌이나 형제가 모인 유가족 모임이 있었거든. 거기에 형님
도 가입해서 활동했어요. 좌익활동했던 사람들이 그래도 몸은 많이 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잃은 것도 없었죠. 그 사람들이 지금은 외지로 나가서 애들 교육도 하고 그
랬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결국 전쟁 고아로 컸으니 제대로 배우지도 못 하고 그렇게
산 것 같아요.


호적 정리
<호적 정리함.>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답_ 다 했죠.
문_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의 연세는?
답_ 46세. 아버지는 그 당시 51세.
문_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장례는?
답_ 어머님 돌아가실 때 시골에서는 친족관계가 많이 있었어요. 그쪽에 외가랑 연관이
있는 어른이 있었다고. 그 양반이 와서 어머니 장례를 밤에 치른 거야. 그러고 삼우제
지낸 게 보름 날이네.
문_ 남은 가족들이 납북자에 대해 묘사한 말은?
답_ 많이 했죠.
문_ 남은 가족의 납북자와의 추억은?
답_ 그런 건 없고. 아버지가 우리가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는 운동회 때 유지들이 앉는
좌석에 앉아 있었어요.
문_ 평상시 자녀들에게 아버님이 강조하신 말씀이 있나요?
답_ 기억을 잘 못하겠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납치 후 정부의 대처 상황 및 지원 노력은?
답_ 그게 이상한 거죠. 4.3사건에 뭘 만들어라 하고 대통령도 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당시 끌려가셔서 돌아가신 분들(전시납북자)에 대해 말 한 마디 한 적 있습
니까? 이 나라 정부에서는 아무도 없어요. 나는 그 사이에서도 지금 이만큼 했다는 것이
천부당만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으면 함.>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답_ 바라는 바는 명예 회복. 그것이 우선이죠. 그래도 이렇게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이 다음에 우리 후손이 충무비에 가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됐다는 것을 전해주
고 싶을 뿐이에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피랍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답_ 제가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위해서 한다는 것. 이것 만으로도 나는 기쁩니다. 흡족하
죠.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줄 사람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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