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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현례(증언자-문대완)
이름: 관리자
2021-09-27 15:07:16  |  조회: 181
190902A 김 현 례 ( 金賢禮)

생년월일: 1908년 1월 15일
출생지: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2가 1번지
당시 주소: 서울시 용산구 서계동 33의 49
피랍일: 1950년 8월 13일
피랍장소: 운영 중이던 식당
직업: 상업
학력/경력: 대한부인회 충무로 지부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 2녀
외모/성격: 여장부, 남자보다 더 호탕함

증언자
성명: 문대완(1939년생)
관계: 3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증언자의 어머니가 납북되었으며, 어머니는 정계나 정치계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음. 증언자는 어머니를
활동가로 기억하며 당시 집에 잘 안 계실 정도로 바쁘셨다고 함.
• 납북자 김현례는 대한부인회 충무로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충무로에서 식당을 운영 중으로 독립
운동에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고 함.

직업 및 활동
<6·25 발생 전에 대한부인회 충무로 지부장을 하셨고, 충무로에서 식당을 운영. 어머니
가 돈을 모아 김구 선생에게 건네줬다고 누나에게 전해 들었음.>
문_ 어머님이 하시던 일이 있었나요?
답_ 저희 어머니가 해방되고 우리가 전라도 목포에 살다가 해방 돼 가지고 서울로 올라
왔어요. 해방 직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충무로에 살았어요. 주소까지 말을 하면 충무로
2가 20번지, 어머님이 6·25 전에 대한 부인회라고 있어요. 대한부인회 충무로 지부장
을 하신 걸로 내가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때 내 나이가 해방 때는 일곱 살이고, 6·25
당시에 열두 살. 그러니까 기억이 별로 없는데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내 생각도 있고 돌아
가셨지만 우리 누님 말씀이. 그리고 충무로에서 어머님이 요식업 식당을 했어요. 6·25
전이죠 해방되고.
내 기억에 어머님이 돈을 모아가지고 김구 선생님한테 갖다 준 것을 우리누나가 그거를
한 번 말하더라고요. 충무로 지부는 당시에 서울의 대표적인 지부라 거기서 회원들이 돈
거둬서 아마 김구 선생님, 독립운동은 한 거고 해방 후니까. 한독당이라고 김구 선생님
이 김규식 박사랑 같이 한 한독당에 아마 운영 자금 하라고 준 걸로 생각이 되네요. 확실
히 그랬다는 것은 내가 모르겠고.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우리 막내 남동생이 돌잔치 때
정계나 정치계나 우리 집으로 여러 사람이 와 가지고 돌잔치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어머님이 그런대로 활동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지금도 우리 애들한테 말하지
만 김구 선생님이 총에 맞아서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그 총 맞은 자국에 솜을 틀어박아
서 지혈을 한 솜 덩어리가 있어. 그것이 피가 몽땅 묻어 있는 지혈 덩어리를 언젠가 그
거를 가지고 와서 이게 그거다. 우리 어머니가 가지고 오셔가지고. 총 맞았다고 하니까
그리로 어머니가 가셔서 거기서 계속 일을 봤겠지. 그런데 그거는 내가 못 믿겠고, 내가
아는 것은 이게 그런 거라고 우리집 가보 비슷하게 해서 모신 기억이 나요.
어머니는 남자야 남자. 성격이. 그래서 우리 누나가 다해. 집에 잘 안 계셔. 사업도 하
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하여튼 어머니는 활동가로 내가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누나
가 (살림은) 알아서 하고.
문_ 당시 같이 살던 가족들은 누구인가요?
답_ 그때 당시 우리 제일 큰 대붕이 형(당시 대학입학 19세), 그 다음에 문제선(18세,
누이), 문대호(17세), 나(12세), 그 다음에 문고헌(9세), 문정자(6세), 문대훈(4세). 이
렇게 일곱이에요 일곱. 많았지요. 인제는 다 죽고, 이민 가고, 나 혼자 있어요. 우리 여
동생이 엊그저께 죽었어요. 아버지는 문공언. 그때 아버지는 전라도에서 광산을 하셨어
요. 어머니가 우리 애들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죠. 아버지는 거기서 서울로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을 했고. 집안 사정이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둘이예요. 아버지는 작은어머
니하고 광주에서 살고.

납북 경위
<어머니가 운영 중이던 식당에 빨갱이들이 찾아와 잡아 감. 다섯 명이었고 그중에 인민군
한 두 명 섞여 있었음.>
문_ 어떻게 납북됐는지요?
답_ 9.28 수복 직전에. 직전이라 함은 하루 이틀도 되고 삼 사흘도 되겠지만. 마지막
에 연행돼 갈 때. 잡혀갈 때지. 그때 그 식당에 내가 있었어요. 우리 형제들 중에서. 내
가 그때 남산 국민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때 어떻게 학교 갔다가 집에 가기 전에 식당에
들러서 밥을 먹고, 집을 가곤 했어. 그렇게 했는데 그날따라 사람들이 아마 학교 갔다가
온 거니까 점심때 됐을 거예요. 아마 네댓 명 됐을까. 네댓 명 됐는데 내가 보기에 군인
같은 사람도 섞여 있고 한 두 사람, 군복 입은 사람, 총 긴 거 장총 둘러 멘 한 사람은 기
억이 있어. 지금 생각하면 인민군이지 그거는. 빨갱이들. 지역 빨갱이들. 그 다음에 이
제 족제비처럼 집어 갔고 나가는데 처음에 다 여러 사람 잡혀 갔다고 하는 말은 내가 들
었는데, 그 다음에 9.28 수복 전에 대량으로 아마 싹 잡아갔을 때 그때 우리 어머니가
거기에 걸렸던 거야. 누가 찔러가지고. 식당 여사장을 누가 잡아갈 일이 없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머니한테 가자고 하니까 어머니가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 하면서 내 손을 잡
고 같이 화장실로 가서 말해길 나 갔다가 금방 집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그 말씀
밖에 내가 기억이 안 나. 네, 알았다고 나는 그랬죠.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그 사람들하
고 같이 갔어요. 네다섯 사람들하고 같이 나가는 거. 그때 그러고는 끝났지요.

납치 이유
<대한부인회 지부장이라 지역 빨갱이나 누군가가 지목하여 잡혀간 거 같다고 추측.>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지역 빨갱이들이) 이제 족제비처럼 (사람들을) 집어 갔고 (후퇴해) 나가는데 여러
사람 다 잡혀 갔다고 하는 말은 내가 들었는데, 이제 9.28 수복 전에 대량으로 아마 싹
잡아갔을 때 그때 우리 어머니가 거기에 걸렸던 거 같아요. 누가 찔러가지고. 식당 여사
장을 누가 잡아갈 일이 없잖아요.

납치 후 소식
<1.4 후퇴 전, 9.28 수복 후에 어머니와 같이 개성으로 끌려가던 사람이 중간에 탈출하
여 어머니 소식을 전해 줌.>
문_ 납치 후 어머님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그런데 이제 그 후에 9.28 수복 돼가지고 1.4후퇴 되기 전에 거기 같이 끌려갔던
사람들이 개성 못 가서 탈출해서 우리에게 온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어머니하고 잘
알았는가 어쨌는가 몰라도 우리에게 와서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어머니에게 내가 도
망간다그러니까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말해 달라고. 애기들 밖에 없는데 말을 하라고 해
서 전해주고 간 사실이 있어요. 그러니깐 서울에서 돌아가셨거나 하지는 않고 이북에 개
성까지는 끌려가셨어요. 그분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부탁을 받고 온 거였죠. 도망 왔
대요. 지금 같으면 내가 자세히 물어 봤겠지만 그때는 너무 아이였잖아요.

남은 가족의 생활
<계속 형제들끼리 집에서 살다 큰형은 잡혀가지 않으려 숨어지내다 폭격에 사망. 광주에
계시던 아버지는 9·28 수복 후 올라오셔 어머니의 납북 소식을 알게 되었음. 이후 아버
지 따라 광주로 내려가 지냄.>
문_ 남은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아버님은 9.28 수복 후에 올라왔어요. 그때서야 어머니가 납북된 걸 아셨죠. 어머
니가 납북되시고 나서도 누나가 다 해주셨고. 계속 형제들이랑 집에서 살았어요. 처음
에는 우리 아버지 광산에서 트럭을 몰던 사람 두 내외가 서울로 올라와서 우리 집에 식
모, 식부 뭐 이렇게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 언젠가는 없어졌어. 언제 없어졌는지 내가
그건 잘 모르겠고. 충무로에 살다가 서계동으로 이사 갔거든요. 6·25 바로 전에. 충무
로 2가 20번지에서 서계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우리 집에서 서울역이 보여요. 서울역
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 집이 보이고, 축대를 서쪽으로 쭉 올려 높이 쌓아서 지은 2층
집이 우리 집이거든.
6·25 나고 9.28 수복 전까지 인민군들이 이북서 열차로 와서 서울역 열차 안에서 밥 끓
여 먹고 살던 사람들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방 하나 빌려주면 밥 해먹고
기거했다가 가면 안 되겠냐해서 그러라고 그랬어.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보름인가 있다가
저쪽에 마산 쪽으로 간다고. 전선으로 간 거지. 경상도로 내려간다니까. 마산 쪽으로 간
다고 그러더라고. 인민군이 거기로 가는 것은 싸움하러 간 거 아냐. 우리는 낙동강 라인
으로 방어막을 쳤고. 그동안에 그 사람들이 쌀이랑 뭐 이것저것 가지고 와서 먹다가 남
은 거 우리한테 줘서 잘 먹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 인민군들 아이들이야. 우리가 책상
놓고 공부하면 옆에 와서 자기도 그러니까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중학교 5
학년인가 하다가 왔다고 공부 잘하라고 그 사람들이. 인민군이지.
6·25 나고 9.28 수복 후에 1.4 후퇴 때까지 서울역 뒤 그 개울이거든요. 거기 시체 많
았어요. 거기가 이제 대한 통운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를 폭격을 했다고요. UN 군이 폭
격을 했는데 그 옆에 개천이 있고 창고 옆으로 길이 있어요. 그 파편으로 이 길로 다니던
사람들이 막 죽어. 죽으면 여기로 밀어 넣어서 개울에 시체가 꽤 많았어요. 거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린 아직 어리니까 보고 그랬지.
9.28 때는 또 포탄들이 우리 쪽으로 날라 왔어요. 저쪽에 효창동인가 어느 쪽에서 포탄
이 막 날라 와서 우리 바로 옆집은 같은 2층 집이 두 개인데 하나는 박살 나버렸어. 그런
데 펑 펑하고 마을로 떨어지니깐 사람들이 바깥에 나와서 구경했는데, 그때 우리는 큰형
이 돌아가셨어요. 그때 9.28에 우리나라 국군 포에 맞아서 돌아가셨어. 인민군에 안 뽑
혀가려고 다락에 숨고, 놀다가 누가 또 오면 다락에 숨고, 아까 인민군들 몇 명 있었다
고 했잖아요. 우리 큰형은 다락에서 숨어서 살았어. (인민군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요.
문대붕 어디 있냐고 (하면서) 저기 갔다고 없어졌다고 (둘러대고) 그러면 막 뒤져봐요.
그 내무서원인가 지방 빨갱이들, 그놈들이 우리 큰형을 데려가려고 해서 계속 숨어 있었
는데 9.28 때 포탄에 결국은 돌아가셨어.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6·25 때 피난은 못 갔죠 우리는. 어머니도 안 계시고 애들만 있었는데 어떻게 가요.
못 가지. 어른이 없는데. (충무로에서) 6·25를 거기서 겪었으니까. 그러니까 6·25 때
부터 9.28 수복까지 있었고, 1.4 후퇴 때 (아버지 따라) 광주로 내려갔으니까. 계모가
그 소생도 있고, 같이 우리를 키웠죠.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어머니를 찾기 위한 노력은 하셨나요?
답_ 알아볼 것이 뭐가 있을까요? 개성까지 끌려가신 거를 아는데. 그러게 그때 왜 그랬
는가 모르겠어. 그때 우리 대분이 형은 바깥에 나가 다닐 수 없고. 우리 누나는 우리 밥
삶아 주려고 농촌으로 다니면서 보리 같은 거 그런 거 집에서 옷가지 같은 거 가져가서
물물교환 해 가지고 곡식 같은 거 먹일라고 했고. 그 다음에 대호형은 중학생이었고 나
는 초등학생이고 그러니까 어머니 어떻게 됐다고 돌아다니면서 알아볼 그런 나이가 아
니죠. 그런 것은 아버님이 올라오셔서 1.4 후퇴 때까지 우리가 피난 갈 때까지 서울에
같이 있었으니까 그때 알아보셨겠죠. 아버지가 이것저것 다 알아봤지 뭐 손 놓고 계셨을
분은 아니었던 거 같고 다 알아보셨을 텐데 우리한테 어떻다는 설명을 나한테는 안 해주
셨죠. 나는 들은 게 없으니까. 근데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건데. 그런 말을 할 때 그때
벌써 우리는 포기를 했죠. 그 남자가 와서 그런 말을 했으니까 개성까지 올라오신 거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때 포기를 한 거죠. 우리 어머니가 탈출해서 오거나 사실 그런
것을 우리들은 나는 잘 몰랐어요.
문_ 정부가 지원해 준 것이 있나요?
답_ 없었어요. 아무도 나한테 온 거는 없었어요.

호적 정리
<사망신고 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사망신고 했어요. 아버지가 하셨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언제 하셨는지는 모르겠
는데, 호적 제적 등본을 떼보면 어머니가 사망으로 돼 있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아니 그런 거 없었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어머니를 찾고 싶지만 시기가 많이 지났음.>
문_ 정부에게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글쎄 뭐가 있을까. 아니 나는 지금 내 이런다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백 살이 넘었
을 텐데. 나는 하다못해 내 DNA라도 확보를 해서 유해라도 찾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뭐 내가 자식으로서 의무가 어머니를 미리 신고(전쟁납북자)를 안 했으면, 그때 신고를
경기도 가평군청에서 했거든요. 내가 신고를 안 하면 우리 어머니를 내팽개치는 거 같
더라고요. 내가 처음으로 알았어요. 납북자 (관련 기관이) 있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증
명한 거죠. 이 사진을 몽땅 가져다가 어머니 사진이다. 내가 대충 아는 거 다 어디 살고,
어떻게 살고, 그거 쭉 이야기 했었어요. 자식 된 도리로 우리 어머님 찾아 주세요, 우리
어머님 어떻게 해주세요, 그것도 할 수만 있으면 좋은데 할 수 있는 시기를 넘어간 거 같
아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하늘나라 가서 만나면 그때 하고 싶음.>
문_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없어요 없어. 내가 앞으로 몇 년 안으로 하늘나라 가서 만날 거예요. 지금 여기서 무
슨 말을 해요. 잘못 말하면 어머니한테 폐 되는 것이고. 그거는 자식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고. 자식으로서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하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그때는
하늘나라 가서 만나면 그때 하려고요. 직접 단 둘이 어머니랑 만나서 할 얘기만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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