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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전상규, 전용규, 전인규(증언자-전덕자)
이름: 관리자
2021-09-27 15:30:19  |  조회: 60
190927A 전 상 규 (全祥奎)
생년월일: 1928년 1월 26일생
출생지: 서울 종로구 누하동
당시주소: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피랍일: 1950년 9월 2일
피랍장소: 서대문구 천연동 노상
직업: 남대문 시장 상인
직계/부양가족: 조모, 부모, 12남매 (3명 납북)
외모/성격: 미남형/자상함

190927B 전 용 규 (全庸奎)
생년월일: 1930년 10월 11일생
출생지: 서울 종로구 누하동
당시주소: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피랍일: 1950년 7월 15일
피랍장소: 인쇄소 직장
직업: 인쇄공
직계/부양가족: 조모, 부모, 12남매 (3명 납북)
외모/성격: 미남형

190927C 전 인 규 (全祥奎)
생년월일: 1933년 1월 4일생
출생지: 서울 종로구 누하동
당시주소: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피랍일: 1950년 8월 5일
피랍장소: 영천시장
직업: 서울대학병원 약제 조수
직계/부양가족: 조모, 부모, 12남매 (3명 납북)
외모/성격: 미남형

증언자
성명: 전덕자(1944년생)
관계: 여동생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6·25전쟁 직후, 여러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첫째(전상규, 남대문 시장 상인), 둘째(전용규, 인쇄
공), 셋째 오빠(전인규, 서울대병원 약제조수)가 각각 다른 날에 밖에서 연행되어 귀가하지 못함.
• 연행 후 철조망이 쳐진 수송초등학교에서 어머니가 셋째 전인규를 발견하고 사이다를 건네주었다고 함.
그 후 사리원에서 한 달 후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받은 후 소식이 없음.
• 전쟁 끝나고 어느 날 신문에 난 포로명단에서 ‘옥천동, 전용규’ 둘째 오빠의 이름을 보았음.

직업 및 활동
<오빠들 모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청년들이었음.>
문_ 가족 중 납북된 분들이 많은데 누구누구인지 말씀해주세요.
답_ 큰오빠, 둘째 오빠, 셋째 오빠가 납북되셨어요. 큰오빠 전상규 스물세 살, 거주는
서대문구. 그때 당시는 옥천동이 지금은 무슨 구로 들어갔는지 서대문구 옥천동이었어
요. 청운초등학교 다녔을 거예요, 전부. 뭐 토박이죠, 토박이. 전쟁 났을 당시에는 옥천
동에 우리가 살았어요. 작은오빠는 전용규, 스물한 살이라고 하더라고요. 셋째 오빠 전
인규는 19세야. 전부 꽃 같은 청춘이죠 뭐. 부모님이 그동안 12남매를 낳으셨으니까 뭐
중간에 죽은 사람들도 있대요.
문_ 오빠분들의 당시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답_ 큰오빠는 상인이었어. 상인. 남대문 시장. 그 전에 보면 유리관인데 움직이는 관이
있어요. 유리 케이스가 거기다가 만년필, 시계, 라이터. 오빠들 맨날 직장에 있으니까.
나는 일곱 살이니까 학교도 안 다니고 그럴 때니까 오빠들을 못 보죠. 한국일보사, 서울
대 병원에서 일하는데 어떻게 봐. 그리고 큰오빠나 가끔 장사한다면서 집에 들어오고.
셋째 오빠 사진이 하나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서울대병원 앞에서 하얀 가운 입은 사진
이 하나 있었어요. 그거라도 하나 유품으로 있을까 해서 (지금 생존해 있는 막내 오빠에
게) 전화했더니 그거를 잃어버렸대요. 뭐 오랜 세월이니까 분실들이 많죠. 그 얘기 중에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맨날 셋째 오빠 퇴근할 때 서울대병원 가서 기다리다가 퇴근
하면 전차 타고 둘이서 집으로 왔다고 그 얘기를, 처음 듣는 얘기에요, 그 오빠한테 둘
째 용규 오빠는 인쇄공이었다나 봐요.

납북 경위
<들은 바 없으나 오빠들이 모두 직장에서 잡혀갔을 것이라고 추측.>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그날부터 안 들어왔어요. 전쟁 터지면서. 그 후로 못 봤어 난. 그리고 이 둘째 오빠
랑 셋째 오빠는 원래 직장에 그렇게 밤낮으로 종사를 했는지 생각도 안 나. 일곱 살이
면… 진짜 딱 하나 생각나는 거는 큰오빠가 시장에서 들어오면 또 남동생 하나 있어요.
걔는 또 월남전에서 전사했거든. 걔가 서너 살이니까 이렇게 안고 여기 와이셔츠에서 미
루크, 그 일제 미루크(밀크 캬라멜)를 꺼내주는 거 그거 하나만 눈에 선해요. 그러고는
그 오빠를 영영 못 본 거지. 전쟁 터지면서. 다 못 본 거지 뭐. 그니까 내 생각에는 작은
오빠 둘 둘째, 셋째는 병원이나 직장에서 잡힌 거고 큰오빠는 돈 받아 온다고 하면서 나
갔대요. 남대문 시장에서 일했는데 그러고 뭐 사라졌으니. 그 소식은 아무도 모르죠. 근
데 이제 뭐 수송국민학교에 잡혀간 젊은이들이 있다고 그래서 엄마가. 납북 당시에는 누
가 보지를 못했어요. 밖에서 잡혀갔으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냥 부모님들만 알고 계시
고 하여튼 전쟁 터진 후부터 못 들어왔어요.
참고사항: 1956년 납북자의 부친 전순동이 대한적십자사에 직접 신고한 실향사민(납북
자)신고서에 의하면 첫째 전상규는 1950년 9월 2일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서대문구
천연동 노상에서 민청원 2명에게 연행되었고, 둘째 전용규는 7월 12일 직장에 출근 후
귀가하지 않았으며, 셋째 전인규는 1950년 8월 5일 가족중 병자가 있어 약을 구하러 나
갔다가 영천시장에서 민청원 1명에게 연행되었으며 그 후 세 아들에 대한 소식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음.

납치 이유
<한참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로 인력활용으로 납치했을 것으로 추측.>
문_ 6·25전쟁 당시 본 인민군들의 행동은 어떠했나요?
답_ 거기 금화산이 있어요. 그 옥천동 뒤가 금화산이거든. 무슨 토굴이 있었다던가. 거
기들 완장을 차고 오죠 피난 가기 전에. 걔네들이 가리는 게 없어요. 집에 신발 신고 막
들어오니까. 우리는 잠깐 피했어요. 방공호라고 그래. 거기 피해 있었는데 거기까지 오
더라고 그놈들이. 그래서 엄마가 중요한 것을 싸 놓으려고 보자기가 없으니 태극기가 있
었는지 태극기로 싸 놓았었데요. 그거 때문에 끌려가서 하룻밤 문초 당하고 풀려 나오더
라고요. 그리고 언니는 기저귀 빨다가도 잡혀 갈 뻔하고 뭐 옥천동에는 쫙 깔려있었어
요. 북괴들이 와서 막 발 올려놓고 마루에서 늘어져서 자기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는 담
장이 높은 집이었어요. 그 밑에 집이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서 내려다보면 마루에서 군
화 신은 채 폭격이 없을 때는 이것들도 뻗어서 자더라고요. 자기 집 아니죠. 걔네들 괴
뢰군들이 가리지 않고 그냥 이 집 저 집 쳐들어 와서 그러는데 잡아갈 사람 있으면 잡아
가는 거야. 전쟁 나고 직후였던 거 같아. 그리고 한 가지 주워들은 소리는 북한 놈들이
서울 사람을 미워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데려가다가 총살을 했는지 어떻게 됐
는지… 이제 다 돌아가셨겠지.

납치 후 소식
<첫째 오빠는 소식이 전혀 없었음. 둘째 오빠는 신문에 난 포로명단에 이름이 있었음. 셋
째 오빠는 수송초등학교에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가 듣고 찾아가, 사이다 한 병을 건네주
고 왔으며, 그 후 셋째 오빠가 언니에게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사리원에 있는데 한 달 후
집에 돌아갈 거라고 쓰여 있었으나 지금까지 소식 없음.>
문_ 그 후 오빠들의 소식은 들었나요?
답_ 언니는 편지를 봤대. 그거는 모르겠어. 인편인지 우편인지 모르겠어. 편지 왔다 그
러대. 편지가 왔어, 얘 그러더라고. 어떻게 편지가 왔는지. 진짜 그러고 보니 그게 궁금
하네요. 전쟁 터지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는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내가 5학년 때인
가 4학년 때인가 남에서 잡혀온 사람, 북에서 잡혀온 사람, 그 명단이 신문에 발표됐을
때 둘째 오빠 이름 전용규가 옥천동으로 해서 나왔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항상 신문을
끼고 계셨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봤어요. 전용규 옥천동 주소로 나온 거 보고 둘째오빠
는 그 이후로는 도대체 모르고 언제인가 무슨 서류가 왔더라고요. (서류를 보여주며) 여
기. 이게 언제인가 어느 해에 온 건데 전용규 둘째 오빠 이름이 의료인으로 나와 있더라
고요.
이제 셋째 오빠는 엄마가 그 수성초등학교인가 뭔가 거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 봤더니
셋째 오빠가 있어서 사이다 한 병 건네주고 왔다는 거. 근데 또 언니 얘기로는 충무로의
영희초등학교래요. 어느 학교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하여튼 어머니가 사이다를 건
네줬다고 그러더라고요. 학교 운동장에 철조망이 이미 쳐있고 그 안에 전부 젊은이들이
붙들려 있는데 작은오빠가 보였나 봐요. 그래서 사이다 한 병을 줬다고 그때 당시에는
그 얘기 밖에 몰라요. 언니가 얘기하는 거야, 언니가. 사리원에서 편지가 왔더래요. 그
러면서 한 달 후면은 집으로 갈 거라고. 그런데 그때 9.28수복이 된 거에요. 수복이 되
면서 그냥 깜깜무소식이래요. 아무도. 연락두절이죠.
그때는 어리니까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사십이 넘으니까 그냥 맨날 6월만 되면 눈물
이. 오늘은 눈물도 안 나네. 말랐어 눈물도.

남은 가족의 생활
<전쟁 중 피난 가지 않고 아버지가 남아 일하다, 1.4후퇴 때 회사 짐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 아버지는 계속 근무하였으나 한참 경제활동을 하던 오빠들을 갑작스럽게 잃어 집
안 경제가 나빠졌으며, 아버지 퇴직 후 집안이 더욱 힘들어짐.>
문_ 오빠들 납북 이후 어떻게 사셨는지요?
답_ 아휴 우리야 먹는 거가 해결이 못 되니까. 엄마가 그냥 어디 가서 참외를 그냥 주워
오셨는지 모으셨는지 그러고 언니 고생한 거. 언니가 엄마랑 쌀하고 참외를 구해오고
나는 먹는 거죠. 일곱 살 때니까. 그리고 언니가 어느 집에 갔더니 그때는 빈집들이 많
았는데 보리가 썩고 있더래요. 그래서 언니가 그거 가져와서 절구에 찧어서 우리 부침
개 해줬는데 그런 거는 기억나요. 너무너무 그때 당시에 맛있었다는 거. 우리야 쉽지 않
았죠. 빈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게 있더래요. 우리도 양식 다 떨어졌지. 전쟁 때 아버님
은 금융조합에서 계셨어요. 서대문 로터리의 금융조합이라고 해서 지금은 농협 로터리
그 자리에. 농협 본점. 아버님은 안 끌려가시고 맨날 숙직을 하셨어요. 거기 수위, 지금
으로 말하면 경비를 보셨기 때문에 그냥 하루는 계시고 하루는 안 계시고 그렇게 회사를
지키시더라고요. 어머니가 피난 가자고 그래도 그렇게. 그래서 결국은 9.28까지 다 넘
기고 우리는 1.4후퇴 때 회사 물건들이 부산으로 빠져나갈 때 그 트럭 짐 사이에 끼어서
갔었어요. 그거는 기억나요. 회사 짐차에 식구들을 싣고 부산으로 갔어요. 부산에 거기
회사 지점이 있더라고요. 지점 뒤편에 짐을 내리고 우리는 거기서 하루 자고, 피난인 수
용소 천막에서 우리가 살았죠. 2,3 년 살았지. 계속 근무하시고 정년퇴직을 하셨어. 그
때는 55세가 정년퇴직이었는지 그때까지 다니신 거예요. 나 4학년 때 그만두시더라고
요. 그때부터 집안 경제가 말할 수 없죠. 완전히 가난을 끼고 살았죠 그때부터. 오빠들
다 잃었으니 그 좋은 직장 다니던 오빠들 다 잃었으니 아버님은 또 그 퇴직금을 누구한
테 날려버렸어. 쌀 점쟁이한테 날려 버려가지고, 어머니 고생에 우리들 고생 뭐 말할 수
없었죠. 진짜 가난을 끼고 살았지.
문_ 어머님,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답_ 아버지는 그때 72세 때 돌아가셨어요. 나 스물네 살 때인가 사회생활 시작할 때이
니까. 어머니는 74세 때니까는… 우리 아이가 두 살 때니까 한 38년 됐나 보네. 그 오
빠들이 살아 있으면 조금 우리들의 생활에 도움이 됐을 텐데, 우리가 다 고생했지. 각자
뿔뿔이… 말로 할 수 없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오빠들은 언제부터 찾으셨는지요?
답_ 마흔 넘어서죠. 아 그거 보고 내가 이제 오빠들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산가족 그 이
지연 아나운서가 하는 게 텔레비전에 맨날 나올 때 그 사람들은 북쪽에 있는 식구들 남
쪽에서 잃어버린 친구들 만나더라고요. 그거 보면서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나도… 아 저 용규 오빠, 명단에 발표된 용규 오빠가 살아 있지는 않을까? 포로
명단에 있던 그 오빠가 생각이 나서. 그 오빠는 신문에 났으니까. 기억 안 나. 동아일보
였는지 우리는 조선일보는 잘 안 봤어요. 통일부 그 속까지 다 쑤시고 들어갔어요. 그
광화문에 통일부 경찰이 딱 지키고 있는데 내 주민등록증 내고 통일부에 찾아가고 남산
적십자사,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네. 서류를 거기도 갔다 냈어요. 12년 전이면 어떻게
되나. 내가 64세네. 64세 때도 하고 또 나오면 또 하고 그랬어요. 몇 번을 했어요. 근데
도 아무 효과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이걸 내면서 이렇게 납북자가족협의회가 있는
지는 몰랐어요. 내가 서류 들고 뛰었죠. 뛰었어. 그런데 하나도 들은 바가 없다고 정부
가 납북자들을 그렇게 등한시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답이 하나도 없어
요. 이렇게 서운할 수가… 유엔에서 지금 이 문제가 대두되고 있잖아요. 그래 나는 최근
에 알았지만 유엔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준다는 거. 그런데 어떻게 정부에서는 무심할
수 있을까 이거지.
그래서 내가 40이 넘으면서 용규 오빠는 어딘가 살아있겠다 (흐느끼며) 그러면서 이제
찾아다닌 거야. 통일부나 적십자사나 다 내가 서류를 만들어서 접수를 한 거예요. 근데
뭐 없는지 살아있지 않은지. 그 후로 이제 여기서는 주로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 고향
이 북에 있는 사람들이 우선이더라고요. 우선 이남에서 잡혀간 사람은 도대체 나 몰라라
야. 그래서 이제나 저제나 연락 오기를 바라나 뭐 없어. 그니까 우리로서는 돌아가셨다
생각하고 언니 오빠는 나 몰라라 하는 거예요. 근데 나로서는 6월만 되면 오빠들이 잡혀
갔으니까 가서 그냥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가엾고 억울하죠. 그 젊디젊은 청
춘에 부모 형제 다 그냥 집에 있는데 잡혀갔으니 얼마나 불쌍한 지경이에요. 그러니까 6
월만 되면 아주 가슴 아파요. 그리고 눈물이 나고 잠도 못 자고. 그 오빠들이 잡혀갈 때
얼마나 엄마 아버지가 그립고 동생들이 그립고 그랬겠어요 글쎄. 그러니까 내가 서류를
다 각처에다 방송국에도 KBS, SBS, MBC 다 갖다 놔도 소용없어요. 단지 KBS에서
한번 오라고 그래요. 언니가 있다고 하니 언니도 데려오래요. 언니 그때는 건강했으니
까. 가서 물어보는 게 뭐냐면 오빠 얘기들 안 물어보고 부산이 그때 당시에 물 사정이 어
땠느냐고 그거만 물어 보더라고요. 내 나이가 육십 몇일 때. 서류를 여러 번 냈어요. 이
게 마지막으로 냈는지 이게 있네. 그니까 통일부, 적십자사, 방송국이야 자기들 일 하느
라 아무 소용이 없는 거지.
그 후에 세 사람 다 한꺼번에 납북자라고 인증을 한다고. 왜냐면 어머니 때는 사상 문제
로 함부로 입을 벌리지 못했는데 내가 40 넘고 이산가족 보면서 그때는 군정이 끝났을
거예요 아마. 군정이 끝났을 때야. 그런데 지금 언니도 냉정하게 대하고 오빠도 그렇게
맨날 이 일에 대해서 하나 관심도 없고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서 나 혼자라도 6월만 되
면 너무 오빠들 생각이 나니까 그때 전화를 건 거예요. 통일부인가 어딘가 그랬더니, 서
울 교환 안내가 가족회에 연결을 시켜주더라고. 그래서 가족회하고 전화 통화가 된 거
죠. 가족회도 올해 6월에 서울 안내를 통해서 안 거예요.

호적 정리
<오빠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 아직 서류상 생존으로 되어 있음.>
문_ 호적 정리는 어떻게 하셨는지요?
답_ 그거 참 너무 억울해 그런 거는. 제일 억울한 게 납북자들이야. 뭐 살았는지 죽었는
지. 지금 내가 호적 초본을 가져왔어요. 99년도에 내가 뗀 거더라고요. 여기 오빠들이
다 살아있는 걸로 되어있다고요. 상규, 용규에 가위표가 없잖아요. 인규에도 안 쳐져 있
어요. 여기 지금 하나 있는 오빠가 정리를 못해. 오빠라는 사람이 이거를 맡아야 되잖아
요. 내가 함부로 할 수 있어요? 우리는 합동 위령미사를 성당에다가 하거든요. 이제 6
월이면 동생도 있고 오빠들 생각이 나서 봉헌금을 조금 내요. 그러면 네 사람 이름을 적
어 내죠. 성규까지 해서. 거기 사무장이 뭐 이렇게 많으세요? 6·25때 납북된 오빠들이
에요 그랬더니 아니 아직 살아있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위령미사를 올리냐고 사무장은
그러는데. 내 선택이죠. 내 선택이니까 돌아가신 걸로 치고 위령미사를 올려요. 근데 이
게 99년도니까는 지금 종로구청에 가서 한 번 나도 떼어볼라고. 그래서 여기 오기 며칠
전에 확인하기 위해서 오빠 종로구청에 오빠들 호적 정리했어? 했더니 아직 안 했대. 그
래서 99년도에 뗀 게 있어서 가져온 거예요.

연좌제 피해
<영어를 잘해 미국 이민을 준비했으나 연좌제를 알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연좌제 얘기는 들었죠, 당한 거는 없지만. 나는 영어를 좋아해서 미국에 갈 꿈을 꿨
는데 그 연좌제에서 좀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못 갔죠. 서류 같은 거는 내보지 않았는데
들은 게 있으니까. 박정희 군정 시대 때니까 아예 포기했죠.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된 오빠들 생사 확인과 납북자 가족 우대를 원함.>
문_ 정부에 바라는 바를 말씀해주세요.
답_ 생사 확인이죠. 뭐 돌아가신 걸로 치지만 그거를 확인을 해야 하잖아. 오빠도 구십
이 넘었죠. 그런데 요즘은 백세시대라니까 어떤지는 모르지만. 나는 연령도 연령이지만
총살을 당하지 않으셨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용규 오빠는 포로명단에 있
으니까 그때 기대를 했는데 용규 오빠도 고령이잖아요. 그리고 도대체가 생계 문제도 왜
납북자들한테는 하나 우선권을 안 주냐고요. 광주 사건들 봐. 걔네들 얼마나 포상금주
고 집들도 다 마련해주고. 광주 사건도 그렇고 다른 사건도 그렇고 굉장히 우대를 하더
라고요. 그런데 납북자 가족만 우대를 안 해주고, 내가 이번에는 저기 구청에다가 기초
수급 신청을 했어. 그런데 겨우 59만원인가 60만원 밖에 안 나와서 전화를 걸었어요.
‘선생님은 그거 밖에 안 된대요.’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어. 나는 납북자 가족이라고 그
랬더니 그거는 우리하고 상관이 없대. 어떻게 상관이 없느냐고, 억울한 납북자 가족을
왜 이렇게 홀대하냐고 그랬더니 다음번에 조금 올려 줬더라고. 그거 한마디 했더니. 참
나… 아니 그런 것들 좀 우선시해야 하잖아, 정부가.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오빠들이 많이 그리움.>
문_ 피랍된 오빠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오빠들한테 나는 보고 싶다는 얘기지. 오빠들 늙으셨든 젊으셨든 보고 싶고요. 그
때 잡혀가시면서 얼마나 우리들 생각나고 엄마, 아버지 생각이 났겠어요. 그런 억울한
생이 어디 있어요. 한창 스물세 살, 스물한 살, 열아홉 살 그 젊은 청춘에 그냥 붙잡혀서
그 놈들한테 끌려가면서 얼마나 우리들 생각나고 그랬겠습니까. 지금은 워낙 고령이시
라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빠들 정말 보고 싶습니다. 살아 계시면 우리
한테 한 마디라도 해주세요. 정말 그립습니다, 오빠!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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