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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정흥동(증언자-정흥산)
이름: 관리자
2021-09-24 15:51:24  |  조회: 174
190619B 정 흥 동 ( 鄭興東)

생년월일: 1930년생(6·25 당시 20살)
출생지: 성북구 종암동 62
당시 주소: 성북구 종암동 62
피랍일: 1950년 7월 초순 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운전사
직계/부양가족: 부모, 남동생 2
외모/성격: 건강하고 체격이 큼

증언자
성명: 정흥산(1940년생)
관계: 막내 남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셋째 형님(정흥동)이 납북됨. 세 사람이 납북되어 모두 신고하였으나 첫째 형님(정흥만)과 사촌 형님(정
흥남)은 근거 불충분으로 인정되지 않음.
• 7월 초순,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피난 가지 못하고 지내다, 갑자기 들이닥친 완장 찬 사람들에게 토끼장
에 숨어 있던 셋째 형님이 끌려가 소식이 없음.
• 넷째 형님은 귀가 중 의용군으로 끌려가다가 탈출하여 산골에 숨어 있었는데 9.28수복으로 미군이 들어
와 투항하여 포로교환 할 때 돌아옴.

직업 및 활동
<그 당시 학교가 일본 학교여서 아버님께서 학교를 보내지 않으셨고, 운전을 배워서 (택
시업과 유사한) 운전사로 일하였음.>
문_ 셋째 형님이 하시던 일은 무엇인가요?
답_ 전에 아버님께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교사들이 했었으니까, 학교를 안 보냈어요.
그래서 형님은 그 당시에 아주 귀한 차를 우리가 갖고 있었는데 운전을 배우셔가지고 차
로다가 돈암동에서 이따금씩, 지금 말하자면 택시라 그럴까? 그런 업을 하고 계셨습니
다.
문_ 당시 함께 살고 계셨는지요?
답_ 큰형님은 월곡동에 사시고 우리 집은 종암동에 집이 컸어요. 거기에 모두 함께 계셨
죠. 그때 그러니깐 6·25 전에만 하더라도 우리 집이 커가지고 작은아버님 네까지 식구
가 한 열두세 명 이렇게 같이 살았어요. 같이 사셨고 그 다음에 6·25가 나기 직전에 돈
암동으로 우리 작은아버님은 이사를 하셨죠.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작고하셔서
안 계시고 작은 형님하고 조카들 하고 같이 큰집에서 살았죠. 그러니까 둘째 형님이죠.
큰형님은 분가해서 나가시고, 둘째 형님의 자녀가 셋이 있었어요. 우리 제일 큰형님이
22년생, 그 다음 형님이 25년생, 또 지금 이북에 잡혀가신 형님이 30년생, 그 다음이
33년생, 그 형님도 6·25 당시에 집에 안 들어오니깐 잡혀간 줄 알았죠. 세 분이 6·25
당시에 안 계셨어요. 큰형님도 내가 6·25 나고서 가봤더니 안 계시고, 모르는 거예요.
잡혀갔는지.

납북 경위
<6·25가 나고, 집 뒤뜰에 토끼 집에 숨어있었는데, 7월 초순 오전 11시 경에 서에서 완
장을 찬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곧장 토끼장으로 가 숨어 있던 셋째 형을 끌고 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는지요?
답_ 셋째 형님이 6·25 나고서 저희 집에 계셨는데 그때 이제 사람들을 막 잡으러 다닌
다는 소문을 듣고서 우리 뒤뜰에, 토끼를 키우는 집이 있었는데 그리로 숨었죠. 토끼집
은 왜 토끼집이냐 하면 그 당시에 창경궁에 토끼 사료를 납품했어요. 그래서 우리 바로
뒤에 토끼장이 많이 있었어요. 셋째 형님이 집 뒤에 토끼장 안에 숨어 계셨죠. 그래서
때 되면 집으로 안 오시고, 밥을 어머니가 해 놓으면 밥을 갖다 드리곤 했는데, 나중에
얼마 지난 뒤에 알게 됐는데 우리 동네에서 누군가가, 거기 가면 토끼장에 숨어 있을 것
이다라고 밀고를 했어요. 그래서 서에서 대의원인가 뭔가, 완장 차고서, 들어오자마자
뒤뜰로 가서 토끼장을 열어서 거기서 딱 끌고서 나온 거예요.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그러니깐 아버님 때문에 나는 피난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기관지 천
식으로 고생을 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피난을 가실 수가 없었기에 어머님하고 저하고만
셋이 남아 있었어요.
문_ 납북되던 당시 그 자리에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계셨나요?
답_ 계셨죠. 방에. 저만 이제 나가서 문을 막 두들겨서 문을 열어 주고. 그때만 해도 아
버님 어머님이 겁이 나니깐 무서워서 숨어 있었고,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안방에서 나오
질 못하셨고, 형님이 뒤에 숨어 계시다는 걸 알고 계시니깐 겁이 나셨지. 제가 가서 문
을 열어주니깐 바로 그냥 뒤뜰로 갔지. 그때 나오면서 ‘어머니!’ 해서, 어머님이 나오셨
지. 아버님은 못 나오시고. 그때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마지막이죠. 뭐 하나도 남기
거나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나간 거죠.

납치 이유
<전쟁수행에 필요한 운전기술자로 동네 누군가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가 밀고한 것
으로 추측됨.>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우리 동네 분위기는 종암동이라 6·25 당시에 피란들을 모두 다 가고 그래서 몇 식
구가 없었어요. 동네에. 우리 동네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종암동 62번지라는 동
네에 정씨네만 거의 살았어요. 대부분이 일가 친척분이고, 일가친척이 아닌 분들은 외
부에서 들어오신 분들 그런 분들이죠. 저는 전혀 모르는 것이 종암동이 이렇게 있다면
불과 집이 한 삼십여 채가 띄엄띄엄 있었어요. 그러니깐 알 수가 없어요. 대문 밖에 나
가보면 길가에 차는 없었어요. 그냥 이렇게 뭐 피난들 나간 것만 알고 저도 이제 무서우
니깐 더 이상 나가지도 못했고. 내가 열어주고 잡혀가는 것만 확실히 다 봤고, 토끼장을
우리 집에서 가려면, 계단이 하나 둘 셋 넷 정도 높아요. 우리 집이랑 거의 붙어있다시
피. 그때가 오전인데 아침 식사 이후에, 지금으로 치면 내가 생각할 때에 한 열한 시쯤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 사람들이 ‘정흥동’ 하고 부르는게 아니라, 우리 집이 천 평 정도
로 굉장히 넓었는데 마당도 넓으니깐 옛날 문 끼익 소리가 나고 대문을 확 발로 차고 들
어오더니 그냥 뒤켠으로 바로 간 거야. 누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무조건 들어와 가지고 바로 토끼장을 뒤졌어요. 그러니깐 우리 형님이 계심을 누가 알려
준 것 아니냐 이렇게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얘기를 하셨죠. 우리 집이 큰데 들어와서 정
흥동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직행했으니.

납치 후 소식
<셋째 형님은 소식이 없고, 넷째 형님이 포로가 되어 돌아옴. 그리고 먼 친척이 육군으로
나갔다가 이북에 포로로 잡혀있다 돌아와서 정흥동 셋째 형님이 이북 포로수용소에서 트
럭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줌.>
문_ 사라졌던 넷째 형님은 언제 돌아오셨나요?
답_ 넷째 형님은 끝내 들어오지 않고, 그 당시에 포로교환 할 때, 그러니까 53년도에 휴
전 협정이 돼서 포로교환 할 때에 거제도에서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한테 소식을
전했어요. 그래서 성북구청을 매일 가봐라 거기 가면 올 거다 해서 닷새째에 거제도에
서 여기다가 (머리를 가리키며) ‘멸공방첩’ 붙이고서 이렇게 와서 만나게 됐죠. 그때 33
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열여덟이죠. 잡혀 가지고 3년 후에 그렇게 인제 집에 들어와
서 다시 육군으로 나갔죠. 그래서 제대를 했죠. 그 형님도 지금 작고하고 안 계시죠. 와
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왜 포로가 되었느냐 했더니 집에 들어오다가 길거리에서 잡혔던
것이에요. 잡혀가지고 끌려가다가 어딘지 본인도 몰라요. 어디선가 밤에 폭격이 심해서
한 집단이 움직이면서 그때 도망을 친 거예요. 그래 가지고 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도망
한 곳이 어디쯤이냐 보니까 고성, 강원도 고성 같아요. 그 산골 어디에선가 숨어 있다가
9.28 수복 때에 미군들이 들어왔는데 손을 들고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포로로 거제
도로 보내진 거지. 군대도 가지도 못하고. 끌고 가다가 인제 본인은 영문을 모르죠. 전
쟁이 나니까, 그때에 서울신문사에 다녔는데 빨리 퇴근하고 집으로 가려고 했죠. 그 형
님도 학교를 아버님이 보내지 않았어요. 초등학교만 나오고 학교를 안 보냈어요. 그래
가지고 제가 지금 확실한 건, 서울 신문사에서 퇴근하고 오다가 잡혔죠.
문_ 셋째 형님의 납북 후 들은 소식은?
답_ 우리 먼 친척 되는 분이 육군으로 나가서 이북에 포로로 잡혀 있었어요. 근데 포로
수용소에서 우리 형님을 봤다는 거예요. 우리 집안사람인데, 형님이라고 안하고 아저
씨라고 불렀었어요. ‘저 아저씨가 저기서 운전을 하고 계셨다’는 거지요. 근데 그분은
6·25때 이북에 포로가 되어 갔다가 교환 때 넘어와 가지고 그 소식을 전해 주어서 알았
죠. 그래서 살아있는지를.

남은 가족의 생활
<아버지는 6·25 이듬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온갖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음. 증
언자가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업을 함.>
문_ 어떻게 사셨나요?
답_ 그러니깐 그 당시에 6·25가 나가지고 우리 동네에서 거의 피난들을 가고 몇 집이
안 남았었어요. 한 삼십여 채 있었지만, 몇 집이 안 남고 그래서 어디로 다니면서 어쩌
고저쩌고 할 만한 곳이 없었어요. 몇 집 되지도 않는데다가 친구되는 우리 나이또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 누구하고 대화할 만한 뭣도 없었고, 또래도 없었고, 빈집이 많았
고, 피난 가고 뭐 어떻게 됐는지 모르죠. 누구한테 물어볼 수가 없었죠. 그래 가지고 아
버님이 그 다음해에 51년도 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깐 6·25가 나고 나서 일 년도
안됐죠. 한 9개월 정도 이후에 봄에 돌아가셨으니깐.
아버님이 51년도에 돌아가시고 그 뒷산에다가 임시로 제가 묻어드렸어요. 저는 생생하
죠.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갈 데가. 어머님을 내가 모시고 나 혼자밖에 없으니깐. 내가
어머니를 어디로 모시고 갈 능력도 안 되고, 그때부터 먹는 것이 힘들었죠. 우리 집에는
6·25를 이렇게 당하고서 9.28 수복 때도 많은 군인들이 들락날락하고, 다음에 1.4후
퇴 때 중공군들이 우리 집 아래채 마구간에다가 말까지 매놓고 있었어요. 그렇게 다 겪
었죠. 그러니깐 6·25 동안 저는 거기서 떠나질 않고 모든 걸 다 봤기 때문에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했고 너무 잘 알지요.
제일 큰형님이 월곡동에 계시면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큰형님
이 이제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되고, 올지 모르니까 거기서 어디로 갈 데가 없죠. 거기서
기거하며 올 때만을 기다린 거죠. 그러니깐 두 식구예요. 형수하고 아들 하나. 그래서
둘째 형님은 그렇게 해서 가고, 그러니깐 그것밖에 없죠. 첫째 형님은 거기에서 나와 가
지고 작은애가 49년생이니깐, 그 당시에 6·25 때 우리나이로 두 살이에요. 걔를 업고
그 위가 45년생이니깐 여섯 살 먹었죠. 우리나이로 다섯 살 먹은 애를 데리고 어디로 피
난을 가겠어요. 그 당시 서울 근교 사람들은 피란을 가봐야 어디로 가겠어요. 젊은 사람
같으면 몰라도 다들 연로한 분들 모시고 어디로 갈 데가 없었어요.
그때 서울에서는 학교라는 것이 다 폐쇄 돼가지고 선생님도 없고 그랬어요. 내가 숭례초
등학교를 다녔는데, 거길 가봤더니 뭐가 없어요. 마당에서 한 이십여 명 가까이 될까? 일
학년짜리 있고 몇 학년짜리도 있고. 그때가 휴전하고 바로 직후니깐. 그래서 저는 거기
가서 배울 게 뭐가 있어야지. 그리고 우리 서울 사람들은 배운다는 것도 배움이지만 먹을
게 없으니깐 다 중공군들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 집에서도 하다못해 고추장, 된장, 간장도
다 가져가고. 우리 형님들이 땅을 파서 묻어놓은 쌀까지도 꼬챙이 갖고 다니면서 다 쑤셔
서 다 가져가고. 그래서 제일 우선은 공부도 공부지만 먹을 걸 구해야 했어요. 나는 초등
학교를 어떻게 다녔냐 하면, 학교에 가니깐 반별로 구분을 못하니깐 정릉에 영락교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구락부(일본식 발음의 클럽)라고 학교를 못 간 애들을 가르쳐주었어요.
저는 이제 단국초등학교를 나오고, 온갖 장사도 했죠.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려
니깐 돈이 있어야죠. 그 당시만 해도 월사금이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별거 닿는 대로 일
했죠. 신문배달부터 안 해본 거 없다시피 하면서 공부를 했죠.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중
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합격이 되었어도 못 들어갔어요. 돈이 없어서.
그래 가지고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서울 대학에 그 당시에 58~59년도에 방사성 동위원
소라는 것을 서울 대학에서 처음 해서 거기서 모집을 할 때 가 가지고 제가 합격이 되었
어요. 그래 가지고 열여덟 명이 왔는데 두 사람 뽑는데 거기서 되가지고 서울 대학에서
그 방사성 동위원소실에서 공부를 했죠. 공부를 하다가 서울대 편입을 해야 하는데 제
교수님께서 편입이 안 된다 이거죠. 어느 학교 졸업장이나 아무데나 재학증명서나 뭐를
떼어다가 줘야 의과대학에 편입을 시켜준다는 거죠. 그러려고 했는데, 그것이 잘 이루
어지지 않아 가지고, 62년도에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에도 방사선 동위원소실이 있었
어요. 옛날에. 거기가 연대하고 합치면서 신촌으로 갈 때에 서울 대학에서 거기로 가라
해 가지고 방사선 동위원소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깐 학교 공부를
못했어요. 연세대에 사람이 부족하니깐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거길 가게 됐죠. 학교에
입학 할 루트가 없었어요. 그래 가지고 서울대 방사선 동위원소 취급자의 면허만 취득한
채로 거기서 근무를 했지 학교를 들어갈 재간이 없었어요. 중학교만 졸업을 했죠. 15년
동안 연구실에 있으면서 다녔고, 이제 너무 머니깐 신촌에다 방 얻어서 살면서 우리 어
머니랑 같이 살았죠.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둘째 형님은 피란 갔다가 돌아오시고. 첫째 형님(정흥만)은 모르죠. 제가 가서 봤더
니 집에서 모른다는 거죠 나갔다가. 납북된 것은 확실한데 어떤 경위로 해서 갔는지를
전혀 모르지요. 그때에 제가 셋째 형님이랑 셋을 신청했었어요. 첫째 형님하고 셋째 형
님하고 돈암동에 저희 사촌 형님(정흥남)이 또 있어요. 그분하고. 돈암동 사촌 형님도
어떻게 나갔는지를 몰라요. 25년~24년생인데. 그 당시에 제가 접수할 때 저는 뭐 아주
빠지지 않고 적십자사부터 쭉 다 했었어요. 맨 마지막에 고양시청에서 할 때 이 두 분(정
흥만, 정흥남)은 확실한 근거가 안 되기 때문에, 언제쯤 어디에서 어떻게 끌려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신고를 할 수가 없다. 해 가지고 셋째 흥동 형님만이 확실했어요. 날짜
는 자세한 것은 몰라요. 그 당시에는 7월 초순으로 알고 있는데, 잡혀간 원인 이런 것들
은… 그때 세 사람이 와 가지고 붙들고 뒤로 포승줄에 매고 나갈 때 ‘어머니 다녀올께요’
하고서 그게 마지막이죠. (울먹이며).
문_ 다른 기관에서도 연락이 왔는지요?
답_ 없어요. 적십자사가 유일했죠.
문_ 정부지원이나 도움은 있었나요?
답_ 아무것도 없었죠.

호적 정리
<호적에 생존으로 남아있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납북된 첫째 형님은 날짜확인이 안되고 납북경위도 잘 몰라요. 그렇지만 내가 끌려
간 것을 보았던 셋째 형님만 날짜 확인이 가능해서 납북결정 받았어요. 그리고 호적은
아직도 생존으로 있어요.

연좌제 피해
<연구원으로 근무 하던 당시 연좌제로 인해 해외 출장을 나가지 못하여 진급 등 사회생활
에 영향을 받음.>
문_ 연좌제 관련해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많았죠. 연세대 나가면서 외국에 가는 길, 여러 가지 많이 있었어요. (제약이) 굉장히
많았죠. 제일 처음에 독일에 지멘스라는 회사가 있어요. 그 지멘스에서 기계가 들어와야
하는데 일차적으로 거기를 가야 합니다. 거기서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데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북에 형제들이 있다고 하니깐 뭐 그 당시에는 무조건 여권이 아니라 호적등본
을 떼면 형님들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형님은 어디 있고 군대는 갔느냐 조회
를 해서 나오면 무조건 해외를 가는 것은 꿈도 못 꿨습니다. 그 외에 다른 피해는 없었어
요. 그런데 그걸로 인해서 진급이라는 것이 늦어질 수밖에 없고,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서도. 해외에 가서 배워가지고 와야 뭐가 되고 하는데 진급에 지장이 되는 거죠.

정부에 바라는 말
<6·25 역사를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생사확인과 서신 교환이라도 가능하길 바람.>
문_ 정부 또는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지금 대한민국에 바라고 싶은 것은 저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안타까움이 너무 많
아요. 지금 학생들에게 6·25가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대학생들도 30~40%도 모르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거기다가 무슨 9.28 수복이니 1.4 후퇴니 이런 건 전혀 모르
고 연도도 몰라요. 우리 때만 해도 6·25 노래를 부르고 했습니다. 지금 너무 슬픈 역사
를 왜곡하고, 또 우리 납북자 가족 말고도 엄청난 피해를 본 가족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런데 그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현 정부가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이
런 큰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제일 큰 피해를 낸 역사인데 이걸 왜
곡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나도 그 당시를 살고 참관했던 한 청년이었건만 살고도 다 잊
혀져가고 이것이 나라입니까? 하는 얘기를 되묻고 싶어요. 이런 심정에서 이북에 끌려
간 형님들을 어떻게 만나볼 수 있을까 이거는 꿈에서도 생각 못할 일이 아닌가 싶은 생
각에 또 저도 이제 팔십인데 우리 세대에서 소식을 못 듣는다면 우리 후세는 들어 본들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끝으로 바라고 싶다면 왕래보다도 서신이라도 주고받고, 죽었는
지 살았는지 이러한 생사확인이라도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되나, 가능하다면 부모님과 함께 가족 선산에 같이 모실 수 있으
면 좋겠음. 이북에 있는 가족들이라도 상봉한다면 도움을 주고 싶음.>
문_ 끌려간 형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해주세요.
답_ 내가 전하고 싶다면 이제 그래요. 이북에서 돌아가셨겠지만 어떻게 계신지는 몰라
도 남북통일이나 원활한 남북 교류가 되서 알게 된다면, 우리 선산을 만들어 놓은 곳에
부모님과 더불어서 같이 모시고 싶은 심정이에요. 살아 계시다면 거기도 조카들이 있
고, 가족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가족이라도 상봉해서 이북보다는 우리가 더 낫게
사니깐 그런 것이라도 배려하고 교류해서 떨어져 살더라도 그런 것만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지. 지금 이 나이에 만난다는 건 꿈에도 생각을 할 수가 없죠. 만에 하나라도 살
아 계신다면 할 말은 없어요. 무슨 말을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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