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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강복만(증언자-강계화)
이름: 관리자
2021-09-24 15:45:18  |  조회: 61
190612A 강 복 만 (姜福萬)

생년월일: 1915년생
출생지: 황해도
당시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399
피랍일: 1950년 8월 12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전기회사, 농사
학력/경력: 청년단 활동
직계/부양가족: 자녀 2남 1녀, 여동생
외모/성격: 헌신적인 가족 사랑

증언자
성명: 강계화(1942년생)
관계: 장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논에 숨어있던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이 보고 싶어 새벽에 집에 들린 사이, 집을 포위하고 들이닥쳐 끌고 감.
• 아버지와 함께 열일곱, 여덟명 정도 되는 답십리 동네 젊은이들 전부를 끌고 갔고 그 후 답십리에 이분들의 성함을 각명한 비석이 세워짐.

직업 및 활동
<낮에는 전기회사, 저녁엔 농사일을 하였고, 청년단 활동을 했음. 어머니는 전쟁 전에 지병으로 사망. 아버지 혼자서 삼 남매를 돌보고 있었음.>
문_ 아버님의 당시 직업과 활동을 말씀해주세요.
답_ 말로 듣기에는 전기 회사를 다녔대. 전기회사를 다녔는데, 낮에는 거기 근무를 하고 저녁에 와서는 농사를 하는 거야. 그렇게 부지런하셨어요, 아버지가. 아주 잘했어요. 우리들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진짜 아버지는 단원도 했죠, 청년단 단원이지.
문_ 증언자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답_ 그런데 아버지가 전쟁 전 엄마 죽고 나니까 밭에서 옥수수 사다가 쪄다가 화로에다가 놓고서는 옛날에는 그릇이 별로 없으니까 그 데스가부도 미군들 쓰는 데스가부도라는 게 있어요. 철모. 거기에 옥수수를 따다가 거기에다가 뭘로 덮어서 쪄서 우리들 먹이면서 아버지가 우시는 거야. 어머니는 안 계시고 이제 삼 남매 고만고만한 걸 데리고 있어야 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우는 걸 본 게 기억이 난다고.
둘째, 바로 밑에 동생도 다 기억을 해요. 아버지 따라서 밭에도 갔다 오고, 엄마 살았을 때도 엄마가 내가 초등학교 갔다 오면 엄마가 새 보러 갔다 오라고 그래요. 그러면 허수아비 달아 놓고 아버지가 애 내보내지 말라고, 새가 먹다 남은 거 우리가 먹으면 되니까 애 뙤약볕에 내보내지 말라고. 엄마한테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야, 아버지가.
아버지가 우리를 말도 못하게 귀하게 키웠어요. 그 없는 시대에도. 농사지어서 타작을 하면 방에 쌀 일곱 가마, 여덟 가마씩 쌓아 놓고 살았거든요. 그럼 사회사업 하는 육촌 아저씨가 쌀 떨어지면 우리 집에 와서 쌀을 꿔 달라고 그래, 우리 아버지한테. 그럼 우리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하고 꿔 주는 거야. 그렇게 꿔 주면 쌀 다 안 갚아요. 뭐 갚을 게 있겠어? 아버지는 포기하고 그냥 주는 거예요. 같은 고향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납북 경위
<낮에 논에 숨었다가 밤 한 시, 두 시경 아이들을 보러 돌아와 식사를 하던 도중, 총대 메고 완장 찬 군인 두 명이 집에 들어와 총대로 자물쇠를 부수고 다락에 숨은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감. 다음 날 증언자가 전농초등학교에 찾아가 도시락을 전달하고 이튿날도 도시락을 들고 다시 갔으나 이미 사라졌다고 함.>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6·25 때 내가 말하려고 하면 아주 그냥 진짜 그 어린 나이에 (할 말이) 너무 많은 거야.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할 사람도 없고. 6·25가 나서 아버지가 논에 가서 숨어 있으니까, 물기가 있어서 무좀이 많이 났었어요. 그래서 고모가 약 가지고 와서 발라주고 그랬어요.
그때 우리들이 아버지가 언젠간 올 거라고 그러고 우리들이 잠을 안 자고 있는 거야. 아버지 언제 온다 그러면서 아버지 보고 싶어 가지고 안 자고 있으니까 고모가 자라고 난리를 치는 거야. 그랬는데 두 시인가 한 시 되어서 아버지가 들어온 거야. 우리 애들이 보고 싶으니까. 들어와서 고모가 밥상을 차려줬어요. 밥을 먹으려고 그러는데, 우리 집을 포위한 걸 아버지도 우리도 몰랐던 거야.
동네 빨갱이가 하나 있어서 답십리에 청년들을 열여덟 명인가 열일곱 명을 싹 잡아가 버린 거야. 집집마다 그 사람이 가르쳐줬으니까 청년단 사무실에 명부를 보고 다 찾으러 다니는 거죠. 그 사람(앞잡이)은 집만 가르쳐주고 안 온 거죠. 숨어서.
문_ 그날 아버님을 데리고 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답_ 인민군들 같아. 군복 딱 입고, 총대도 길다란 거 그걸 끼고 들어오더라고. 완장 같은 것도 하고. 둘이 와서 끌고 갔어요. 근데 아버지가 들어와서 밥숟가락 딱 들려고 하니까는, 옛날에는 싸리문이 많았어요. 옛날 집이니까. 그런데 방에 있는데, ‘여기 강복만이 들어오는 거 내가 봤는데!’ 하면서 발길로 문을 꽝하고 차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울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강복만이 여기 금방 들어왔는데?’ 하는데, 그사이에 고모가 다락에 아버지를 숨긴 거예요. 숨기고 쇳대를 탁 잠가버렸어. 신발까지 그 안에다 넣고. 아버지가 밥을 막 뜨려고 하는데 들이닥친 거니까. 그런데 그 인민군인지 빨갱이 둘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 ‘강복만이가 금방 들어오는 걸 봤는데 왜 강복만이가 여기 없느냐?’ 그러니까 고모가 하는 말이, ‘애들이 저녁을 안 먹고 자서 지금 애들이 밥을 먹은 거다.’ 그러니까 인민군들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금방 들어왔다는 거야, 보고 들어왔다는 거야. 그러더니 총대로 쇳대를 부수더라고, 그러더니 아버지 목을 끌고 내려온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안 가겠다고 버티고 우리도 울고 난리를 치니까, 갔다가 조사만 하고 금방 보낼 거다 하면서 총으로 위협하면서 끌고 갔어.
문_ 그때 마을 분위기가 어땠나요?
답_ 울음바다예요, 울음바다. 전쟁 일어나기 전에는 평안하게 살은 거죠. 그랬는데 동네 빨갱이가 하나 끼는 바람에. ◯훈이라고, 나중에 들었는데, 성은 모르고. 김 씨라는 것 같아요.

납치 이유
<한때는 청년단 활동을 했으나 동네 빨갱이가 된 김◯훈이 같이 다니며 집을 알려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함. 마을에서 열일곱, 여덟명이 납북되었다고 함. 이들에 대한 기록은 답십리에 있는 비석에 있고, 아버지 이름도 포함되어 있음.>
문_ 왜 납북되셨을까요?
답_ 그게 말하자면. 이 동네 빨갱이가 일어나서 집집마다 다 밤중에 돌아다니면서 다 가르쳐줘서. 그 사람도 그 안(청년단)에 있는 사람이예요. ◯훈이. 토끼장수 했던 ◯훈이라는 사람도 그 명부에 있는 사람이야. 뭐 그 사람도 빨갱이가 되고 싶어서 됐겠어요? 빨간 완장 채워주면서 앞잡이 노릇 하라면서 총대 들이대고 죽인다고 그러니까 (했겠지) 열일곱명인가 열여덟명이 끌려갔는데…
현재 답십리에 사촌이 살아요. 그래서 갔더니 날더러 그래. 사촌동생이 누님, 아버지 비석 구경하러 가실래요? 하기에 그러자 하고 갔었지요. 우리 집 아저씨(증언자 남편) 하고 같이 갔어요. 그랬더니 까만 비석인데 넓이가 이 정도 되고 높이가 이 천장을 넘어요. 어디인지는 모르는데 하여튼 답십리야. 옛날에 도당 때 얻은 자리거든. 일년에 한 번씩 거기서 굿을 했어요. 무당들이 와 가지고 일년에 한 번씩 굿을 하던 자리인데, 그걸 없애고 그 자리에다가 비석을 세웠다는 거야. 비석이름은 몰라. 크기가 이 정도인데, 거기 이름이 다 적혀 있어요. 답십리에서 붙들려간 사람들 열일곱명인가 열여덟명 이름이 다 써 있어요. 청량리 지나서, 답십리라고 하면 구답십리가 있고 신답십리가 있고 그래. 그래서 거기서 사진을 찍었어요. 사진만 가져왔으면 됐는데, 사진을 찍고서는 그 사촌동생이 사진을 안 주는 거야. 언제 나 사진을 줬냐? 비석 앞에서 찍은 거 네가 나 안 줬다 그러니 아 그랬나? 하더니 말아버리는 거야. 그게 6·25 나서 얼마 안 있다 그랬던 거 같은데. 옛날에 국회의원 민자당 있었죠. 그 민자당 국회의원들이 세웠대. 세웠는데 그 사람들이 언제 죽었는지 모르니까 음력으로 9월 9일 날 가면 거기서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유지급들하고 국회의원도 오고.

납치 후 소식
<고아가 되어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보육원에서 어렵게 지냄. 후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적십자사로 추정되는 곳에 갔으나, 찾으려면 백오십만원을 보내야 한다고 하여 신청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함.>
문_ 납치 후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얘기를 들어보니까 전농국민학교 지하실에다 가둬 놨다는 거야. 그래서 고모가 밥을 해주면서 아버지 가져다주래. 내가 혼자 간 거죠. 내 학교니까 아니까. 밥을 드리려고 전농국민학교 가니까 밥을 받아 들이더라고요. 그러고 왔어요.
고모가 하는 소리가 날 더러 애기라 그랬어. 내일도 밥 해주면 아버지한테 가져갈 수 있니? 또 가져갈래? 그러기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니까 고모가 밥을 또 해줬어요. 그래서 다음날 전농국민학교를 갔는데, 엄마들 할머니들이 길에 나와서 막 울고 난리들이 난 거야. 내가 밥을 가지고 가려고 하니까 어떤 할머니가 아가 이리오라고 하는 거야. 밥 가져가도 소용이 없다고. 지금 포승줄에 묶어서 이북으로 다 끌고 갔다는 거야. 하루 저녁 재우고 이틀 만에 끌고 간 거지, 이북으로. 그러니까 할머니들, 엄마들이 나와서 울고 난리를 치는 거지. 집에 와서 고모한테 그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랬느냐며 고모가 막 울더라고요.
문_ 그 후에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 있는지요?
답_ 이산가족 상봉하는 데 갔어요. 지(남동생)가 갔다 왔다고 나한테 얘기를 하니까 내가 알지. 갔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백오십만원을 내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이건 정부에서 하는 건데, 무슨 백오십만원을 내느냐 이랬대요. 거기서 하는 말이 백오십만원을 우리가 쓰는 게 아니라, 그 돈을 받아서 달러로 바꿔서 이북으로 보내야만 사람을 찾는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적십자지. 적십자도 거기 같이 다 있더래요. 처음 듣는 소리죠. 나도 처음 들었죠. 그러니까 우리 동생도 이제 아버지가 살았어도, 그때 당시에 구십이 넘어서 백세가 다 돼 가는데, 그래도 한 번이라도 희망을 가져보자고 걔가 간 건데, 백오십만원을 내라니 그래서 그냥 왔다고 그 얘기를 나한테 하더라고. 그래서 잘했다고. 그놈들 한 푼이라도 보태주면 안 된다고. 왜 주느냐고. 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셨지, 지금까지 살아계시지도 않는다고.

남은 가족의 생활
<납북 이후 밭에서 딴 호박, 옥수수를 팔러 청량리 굴다리에 간 고모가 폭격으로 사망. 고아가 된 삼 남매 중 막냇동생은 큰아버지와 함께, 증언자와 둘째 동생은 보육원을 하던 육촌 아저씨를 따라 제주로도 피난가게 됨. 제주도 보육원에서 어렵게 살아가다 둘째 동생은 사망, 막내는 제주도로 왔다가 도망을 쳐 청주 외할머니 댁에서 지냄.>
문_ 납북 이후 남은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했나요?
답_ 어머니 돌아가시고 고모가 와서 있어줬을 때만은 우리가 그렇게 고생을 안 했지. 땅도 있고 집도 있고 다 있으니까. 아버지 납북되고 고모가 밭에서 호박이니 옥수수 같은 거 그런 거 따서 청량리에 굴다리로 팔러 간 거야. 고모가 돈 한 푼이라도 번다고 갔는데 6·25 때 청량리 굴다리가 폭격을 맞은 거예요. 그래서 고모가 거기서 즉사를 했어. 고모 시체도 못 찾았어요. 동네에서 소문이 돈 거지. 우리 고모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거기청량리 굴다리에 장사하러 갔으니까. 동네 사람들 말이 죽었다고 들어오는 거야. 그러니까 고모까지 그렇게 되니까, 우리 셋이서 갈 데가 없는 거라.
그래서 지금 강남에 있는 막내는 큰아버지가 데려가고, 우리 둘은 황해도에서 넘어온 육촌 아저씨 그 아저씨가 사회사업을 했어요. 보육원을. 쉽게 말하자면 고아원을 한 거야. 그래서 나하고 내 밑에 동생은 거기로 딸려 간 거야. 갔는데 기차를 타려고 노량진에서 가서 한 달을 지내다가, 강원방이(육촌 아저씨)하고 부인하고 피난길에 갈라진 거예요. 고아들을 몇 명씩 데리고 길이 어긋나서 갈라진 거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안 되어서 우리는 육촌아줌마 따라서 가고 나머지 몇 명은 육촌 아저씨 따라서 노량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질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기차는 온다 그러고, 기차 제일 꼭대기에 탔어. 근데 완행열차야. 조금 가다가 쉬고, 한 두 시간 가다가 사람들 오줌도 누고 해야 하니까 쉬는 거야. 쉬는데 우리가 그 꼭대기에서 내려오려면 송장을 밟고 내려오는 거야, 말하자면. 그러고 볼 일 보고서 또 올라가는 거야. 그럼 다 올라왔다고 신호가 오면 기차가 출발하고. 그렇게 부산에 도착 했는데, 부산서 큰 미군 아구리배가 왔는데, 부산 바다가 얕아서 그 아구리배가 못 들어온대. 그래서 미군 보트배가 있어요. 약 이십대가 피난민들을 실어 나르는 거야. 피난민들을 전부. 우리뿐이 아니고 피난민이 많았죠. 다 실어 나르는 거야.
그래서 제주도에 도착을 했는데, 피난민이 너무 많으니까 분산을 시킨 거야. 근데 우리는 제주도 표선이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로 우리가 배당이 된 거예요.
고아인 우리들도 가고 다른 피난민도 같이 껴서 간 거지. 갔는데 거기도 말하자면 부인회가 있었나 봐요. 부인회에서 커다란 솥을 가져와서 노란 좁쌀로 죽을 쒀서 나무 국자로 한 사람당 한 국자씩 주는 거야. 피난민들도 우선 먹어야 하니까, 가서 한 국자씩 주는 죽을 먹는데 진짜 맨 죽은 못 먹겠어요. 그래서 소금을 좀 달라니까 소금이 없다는 거야. 소금을 안 줘. 그래서 맨 죽을 먹었어요. 표선초등학교 강당, 교실에다가 전부 피난민들 수용시키면서. 나는 표선에 있다가 제주시로 오게 된 거예요.
삼성열이라고 아시는지 모르겠네. 제주도에 삼성열이라고 있어요. 거기에 고 씨, 양 씨, 부 씨 세 사람이 그 굴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굴인데 둥그렇게 가시철망을 해서 구멍을 요만큼씩 세 군데가 있어요. 근데 거길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그 안에는. 그때는 우리가 어릴 때니까 거기 들어가서 놀려고 그러니까 안 된다고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미군들이 한 세대에 천막을 하나씩 주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었냐면 명진보육원, 한국보육원. 내가 따라간 데는 화생보육원이에요. 보육원 세 군데가 삼성열에 나무 많은 데 천막 치고 사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이 강냉이 가루, 밀가루, 알 강냉이 같은 거 배급 타서 먹고 그렇게 한 1년은 있었을 거예요. 그러다 제주시로 간 거야. 제주시로 가서 정
276 2부 증언자료 277
부에서 어떻게 해서 집을 하나씩 해서 고아들 키우라고 줬어요. 한 10년인가 15년? 20년 살았을 거예요. 제주도에서 쭉 있었죠. 보육원에 있었던 거죠.
그러다 강원방이 원장 우리 육촌 아저씨가 병이 난 거야. 지금으로 말하면 암 같아.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에 간 거야. 거기서 검사 다 하고 나는 그때 조그마하니까 나를 밥해주라고 나만 서울로 올려 보낸 거야, 마누라가. 가서 심부름해주고 밥해주고 죽 쒀주고 그러라고. 그래서 서울 올라와서 방을 조그만 거 하나 얻어서 원장님(육촌 아저씨)과 같이 있다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그러다 돌아가셨어.
그때 내가 열두 살 정도 됐을 거예요. 그랬는데 육촌아줌마가 강원방이라는 사람하고 진짜 마누라가 아니고 강원방이라는 사람이 이북서 넘어올 때 마누라를 데리고 넘어왔는데 아들 넷을 낳고 본마누라가 죽었어요. 죽으니까 재취를 얻은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평안도 여자야. 사회사업 한다고 처녀라고 시집을 온 거지. 와서 딸 둘을 낳았어요. 그래서 같이 피난을 다녔는데, 강원방이라는 사람이 죽으니까 여자 혼자서 사회사업이 안 되잖아요. 그래도 혼자서 몇 년 하다가 해산이 되어 버렸어. 벽재 가는데 대자리 가는데 보면 집이 한 채, 한 채씩 있어요. 정부에서 해줘서 거기 있다가 안 되겠으니까 해산을 다 시킨 거야. 다른 보육원으로 다 간 거야.
나는 그때 나이가 열네살인가 열다섯살인가 모르겠어, 기억도 안 나. 나랑 같이 있던 두 살 위에 사람이 같이 나와서 살자고 그래서 같이 나와서 숟가락 하나도 없고 이불 하나도 없고 말도 못하게 고생을 했어요. 우리 집 아저씨가 제주도에 오현중학교라고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거길 나왔어요. 나는 거기서 육촌 아저씨 살아계실 적에도, 그 아줌마가 꾼보에요. 아줌마 그런 사람을 꾼보라고 하는데, 날 가지고 구박을 하고 식모로 부려먹는 거예요. 식모를 두면 월급을 줘야 하니까. 그렇게 구박을 하고, 밥을 하면 손으로 이겨 봐요. 애들이 많으니까 밥을 큰 가마솥에 하잖아요. 그럼 쌀을 조금 씻어서 퍼지지 않게 앉혀서 쌀 조금 퍼서 원장네 집 식구들 가져다주고, 애들은 순 보리밥 해서 주는 거야. 나중엔 안 되겠으니까 자기네들은 따로 해 먹겠다고 해서 나를 자기네 식모로 쓰는 거야. 학교도 안 보내고. 나를 초등학교도 안 보냈어요.
답십리에서 2학년 다니다가 6·25 나서 학교를 못 갔어요. 밥을 해다 주면 손으로 이겨보고 밥이 뜸이 덜 들면 잘 안 이겨지고 몽우리가 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가면 육촌 아저씨도 같이 있는데 상을 들고 가면 너도 강 씨냐고 하면서 머리를 숟가락으로 때리는 거야. 그럼 처마 끝에 가서 실컷 울다가 들어오면 또 어디 갔다 왔느냐고 야단을 또 치는 거야.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죠.
그 당시에 강원방이라는 사람이 있을 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마누라 때문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어찌나 들들 볶는지. 어찌나 볶는지 못 살아. 그래서 이 아저씨가 병이 난 거야. 육촌 아저씨는 남자니까 나를 상 밑에서 야단을 치고 뭐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화가 나니까 부인을 때리려고 할 거 아니에요. 그럼 원장 부인이 뛰어나가고, 조용하면 또 들어가고, 들어가서 또 싸우는 거야. 하여튼 제주에서 싸움도 무지하게 했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호적 정리
<남동생이 장성하고 나서 큰댁에 물으니 납북된 아버지의 호적은 전쟁 때 다 불타서 소실되었다고 하여 가호적을 만들었다고 들었음.>
문_ 아버지와 형제들의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그동안 제주도로 피난 가서 우리 큰동생이 열아홉 살인가 스무 살이 되었어요. 그래서 큰아버지한테 가서 땅을 달라고, 그리고 우리 호적을 만들어 달라고. 우리 호적은 어떻게 되느냐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피난 갔다 오니까 정부에서 호적이 다 불에 탔기 때문에 가호적을 하라고 했다고 큰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삼 남매를 호적을 안 만들어 놓은 거야. 보육원에서도 호적을 안 만들어 놓은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뭐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지, 호적이 없으니까는. 우리 집 아저씨도 보육원에서 나와 가지고는 조천에 사는 친구가 오현중학교 동창인데, 호적이 없다는 말을 그 친구한테 얘기 한 거예요. 그 친구 아버지가 조치원에 사는데 호적 계장이래. 그래서 우리 집 아저씨는 거기서 호적을 만들었어요. 그때는 총각이니까. 내 호적은 안 만들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이러다 보니까 내 호적이 없잖아. 그래서 가호적을 한 거지.
우리 호적이 아버지 호적이지, 말하자면. 아버지가 결혼을 했으니까 우리가 거기 다 실려 있을 거 아니에요? 나중에 고아원 하던 아줌마가 자식들 다 데리고 미국에 이민을 가는데 호적이 필요해서 구청에 가서 찾아보니까 호적이 그대로 다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건 다른 사람한테 들은 소리인데 만약에 나라에서 전쟁이 나잖아요? 그럼 호적부터 챙긴대요. 나라의 재산이기 때문에 호적부터 챙기기 때문에 호적이 없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데 큰아버지가 우리한테 거짓말을 한 거지. 그래서 우리 삼 남매가 전부 가호적이 되어서 형제로 안 묶여 있어요. 남동생도 이제 아버지 엄마 성만 따서 가호적을 만든 거지. 강남에 있는 막내에게 아버지 엄마가 올라가 있는 거지. 큰아버지가 호적을 안 만들어 놔서 고생했어. 아주 원망스럽지.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연좌제가 뭔데? 아, 그게 없어요. 몰라요.

정부에 바라는 말
<바라는 게 없다. 앞으로 전쟁 날 일 없겠지만,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반복되면 안된다 생각함.>
문_ 지금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나는 바람도 없고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고 80이 다 되었으니까. 이제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겠어요. 뭐 이제 앞으로 전쟁 날 일도 없겠지만,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으면 안 되는 거고. 진짜 그때만해도 우리나라가 조금이라도 뭐가 있었으면 그놈들한테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워낙 없이 살고 전쟁 준비도 안 했고. 어릴 때 들은 것이 우리가 전쟁 준비도 안 하고, 그놈들이 탱크를 밀고 내려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전까지 내려오고 대구까지 온 거예요. 피난민들 보다 고아들을, 미국 사람들은 이제 고아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들이 구호물자니 뭐니 막 줘서 살았지. 그래서 남들은 미국 사람들 욕하려는지 몰라도, 나는 그 사람들이 은인이야. 나한테는 은인이야, 미국 사람들이.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계속 숨어 있었다면 안 잡혀갔을 텐데, 아이들 보러 오신다고 왔다가 그렇게 붙잡혀 가신 게 가슴이 너무 아픔. 증언자의 아들도 사고로 잃어 며느리마저 혼자가 되었음.>
문_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를 말씀해주세요.
답_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그냥 거기 숨어 있었으면 안 잡혀 갔을 텐데, 밤중에 뭐 하러 들어와서 세상에 그게. 그 놈들한테 끌려가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우리 아버지 얘기만 하면 나는 눈물이 나고 아주 미칠 것 같아요.
(울먹이며) 아주 그냥. 아버지가 너무 우리들한테 헌신적으로 하고, 이북에서 이남으로 넘어와 장가들어 애 셋을 낳아 놓고, 얼마나 아버지가 진짜, 엄마가 죽으니까 세 번이나 기절을 했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진짜. 아버지는 진짜.
나는 엄마는 기억을 못 해요. 그냥 뜨개질한 거 있으면 그거 풀어서 뜨개질해서 우리 양말 신기고. 그 당시에 나 초등학교 들어갈 때는 가방 멘 애가 없어요. 다 보자기로 해서 둘러메고 다녔는데 아버지가 그 밤새 가방을 사다 주더라고. 사다 주면서 이걸 메고 다녀라 아버지가 그러는 거야. 그래서 어린 마음에 아버지 돈이 어디서 나서 이거 샀어? 하니까 아 그냥 메고 다녀. 아버지가 사다 준 거니까. 그리고 아버지 혼자 있을 때도 일을 다니고 들어올 때는 참외를 꼭 세 개를 사요. 사 가지고 옛날에는 봉지가 없으니까 끈으로 묶어서 가져와서 똑같이 나눠 주는 거야. 그런 것도 다 생각이 나고. 아버지가 진짜 너무 그냥, 밭에 나가서 우리 어머니가 새 보라 그러면 새 보지 말고 그동안 공부를 하라 그러고. 아버지가 그렇게 반대를 해서 새 보러 한 번도 안 나갔어요. 동네 친구들은 많이 나갔는데, 나는 안 나갔어요. 그렇게 아버지가 우리들을 키웠는데. 당신이 끌려가면서 오죽 했겠어요? 끌려가면서.
머리에서 상상만 해도 너무 그런 거야. 나는 그래서 갈월동에 살다가 여기로 이사를 왔거든요? 우리 아저씨 돌아가신 지가 지금 햇수로 십팔년이 됐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딸은 지금 논현동에 살고 아들은 인하대학을 나왔어요. 공부를 시켜서. 온갖 고생 다 하면서 대학공부를 시켰는데. 그래서 삼성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아침 출근길에 덤프트럭과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어. 그래서 시체도 그냥… 덤프트럭이니까 얼마나 크겠어요. 죽은 지가 한 사년 됐나 봐요. 요즘도 며느리가 전화 오고, 전화 오면 막 우는 거야. 어머니, 지금 들어오는 거 같고 침대에 누워있는 거 같다고 통곡을 하며 울어. 그러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더 아프겠느냐고. 회사 출근하다가 그렇게 돼 가지고, 너무 지금 가슴이 아파서 아들 생각만 하면. 나는 여기서 우리 집 아저씨가 일년 아파서, 사는 사람을 내보내고 사는 집이 경매가 되어서 들어왔어요.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해도 못해요. 오죽하면 내가 고등학교, 중학교만 나왔어도 내가 자란 글을 쓰면 아마 방송국에 드라마로 당선이 될 거라고 그 말을 오죽하면 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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