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양대현(증언자-양성안)
이름: 관리자
2021-09-27 15:09:25  |  조회: 185
190902B 양 대 현 ( 梁大鉉)

생년월일: 1915년 5월 27일
출생지: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시미리
당시 주소: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시미리
피랍일: 7~8월 오후
피랍장소: 마을 동네(신작로)
직업: 농사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배우자, 자녀 2남 3녀
외모/성격: 성격이 거칠고 목소리가 큼

증언자
성명: 양성안(1944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당시 30대로 청년단으로 활동한 것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동네에서 농사지으며 살다 동네 청년들의 행사
가 있으면 불려나갔음.
• 행렬에 섞여 아버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르고 당시 어린 아들이었던 증언자가 엄마와 손을 잡고 다
녀오라고 배웅하러 나갔음.
• 인근 마을 청년들이 대거 인력과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함.

직업 및 활동
<농사를 짓고 살았음.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어른들과
목총으로 훈련연습 하는 것을 봄.>
문_ 아버님의 직업이나 사회적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답_ 농사 짓고 살았어요. 그때 당시에 소학교 정도는 나오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는
가족들이 다 한 집에 살았었어요. 친할머니, 우리 어머니, 우리 형님, 우리 누님, 그리
고 저, 제 밑에 동생들 둘 이렇게요. 2남 3녀에요.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에서 활동을 하
신 것이 확실하지는 않아요. 우리 아버지가 그때 당시에 30대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런
행사가 있으면 불려나가고 그러셨어요. 그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나무로 만든 목총을 가
지고 훈련연습도 하고, 집에 와서 일하는 걸 내가 봤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간부가 됐었
는지 이런 건 모르죠. 그때 당시 내가 사상교육 받았거든요, 그게 참 싫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자라면서도 우리 아버지하고 니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가게 된거냐? 이런 소
리를 못하고 자랐어요. 친구들끼리도 그런 얘기를 전혀 못했어요. 그런데 봉필애라는
친구를 이제 저기 임진각 저기 오픈할 적에 만났어요.필애야 너는 어떻게 오게 된 거냐?
했더니 나도 우리 아버지가 6·25때 납북 됐잖아요 이러는 거예요. 그래도 그때 죄의식
이라는 게 있어 가지고 이런 얘기를 못 물어봤어요. 지금 6·25 납북자들이 거의 다 죄
의식 갖고 살았으니까… 전 그렇게 생각해요. 동네에서 봉필만이나 봉필애는 임진각 가
서 알았지만, 같이 이런 거에 대해서 알려고 하기도 싫고 그렇더라고요. 어렸을 때 싫었
던 기억에 대한 느낌이 대한청년단일거예요. 내가 정확한 소속은 몰라서 그런데, 청년
단은 맞아요. 봉필만이 아버지가 청년단 총무인가 뭔가 했나보더라고요. 청년단 단장이
었던 사람은 김학래 씨 아버지인데, 그 양반은 그때 바로 잘못됐다는 말도 있고 구체적
인 건 잘 몰라요. 봉필만이랑 봉필애는 사촌이에요. 사촌인데, 봉필애 아버지가 막내예
요. 봉필용 아버지하고 봉필만 아버지하고, 봉필애 아버지하고 삼 형제인데, 그 삼 형제
중에서 봉필용 아버지만 안 가고 둘째, 셋째만 간 거죠.

납북 경위
<청년단에 서명해서 불러냈을 것이라고 추측.>
문_ 아버님이 납북되었을 때 동네 상황은 어떠했나요?
답_ 그때 당시에 6·25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니까 그때 막 끌려가는 것도 많이 봤고,
동네에서 뒷간에서 숨다가 또 끌려가서 매 맞고 이러는 걸 많이 봤고 그랬거든요. 그때
그 정황이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어렸을 때에도 죄인의식 같은 걸 많이
느꼈어요. 우리 동네가 한 96가구 정도 되서 다복하게 한 동네로 밀집되어 있어요. 큰
마을이죠. 동네 위치도 산봉산이라는 산을 끼고 우리 동네가 있어요. 그래서 위치가 좋
아요. 동네에서 차 다니는 거리도 얼마 떨어지지도 않고 그래서… 조건이 좋았는데, 그
때 당시 6·25난 것도 우린 몰랐어요. 전쟁이 나다 보니까 막 붙잡아가고 이러는 걸 숱
하게 봤어요. 그때는 그냥 반공호를 파 가지고 밑에서 숨어 있었어요. 반공호를 전쟁나
고 한참 뒤에 파서 들어갔었죠. 그 후에도 시국이 원만하질 못하다 보니까, 반공호라는
게… 옛날에는 재래식 아궁이고 그랬잖아요. 나무 쌓아놓는 데 밑에를 파 가지고, 나무
밑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가 아마 7월 8월쯤 되지 않았나 싶어요. 6·25도 났었지
만 그 이후에 시국이 불안해가지고 막 그냥 후퇴도 하고 전진도 하고 그랬을 때니까요.
문_ 전쟁 전에는 어땠나요?
답_ 농악들을 다녀오더라고요, 우리 아버지가 상쇄를 많이 치더라고요. 그런 걸로 봐서
분위기가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근데 동네 골목에서, 동네 안에 사거리가 있는데, 사거리
에서 모임을 가지면, 청년단 단장네 집이 사거리 바로 옆에 있는 데 그 집이 좀 컸어요.
전쟁이 나기 전에는 평소랑 똑같았어요.
문_ 어떻게 납북되셨는지요?
답_ 그때가 낮에 아마 7,8월의 오후쯤 되는 것 같아요. 그때는 서명을 해서 불려내 간
것 같아요.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우리 아버지 행렬로 쭉 가는데, 아버지도 이제 간다고
그랬던 거 같아요. 내가 지금 생각을 해보면, 동네에서 그냥 몇 사람이 갔다 그러면, 몇
사람이 가고 말아야 하는 데, 행렬이 쭉 있었으니까… 거기다 의용군 붙잡혀 가는 사람
만 있는 게 아니라, 인민군도 같이 있었으니까 불려나간 거 같아요. 우리 어머니도 영문
도 모르고 그러니까 길 있는 데까지 배웅하러 간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나도 거기
까지 쫓아간거죠. 우리 동네가 마을에서 버스타는 데 까지가 1km가 못될 거예요. 거기
까지 이제 신작로까지 걸어가는 거예요. 거길 가보니까 사람들이 소위 얘기하는 군대에
서 행렬하듯이 쫙 가더라고요. 그때 제가 알기로다가, 우리 동네에서는 10여명정도 납
치됐던 거 같아요. 군인들이라는 게, 우리 아군들 군인들은 본 기억이 안 나고, 인민군
들은 복장이 지난 번 광화문에서 퍼포먼스 한 거랑 비슷한 게 기억이 나요. 비가 오고 우
리 아버지가 갔을 때 비가 온 건 아닐텐데, 막 오고, 우리 아군이 부산까지 다 밀렸었잖
아요. 그때 신작로 앞으로 그 사람들이 다 와 갖고 군인들을 많이 봤죠. 그러고 나서 얼
마 안 있으니까 미군들이 와 가지고 우리 마당까지 들어왔었어요. 그때 지프차가 들어
왔는데, 미군 애들이 오니까 시커멓고 깜둥이가 오니까, 그거 보고 우린 다 도망간 거예
요. 시커먼 검둥이가 총들고 오니까, 내 동생 둘만 남기고 다 도망간 거예요. 그니까 그
때 당시에 문턱이 좀 높았어요. 문턱을 붙잡고, 걔들이 가고 난 담에 저쪽에 숨었다가,
동네에서 갔다고 수근수근 하잖아요. 그래서 내려와 보니까 오줌을 싸고서 애들이 울고
있더라고요. 우니까 달래느라고 초콜렛을 주고 그랬나봐요. 그러니까 더 놀래가지고…
나중에 두 동생들은 전쟁 중에 죽었어요.

납치 이유
<인민군이 아버지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데려간 것으로 보아 의용군으로 끌려갔을 것이
라 추측.>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청년단으로 활동한 게 확실하지 않아서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마 의용군으로 끌려가
신 것 같아요.

납치 후 소식
<한참 뒤에 같이 끌려간 이한용의 아들에게서 아버지하고 포천까지 갔다가 자기는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들음.>
문_ 납치 후에 아버님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양택수 씨하고, 이한용 씨라고 두 분이 포천까지 같이 갔대요. 이한용 씨는 우리 아
버지하고 동갑이고, 양택수 씨는 조금 아래고. 그래서 포천까지 가면서 이한용 씨하고
양택수 씨가 우리 아버지한테 야, 우리 여기까지 왔는데 도망가자 그러니까 인민군들이
도열해서 포위해서 가는데, 여기서 어떻게 도망가냐? 하니까, 죽는다 그랬대요. 다 총
메고 그랬으니까.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가다 죽으나 가야 되지 않느냐 그런 식이였나봐
요. 그 양반들은 얘기할 시간도 없잖아요. 혁대를 풀면서 똥 마려운 척하고 산에서 둘이
서 하나는 먼저 그러고 하나는 저만치 가다가 아이고, 나 배탈 나 죽것다고 그러면서 도
망을 나온 거예요. 도망을 나와 가지고, 동네는 못 들어오고, 몇 달 동안 친척집이나 이
런 데서 은거하다가 동네가 조용하고 그러니까 그때 들어오신 것 같아요. 두 양반들이
다 그렇게… 소위 탈출이죠. 탈출해서 온 거죠. 두 양반이 다 그렇게 돌아왔어요. 그렇
게 아버지랑은 포천까지 같이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큰형과 같이 농사짓고 일하며 생계를 유지함.>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우리는 아버지도 안 계시고, 피난이라고 그래봐야 산으로 가서… 동네 산, 좀 깊숙
한 데. 멀리는 못 갔어요. 주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많고. 생각이 좀 있던 사람들은
멀리 가고 그런 것 같더라고요. 피난 안 갔던 이유는 특별하게 기억은 못하고, 그때 어
머니나 할머니가 인민군들 오니까 도망가자하고, 도망가는 걸로 끝이었죠.
문_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답_ 어머니가 83년도에 돌아가셨나봐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니까 우리
그때는 상황이 가족들한테 그런 저런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
도 얘기를 못했고, 내가 기억이 남는 거는 우리 할머니가 우리가 손자니까, 예뻐해주고
그런 것만 기억이 나고,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되면서 우리 할머니가 속상해 했던 마음
으로 1년 있다 돌아갔는지…그거는 정확하지 않아요. 하여튼 시국이 아주 복잡할 때 돌
아가셨어요. 그래 가지고 그때, 상여에다가 지금처럼 수의를 하는 게 아니고, 그때 당시
에 죽으면 입던 옷에다가 가마자루에다 둘둘 말아가지고 그냥 묻었거든요. 동네 사람들
이 상여를 메고 가다가 비행기가 ‘웽’하고 뜨면 숨어서 있었고 그때는 어머니랑 큰형이랑
같이 일하고 농사 짓던 거 짓고 그렇게 생활을 해 온 거죠.
우리 형님이 먼저 61년도에 이사 왔을 거예요. 그때 저도 올라와 가지고서 직장에 조금
다녔죠. 한영 알루미늄 공장에 한 5~6개월 다닌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머니도 떨어져
가지고, 형님 밑에 와 있는 게 싫어가지고 내가 다시 용인으로 내려갔어요. 내려가서 농
사 짓다가 군대를 갔죠. 형님은 인천에서 계속 살고요. 우리 형님도 직장은 알루미늄 공
장 같이 다녔었고, 몇 년 다녔죠. 그러고서 나는 내려와 있으니까… 거기 봉급도 작고
이러니까 그만두고, 장사를 한다고 형이 그랬어요. 장사를 좀 하고 직장 다니고, 다시
장사하다 생활이 그랬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에서 받은 도움이나 지원은 있었나요?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문_ 적십자사나 이산가족 찾기 이런 데 신고를 했는지요?
답_ 신고한 적은 없어요. 그때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요. 우리 형님은 여
덟 살 더 많으니까 알 수도 있겠죠. 내가 가족회에다가 신고해서 참여하게 된 동기는 (납
북이야기를) 봉필만한테 들었어요. 넌 이런 정보를 어떻게 들었냐 하니까 가족협의회에
회비를 내면 알려준다고 했어요. 전화를 해서 내가 이렇게 한 거예요. 납북자 결정 통
지서 받을 때 진상규명위원회에 있을 때부터 관심있게 신고를 했어요. 제가 장례식 버
스 사업을 했었는데, 그러다보니까 전국을 안 다니는 데가 없어요. 포천 쪽이나 파주 병
원에 가서 한 7년 동안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포천까지 갔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기 때
문에 비석 같은 거 보면 6·25때 저기 된 비석을 유심히 많이 봐요. 혹시 우리 아버지가
이런 데 이름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통일 전망대에도 보면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나
와 있어요. 그런 걸 내가 유심히 보죠. 그런데서는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어요. 8월 15
일 이전인 거 같아요. 내가 8월 한 10일 경인가, 파주 광탄을 갔었어요. 거기서 현역들
이 부사단하고 이사단 현역들이 나와 가지고 출렁다리를 갔는데 군인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6·25 때 납북됐던 사람들 신고 받는다고. 거기 가니까 광고판 비슷하게 팜플렛
을 걸어놓고 6·25때 납북됐거나 끌려갔거나 이런 사람들 신고해라. 그런데 그 친구들
이 지금같이 설명을 쭉 하더라고요. 얘기를 다 했더니 자기들은 군인이기 때문에 그때
6·25 때 어디서 전투가 치열했고 그런 것들이 다 기록이 있나봐요. 요새 자막에 나오던
데, 6·25 납북자들 발굴한다고 계속 나오더라고요. 어디까지 가서 치열했던 그 부근을
발굴하나 봐요. 근데 그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면서 DNA까지 얻어요. 근데 그 전에
는 DNA를 혈액이랑 머리카락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서는 입안에 넣고서 하더
만요, 그게 더 정확하다고 하더만요.

호적 정리
<2004년도에 사망신고를 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형님이 하자고 해서 한 15년 정도 전에 사망신고를 한 걸로 돼 있어요. 2004년 정
도, 그 시점에 사망신고를 어떻게 하면 되냐? 우리 선배가 면장인데, 면사무소에 찾아
가니까 이거 인우보증 두 사람만 세워. 인우 보증 두 사람만 세우면 사망신고 되는 거
야? 하니까 되지. 그래서 형이 하나 서 해서 형이 하나 서고, 친구가 하나 서고 이래서
됐어요. 납북된 걸 알았지만 사망신고를 했죠. 그런 거에 대한 기록 없이 사망신고만 했
어요.

연좌제 피해
<전혀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저는 군대 생활도 카투사 생활을 했는데, 군대 생활 30개월을 했는데, 카투사만 25
개월을 했어요. 카투사가 보통 15개월 정도면 한국부대로 군대이동을 하는 거예요. 기
성부대에서 일반부대 생활을 하다가 카투사로 차출이 되면 나머지 잔여기간을 카투사로
들어가는데 그니까 영장을 받고 군대를 갔는데, 논산 훈련소를 다 거쳐서 전주 35예비
사단을 떨어졌어요. 거기서 66년도 4월달인가 그때가 ROTC들이 막 예비사단으로 교
육을 받으러 와요. 우리가 기관요원이죠. 우리가 시범조교가 되고. 그때 백마부대에서
월남차출이 막 왔거든요. 우리 동기들이 월남을 많이 갔는데, 그 1차 가고 차출이 떨어
졌는데, 우리 선임 하나가 막 헐떡거리면서 뛰어오더라고요. 야! 너, 임마, 카투사니까
여기 있는 거 다 집어치우고 복장만 챙겨서 빨리 가라고 그렇게 해서 25개월 카투사 생
활을 했죠. 연좌제 피해 같은 건 걸려본 것도 없고, 옛날에 외항선 선장도 했는데, 그거
하려면 야간 통행증이 있어야 했어요. 그거 아무나 못 받았어요. 그런데 그때도 전혀 구
애 안 받았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좀 더 자세한 진상규명이 필요함.>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그때는 우리가 자라는 과정이니까 야, 네 아버지, 그때 다 끌려간 거야 이러니까 끌
려갔다는 자체가 죄인 같다는 의식, 지난번에도 납북자 가족들 같이 얘기해보니까 나 같
은 마음이더라고요. 죄의식 가지고… 소위 얘기하는 우리도 유공자 대우 받아야 돼 하고
떳떳하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하루 빨리 국회에서 통과가 되고, 국회에서 여
론화되고 해야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겠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적법절차에
의해서 법령으로 해결이 돼야지, 나중에 피해보상이고, 명예회복이고 그 사람들이 다
나 같이 이런 가족이면서도 떳떳하게 6·25 때 끌려가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끌려갔다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내가 본 거로는 그때 그렇게 많은 행렬이 갈 적에 개별적으로 북
한을 찬양하기 위해 갔다? 그러면 그렇게 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니까 우선은 정부에
서 관심 있게 국회에서 논의가 되가지고, 결정이 나야 돼요. 국회에 심재철 국회의원이,
그 양반이 지금 자유한국당 14명인가 15명이 발의를 한 거예요. 지난번 국회도서관에
서 세미나가 열린 건데, 이런 게 자꾸 되서 법으로 통과가 되서 진상이 밝혀져야 되지 않
겠나 그런 생각이에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아버지가 도망오지 않은 것 같아 자라면서 대한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과 억울함 있음.
그래도 잘 살았다고 말하고 싶음.>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아버지는 그때 도망도 못 가고 가족에 대한
책임이 없었나. 그런 게 섭하고 아쉽고, 그때 당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괜히 죄의식
같은 걸 느끼고 살았기 때문에, 떳떳하게 남들은 다 아버지 밑에서 사는데, 그러지 못한
게 좀 억울하죠. 많이 억울하죠. 그걸 다 말로 다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제가 원래 또
체격도 좋았고, 힘도 좋고 그러니까 누구한테 그런 걸로 놀림을 안 받고 살았어요. 사회
생활도 우리 아버지가 없이 자랐어도 조금도 그늘에서 살지 않았고, 남들보다 앞에 서서
살았지, 뒤쳐져서 살지는 않았어요. 그런 점이 진상이 좀 밝혀져 가지고 매끄럽게 잘 됐
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30 납북자-이주신(증언자-이영찬, 이경찬)
관리자
21-09-27 252
229 납북자-윤삼식(증언자-윤병조)
관리자
21-09-27 190
228 납북자-전상규, 전용규, 전인규(증언자-전덕자)
관리자
21-09-27 182
227 납북자-박수홍(증언자-박동화)
관리자
21-09-27 170
226 납북자-안홍모(증언자-안순일)
관리자
21-09-27 180
225 납북자-봉재석, 봉재충(증언자-이풍렬, 소명규, 봉필만,봉필회)
관리자
21-09-27 195
224 납북자-임완수(증언자-임재우)
관리자
21-09-27 162
223 납북자-임찬선(증언자-임화순)
관리자
21-09-27 187
222 납북자-양대현(증언자-양성안)
관리자
21-09-27 184
221 납북자-김현례(증언자-문대완)
관리자
21-09-27 180
220 납북자-안승우(증언자-안승범)
관리자
21-09-27 170
219 납북자-임명근(증언자-임갑희, 임용수)
관리자
21-09-27 178
218 납북자-이완중(증언자-이무성)
관리자
21-09-27 196
217 납북자-김용진(증언자-김윤길)
관리자
21-09-24 188
216 납북자-왕영덕(증언자-왕영식)
관리자
21-09-24 163
215 납북자-박홍구(증언자-박신자, 박정자)
관리자
21-09-24 196
214 납북자-정흥동(증언자-정흥산)
관리자
21-09-24 173
213 납북자-방영흥(증언자-방재흥)
관리자
21-09-24 169
212 납북자-강복만(증언자-강계화)
관리자
21-09-24 183
211 납북자-이재환(증언자-이영선)
관리자
21-09-23 189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