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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화실(증언자-이영석)
이름: 관리자
2017-01-26 16:07:02  |  조회: 1486

이 화 실( 李花實)
2016. 4.17. 채록


피랍인
생년월일: 1920년 12월 8일
출생지: 서울 세종로 54번지
당시 주소: 서울 세종로 54번지
피랍일: 1950년
피랍장소: 자택
직업: 운수업
직계/부양가족: 부모, 배우자, 1남 1녀
외모/성격: 체격이 좋고 미남형


증언자
성명: 이영석
관계: 아들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일제강점기 때 공직에 있다가 해방 후 매국했다고 하여 집을 빼앗김. 전쟁 후 피난을 가려다가 한강 다
리가 끊겨 다시 집으로 와 있는 상황에서 끌려감.
• 동네 좌익이었던 증언자의 친구 아버지가 돈 많은 지주라는 명목으로 종로경찰서에 밀고하여 인민군 4
명에 의해 끌려 감.
• 증언자가 고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북에서 나왔다 돌아갔다고 고모할머니를 통해 들은 바 있고, 군 생활
과 취업에서 심한 연좌제를 겪음


직업 및 활동
<일제강점기에 공직에 있다가 해방 후 매국인이 되어 집을 빼앗기고 특별한 일을 하지 않
고 지냄>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1946년 4월 8일생. 이영석입니다. 납북자는 아버님이죠.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답_ 이화실. 1920년 12월 8일생. 출생지는 서울이에요. 주소는 세종로 54번지.
문_ 전쟁 당시에도 거기에 사셨는지?
답_ 네. 해방된 그 이듬해에 이사를 갔거든요. 동대문 쪽인데 지금은 대형 아파트가 서
있죠? 99칸짜리 집에서 살았어요.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답_ 해방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땐데, 일제강점기 때 공직에 계셨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저
희 집안이 공직에 근무하셨고, 박영철씨 하고 이완용씨가 외무부에 있을 때에요. 그러
다 보니 자식들이 다 중앙청 등 공직에 근무하게 됐죠.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친일 매
국을 한 것이 되어 도망 다니기 시작 한 거지. 그러니까 99칸짜리 집이 그냥 적산가옥으
로 빼앗긴 거지요. 매국을 했다는 것은 잘못인데 그 당시에는 그나마 그거 밖에는 한국
사람들이 직위를 가질 수 있는 입장이 못 됐잖아요? 그러니 그 때 공무원을 했던 사람들
은 다 매국을 한 사람이야. 무조건 매도되는 거지. 그래서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팔판
동 작은 집으로 옮겨와서 25살 까지 살았어요. 군대 가기 전이죠. 그 때까지 살면서 짐
이랑 짐은 엄청나게 있었어요. 앞마당에 자동차가 두 대씩 있고 그랬으니까.
문_ 아버님이 전쟁 당시에 하시던 직업은?
답_ 그 당시 차가 있었으니까 운수업이라고 써놨는데 정확치 않아요. 내가 다섯 살 때까
지 기억은 아까 사진으로도 보여드렸지만 차가 롤스로이스 같은 영국제 세단이에요. 운
수업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이 가진 돈으로 술 먹고 놀았겠지 않나 생각해요. 지금
도 난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것이 얼마든지 내려올 수도 있었고 그 당시에 적십자사를 통
해서도 그렇고 제3국을 통해서도 그렇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납
치된 과정에서 겁이 많은 거지. 죽을까 봐.
문_ 아버님의 출신 학교는?
답_ 선린상고를 나왔다고 작은아버지가 얘길 하셨어요.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답_ 저하고 제 여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이 계셨지. 할머님 할아버
님도 계셨어요. 여섯 식구가 있었죠.
문_ 납북자의 경력 및 사회 활동은?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작은 아버지가 활동성이 있고 운동을 좋아해서 결혼하고
나서 축구를 좋아해 중국으로 원정 간 사진도 있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매일 술에 취한
것만 기억에 있어요. 술에 취해서 아우들이 업고 들어오고….
문_ 납북자의 외모 및 성격 등의 특징은?
답_ 성격은 잘 몰라도 외모는 보시다시피 미남이죠. 덩치도 크시고 그 당시에 보스라고
해야 될까요? 항상 돈을 쓰는 입장이니까 술을 먹고 업혀 들어오고 그런 기억이 나요.
다섯 살 까지 기억이 그것 밖에 없어.
문_ 6·25전쟁 도발 전 당시 상황은?
답_ 전쟁 나기 전에는 좋았죠. 집에 차가 두 대 있었어요. 저도 그 당시 엄청나게 큰 세
단을 타고 광화문의 이성곤 내과, 외과 그런 데를 다녔었죠.
문_ 피난은?
답_ 피난을 제가 차를 타고 간 거에요. 그런데 한강다리가 끊겼잖아요? 그래서 다시 철
수를 했죠. 그 바람에 납치되신 거에요.


납북 경위
<피난을 가려다 한강다리가 끊겨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친구 아버지인 동네 좌익이 돈
많은 지주라는 이유로 신고를 하였음. 종로경찰서에서 내무서원 네 명이 집으로 와 조사
할 게 있다며 납북자를 종로경찰서로 끌고 감.>


문_ 납치 날짜는?
답_ 잘 모르겠어요. 그 때 반팔을 입었던 기억이 나요.
문_ 한강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얼마 뒤 납치되신 건지?
답_ 그러고 나서 얼 마 안 됐어요. 한 달도 채 안 돼서….

문_ 납치 방법은?
답_ 지금 제 동창인 친구의 아버지가 빨간 띠를 두르고 죽창을 들고 다니는 동네 좌익이
었는데 신고를 한 거지요. 그 때 막 동대문 내무서가 생겼는데 그 과정에서 저 집 돈 많
아요 하고 지주라는 이유로 신고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난 지금도 그 아이하고는 형제같
이 지내지만 그 아버지는 날 보면 항상 도망 다녔어요. 저희 작은아버지가 계셨는데 그
친구 아버지 팔을 부러뜨려서 평생을 불구자로 지냈어요. 그 사람은 9.28수복 후에 개
성으로 도망가서 2년 만에 돌아왔어요. 무, 배추 실은 차 있지 않아요? 그 속에 숨어서
온 거죠. 그렇게 광나루다리를 건너서 들어왔다니까 그 사람이. 돌아와서 우리 집에 와
서 용서해준다는 서명 받고 그랬어요.
문_ 납치 장면은 직접 보셨나요?
답_ 네. 봤어요. 친구 아버지가 종로경찰서에서 신고를 하니까 내무서원들이 왔죠.
문_ 몇 명이 그랬나요?
답_ 네 명이 문을 따고 들어왔어요, 낮에. 난 어리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 아버지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잠깐 데려간다는 것이 안 온 거죠.
문_ 그럼 데려가면서 한 말은 없나요?
답_ 잠깐 조사할 게 있다고 그런 거지. 그래서 종로경찰서로 간 거에요.
문_ 아버님은 가면서 아무 말씀 안 하셨는지?
답_ 어른들끼리 무슨 얘기를 했을지 몰라도 난 기억이 없고 또 얘기가 없었던 것 같아
요. 바로 끌고 갔으니까.
문_ 납치한 사람들은 무장한 상태였는지?
답_ 총 들고 있었죠. 군복도 입고. 하여간 머리 위로 올라가는 큰 총에 모자도 헬멧이 아
니고 인민군 모자 누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쓰고. 그러고 3일인가 종로경찰서
에 있었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쫓아다니면서 면회를 시켜달라고 그래도 안 시켜주더라
고. 그런데 마지막에 차를 대놓고 가는 거야. 그 때 인민군들이 도망을 갈 때인데 그러
면서 포로들을 다 끌고 가는 거에요. 그 때 종로경찰서라는 게 지금 빨간 벽돌 건물이었
거든요? 그 앞에 운동장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철조망 사이로 내무서원한테 돈을 주니
까 밖에 있는 나를 끌고 온 거야. 그 때도 그랬다니까. 봐 달라고. 돈을 쓸 테니까. 그걸
보고 내가 철조망 사이로 손 붙잡고 그만이었어요. 그러니까 돈 주고 면회를 한 거지.
붙잡혀 간 지 3일인가 5일 만에. 그런데 그 때 바로 트럭이 있더라고. 거기에 다 싣고 간
거지.


납치 후 소식
<고모할머니를 통해 증언자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북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두 명이 북에
서 나와 집에 왔다 갔다는 얘기를 들음.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추측함.>


문_ 마지막으로 면회한 뒤로 소식은 없나요?
답_ 글쎄요. 그걸 소식을 알았다고 해야 되나 몰라도 내려왔었단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
가 고2 때 낮인데 종로경찰서에서 왔더라고. 그래서 경찰서에 갔더니 너희 아버지가 언
제 왔다 갔냐고 묻는 거에요. 그러고 그 날 밤을 샜어요. 고모할머니가 효자동 바로 옆
에 누상동에 사셨거든요. 그 고모할머니께서 나중에 말씀을 하시더라고. 두 명이 여기
까지 왔었다고.
문_ 누구를 만나고 가셨을까요?
답_ 글쎄요. 누굴 만나러 왔다기 보다는 길동무를 해주러 왔을 것만 같은 느낌? 왔었다
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신반의 했어요. ‘정말 왔었을까?’ 하고…. 그 때는 그걸 몇 년 후에
안 거 아닙니까. 나는 못 봤죠. 그런데 우리 고모할머니께서 툇마루에 앉아서 막걸리 한
잔 주세요 해서 먹고 갔다고 하는 거야.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나중에 그런 일이 있었어
요. 기독교방송과 이북의 소리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에 내가 리스트에 올
라간 것 같아요. 군 생활이며 뭐며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
가 외국으로 나가려고 무척 애썼어. 내 동료들, 친척들 다 나갔는데 나는 못 나갔지.


연좌제 피해
<국립공업연구소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데 차출됐으나 신원조회 이후 취소되었고, 공군사
관학교, 일반 공군, ROTC, 공무원에 지원했을 때도 1차에서 통과되었지만 면접에서 떨
어짐. 고등학교 3학년 때 중앙정보부에서 북으로 가는 스파이 임무를 띤 두 명이 이북으
로 가기 전 며칠간 증언자의 집에서 머무르겠다고 하며 있다감. 이후에도 가끔 경찰이 찾
아오는 일이 있었음.>


문_ 그러니까 연좌제 피해를 심하게 겪으신 거군요?
답_ 그게 연좌제인지 뭔 진 몰라도 저는 살면서 늘 당신(아버지)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
는 말이지. 공무원을 할 수도 없고. 내가 그걸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신
공학을 했었기 때문에 국립공업연구소에 있었어요. 거기 있으면서 대학원 생활을 1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외국으로 나가는데 차출됐었어요. 그 때 신원조회를 하는 거지. 그

러니까 내 후배가 되어 버리고 내가 안 된 거야. 그래서 내가 그냥 연구소를 관두고. 그게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뭐…. 내가 공군사관학교도 봤고 일반 공군도 봤어요.

ROTC도 봤고. 1차에는 다 붙었어요. 그런데 면담에서 떨어지는 거지 항상. 늘 그랬어요.
문_ 회원님은 그 원인이 아버지의 납북 때문이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답_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편이죠.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군대나 가자하고 지원을 했어요.

그런데 난 논산으로 군대에 가서도 쫓겨났어. 8명인가…. 집에 갔다가 다시 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때 논산 논두렁을 혼자 걸으면서 참 막막했는데 한 1주일 있다가 헌병대에서 잡으러

 온 거야. 탈영병이라고. 그래서 또 다시 입대를 했죠. 결과적으로 내가 입대 대상이 아니야. 왜냐면 아버지는

납북된 상태에서 나는 단대 독자인데 그 당시 독자는 군대 해당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육군 본부에

 탄원을 냈지. 나는 군대 갈 자격이 없고 부양가족도 있다고. 나 제대 하겠다고. 그래서 18개월 만에 제대했어요.

그 때 향토군인이라는 것도 생기고. 그런데 내가 제대하는 날 김신조가 내려왔지. 난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여기 초상화 (자료원 납북자 초상화)에 있는 사람들도 왔었을 거에요. 난 확신해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대학을 막 입시하려고 하는 데 중앙정보부인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왔었어요. 두 사람만

우리 집에 한 달간 있게 해 달라. 난 그게 뭔지 몰랐어요. 나야 학생이고 어리니까. 그런데 그게 이북으로

 가는 스파이였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우리 집에 있었어. 그러니까 각 집에 배당이 있었던 거지. 다른 집에도

 있었겠지. 그런 것이 강압적인 것인지 뭔지 몰라도 가끔 우리 집은 경찰서 같은 데에서도 찾아오고 그랬어요.

그게 한 두 번이 아냐. 그런 생활을 하면서 살았는데 스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이북으로 가기 전에

 일주일 남은 날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머리도 이북식으로 하고 복장도 다 갖췄었는데 내가 방문을 들여다보니까

 훌쩍훌쩍 울더라고. 그러고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 도망을 가 버렸어요. 그런데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겠어요?

그 당시 빤한데. 강원도 사람이더라고. 그래서 가서 도로 잡아왔어. 와서는 잘 갔다 오겠다고 간 기억도 있고….


남은 가족의 생활
<할머니 재산으로 생활하고 어머니가 미싱 일로 생계를 도움.>


문_ 남은 가족의 피난, 생계, 양육 등은?
답_ 글쎄요, 저희 어머니가 미싱 기술이 좋아요. 많이는 안 했지만, 그것도 하시고, 저희 할머니가 옛날 분들이 얘기하는 대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계셨어. 그게 뭐냐하면 동네 유지라는 개념이죠. 그래서 못 사는 사람들도 도와주고 그랬을 거에요. 그래서 많은 걸 받았는데 그 할머니가 재산이 좀 있었죠. 그래서 난 대학 다닐 때까지 등록금 걱정 같은 건 없었어요. 경제적으로 누구보다도 편하고 그렇게 산 것 같아요. 우리 노인네들은 참 힘들게 살았겠지만.
문_ 아버지 납북 후 적십자사에 신고한 것 외에 납치된 분들을 구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셨나요?
답_ 안 했어요. 우리 노인네(어머니)마저 구출을 못 했는데 뭘 했겠어요. 뭐 사방으로 알아보긴 했죠. 적십자사하고 방송국에서 자꾸 찾아 온 거죠. 그래서 인터뷰도 나갔는데 그렇게 하면 그쪽에서 더 억류를 한다고 훗날 들었어요. 인터뷰는 중학교 1학년 때와 3학년 때 두 번 한 것 같아요. 기독교 방송국이 그 당시에 종각 옆에 4층인가? 거기 건물에 있었어요. 그래서 빨간 스타일의 장식이 있는 방에서 했던 기억이 나네요. 편지를 쓰고 읽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오히려 억압을 받게 된 거지. 대개 이런 배경의 자손들은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에요. 비슷한 처지의 제 동료들이나 친구들 보면 공무원 생활 다 못 했어요. 공부도 잘 했는데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일반 기업에 들어가서 일 하고….
문_ 탈출해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 또는 주변의 소문 등은?
답_ 있었어요. 온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누구하고 산다 이런 얘기도 하더라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죠. 어머니도 수절하는 여자로서 그 말을 어떻게 듣겠어요.
문_ 직접적으로 아버님 소식을 전해 준 적은?
답_ 없었어요. 그런데 넘어 온 분이 아버님 얘길 하더라고. 거기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문_ 말씀해주신 분은 언제 내려오셨는지?
답_ 내가 고등학교 2학년쯤 내려온 것 같아요. 어떻게 왔는 진 잘 모르겠어요.
문_ 아버님이 내려올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다고 하셨는데….
답_ 그렇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내려왔으니까. 재작년인가? 적십자사에서 이산가족 하느라고 전화가 왔어요. 북에서 리스트가 내려왔기 때문에 저한테 연락이 온 걸 거에요. 그런데 난 거부했어요. 우리 주위 사람 중에 만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뒤에 골치 아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본인이 살아있지 않으면 난 곤란하다고 그문_ 그 후로 연락은 없었나요?
답_ 한 번 더 왔고 그 다음에는 오지 않았어요.
문_ 그러면 아버님이 생존해 계신 건가요?
답_ 생존해 있지 않으니까 그 뒤로 연락이 안 됐겠죠. 본인이 생존해 있지 않으면 결혼해서 낳은 이북 아이들을 내가 만나서 도와주고 그럴 까닭이 없을 것 같아. 우리 동료 중에 한 사람이 그렇게 만난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데 매일 편지가 온다는 거야. 하다못해 전화까지 온대요. 그런데 그게 본인이 하는 게 아니고 제3자를 통해 오는 거죠. 그럼 보내준 것 중 반의 반도 안 오고 흩어진단 얘길 하면서 내 선배 되시는 분이 하지 말라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걔들 배 불리는 일인데 왜 굳이 지금 없는 양반 찾아가면서 고생 하냐고 하더라고요.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답_ 네. 사망으로 처리 했죠.
문_ 남은 가족들의 현재 생존 여부는?
답_ 내 동생은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고요. 어머님은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흔 한 살 때. 그 전까지도 계속 만나려고 애쓰시더라고. 그래서 사실은 신고 안 하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자꾸 신고 하라고 어머님이 그래서.
문_ 남은 가족들이 납북자에 대해 묘사한 말은?
답_ 별로 안 했어요. 어머니는 별로 말이 없는 양반이에요. 나도 묻고 싶지 않았고. 워낙 여자가 수절을 하고 혼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세요? 거기다가 시아버지가 풍으로 15년을 고생하고.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효부 열녀상까지 받았다니까요. 그게 지금도 어디 있을 거에요. 난 자손들한테 그런 얘길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일제강점기 때 마지막 외무대신이던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 밑에 있었다고 얘길 들었는데 그 아들이 날 찾아왔더라고. 일본에 살고 있는데. 그 때 제가 스물여덟인가 일곱이었는데 새싹교회라고 윤석중씨가 하던 어린이 아동 보호단체에 근무했었어요. 그런데 음악회를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화여대 강당에서 한 번 주선을 해서 음악회를 해 줬어요. 그게 매국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많이 왔어도 2회를 못 하게 하더라고. 그런 압박이 들어오더라고요. 그 때 육영수 여사 있을 당시니까 지나간 얘기지만 박지만씨가 유치원생이었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새싹교회에 오고 그랬거든요. 그 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을 한 거에요. 그래서 박영철씨가 위험하니까 넘어 가 버리더라고. 나중에 제가 집에 가지고 있던 약간의 골동품이지, 말하자면 김성수씨 글 이라든지 이런 걸 다 줘서 보내버렸어요. 박영철씨 식구들이 다 거기(일본에) 살거든요.

문_ 할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는지?
답_ 내가 결혼하고 1년쯤 됐나? 1974년도쯤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님은 미국생활을 한 20년 하시고 거기에서 3년에 한 번씩은 꼭 들어오셨었어요. 그래서 사실 그 때 제3국을 통해 아버지 소식을 알아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오히려 더 어렵더라고. 대사관을 통해서 하는데, 알아보려고 꽤 애썼는데 안 됐어요. 끝내는 그게 좌절되고 어머님이 70이 넘어서 기동을 못 하고. 미국 생활이 그렇잖아요? 노인들이 아이들 키워주고 나머지 식구들은 직장생활을 해야 되고. 어머님은 아버님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어머님이 환갑이 됐는데 그 때 제가 사업을 하다 실패를 했어요. 그 때 내가 병으로 많이 앓았어요. 여동생이 오빠 몸도 아픈데 어머님 제가 모시겠다고 그래서 한동안 여동생이 모셨어요. 어머님이 3년마다 왔다 가고 그러셨어요. 그러다가 70넘으니까 더 이상 미국에 못 있겠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리고 제 생활도 나아졌고 해서 제가 모셨죠.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의 대처 상황 및 지원 노력은?
답_ 없죠. 무슨 도움을 줘요. 도움은 내가 오히려 줬지. 이런 사람들이 다 어렵잖아요. 그래서 교회 단체를 통해서 기금도 많이 해주고 그랬어요. 지금 와서는 그게 또 후회가 돼. 왜냐하면 그런 게 잘 쓰여야 되는데 제대로 쓰이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보니까. 자기들 배만 불렸지. 이제 내가 나이가 72세인데 더 이상 뭘 하냐,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요. 엊그제 일어난 일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속도 상하고 그래요. 지금은 밥은 먹고 사니까 내가 또 3남매를 뒀는데 조상들이 좋아서 그런지 자식들이 다 장성하고 잘 됐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헤어진 사람들이 서로 소식이라도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면 함>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답_ 지금 이런 사회단체에서 너무 잘 하고 있기 때문에 바라는 건 없지만 헤어진 사람들이 소식이라도 통할 수 있는 제도가 되면 좋을 텐데 되겠어요? 한 쪽에서는 핵 실험하고 한 쪽에서는 죽이려고 그러는데 어느 쪽이 양보를 해야 뭐가 되는 것 아니야. 소식이야 알면 좋죠.

문_ 아버님을 기념하는 날이 따로 있으신가요?
답_ 그런 건 없어요. 제가 제사를 모셨어요. 어머니가 미국생활을 하시면서 크리스천이 되셔서 그런 날을 별도로 정하고서 하진 않아요.
문_ 피랍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답_ 나는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느냐고 욕하고 싶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자식들이 피눈물 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이걸 누구한테 얘기하겠어요? 물론 자발적으로 가신 건 아니지만 남들은 몰래 넘어 왔단 말이야. 그런데 난 경찰서에 찾아가서 취조 받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러니까 대학을 가건 군대를 가건 다 브레이크가 걸리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해요. 그래서 다 포기를 하고 개인사업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게 쉬워요? 하는 것 마다 실패를 하고 그런 생활을 하다가 70이 넘었는데. 글쎄요 아흔이 넘은 양반이 살았다 죽었다 이걸 신경쓸 만큼 내 생활이 한가롭질 못했죠.
문_ 그래도 아버님이 나타난다고 하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답_ 글쎄 원망부터 하고 싶더라니까. 보면 살갑게 아버지 하고 울고 그러는 사람 보면, 막상 당하면 모르겠지만 정말 약 오를 때가 많아요. 그런데 하다못해 그 양반이 넥타이 매고 나타나면 얼마나 약 오르겠어요. 나는 번듯하니깐 너는 잘 살아라? 그건 아니지. 그렇잖아요, 저는 부인하고 다니면서 동대문을 지나면 저기가 옛날에 우리 집이고 내가 저기에서 태어났어 그러면 그 사람(부인)이 그래요. 지금 한 푼도 없는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릴 하느냐 이거야. 조상이 가진 걸 물려받고 싶은 건 아니지만 화나죠.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빼앗긴 거지. 그래도 저는 뭐 어머니도 할머니도 잘 만나서 잘 살았어요. 구김 없이 자랐는데 근데 그럴 때마다 원망도 많이 한다는 말이죠. 아버지를 불러볼 수도 없고, 학예회 때 보면 나는 늘 혼자 있는 거지. 그런 게 가끔 떠올라요. 내가 그래서 결혼할 때는 화목한 곳으로 가야지 그랬는데 처갓집을 잘 만나서 장인어른 장모님도 잘 만나고. 아버지를 막상 뵈면 그리워했다는 말은 하겠지만 너무 무책임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더 나아가면 나라 원망도 들고 그렇잖아요?
문_ 그렇지만 납치당한 게 자의는 아니니까….
답_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이 들어요. 종로경찰서 철조망이 이만큼 차이가 났거든요? 나는 다섯 살 정도니까. 그런데 그걸 벌리면 머리가 빠져. 그 뒤에 한 사람이 총 메고 서 있긴 했어요. 그런데 그 놈한테 돈 던져주면 봐준다니까. 저희 아버님이 늘 그랬어요. 사람이 너무 착하고 그냥 퍼다 줄줄만 알았지 챙길 줄 모른다고. 순박하고 겁도 많고. 오죽하면 작은아버지가 저희 아버지에게 영장이 나왔는데 내가 이화실입니다 하고 대신 갔어요. 두 번이나. 그러고 일제강점기 때 히로시마에 가서 원자폭탄 떨어진 데에서 살아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창고에 숨어서 자기 동생 먼저 보낸 사람이라니까요. 그게 이북 애들한테는 먹혀들었지. 아마 다른 것도 가져갔겠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정보들도 다 알려줬을 거에요. 김신조가 내려왔을 때 저 놈이 어떻게 저 지리를 다 알았을까? 여러 사람이 알려줬을 것 아니에요? 그 중에 일익을 담당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말 원망스러워요. 자식이 혼자서 고생하고 그랬는데. 어제 집안 행사가 있어서 제가 종손이고 나이가 제일 많아요. 그래서 모이라고 그래서 다 모였는데 다들 괜찮더라고. 그 사람들은 다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기 때문에 장성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내 핑계지 뭐. 그래도 그게 맞는 대답인 것 같아. 사람이 살면 온 가족이 모여 살아야지 흩어지면 그 때부터 엉망진창이 되요. 제가 꼭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좀 더 열심히 살았어야 되는데 내가 자제력이 부족했어요. 왜냐하면 여자들 틈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그게 내 팔자지 뭐. 그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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