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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종식(증언자-이재호)
이름: 관리자
2017-01-26 16:49:54  |  조회: 1472

이 종 식( 李鍾植)
2016. 4. 19. 채록


피랍인
생년월일: 1914년 9월 4일
출생지: 강원도 춘천시 신문면 신동리 343번지
당시 주소: 서울 종암동
피랍일: 1950년 9월 20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면서기, 정치 활동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7남매
외모/성격: 엄격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성격


증언자
성명: 이재호
관계: 아들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춘천에서 독립운동(집회 참여, 후배양성 등) 을 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된 적 있음
• 면 서기를 하다 1948년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중도포기하고 정치활동, 청년단 활동함.
• 1950년 8월 북한에서 아버지를 납치 대상으로 지목하여 안암동 자택으로 잡으러 왔으나 지하실에 숨어
위기를 모면함. 그 뒤 쌀이 없어서 쌀을 구하러 춘천 할머니댁에 갔다가 데리고 있던 소작인들 중 좌파가
고발해서 9월 20일 춘천시 자택에서 북한군 보안서원에 의해 붙잡혀 춘천교도소로 끌려감.

직업 및 활동
<면 서기하다 1948년도 춘천 국회의원에 출마하셨다가 중도포기하고 정치활동, 청년단
활동함.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춘천에서 독립운동(집회 참여, 후배양성 등) 을 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음>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저는 이재호입니다. 1949년 7월 24일 생이고 아버지의 7남매 중 여섯째 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답_ 아버님은 1914년 9월 4일 생입니다. 이종식이구요. 출생지는 강원도 춘천시 신문
면 신동리 343번지입니다. 전쟁 당시에는 서울 종암동에 살았어요. 주소는 잘 기억이
안 나요. 개운사 밑인데.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답_ 직업은 저희 아버님이 1939년까지는 면 서기 하시다가 그만 두시고 이후로는
1948년도 춘천 국회의원에 출마하셨다가 중도포기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직업이 주
로 정치활동. 청년단 활동을 하셨습니다. 출신 학교는 춘천고등학교입니다. 그 당시 졸
업할 때는 춘천고등보통학교라고 했습니다. 8회 졸업생입니다.
문_ 납북자의 외모 및 성격 등의 특징은?
답_ 제가 알기로는 아주 엄하셨어요. 할머니의 3남 2녀 중 장남이신데 아주 엄하십니
다. 동생들한테도 그랬구요. 저희 아버지 성향이 그러셔서 독립운동을 하신 겁니다. 그
정도로 나라와 가족에 대해서 엄격하고 원칙을 중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문_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을 하신 건가요?
답_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1937년도 2월 달에 춘천고등학교
졸업하고 신문면 면 서기를 하셨어요. 1939년 3월에 면 서기를 그만 두시고 본격적으
로 독립운동을 하셨죠. 독립운동의 주요 내용은 고향 춘천에서 춘천고등학교 동창들 네
명하고 독립운동을 위해서 모임을 갖는다든지 집회를 갖는다든지 아니면 주위에 춘천고
등학교 후배들을 데려다가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한다든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및 형법에 의해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3년, 구류 5개월을 사셨습니다. 구치소에서 5개월을 살고 풀려났습니다.


납북 경위
<1950년 8월 북한에서 아버지를 지목하여 안암동 자택으로 잡으러 왔으나 지하실에 숨
어 위기를 모면함. 그 뒤 쌀이 없어서 쌀을 구하러 춘천 할머니댁에 가셨는데 데리고 있
던 소작인들 중 좌파가 고발해서 9월 20일 춘천시 자택에서 북한군 보안서원에 의해 붙
잡혀 춘천교도소로 끌려감.>


문_ 전쟁 도발 전 당시 상황은?
답_ 저희 아버님은 어머님하고 같이 안암동에서 사셨는데 이미 북한에서 저희 아버지
를 납북 대상으로 지정했어요. 아버지를 안암동에서 1차적으로 잡으러 왔는데 저희 어
머님이 유복자를 하나 뒀어요. 동생이 1950년 7월 6일 생입니다. 그러니까 6·25 터
지고 나서 20일 있다가 태어난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을 임신하고 낳고 하는 시기에 전
쟁이 터져서 아버지가 납치당할 당시에 북한 애들 두 명이 왔어요. 그게 1950년 날짜
는 모르겠는데 그 때가 아마 8월 인가 싶어요. 동생 낳고 한 달 있다가 아버지 잡으러
왔는데 지하에 숨었답니다. 그래서 뒤로 도망을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 왔는데. 그
당시 저희 식구가 어머니까지 해서 다섯이죠. 큰아들이 여덟 살, 누나가 다섯 살, 제가
세 살입니다. 그리고 제 동생이 유복자로 7월에 출생했고. 그래서 집에 쌀이 없어서 아
버지가 춘천 할머니 집으로 쌀을 가지러 갔습니다. 저희 형님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춘천에 가니 사람들이 지주 아들이 왔다고 했죠. 저희가 소작인을 여럿 두었는데 소작
인들이 주로 말하는 빨갱이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버지를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아
버지가 거기 계신 지 얼마 안되서 잡혀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부농입니다. 그래서 돈
이 많아서 작은아버지 두 분이 다 일본과 미국 유학을 갔는데 아버님은 정치 활동을 하
셔서 희생자가 되셨죠.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지키다가 희생되셨습니다. 자택 343
번지에서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북한군 보안서원에 의해 1950년 9월 20일에 피랍되
셨습니다.
문_ 피랍때 목격한 분이 계신지?
답_ 그 당시엔 없었어요. 저희 돌아가신 할머니만 보셨는데 이미 1962년도에 돌아가셨
으니….
문_ 할머님께 아버지가 어떻게 납치되셨다는 말을 들으셨는지?
답_ 네, 들었어요. 그 당시에 여러 명이 왔대요. 저희 집을 북한군이 사무실로 썼어요.
집이 크고 시설이 좋다 보니까. 붙잡혀서는 춘천교도소로 데리고 갔어요.


납치 후 소식
<춘천교도소에서 화천으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할머니가 연세가 많아 못 가셨
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음>


문_ 납치당한 뒤 교도소로 면회를 가셨는지?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저희 어머니는 애들 데리고 서울에 있었으니까. 할머니가 면회를
몇 번 갔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런데 한 번 갔다가 우리 아버지는 납치당한 분들 중 미운
털이 박힌 사람입니다. 한 번 도망을 갔었기 때문에 혼을 내겠다 해서 가족 면회도 안 시
키는 거에요. 그래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끌려갔어요.
문_ 그 이후로 할머님도 아버님을 못 보신 건지?
답_ 네, 못 보셨어요. 화천으로 끌려갔다는 얘길 들었는데 끌려가면서 동네사람들이 다
쫓아갔어요. 그런데 할머님은 연세도 있으셔서 안 가셨고 그래서 혼자 가셨어요. 그런
데 저희 아버님이 하도 그 사람들한테 미운 털이 박혀서 화천에서 총살당했다는 얘기도
많아요.
문_ 탈출해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 또는 주변의 소문 등은?
답_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가족들이 화천에서 왔다 갔다 할 때 할머니한테 아버지는 총
살당했다고 하더랍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 뭣 하러 그 사람들을 밥도 먹이고 보호를 하
겠냐고요. 그럴 필요 없이 미운 털 박힌 사람들을 총살시켰다고 하는 얘길 많이 들었어
요. 그래서 이번에 아버지 유해 송환 문제로 국방부 유해발굴조사단과 접촉 중입니다.
문_ 아버님이 1차로 납치되셨을 때 어떻게 도망 나오신 건지?
답_ 지하실에 있다가 뒷문으로 도망친 거죠. 저희 집이 커서 뒤에 지하실에 바깥으로 통
하는 문이 있는데 걔들이 앞으로 들어오니까 아버지가 뒤로 도망을 갔죠. 어머니가 애를
임신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어머니는 못 건드리고.
문_ 총을 가지고 있었나요?
답_ 다 총을 가지고 있었죠. 군인이니까.
문_ 그럼 집도 뒤지고 그랬나요?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어머님 얘기가 아버지가 없다고 하니까 바로 떠났답니다. 왜냐하
면 이 사람들이 아버지가 춘천에 있다는 걸 알고 준비하고 있었겠죠.
문_ 피난은?
답_ 저희 식구가 애들이 네 명이었는데 배를 굶으니 쌀을 구해야 되는데 춘천에 가면 쌀
이 많으니까 그리로 가신 거죠. 저도 그런데 의문이 남아요. 왜 피난을 안가고 춘천을
가셨을까. 그런데 지나고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효자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어떻게 되
실까 걱정도 되셨겠죠.
문_ 아버님의 납치 후 남은 가족들은 서울에 계속 사셨나요?
답_ 피난은 갔죠, 외가 식구하고. 저희 어머니가 외가 식구가 많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셋째인데 아이 넷을 거느리고 갔죠. 저는 이모하고 삼촌들이 안고 갔죠. 제가 세 살이니
까. 다섯 살이랑 여덟 살짜리 애는 어느 정도 걸을 수 있는데 저는 걷기도 애매하고 그래
서 식구들이 버리라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옛날에 활동사진을 보면 그 집에 애들이 우는
걸 몇 번 봤어요. 그 때 제가 거기 있었어요. 그래서 버렸는데 어머니가 그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걸 아시고 나를 죽여라 그래서 다시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제가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이모들이 넷을 데리고 가야 되는데 너무 힘드니까 하나를 버려야
되는데 안 버리겠다고 그러니까요. 1·4 후퇴 때 경상도 어디까지 내려갔는데 힘든 거
야 이모가. 그래서 제가 엉덩이에 멍 자국이 아직도 있어요. 미워서 얼마나 꼬집어 댔는
지. 버릴 놈을 데리고 왔으니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어머님은 꼼짝도 않고
끝까지 부산까지 데리고 갔어요. 거기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 왔죠.


남은 가족의 생활
<어머니가 청량리에서 좌판을 하며 4남매를 데리고 힘들게 생활함. 가톨릭 기관에서 구
호물자가 나와 도움을 받음.>


문_ 아버님이 붙잡혀 가셨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으셨나요?
답_ 성장하면서 어머니가 항상 이야길 하셨죠. 그리고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면서 저희 어머니가 옆에서 너희 아버지가 너네 굶어 죽이지 않으려고 춘천에 쌀 구
하러 가셨다, 굉장히 효자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죠. 그리고 어머니가 항상 하시는 얘
기가 혼자되시면서 항상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씀을 그렇게 하셨어요. 훌륭한 분이셨다
고. 그래서 너희들이 아버지 은덕을 못 받고 자란 게 안타깝다고. 제가 청량리 올 때마
다 느끼는 건데 우리 어머니가 돈이 없어서 청량리에서 좌판을 했어요. 여기 올 때마다
그걸 느껴요.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심부름을 몇 번 다녔어요.
문_ 남은 가족의 생계, 피난, 양육 등은?

답_ 어머니가 다 하셨죠. 어머니가 챙겼고 없이 살고 못 먹고 살다 보니 전부 병이 걸렸
어요. 우리 형님은 뇌출혈로 쓰러져서 15년째 누워 있습니다. 저는 위암 수술을 6년 전
에 받아서 위의 5분의 4를 절개해서 하루에 다섯 끼를 먹습니다. 우리 누님도 46년생인
데 혈압이 생겨서 고통 받기 이를 데 없어요. 그게 다 못 먹어서 그런 거에요. 우리는 한
참 먹을 나이에 굶거나 기껏해야 꽁보리밥이나 수제비를 먹었던 게 선합니다. 어머니가
엄청 고생 하셨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아버님의 납치 후 정부의 대처 상황 및 지원 노력은?
답_ 그런 건 거의 없었고 저희가 가톨릭 신자라 가톨릭 기관에서 구호물자가 나왔고 어
머니가 16살 때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는데 지금 96세인데 거의 80년 되셨죠. 성당에
나가실 때 꼭 한복을 입고 4남매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옛날에 사제들이 구호물
자를 줘요. 그걸 우리 4남매가 조금씩 받아서 집에 와서 먹는데 어머니가 집에 오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다 주고 와요. 우리는 주기 싫었는데 어머니가 주라는데 어떻게 해?
없는 사람들 다 주라고. 천막에서 굶는 사람들 주라고. 그런 기억이 초등학교 때인데
아른아른 해요. 그리고 어머니가 공부를 다 못 시켰어요. 우리 형님은 아버지 덕분에
교동초등학교, 서울 사대부중, 사대부고,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동생도 나름대로 휘문
고등학교 나오고 연세대 나왔는데 어머님이 저한테 그러는 거에요. 너는 공부 하지 마
라. 너까지 공부시킬 돈이 없다. 그래서 저는 공부를 안 했어요. ‘어머니 저는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너는 상고 나와서 돈 벌라고. 그래서 1967년도에 덕수상고를 나와서
돈벌이를 시작했어요. 회사 다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윗사람들 눈치 보는 것도 너무
힘들고. 그래서 저도 안 되겠어서 어머니 몰래 야간대학을 갔어요. 직장은 인천이었는
데 서울에 야간대학을 다녔어요. 그래서 그 때 불규칙적으로 밥 먹어서 암 걸린 것 같
아요. 그렇게 공부하고 새벽에 나가서 일 하고. 그래서 어머니가 나중에 아셨어요. 그
랬는데 다행히 제가 번 돈은 어머니가 안 건드리셔서 나중에는 학교 다녀오겠다고 했
더니 네가 번 돈이니 알아서 할 일이라고 그러시더라구요. 어머니가 굉장히 냉정해요.
그랬는데 묘합니다. 제가 직장을 나와서 야간대학을 나와서 70년대 군대 갈 때 도저히
힘들어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주간대학으로 편입하고 군대를 갔어요. 그 때 입대
전에 어머님한테 50만원을 드리고 갔어요. 제가 그 동안 회사 다니면서 등록금 내고
돈 벌고 남은 돈인데 쓰시라고 드리고 갔어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그 돈 가지고 아들이
군대 갔다 오면 3학년 2학기하고 4학년 1, 2학기 공부 시킨다고 두 번 고리채를 했다
가 뜯겼어요. 그래서 군대 갔다 오니까 그 돈이 그렇게 됐다고 그래서 엄청 울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머니한테 뭐라고 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알았
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벌죠 이랬죠.
문_ 적십자사, 정부나 관청 등에 신고는?
답_ 신고를 우리 형이 어디 했을 거에요. 장남인데 안 했을 리가 없죠.
문_ 아버님이 붙잡혀 가시면서 할머님께 남기고 간 말씀은?
답_ 그건 없었어요. 그냥 뭐 우리 애들 잘 부탁한다고 그랬겠죠. 우리 집안 식구 중에 유
일하게 존경하는 분이 할머니인데 할머니가 애잔한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러면 끝이에요.
문_ 아버님이 붙잡혀 가신 뒤 할머님의 삶은 어떠셨는지?
답_ 춘천 집에서 여전히 부농이니까 아버지 소작인들 데려다 농사짓고. 우리 할머니는
입이 무거워요. 제가 춘천에 놀러 가면 재호 왔다 이런 적이 없어요. 오직 일하는 아저
씨들 꾸짖고 일시키고 그러고. 아버지 보고 싶다 그런 얘기도 없어요. 우리 할머니는 남
자에요 남자.
문_ 할머니가 부농이셨으면 회원님은 혜택을 못 받으셨는지? 어머님이 고생도 많이 하셨
는데.
답_ 못 받았어요. 그럴 사정이 있어요.
문_ 현재까지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답_ 2010년 1월 1일 저희 작은아버지께서 너희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라고 하셔서 제가
확신을 갖고 전국을 누비며 8월에 독립유공자 표창장을 아버님 대신 받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죠. 그 전엔 제가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시간 내기 힘들었지만, 이제 정년
퇴직도 하고 시간이 있어서 아버지의 행적을 지금까지 추적해오고 있죠.
연좌제 피해
<취직할 때와 군대 입대시 신원증명원을 낸 것 이외에 없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답_ 취직할 때와 군대 갈 때 신원증명원을 내요. 그게 연좌제거든요. 학교 들어갈 때도

내구요.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있을 때 연좌제가 없어졌어요. 우리 형님도 마찬가지
였구요. 그 피해밖에 없었어요. 서류 하나 남들보다 더 내는 거에요. 불이익을 당한 건
없었어요.


호적 정리
<1968년 사망신고함>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답_ 호적은 춘천에 있으신데 1968년인가 집안 사정으로 사망 신고했어요.
문_ 남은 가족들의 현재 생존 여부는?
답_ 어머님은 제가 모시고 있어요. 96세입니다. 요양원에 계신데 이 사진이 저희 어머
님입니다. 굉장히 건강하십니다. 이게 우리 형님이고. 지금도 저만 보면 (형님이) 아프
다고 그러셔요. 15년째 남의 도움 없이는 대소변도 못 가리고. 서울대학교 나왔는데 그
러면 뭐 합니까 몸이 망가졌는데. 형님은 1943년생이니까 내가 예순 아홉이니까 일흔
넷인가? 불쌍해 죽겠어요 이 양반. 우리 어머님도 그렇지만 이 양반도 정상이었으면 장
관이라도 할 사람인데 한국에서 공사 큰 거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몸이 망가져서. 나는
그 때 죽는 줄 알았어요.
문_ 남은 가족의 납북자와의 추억은?
답_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어머니께) 물어보려고 갔더니 재호야 묻지 마라 기
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하시더라고. 내가 재호라는 것만 알고 있어요.
문_ 그럼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지?
답_ 사사로운 얘긴 어머니가 잘 안 하세요. 연애 시절 때 어머니가 간호사셨는데 아버지
가 편찮으셔서 병원에서 만나서 연애를 하셨대요. 러브스토리 얘길 해달라고 해도 그런
얘길 잘 안 하세요.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가 독립유공자인데 어머니가 두 번째 부인이라 혜택을 못 받고 있음. 탄력적인 법
의 운영을 위해 노력해주기 바람>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답_ 저희 어머니가 둘째 부인입니다. 아까 왜 가난하게 살았냐고 했는데 첫째 부인이
다 잡고 안 내놨어요. 제가 정부에 권하고 싶은 것은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조
항에 보면 유족의 범위하고 연금의 규정이 있는데, 여기 보면 유족의 포상금과 유족의
1순위가 부인입니다. 제가 2010년도 9월에 저희 어머님을 대상자로 넣었어요. 그랬
더니 보훈처에서 사실혼 불인으로 안 됐어요. 그래서 재심을 청구했어요. 헌법재판소,
법원, 국민 권익위원회 다 해봤는데 다 안 된대요. 제가 6년째 이걸로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결국 2010년 9월에 안 된다고 판결이 나고 어머니를 뺐어요. 그 다음은 올해
83세인 장녀입니다. 그걸 장녀가 가져갔어요. 2주 만에 북부 보훈처로 옮겨졌더라고
요. 그래서 이건 더 안 된다 그러고 통화를 했더니 ‘(장녀가) 이 자식아, 법대로 하면 그
게 누구냐?’ 이러더니 끊더라고. 그 다음부터 제가 6년간 투쟁을 하고 있어요. 이 장녀
하고. 제가 법 운영에 있어서 지난 6년 동안 관련 법 기관, 국회, 사법기관, 행정기관
다니면서 느낀 건데 법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조금 탄력적으로 운영 해야
지. 예를 들어서 어머니 돌아가시면 대전 현충원에 안장한다고 그랬더니 보훈처 사람
들이 하는 말이 둘째 부인은 안 된대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법이 그렇대. 그래
서 내가 안 하고 말지. 법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그랬어요. 지난번에도 유해 발굴 조
사단에 갔더니 아버지의 DNA가 여기 있는 1만 여구의 시신 중에 있다면 내 줄래도 규
정이 안 된대. 그래서 뭐가 안 되냐고 하니까 규정이 되려면 뭐 전사자이어야 되고 그
런 게 있대. 아버지는 독립유공자라고 그랬는데도 안 된다고 그래서 관두라고 그랬어
요. 그래서 내가 지난 6년 동안 법의 경직성에 대해 너무 실망감을 느껴서 오죽하면 이
민 갈 생각도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의 첫 마디가 ‘이
재호씨 국선 변호사 선임하시오.’ 그래서 내가 조금 희망을 가졌어요. 국선 변호사를
선임하라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거거든. 결과가 3월 25일에 150만원 약식 벌금
형을 받았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죠. 그래서 지방 법원은 희망이 있어서 계속 한국에 살
까 싶기도 하고. 제일 속상한 게 뭐냐? 어머님 현충원에 못 모시는 거. 그래서 내가 원
하는 건 법의 탄력적인 운영을 원하는 거에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피랍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답_ 아버님께서는 아버님의 7남매 중에서 여섯째이지만 저희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 합니다. 또 아버지의 뜻이 손상됨이 없이 후손들에게, 역사에, 가
족사에 길이 보존하고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도 큰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작은 딸이 사법고시에 준하는 큰 시험에 됐어요. 5수

만에 됐는데 아버지 어머니의 큰 은공입니다. 그런데 법을 전공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
이 앞으로 법을 다룰 때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이런 억울한 상황은 너희
아버지 세대에 끝나야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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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납북자-강신원(증언자-강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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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460
169 납북자-최준경(증언자-최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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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324
168 납북자-유원순(증언자-유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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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414
167 납북자-이순임(증언자-이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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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410
166 납북자-정관만 (증언자-정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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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348
165 납북자-권두한(증언자-권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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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568
164 납북자-염준모(증언자-염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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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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