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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오해건(증언자-오경자)
이름: 관리자
2017-03-16 14:52:49  |  조회: 1450

오 해 건( 吳海建)
2016. 10. 12. 채록


피랍인
생년월일: 1897년 2월 5일 (음력)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181번지
당시주소: 서울 중구 저동 2가 14번지
피랍일: 1950년 9월 4일 아침
피랍장소: 자택
직업: 사업가(사금광, 삼판 목재 관개사업) 이자 정치가
(2대 국회 때 국회의원에 입후보 하였다가 낙선)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1남 1녀
외모/성격: 주변 사람에게 너그럽고, 늦게 얻은 딸을 애지중지
하였음.


증언자
성명: 오경자
관계: 장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직업 및 활동
<납북자는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했고, 해방 후 사금광업을 하는 사업가이자 2대 국회의
원 선거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한 정치가임>


문_ 증언자의 성함은,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오경자입니다. 1942년 2월 13일생이고요. 납북된 분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답_ 아버님 성함은 오해건이시고요. 생신은 음력으로 1897년 2월 5일입니다. 출생지
는 전라북도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 181번지. 전쟁 났을 때는 서울시 중구 저동 2가 14
번지에 살았어요. 지금 영락교회 선교관 자리입니다.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답_ 아버지는 그 당시 사업가셨고요. 정치인이셨어요. 왜냐하면 그 해 2대 국회 때 국회
의원에 입후보 하셨다가 낙선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독학하시고 한학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답_ 서울에 있던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저 세 식구였고 생활하는 사람들이야 아버지가
정치를 하셔서 20명 넘게 왔다 갔다 했죠. 그리고 오빠가 한 분 시골에 계셨습니다. 올
케언니도 있고 조카도 있었고.
문_ 납북자의 경력 및 사회 활동은?
답_ 아버지는 청년단 활동은 안 하셨고요. 젊었을 때는 청년운동 하셨겠지만 일제강점
기에 군수셨어요. 판임관 시험이라고 아마 보통고시에 해당하는 과거 같은 시험인데,
거기 합격하셔서 군수를 하셨으니까 행정관료죠. 고급 행정관료고 광복 후에는 바로 사
업을 하셨고. 그래서 삼판 목재 관개사업도 하시고 사금광을 하셔서 금을 캐고 성공하기
시작한 직후에 전쟁이 났습니다.
문_ 피난은?
답_ 1·4 후퇴 말고 6·25 전쟁이 처음 났을 때는 피난은커녕 서울이 괜찮다는 이승만
박사의 방송을 듣고 우리 저동 집 지하실이 일본인이 지은 집이라 깊게 잘 되어 있어서
거기 내려가 있었죠. 거기에서 제가 9살에 라디오에서 들은 이승만 대통령 목소리가 아
직도 기억이 나요.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있으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전 도지
사 관사에 이미 피난 가서 녹음한 방송이라는데 우리를 비롯해서 모든 서울 사람들은 지
금 청와대에서 하는 방송으로 믿고 아무 생각 없이 있었죠. 알았던들 대책도 없었겠지만
그래서 피난도 못 가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밖에 탱크가 와 있는 거에요. 그래서 갇혔죠.
피난은 생각도 못 하고 아버지만 피해서 계시다가. 난리가 나니까 서울 안에서 명륜동
산에도 숨어 계셨습니다.


납북 경위
<서울 명륜산에 숨어 있다가 잠시 집에 들른 사이 정보를 입수한 내무서원 여러 명이 집
으로 들어와 아버지를 묶어 놓고 여러 시간 가택을 수색한 뒤 끌고 감. 중부경찰서였던
내무서원으로 들어갔으나 이후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소식을 못 들음.>


문_ 아버님의 납치 장소는?
답_ 우리 잠깐 본다고 밤에 들어 오셨다가 얼굴 막상 보니까 하룻밤만 데리고 같이 자고
싶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그 이튿날 새벽에 가시겠다고 그랬다는데 엄마 말에 의하면 여
름에 동이 일찍 트잖아요? 한 네 시쯤 됐을 때 들이닥쳤다고 그래요. 저는 수런수런 하
는 소리가 들려서 일어났더니 이미 아버지는 묶어서 세워 놓고 카키색 옷의 내무서원이
온 집을 뒤지고 가택수색을 시작 했더라고요. 그 날이 1950년 9월 4일 아침입니다.
문_ 납치자의 용모 및 신분 확인은?
답_ 저는 어린 아이였으니까 무서웠을 거 아녜요. 그래서 떨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아
무튼 숫자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내무서원이라는 사람의 말투, 행동거지를 그대로 그려
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떼거지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고 은밀하
게 잡으러 온 것 같아요. 나중에 김제경찰서에서 6·25가 지난 뒤에 들은 이야기에 의
하면 이미 아버지가 그 날 밤에 들어온다고 말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전날 저녁에 나가셨다 한들 잡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 것 같은데 아무튼 제 눈앞에 벌
어졌던 상황은 가택 수색하는 장면인데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저는 어떤 영화나 드라
마를 봐도 그보다 생동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때 봤던 만행의 백만 분의
일도 못 그리고 있단 생각이에요. 온 집을 다 뒤지는데 해가 중천에 떠올라서 점심때가
됐을 때 아버지를 끌고 나가지 않았나 싶거든요.
그러니까 새벽 네 시쯤 들어 왔다고 하면 자그마치 일곱 시간 넘게 집을 뒤진 건데 워낙
집도 넓고, 그 집이 대지가 450평 집이고 건평을 기억을 못 하는데 굉장히 넓은 집이
고 제가 경교장에 가서 보니까 우리 집보다 약간 넓더라고요. 그 정도로 넓은 집이었어
요. 아버지는 이미 묶여서 서 있고 수갑 채운 채로 계셨고 어머니는 떨면서 뭐라고 말
하면 대답하는 상황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마 상당히 여러 명이 왔을 거라는 생각
이 드네요. 사람들이 지시에 따라서 막 뒤졌어요. 그런데 일본 집은 문틀 위에 손을 집
어넣으면 깊이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거기 손을 집어넣어서 꺼내면 태극기가 수도 없
이 쏟아졌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정치한다고 해서 정치인들도 많이 드나드셨고 그
길이 지금 평화방송 앞에 인도로 좁게 나 있는 길인데 당시에 도로 전체였어요. 그리고
지금 3.1로 버스길 큰 길은 성당 후원이었는데 성당에서 그 땅을 기증해서 지금 길이
된 거에요. 그래서 지금의 인도 자리, 그게 좁지만 중요한 길이었나 봐요. 그래서 해방
되고 나서 군정 할 때겠죠. 어릴 때 기억에 신탁통치 결사반대 하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지나가면 그 뒤로 곧바로 누가 또 지나가고 그랬는데 그 때 젊은이들이 태극기
를 흔들고 그러다가 거기에 넣었나 봐요. 그걸 여기저기서 꺼내서 발을 굴러 짓밟아 가
면서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짐승이 날뛰듯이 그렇게 뒤졌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금광 집인데 금을 어디에 숨겼을 것 같아서 뒤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지만 정확
한 건 모르죠. 그러다가 안방 벽장에 아침에 엄마, 아빠가 일어나서 외우던 팔양경이라
는 경이 있었어요. 하룻밤에 필사를 하면 덕이 하늘에 미쳐서 복을 받는다고 해서 아버
지가 하룻밤 만에 필사를 한 경을 초록하고 빨강색 보자기에 싸고 행자목으로 된 찻상
에다가 그걸 놓고 염주를 놓고 한 것인데, 그걸 내려서 경을 외우곤 하셨죠. 그런데 문
을 열고 그게 나오니까 그걸 확 잡아채서 발바닥에 집어 던지니까 온 방에 그게 흩어졌
어요. 불경이 쏟아지니까 정말 광분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처음 본 것 같아요. 공산주의
자들은 종교를 원수라고 생각한다는 증거를 제가 본 거죠. 그걸 밟으면서 찢고 하는 장
면을 목격했죠.
그러고는 간다고 하니까 엄마가 ‘부탁이 하나 있다, 죽 한 모금만 요기하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 죽이라던 게, 멀건 숭
늉에 보리 알갱이가 뜨고 근대 한 서너 이파리 뜬 거였거든요. 그러니까 엄마 생각은
부탁을 했으니 수갑을 풀어서 먹게 해 주겠거니 한 거죠. 그래서 들고 서 있으니까 왜
빨리 안 먹이냐는 식으로 쳐다봐요. 풀어 줘야지 먹을 것 아니냐고 그랬더니 그냥 먹이
라고 하는 거에요. “믹이오.” 하던 그 함경도 사투리를 지금도 들으면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엄마가 들고 입에 대려고 해도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아버
지 손아귀에 쥐어드렸는데 묶여 있으니까 엄마는 애써서 들어 올리려고 그래도 안 되니
까 나중에는 아버지가 결심을 한 것 같아요. 아내가 불쌍해서 그랬는지 몸을 있는 대로
숙여서 드시려고 했는데 그래도 닿질 않아요. 그러던 그 모습이 죽어도 잊어버릴 수 없
을 것 같아요. 결국 입에 못 댔죠. 안 닿으니까. 오히려 안 된다고 끌고 간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걸 못 마시고 엄마를 뒤로 하고 나가는
아버지 등을 밀면서 엄마한테는 안방에 라디오(큰 4각 제니스 라디오)가 있었는데 그
걸 가져오라는 거에요. 그게 엄청 큰 라디오였어요. 그걸 어떻게 갖고 갑니까?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시집오니까 군수 마님이라고 해서 대접받고 평생을 살고 그랬는데….
그걸 자기가 이고 가야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했을 거에요. 그러니까 그걸 빨리 가
지고 안 따라 온다고 나중에는 그걸 머리에 이고 남편은 포승줄에 묶여 있고. 그 때 아
버지가 모시 적삼을 입으셨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그 뒤로 엄마는 가녀린 몸에 미인에
속하는 여자였어요. 그 가녀린 몸에 그걸 이고 쓰러질 듯 하면서 따라 나갔어요. 지금
우리 집 위치가 영락교회 선교관 자리인데 평화방송에서 올라가는 길 그 쪽이 입구고
저희 집 후원은 1/3은 영락교회랑 담이 닿아 있고 2/3는 중부경찰서하고 닿아 있는 집
이에요. 그렇게 앞, 뒤 집이었지만 디귿(ㄷ) 자로 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ㄷ 자를 돌
아서 그들이 내무서로 쓰고 있었던 중부경찰서에 갔는데 거기까지는 제가 따라가질 못
하고 현관문으로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보고 그냥 집에 있었죠.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엄
마가 왔는데 그 후에 계속 사람들에게 하는 말에 의하면 경찰서 앞에 이르니까 머리에
있는 걸 확 집어 가더라고 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들어가려고 했더니 총으로 앞
을 가로막으면서 가라고 하더래요. 그러고 나서 엄마는 계속 눈만 뜨면 중부경찰서 앞
에 가서 오밤중에 사람이 쫓아낼 정도로 기다렸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총소리는 없었는데 이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자기
가 그 날부터 가서 지켰건만 흔적도, 그림자 하나도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어
이없이 아버지가 끌려 가셨습니다.
문_ 아버님이 따로 남기신 말씀은?
답_ 말을 남기고 할 시간이 없었어요. 여유도 없죠. 만약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다면
어머니가 그 말을 경 외듯이 했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하신걸 보면 남기신 말씀이 없는 것
같아요.
문_ 적십자사, 정부나 관청 등에 신고는?
답_ 안 했습니다. 우리 오빠가 저하고 두 띠 동갑이에요. 연세가 많아요. 그래서 오빠가
아버지 사업도 같이 하고 그랬었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런
일을 결정하는 걸 오빠가 하셨는데 돌아가신 지 4년째인가 됐어요. 오빠는 그런 이야길
했어요. 제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인가 적십자사에서 처음으로 신고를 받았나 했는데,
‘적십자사에 신고해도 아무 소용없으니 하지 말아라. 통일도 우리 생전에 안 된다. 아버
지 다시 못 본다. 기대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잊어 버려라.’라는 얘기를 주문 외듯이
했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날마다 우니까. 그리고 정부도 믿지 말라고. 그 동안 아무 능
력을 보여준 게 없으니 믿지 말고 마음 독하게 먹고 잊어버려라. 그게 지론이었어요. 그
리고 이쪽에서 아무리 노력을 한들 북한이 받아 줄 상대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아무
것도 못 했어요.


납치 후 소식
<내무서원으로 끌려간 후, 어머니가 그 앞을 매일 지켰으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같이
있다가 풀려나왔다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자신보다 일주일 먼저 호명되어 나갔
다고 하나,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음.>


문_ 어머님은 아버님 납치 후 얼마 동안 경찰서 앞을 지키셨나요?
답_ 9.28 될 때까지 하루도 빼지 않았죠. 아버지를 잡아가고 우리를 바로 쫓아냈어요.
우리 집을 인민위원회인가 그런 걸로 썼는데 우리는 바로 두 집 건너에 있는 집으로 쫓
겨났어요. 제 어린 생각에 이렇게 작은 집도 있어 할 정도로. 거기에 있는데 9월 18일
경쯤 어떤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아버지 이름을 대고 찾으시더라고요. 그 분이 양씨였
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그 분이 형무소에 아버지랑 같이 계셨다고. 그래서 아버
지 안 계신다고 그랬더니 그 양반이 얼굴이 놀라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엄마가 같
이 계셨는데 우리 집 양반은 어떻게 됐기에 찾아 왔냐고 하니까 자기는 며칠 전에 나왔
는데 만약 나가면 누구든 먼저 나간 사람이 상대방 집에 가서 소식을 전해 주기로 했대
요. 그런데 자기가 아파서 2, 3일 늦어서 죄송한 생각으로 왔노라고. 1주일쯤 전에 아
버지가 이름이 불려서 나갔는데 안 들어오셔서 출감이 되셨구나 생각하고 찾으러 왔다
는 거에요. 그 뒤로 그분이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갔어요. 제가 자라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게 미스터리인 거에요. 우리 아버지가 정말 먼저 불려 나가서 형무소 속에서
학살을 당한 것인가 싶은. 그래서 9.28되고 나서 자연발생적으로 모인 납북자의 부인
들이 날마다 시체 찾으러 다녔어요. 처음엔 서울 시내를 뒤지고, 11월 언제까지도 동
두천, 의정부, 문산 그런 지역에 찾으러 다니고. 그래도 못 찾은 거죠. 그래서 그 때 끌
려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할 뿐이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어요. 그러고 우리 어머
니가 9월 28일에 미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엄마가 회상하기를 9월 4일 이후에 24
일을 지낸 날보다 9월 28일이 더 괴로웠다고 회상을 했어요. 마루 밑에 있던 사람, 뭐
산에 있던 사람 다 살아 있었구나 하고 너도나도 뛰어나와서 안고 그러는데 자기 남편
은 안 오는 거에요. 그래서 눈이 완전 뒤집혀서 어머니가 정신이 나갈 뻔 하셨죠. 그 때
는 그 심정을 몰랐죠.
우리 집이 넓으니까 9.28수복 된 이후에 아버지 친구분들이랑 엄마 친구분들이 집이
불타서 우리 집으로 왔어요. 그래서 걔들하고 놀고 그랬는데 저녁때면 아버지들이 오
잖아요. 그러면 자기 아버지를 부르면서 같이 방에 들어가는데 그게 너무 부러운 거에
요. 그 때 아버지라고 부르고 따라가는 모습이 부러운 정도가 물건이었으면 절도죄로
500번도 더 감옥에 갔을 거에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남은 가족의 생활
<외가댁이 부유하여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옴. 어머니는 56세에 돌아가시고, 나이 차가 많
이 나는 오빠도 4년 전에 사망함.>


문_ 1·4 후퇴 때는 어떻게 사셨나요?
답_ 그 때는 우리 외할머니가 전주의 거부고 외삼촌이 명륜동에 사시는 사업가였어요.
그러니까 남매를 다 안전하게 데리고 가겠다고 11월 초인가에 트럭 3대를 전세를 내
서 올라오셨어요. 그래서 엄마보고 내려가자, 여기 있다가 또 내려오면 안 되니까 내려
가자고 했어요. 엄마가 셋이서 살려고 서울 왔다가 남편이 없어지고 둘이 살겠다고 나
보고 내려가자는 얘기냐, 난 여기서 죽고 북한이 내려오면 누굴 붙잡고라도 우리 남편
을 찾아내고야 말겠다, 끌려가도 그게 낫다고 하니까 한 달 가까이쯤 어머니를 설득하
다 외삼촌네만 실어서 내려가셨어요. 그러고 1·4 후퇴 전까지 매일 시체 찾으러 다니
고 그랬어요. 1·4 후퇴 사발통문이 돌았을 거 아니에요? 반장 댁에서 연락을 하는데
우리 집이 본채고 반장 댁이 행랑채 같은 식이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자기가 심복으로
데리고 있던 부하직원을 키워서 내 준 집이었어요. 그 분의 부인이 반장이었어요. 그런
데 그 집에서 가족회의를 했대요.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고요. 속
만 뒤집어놓을 테니 연락을 안 해야 되지 않겠냐, 그래서 연락을 안 하고 다른 집만 했
대요. 그러니까 엄마가 어느 날 시체 찾으러 다니고 그랬는데 시내 분위기가 이상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이달 말까지 다 나가라고 그랬다고.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그랬더니 나라에서 연락을 했는데 못 받았느냐고 해서 누가 연락했냐고
그랬더니 반장이 했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또 꼭지가 돈 거에요. 남편이 없어지니까 나
를 따돌려? 감히 나를? 그래서 엄마가 분기가 탱천한 거에요. 분해서라도 이 어린 것
을 데리고 살아 남아야겠구나 그래서 그 때 제정신이 들었죠. 그래서 백방으로 피난 수
송을 찾으러 다닌 거에요. 그러다가 아무 것도 없으니까. 돈은 또 없고. 그래서 전주
에 가서 돈을 후불로 주겠다고 해서 아버지 친구 분 중에 아들이 수송을 한다고 해서 찾
아 갔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 친구 분이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가니까 건성으로 인사
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라는 거죠. 우리 집에 매일 아침마다 와서 아침 잡수시고 그랬
던 분이에요. 그랬는데 왜 왔냐는 식으로 쳐다보더라는 거죠. 그래서 엄마가 기가 막혀
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내가 이런 일을 하니까 전주 가서 드리겠으니 우리 두 모녀를 태
워다 달라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일이라 자기 소관이 아니니 아들한테 가서 이야기 하
라고. 그래도 모욕감을 참고 그 아들한테 가서 얘기를 했더니 차가 없어서 도저히 돈
이 문제가 아니라 안 됩니다. 그리고 부산 가는 쪽 인원이 많아서 호남선 쪽으로는 차
를 배치할 수 없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대요. 그래서 그 집을 나와서 백방으로 아
버지 친구를 찾아 나서는데 우리 아버지 친구 분들이 거의 다 납치를 당하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백관수 선생님하고 친하고 그 분이 우리 집에 날마다 오실 정도였고 금광도
아버지가 개발해서 그 분을 사장으로 모시고 고향 선배님이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셨어
요. 그런데 그 분도 납치당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 생각에 아버지 친구라도 있으면
좋은데 친구들도 다 납치를 당해서 너무 막막하더라는 거죠. 그런데 그 중에 아버지를
따르던 후배가 계셨는데 그 분을 우연히 만났대요. 그랬더니 그 어른께서 체신부의 고
급공무원이셨나 봐요. 체신부의 가족이 탈 수 있는 차가 있는데 자리가 있는지는 모르
겠다. 그런데 우리 집이 세 식구니까 여자 분 두 분은 끼어서 가 볼 수 있게 자기가 최
선을 다 해보겠노라고. 그래서 그걸 얻어 탈 수 있게 된 거에요. 마지막 차, 그 날이 아
마 1월 3일이었는지 아무튼 최후의 차를 용산역에서 타고 피난을 갔죠.
문_ 남은 가족들의 생계는?
답_ 우리는 생계는 어렵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호강을 못 하는 게 가엾었지요. 오빠가
아버지 사업을 맡아서 했고 오빠가 경제학을 전공한 분이라 사업을 얼른 정리하고 대학
교수를 하셨어요. 그래서 자기가 살기도 힘들지만 우리 생계를 책임져 주는 마지막 보루
가 되어 줬고 우리 외할머니께서도 굉장한 거부셨어요. 그래서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많
이 잃었지만 그래도 외갓집이 튼튼하니까. 엄마 자신은 생활력이 없고 그런 사람들이 주
위에 없었으면 뭐라도 했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생계엔 어려움 없이 살았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아버지가 공산주의하고는 이미 거리가 멀고 정치인, 사업가로
위치가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찰계에서 일괄적으로 동태를 살피는 대상은 됐
었어요. 간첩을 내보낼 때 이쪽에 연관 있는 사람들을 꼬투리 잡을까 봐 일단 북에 간
사람들은 동태를 계속 파악하고 있으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애 낳고 해
외에 공부시키러 보내거나 할 때 남들은 한번 가면 될 거 우리는 몇 번씩이나 가야 될
수도 있고 해서 나중에 엄마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바로 아버지 사망신고도 했어요. 실
종신고로 안 하고.


호적신고
<사망 신고함>


문_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나요?
답_ 1968년 10월 1일에 돌아가셨어요. 당시 56세. 38에 혼자된 후에 19년을 대문을
안 잠그고 지냈어요. 피난 가서 한 3년은 우는 게 엄마 일이었어요.
문_ 아버님과의 특별한 추억은?
답_ 우리 아버지는 정말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어요. 누구한테 뭘 잘못해도 그 자리에
서 성질 급하게 지적하는 일도 없으신 분이었어요. 다 지켜보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렇
게 말하는 분이었어요. 저를 마흔 다섯에 낳은 딸이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제가 하는
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걔가 한다면 맞다 할 정도고. 오죽하면 우리 엄마가
그 좋은 아버지를 잃어버리고도 세상을 산다는 게 어쩌면 네가 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고 그랬어요. 아버지랑 남산에 산책 때도 같이 따라가고. 해방되고 바로니까 남산에 신
사 자리가 헐리지 않았나 봐요. 이렇게 나무 창살이 있는데 그 안에 하얀 계란 같은 게 바
닥에 있는 거에요. 그걸 하나 가지고 싶은데 손이 안 닿는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손잡
이가 동그란 막대기를 집어넣더니 하나를 꺼내서 나한테 주면서 이런 데 있는 거 가져가
는 거 아닌데 지금은 쓸모없는 거니까 가져가지만 다른 데에선 그러면 안 된다고. 피난
갈 때 까지도 그걸 쥐고 갔는데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 오면서 오빠네 집
의 화분에 올려놓고 왔어요. 그런데 방학 때 가니까 그게 없어진 거야. 그래서 제가 너무
그게 그리워서 수필도 한 편 썼지만 그 돌멩이가 지금도 제 손에 쥐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과자 같은 게 꼭 두어 개가 있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납치 후 정부의 대처 상황 및 지원 노력은?
답_ 납치된 사람한테 지원한 적 있어요, 정부가? 없어요. 우리 피난 내려갔을 때 피난민
증을 줬어요. 배급을 받으러 오라고. 전주는 피난민이 별로 없으니까 갔더니 광목 두 필
인가? 저하고 어머니하고 피난민 증이 두 개니까. 그리고 미군 군용 담요 두 장을 줬어
요. 그런데 광목이야 우리 집에 많으니 별로이고 모포가 좋았죠. 그걸로 어머니께서 제
옷도 만들어 주시고 그랬죠. 납북자라서 준 게 아니라 피난민이라서 준 거에요. 정부에
서 납북자라고 뭐 해준 건 아무 것도 없어.


정부에 바라는 말
<특별법이 만들어져 납북자를 기억해주고 역사를 기록해주는 것에 감사함>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답_ 전반적으로 바라는 건 많은데 납북자 정책에 대해서 정부가 잘못하고 있거나 한 건
없어요. 이 정부가 잘못한 일이 아니고 지금 정부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
니까. 다만 법이 만들어지고 납북자들을 기억할 수 있고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서 자리매
김 해줄 수 있다는 결정만으로도 저는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한 미
망인들이 한의 절반은 풀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신고를 왜 이렇게 안 하
는지 안타까운데 이 분들이 여러 종류더라고요. 너무 늙었고 자기 남편들이 다 죽었을
거란 거죠. 역사의식이 있어야 신고를 해 줄 텐데 ‘죽었는데 뭐 하러 신고를 해?’ 이러니
까. 세상에 10만 명을 잡아갔는데 4천명만 신고를 한 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기록을 남길 때도 그 부분을 강조해서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아버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답_ 아버지는 지금 이제 123세 정도 되셨을 텐데. 제일 불쌍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제일 피해자는 우리 아버지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피하고 살 수 있었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못 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요. 일본 사
람들이 다 파먹고 간 금광을 다시 사금을 캐서 광산을 일으켜 세우실 정도로 신발을 짝
짝이로 신고 다닐 정도로 집중해서 사신 분인데 그 뜻을 못 펴고 가셨으니. 여기 계셨
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고 인류에도 덕을 퍼뜨리는 일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
어서 아깝고. 아버지께서 원하셨던 게 우리 오빠가 고등고시 패스시키는 거였는데 오
빠가 그것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 일제하에서 그걸 해서 일본사람들처럼 되는 건 싫
다. 그래서 경제학을 하겠다고 해서 박사학위도 받고 가셨으니까 아버지도 흡족하셨
을 거에요. 그러면 제가 오빠 대신해서 고등고시를 해 드릴게 하면서 법과대학을 갔어
요. 거기까진 아버지 소원을 풀었는데 고시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뜻을 못 풀
어드린 게 죄송하고 내가 게을러서 공부도 안 하고 그랬던 것 같아 죄송하고. 어머니를
좀 더 잘 모셔서 환갑도 넘겨 좀 더 오래 사시게 했어야 하는데 효도를 못 해서 엄마가
일찍 가신 거 아닌가 싶어서 아버지한테 죄송한 것 밖에 없고. 지금이라도 아버지 뜻
에 맞게 뭘 이루고 그런 걸 보여드렸으면 좋겠는데 저도 이제 떠날 날이 가까워져서 너
무 죄송하단 생각밖에 드는 게 없고요. 이건 종교적인 얘긴데 아버지가 기독교를 믿다
가 중간에 실족을 해서 불교를 믿으시다가 잡혀 가셨는데 제 생각으로는 환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다시 찾지 않으셨을까 싶고. 그러셨으면 천만 다행이다 싶고 지금 이 순간
에도 아버지한테 제가 미안하고 죄송한 건 인간이 지난 날 이렇게 됐으면 어쩔 수 없지
만 만약 아버지가 북에서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셨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형제
들 만나면 잘 해주고 싶다고 그러는데 저는 양심껏 이야기해서 아직도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우리 엄마가 눈에 밟혀서 아버지가 만약에 어떤 상황에서든 다른 여자하고 살
아서 자식을 낳았다면 저는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것도 아버지한테는 죄송하고.
우리 정부가 기념관을 제대로 완성해 주시기를 바라는데 거기에 납골묘까지 아니더라
도 외부에 기념비를 세우면 각자 선산에 흙 한 줌 씩을 지정을 해 줘서 거기에다가 묻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흙을 묻을 때 부인의 이름 하나씩은 새겨 줬으면 어떨까
싶어요. 그러면 그게 위패를 대신해서 혼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 분
들이 남편을 잃어버림으로써 일생을 쓸모없이 살다가 간 아내들에게 일말의 보상이라
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걸 꼭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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