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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형호 (증언자-이준모)
이름: 관리자
2013-09-17 11:57:02  |  조회: 2272
2006. 12. 12. 채록
061212A 이 형 호 (李鎣浩)

피랍인
생년월일: 1897년 8월 17일생
출생지: 경기도 평택 안중
당시 주소: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288-4
피랍일: 1950년 7월 6일경
피랍장소: 돈암 초등학교 입구(자택 근처)
직업: 의사(천호당 의원 운영)
학력/경력: 양정중, 경성의학전문대학 졸업/ 소년소녀체육회 초대회장, 정치 활동 했음.
직계/부양가족: 자녀 2남
외모/성격 : 활동적, 인자한 성격.

증언자
성명: 이준모(1932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1950년 7월 6일경 전쟁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피하던 중, 집을 나서자마자 돈암초등학교 입구에서 서너 명의 인민군들이 연행함.
- 직업이 의사였고, 북한의 인재 부족문제부재를 해결하기 위한 납치라 추정됨.
- 피랍인의 납북으로 고아가 된 자녀들은 장남이 군에 입대하여, 어린 동생을 군번도 없이 철모를 씌워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며 전쟁 시기를 보냄.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정부의 자국민 보호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 인정, 피랍인 생사확인

“아버지께서 북한괴뢰군에게 전쟁이 난지 일주일 겨우 지난 7월 6일에 납치당하신 것은 사전에 벌써 유력한 인사와 지도층을 납치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아버지께서 워낙 반공에 대한 사상이 뚜렷한 분이었기에 남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납치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6.25 때는 반역자의 집이라고 해서 내 동생은 밖에서 문 잠그고 문지기 노릇을 하고, 누구라도 문을 두드리면 나는 식도 하나 품고 벽장 속에 뛰어 올라가 숨고. 수복되기 전 3개월 동안 버틸 식량도 없었어. 그러니 주위 친구네 부모님이 가끔 먹여주기도 했고, 그렇게 산 거야.”

“내가 어느 정도 이성적,.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사는 것은 전부 아버지에게 배운 거야. 스스로 터득했다는 것보다도 그 분의 가르침이 뼈 속 깊이 남은 것들이야. 그러니 내가 위대하게 살진 못해도 충실하고 바르게 살 수는 있었다고 생각해. 하나 예를 들면, 내가 컸을 때도 밤 12시가 되어 잠이 들 때면 아버지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어 보시고 나가신다고. 그럼 부자지간이라도 내가 눈을 떠서 보면 민망하실까봐 나는 자는 척 하고. 그렇게 아버지가 문을 닫고 나가시면 나도 모르게 베개를 적시지.”



○ 직업 및 활동

<천호당 의원 개업설 의사로, 이전부터 정계 인사들과의 잦은 교류가 있었고, 소년소녀체육회 초대회장을 역임함도 했었음. 사회 지도층 인사였다고 할 수 있음적으로 상당히 지지를 얻는 엘리트층이었음.>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선친께서는 내과를 전문으로 하셔서 결핵을 전문으로 하는 내과의로 순화병원에서 7년간 일하시다가 지금의 종로 4가 종묘공원 옆에 천호당 의원을 개원설하셔서 운영하셨어. 그 분이 의료계에 투신하신 것은 일제 때인데, 그 때는 전공을 선택할 여지가 없었어요. 자연인으로 가는 길과, 일제 관리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그 중에서는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의술을 선택하신 거지. 그러나 그 분의 성품을 보면 대단히 활동적이고 능동적인 편이라 의술에는 그리 적합한 분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그 후, 일제 치하 말기에는 외갓집이 강원도 기마에 있어 가족이 다 거기에 가 있다가 조국이 1945년 8월 15일 광복된 이후에는 다시 돈암동에 와서 아버지는 병원을 하셨어. 지금의 돈암 초교 입구 사거리에 다시 천호당 의원을 여셨지. 그 후엔 병원을 하시면서 정계에도 인연을 맺어 활동도 하고, 또 체육 분야에도 소년소녀체육회를 창설, 초대 회장도 하셨지. 아마 아버지께서 북한군괴뢰군에게 전쟁이 난지 일주일 겨우 지난 7월 6일에 납치당하신 것은 사전에 벌써 유력한 인사와 지도층을 납치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아버지께서 워낙 반공에 대한 사상이 뚜렷한 분이었기에 남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납치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께서 병원을 하실 때 보면, 직원들이 아버지를 굉장히 따랐어요. 아버지는 사리가 분명하시고 대단히 이성적인 분이셨거든. 그러니 해방 후 납치 될 때까지도 병원 가족들이 계속 우리와 유대 관계를 가졌어요. 아버지는 그 당시 한일 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많이 도와줬었어요. 상해 임시정부 있을 때도 그 쪽 분들과 선친하고 계속 교류가 있었고요. 내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재능이라든가 성품은 물론이고 그 분의 깊이 있는 인간애는 정말 존경할 만 했어요.

문_ 당시 가정형편은?
답_ 의사라고 하지만 지금의 의사랑은 좀 달라요. 그 당시 의사는 의술인으로서 병자를 고치는 것도 물론 대단히 사명이 있지만, 그거 이전에 사회적으로도 하나의 지도자예요. 또 최고의 고등지식을 받으신 분으로서의 책임도 있고. 그러니 베풀고 지도하고 다른 것들도 전부 상담을 하고. 그러니 지금과는 개념이 좀 다르지. 생활은 크게 불리하진 않았지만 그 이상도 아니었어요. 해방 뒤에도 병원은 개업하셨지만, 워낙 다른 일도 많이 하셨고. 또 당시 정치를 하신 분들은 지금과 달리 민족을 재건하려는 순수한 의도로 하셨기에 생활이라는 것이 어려웠다고. 그러니 아버지가 그분들의 생계라든지 아이들 학비라든지 여러모로 도와주셨지. 심지어 서울에 있는 집도 저당 잡혀서 도와주고 그랬지. 그래서 아버지가 납치되신 후에, 물론 가신 분의 고통스러운 삶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남아 있는 우리 두 형제는 별안간에 천지 고아가 됐어.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거야. 6.25 때는 반역자의 집이라고 해서 내 동생은 밖에서 문 잠그고 문지기 노릇을 하고, 누구라도 문을 두드리면 나는 식도 하나 품고 벽장 속에 뛰어 올라가 숨고. 수복되기 전 3개월 동안 버틸 식량도 없었어. 그러니 주위 친구네 부모님이 가끔 먹여주기도 했고, 그렇게 산 거야.



○ 납북 경위

<1950년 7월 6일경 전쟁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피하던 중, 집을 나서자마자 돈암초등학교 입구에서 서너 명의 인민군들이 연행함. 성북경찰서 쪽으로 가고는 연락 없음.>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아버지께서 납치당하신 곳이 돈암 초등학교 초입엽이었대. 그 곳이 미아리 고개 올라가는 길이라고.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왔었는데, 심상치 않은 상황 속에서 당시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주요 정부 관계자들이 자기들은 도망가면서 우리에겐 괜찮다고 한 거야. 그러니 우리 집 근처에 조소앙씨라고 임시 정부의 주요 요인이시고 우리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도 납치당하고 그랬단 말이야. 그런데 27일인가에 현역 대령이 우리 집에 왔어. 하루 유숙하겠다고 하기에, 내가 문을 열어 줬다고. 나는 문 앞에서 지키고 서 있는데 밤새 있어도 아무도 안 와. 그러더니 새벽 두 시 쯤 되니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아침 네 시, 어둠이 개일 때쯤에는 미아리 고개에 있던 인민군 탱크가 시내로 들어가는 거야. 정부가 터무니없이 국민들을 기만한 거예요. 성북에서 박격포를 쏘면 미아리 정도에나 떨어지는 건데, 의정부에 떨어진다고 한 거야. 때는 이미 늦었지. 현역 대령은 우리 집 근처에서 (국군이 오면) 진두지휘를 한다고 했지만 새벽이 되니 탱크가 거꾸로 내려가는 거야. 그제야 이건 아니다 싶어서 부랴부랴 짐을 싸서 아침 일곱 시에 삼부자가 삼선교로 갔어요. 가 봤더니 거기서도 총격전이 난 거야. 그 당시 보니까 육군 소위 하나가 딱 둘의 부하를 데리고 삼선교에 엎드려서 적 탱크에 총을 쏘고 있는 거야. 그 때 그 젊은 육군 소위는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우리는 안 되겠다 싶어 일단 집으로 철수했어. 와서 동태를 보면서 있는데, 그게 운명이었어. 당시 성북동에 선친하고 가깝게 지내던 분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 쪽으로 피해야겠다면서 인부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허름한 차림으로 나가셨어. 우리 둘을 두고 가시려니 맘이 힘드셨겠지. 그런데 나가자마자 인민군들이 들이들이 닥친 거야. 7월 6일이니 전쟁이 나고 얼마 안 됐어. 우린 전쟁납치자라도 오랫동안 서울에서 뭐 하고 어쩌다 납치된 거랑은 달라요. 걔네들은 아버지를 요주위 인물로 정하고 납치하려고 왔던 거야. 문 앞에서 그 놈들이 아버지 함자를 물으니까 아버지가 옛날 어른이시다보니 고지식하게 '그래 나다'고 하셨고. 그러니 '잠시 모시겠습니다.' 해서 가신 거야. 그리고 우리랑은 영원히 이별을 한 거지. (데리러 온 사람은) 대충 서너 명 되는 것 같았고, 당시 마을 앞에 바로 파출소가 있었고 성북서도 가까이 있었으니 그리로 가셨지. 그렇게 가시고는 연락도 없고.



○ 납치이유

<직업이 의사였고, 북한의 인재부족문제재를 해결하기 위한 납치라 추정됨>

답_ 당시 북한괴뢰 정권에 사람이 없었잖아. 그러니 인재가 필요한 거지. 의사 활동도 오래 하셨고.



○ 납치 후 소식

<없음>

문_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가셨는지?
답_ 서대문 형무소로 가셨겠지. 내가 한스러운 게 있어. 9.28에 서울이 수복이 됐단 말이야. 9월 15일 쯤 인천상륙 작전이 시작되고, 20일 경에는 포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때 지하실에 숨어 있고 동생이 문을 지키고 할 때인데, 새벽에 자다 보니 수십, 수천 명이 줄이 지어 재촉을 하며 걸어가더라고. ‘그래서 ‘여기 분명히 아버지가 있을 거다.’ 싶어 지켜봤지만 찾을 수 없었어. 내가 지금 후회하는 것은 그 때 내가 그 대열에 끼어들어 갔으면 아버지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 아직도 가슴이 아파. 불운한 그 분의 생이 한스럽고 원통해.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납북으로 고아가 된 자녀들은 장남이 군에 입대하여, 어린 동생을 군번도 없이 철모를 씌워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며 전쟁 시기를 보냄, 이후에도 고통과 애환의 삶을 살았음>

답_ 내가 불행하게도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었어요. 그래서 4년 동안을 아버지와 나보다 네 살이 적은 남동생과 세 부자가 외롭게 살았어요. 그리고 6.25때 아버지가 납치되신 거야.

나중에 아버지 친지들이 오셨고. 어떻게 해야 겠냐고 물으시는데 학업은 해야겠지만, 동생이 있으니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좀 있다가, 젊은 혈기로 전쟁 일선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군에 들어갔지. 훈련받고 해서 1952년 초에 임관, 전쟁에 참전했지. 1.4후퇴 때는 나는 장병이라 갈 수 없었고, 내 동생만 한강 백사장에서 이별을 하고는 평택에 있는 연고지로 보냈지. 나중에 내가 전방에 출전해 갈 적에 동생을 데리고 왔어. 의탁할 때가 없어서. 역사에도 전사에도 없는 얘기일거야. 동생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 조그만 몸에 군복을 입히고 철모를 씌워 데리고 다니며 전쟁을 겪었어. 그렇게 나는 한 20년 군에 근무했고. 또 아버지 납치되신 후 난 어렸으니 아무것도 없었어. 나의 인생이 좋은 복을 타고 나서 유소년기까지는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따사롭게 살았고, 20대 부터는 인생 중년기 까지는 고통과 애환의 삶을 살았어. 그리고 70년도 초에 예편해서 맨손으로 다시 일으켜 사업을 했지.

문_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병원은 어떻게 됐어요?
답_ 병원이고 뭐고 다 없어졌어. 흔적도 없어. 땅문서 같은 건 정계에서 일하고 하시느라 다 저당 잡혀있고 그랬는데, 1.4후퇴 때 부산 피난 때 제 3자에게 다 넘어가버렸어. 친가에서도 아버지도 독자시고, 할아버지도 독자고 그랬어. 처음엔 지주 계급이었는데 나중에 농지 개혁이다 뭐다 해서 없어지기도 했고, 또 평택지역의 땅문서는 폭격 맞아서 없어요. 일제 시대 때 있던 땅문서고 뭐고 다 없어졌지 뭐. 이후에도 내가 군 생활 하는 동안 이놈 저놈이 사기 쳐서 가져가고 그랬어. 찾으려고도 해봤지만, 몇 사람이 결탁해서 하니 방법이 없어. 앞으로 통일되고 하더라도 이북에도 이런 문제가 참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까 광복되고 나서 혈혈단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보다 더 어렵게 생활한 거지.

문_ 나이를 보면 선생님도 의용군에 잡혀갈 나이인데?

답_ 그렇지. 그러니 숨어 있었지. 3개월 동안 지하실에 있으니 탁한 공기를 마시고 해서 당시 혈기 왕성한 때인데도 정신이 없고, 얼굴도 백지처럼 되고, 먹는 것도 못 먹고 그랬지.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나중에 친가 쪽에서 신고했지.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그런 거는 없었어.

문_ 아버지 지인들은 어땠는지?
답_ 아버지 지인들 대부분이 조병옥, 장태산 이런 분들, 당시 이 박사 계열의 몇몇은 피난을 갔는데 그 외의 분들은 대부분 납치당했어.



○ 호적정리

<정리됨>

답_ 그것도 그냥 불만이 있어 실종으로 뒀어. 그랬더니 자동으로 제적했더라고.
5,6년 전인가 납북인사 가족협의회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산가족 찾고 하던 얼마 후에 내가 통일부에서 방송으로 호소한 것이 있어. 그 당시 내가 나이가 70이 됐을 때인데 '(아버지가) 지금까지도 살아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거기서 사셨다면 어느 누구라도 친지가 있지 않겠나? 누구라도 연락을 달라'고 통일부에 호소했더니, 그 쪽에서 내 신분도 알고 하니 '소식이 있으면 들을 수 있고, 만날 수도 있다'는 승인도 받았었어. 사실 자식이 아버지가 생존해 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나는 그 분이 그 쪽에서 편안하게 좋겠다는 바람이 없잖아 있었어요. 그러다가 1982년도에 와서야 사진을 그려서 돌관을 해서 어머니 묘 옆에다 합장을 했어. 비문에 애절한 마음은 한이 없지만, 이제 이 세상에서의 모든 원한은 푸시고설해하고, 차후 세상에서나 다 위로 받으시고 또 아무리 북쪽을 바라보고 기다려봐야 요원하니 세월이 흐르고 해서 모셨다고 했지. 그러니 상당히 늦게 모신 거지. 어머니 기제사날에 같이 아버지 제사를 지낸다고.



○ 연좌제 피해

<없었음>

답_ 집안 내력이 공산주의자는 될 수 없는 사상이고, 친지들이나 아버지의 그동안의 활동이 민주 진영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다른 납북자 가족을 보면 연좌제까지 해서 이중 삼중으로 고통당하셨지만, 나 같은 경우는 보이지 않는 눈이나 피해가 있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별로 없었어.



○ 정부에 바라는 말

<정부의 자국민 보호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 인정, 피랍인 생사확인>

답_ 내가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회에 이사로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통일부에도 가보고 하는데, 우리 전쟁 납북사건, 이건 납치야. '끌고 간 것'에 대해 정부의 기만과 보호하지 못한 책임, 또 현재까지도 모호하게 했는데, 후손들에게 보상할 책임도 있어. 특히 전쟁 납북자의 경우는 이념, 반공에 관계된 거란 말이야. 8-9만명 모두가 전부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갔고 그놈들에게 기만당했고, 본인의 뜻이 아닌 다음에야 찾아 와야지. 이거는 앞으로 후에 역사적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집정자들의 포기야. 유기 이전에 포기야.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형제 둘이서 부모님을 많이 그리워했을 것 같은데?
답_ 이루 말할 수 없지. 그리움 정도가 아니라 가슴이 아프지.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방에 어머니, 아버지 사진도 걸어 뒀는데 수시로 그것을 보고 명상하고 기도하고 그러지.

문_ 기억에 남는 것?
답_ 부정이라는 게 어느 가정이나 있겠지만, 내가 청소년 시기일 때 내가 독서하고 할 때는 '뭘 보나'하고 살피시고, 또 앞으로 정치, 진로 등 인생관에 대해 아버지와 많은 토의도 했고. 내가 어느 정도 이성적,.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사는 것은 전부 아버지에게 배운 거야. 스스로 터득했다는 것보다도 그 분의 가르침이 뼈 속 깊이 남은 것들이야. 그러니 내가 위대하게 살진 못해도 충실하고 바르게 살 수는 있었다고 생각해. 하나 예를 들면, 내가 컸을 때도 밤 12시가 되어 잠이 들 때면 아버지가 살그머니 방문을 열어 보시고 나가신다고. 그럼 부자지간이라도 내가 눈을 떠서 보면 민망하실까봐 나는 자는 척 하고. 그렇게 아버지가 문을 닫고 나가시면 나도 모르게 베개를 적시지.

문_ 피랍인에게 하고픈 말?
답_ 아버지. 아무리 저승이 좋다 해도 이승만 하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았습니다. 그 동안에 아버지, 어머니 불행과 고난은 전부 씻으시고, 내내 혼백이라도 평안하시고 곱게 사시면서 내내 후손들과 인연을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저희들이 같이 보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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