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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강기형,강의형,강선형 (증언자-박옥랑, 강성형)
이름: 관리자
2013-09-17 12:19:27  |  조회: 2573
2007. 10. 19. 채록
071019C 강 기 형 (姜起馨) 외

피랍인
생년월일: 1918년 1월 14일생
출생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82번지
당시 주소: 상동
피랍일: 1950년 9월 25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8남매/배우자, 자녀 3녀
외모/성격: 늘 편안한 얼굴에 배려심이 많고 착한 성품


이름: 강의형(姜義馨)
생년월일: 1921년 4월 25일생
출생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82번지
당시 주소: 상동
피랍일: 1950년 9월 25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8남매/배우자, 자녀 2녀
외모/성격: 다부진 체격에 단정하고 온순한 편


이름: 강선형(姜善馨)
생년월일: 1928년 12월 10일생
출생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82번지
당시 주소: 상동
피랍일: 1950년 9월 25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학력/경력: 인천공립상업중학교(현 인천고)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8남매
외모/성격: 키 180cm에 온순한 성격



증언자
성명: 1.박옥랑(1919년생) 2.강성형(1931년생)
관계: 1.배우자 2.동생
증언 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이 강성했던 강화 지역에서 당시 농사일을 했던 피랍인을 포함한 삼형제도 반동으로 지목되어 모두 북으로 끌려감.
-황해도 금천까지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이웃의 증언을 근거로 피랍인이 황해도 금천지구에서 사살된 것으로 추정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독거노인으로 남은 피랍인의 배우자 생계 지원

“9.28쯤이거든. 하루는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다음에 산에 올라가서 보니까 인천서 경비정도 아닌 자그마한 배가 올라오더라고. 그 군함이 올라올 때 초지진과 대명리에서 인민군들이 총을 쐈어요. 그러니까 상대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후퇴하더니 그 다음에는 오지를 않아요. 그 배가 왔다고 하니까 여기에 있던 지방 빨갱이에서부터 모조리 개성으로 건너갔거든. 군인은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요. 여기는 그냥 내버려뒀지요.”

“이 동네가 소위 제 2의 모스크바라는 말이 돌 정도로 빨갱이들의 활동이 강했어요. 그 중에 우리 같은 집은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이런 걸 떠나서 그냥 조금 생활 격차가 있다고 하여 완전히 제쳐놓고 때려잡는거야. 회의하는 곳에 가면 우리 아버지가 강도완인데 그거 잡아야 한다고 그러고. 한 사람이 “좀 봅시다” 하고는 아버지를 이 시골길로 끌고 가는 거야. 여기서 지금 한 십오 리 길은 돼요. 건평이라는 면인데 거기에 지서가 있었거든. 거기로 끌고 갔어.”



○ 직업 및 활동

<농업>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강성형)
농사일을 했죠.

문_ 다른 활동들을 하셨는지?
답_ (강성형)
사회적인 활동은 안 했어요. 우리 초등학생들까지 다섯 명을 키우니까 아버지는 항상 돈이 필요한거야. 나무 잘라서 실어다가 읍에 가서 팔면 돈 몇 푼 되니 그걸로 중학교도 보내고 그랬죠. 그런 것 외에 특별히 다른 건 없었어요.



○ 납북 경위

<6.25전쟁이 나고 제2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강화도는 생활수준이 조금 나아보이면 반동으로 몰아 잡아가곤 했음. 피랍인의 가정이 그렇게 지목이 되어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9월 25일에 장남부터 셋째까지 아들 셋을 건평리 지서로 연행해 감.>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강성형)
해방이 되고 이 동네가 청년들이 많으니까 구봉해라는 사람이 청년들을 모아서 축구를 하곤 했어요. 그러면 이 친구가 말도 잘 하고 앞장서서 막걸리도 얻어 먹고 다 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이 젊은 사람들을 많이 포섭하고 있었다고 봐야지. 그렇게 지내다 평양을 가서 소위 남쪽에서 왔으니까 먹고 살 길은 남로당에 들어가서 빨갱이 노릇을 배우는 거지. 그때는 몰래 38선을 왔다 갔다 할 때야. 그러다 6.25전쟁 나기 전에 거기서 “너는 너희 고향에 가서 인민위원장을 해라.” 하여 강화군수가 돼서 온 거야. 이 친구가 오고 이 동네 청년들이 완전히 그 사람한테 빠져버린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은 일단 반동분자야, 무조건. 우리집은 밥술이나 먹고 공부도 시켰고, 그 당시 집을 이 정도로 지으면 시골집 치고는 잘 지은 집이거든. 그러니까 부르주아다 이거지. 그래 가지고 동네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안 와. 우리하고 말만 해도 반동분자로 몬다니까 오질 않아요. 동네에서 이 친구들이 그 당시 내무서에 무슨 위원장이니 다 이런 감투를 쓰고 있으니 기고만장 할 수밖에 없어요.
이 동네가 소위 제 2의 모스크바라는 말이 돌 정도로 빨갱이들의 활동이 강했어요. 그 중에 우리 같은 집은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다 이런 걸 떠나서 그냥 조금 생활 격차가 있다고 하여 완전히 제쳐놓고 때려잡는 거야. 회의하는 곳에 가면 우리 아버지가 강도완인데 그거 잡아야 한다고 그러고. 한 사람이 “좀 봅시다” 하고는 아버지를 이 시골길로 끌고 가는 거야. 여기서 지금 한 십오 리 길은 돼요. 건평이라는 면인데 거기에 지서가 있었거든. 거기로 끌고 갔어.

문_ 그 때가 언제인가요?
답_ (강성형)
9.28쯤이거든. 하루는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다음에 산에 올라가서 보니까 건너는 김포 대명리이고 강화 쪽에는 초지진이 있는데, 인천에서 경비정도 아닌 자그마한 배가 올라오더라고. 그 군함이 올라올 때 초지진하고 대명리에서 인민군들이 총을 쐈어요. 그러니까 상대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후퇴하더니 그 다음에는 오지를 않아요. 그 배가 왔다고 하니까 여기에 있던 지방 빨갱이에서부터 모조리 개성으로 건너갔거든. 군인은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요. 여기는 그냥 내버려뒀지요. 개성으로 갔던 사람들이 강화 쪽이 괜찮다더라 하니 이놈들이 다 되돌아 왔어. 되돌아 와서는 그 다음부터 다 때려 끌고 간 거지. 자기들한테 개인적으로 기분만 상하게 하면 반동이다 하고 끌고 가거든. 그러니까 우리 같은 집이야 영락없이 끌고 간 거예요. 아버지는 늙고 환갑이 지났을 때거든. 그러니까 늙은이 끌고 가면 그렇고 하니까 큰아들부터 세어서 형 셋을 끌고 간 거예요.

문_ 그 당시 강화에서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나요?
답_ (강성형)
많았죠. 이 동네에서만 8명이나 되니까. 파출소에다 몇십 명을 끌어다 놨으니까 먹고 자는 것도 그렇잖아. 배우고 힘 좀 쓰는 놈은 그 자리에서 그냥 잡는거야. 이렇게 무릎을 꿇게 해놓고 그냥 아주 짓이겨 놨어요. 내 바로 위에 형은 180cm가 넘는 키에 그 당시 유명했던 해군 나팔바지를 입은 채 끌려갔는데 그 무릎을 아주 지져놓아서 흰 바지가 핏덩어리가 됐었어요. 그렇게 그냥 끌려간거야. 여기서 이내성으로 해서 교동 쪽으로 갯벌을 타고 건너가면 한참 가요. 그때 비행기가 막 떠 다녔는데 비행기 떴다 하면 뿔뿔이 흩어져서 숨어 있다가, 지나가면 또 가고 그랬으니 얼마나 오래 끌려갔겠어요. 그렇게 간걸 일부는 개성에 가서 죽여 버렸어요. 활동도 못하고 시원찮은 사람들은 우선 처리를 하고 간 거야. 교통에다 놓고 처리를 하고 나머지를 또 끌고 간 거예요. 거기서 한 사람이 살아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황해도 금천이라는 지역까지 갔는데 도저히 더 가지를 못하고 먹지도 못하니 그냥 거기서 일괄 처리를 했대요. 따발총이 한 100발인가 50발정도 들어갔는데 총탄이 처음에는 제대로 나가지만 오래 쏘다 보면 힘이 약하거든. 그렇게 맞고 쓰러지고 덮고 덮고 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이 사람 한명 살아남았어요. 거기에서 몇 시간 만에 사체속에서 빠져 나와 한 달인가 만에 살아서 온 사람이 있어요.



○ 납치이유

<공산주의에서 봤을 때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더 배불리 먹고 살면 반동분자로 분류되었던 당시 시대 상황>

답_ (강성형)
6.25전쟁 나고 바로 우리는 걔네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야. 붉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한테 우리는 개밥에 도토리식으로 저건 완전 반동분자니까 없애야 한다고 생각될 정도였지.
다른 사람들은 소학교도 못나오고 중학교라는건 생각도 못했어.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웠으니까. 우리는 중학교를 둘이나 다니고, 초등학교도 셋인가 넷 다녔고 하니 하늘과 땅 차이의 격차가 생긴 거야. 그렇다고 돈이 많은 지주도 아니었고 그저 부지런히 벌어서 동생들 뒷바라지했던 거지. 그 당시 사상이라는 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딱 둘이야. 해방되면서는 공산주의는 우선 똑같이 먹고 똑같이 지낸다는 평등주의를 주장했어요. 그러니까 밥술이나 먹고 논 많이 있고 공부 좀 한 사람들은 제쳐놓고 그 사람들 것을 다 뽑아서 저희가 편안하게 먹고 지내고 이렇게 평등해진다고 말했죠. 잘사는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나보다 조금만 잘 살면 잘사는 사람이야. 똑같이 남의 땅을 경작해도 좋은 땅에서 경작하는 사람과 안좋은 땅에서 경작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야. 그 소출 자체가 못 사는 사람은 항상 못 살게 되어 있어. 좋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먹을 만큼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런 차이가 생기지.



○ 납치 후 소식

<황해도 금천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이웃을 통해 끌려간 이야기만 들었을 뿐 피랍인의 소식은 알 수 없음. 황해도 금천지구에서 사살된 것으로 추정.>

문_ 같이 끌려갔다가 돌아온 분을 통해 들은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강성형)
그 사람을 만났는데 황해도 금천 땅에까지 갔다 왔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우리가 못 봤으니 끌려간 것까지만 알지 생사는 전혀 모르는 거죠.

문_ 살아 돌아온 다른 사람들은 없었나요?
답_ (강성형)
이 동네에 끌려간 사람들 말고도 자진해서 월북한 사람들, 말하자면 빨갱이 노릇하다가 간 사람들 있잖아요. 이 사람들도 돌아온 사람이 없어요.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배우자가 대가족의 가사를 돌보며 외롭게 보냄>

답_ (박옥랑)
젊었을 때 힘들었죠. 제일 어려운 때가 6.25 나고 나서 대식구가 같이 사니까 하루에 밥을 여덟 번, 아홉 번 차릴 때…, 그리고 남편이 없으니까 맨날 어렵죠, 뭐.
(강성형)
우리 아버님이 사람들을 좋아하다 보니 생판 모르는 사람도 들어와서 한술 먹여서 보낼 정도였어요. 당신은 담배, 술도 못하시는 양반인데, 담배도 주고 “술 한상 내 와라” 해서 술도 주고, 막걸리 한잔 퍼 먹이면 배가 불러요. 그렇게 든든해져서 보내고 나면 부엌에서는 금방 한번 나갔는데 다른 사람이 또 오는 거야. 나는 1.4후퇴 전에 학도호국대로 나가버렸어요. 그 때 미자(피랍인의 장녀)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우리 형수님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활동할 수 있는 나이니까 그렇게 저렇게 살아 오셨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강성형)
1.4후퇴된 다음에 다시 서울이 수복되었어요. 수복이 되고 행정적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다음이 자유당 시대거든. 정부쪽에서 무슨 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십자사에서 제일 먼저 납북된 사람들 이상 유무를 조사했어요. 그 당시에는 아들 3형제씩 납치당한 집인데 뭐 다 알 거 아니에요. 조사를 할 때 다 신고를 해서 적십자사에 올라갔어. 우리 아버지가 장가도 안 간 아들을 뭘 올리냐며 결혼한 아들 둘만 올리고 작은 아들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해서 아마 둘만 올라가 있을 거예요. 적십자사 기록에는 그렇게 등재돼 있어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강성형)
없었죠.



○ 호적정리

<호적에서 제적 처리>

답_ (강성형)
1955년 8월 19일 생사불명 기간 만료로 1980년 11월 19일 수원지법 인천지원에서 실종 선고를 받고 제적 처리했어요.



○ 연좌제 피해

<없음>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독거노인으로 남은 피랍인의 배우자 생계 지원>

답_ (박옥랑)
내가 지금 나이가 많은데 얼마나 더 산다고 바라는 게 있겠어.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집에서 살면서 이 집에서 죽어 나갔으면 하는 마음밖에는 없어…...
(강성형)
개인 단체에서는 생사확인을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 그런 거라도 정부에서 좀 해주길 바래요. 어머니가 나이 90이 되도록 독거노인이잖아. 이런 양반이 농사를 지을 거야, 뭐 할거야. 아무것도 안 된다고. 그러니까 참 어려운 거예요. 독거노인을 꼭 어떻게 하라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의 생계 대책의 일환으로 뭔가 도움을 주는 방법이 있어야지요. 벌써 반세기가 지난 얘기지만 실질적으로 끌려갔다는 것만 알고 어디로 갔다는 것 까지만 알지, 사람이 죽었는지 그대로 끌려가서 살아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국군포로 가운데, 전쟁 중에 끌려가도 산 사람이 있거든. 이건 알 수가 없으니까 생사확인을 해줬으면 하는 거지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강성형)
만난다고 생각하면 너무 너무 고맙겠는데 우리 형님, 어떻게든지 지금 90이 지났으니까 뭐 기대할 수는 없지만 살아계시다면 한번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비단 저 뿐이 아니라 우리 형수님도 있고 딸들도 있고 한데 참 정말 기대하고 기대합니다. 형님,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살아계십시오.

문_ 세 형님들과 추억이 많을 텐데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면?
답_ (강성형)
형제가 자그만치 6형제야, 남자만. 여기가 외딴 집이잖아요. 딸랑 이 집 하나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그러니까 이 마당에 모여서, 지금은 라면 삶아먹자고 하지만, 그 때는 쌀밥, 꽁보리밥도 못 먹을 때거든. 그래도 여름에는 밀을 갖다 털어서 갈아가지고 소위 수제비를 뜨고 밭에서 일찌감치 감자를 깎아서 그걸 넣어 마당에다 놓고 먹었어요. 식구가 좀 많을 때는 6형제에 딸도 있고 조카도 있고 어쩌고 하면 십여 식구가 왕왕거릴 때거든. 바깥에 모깃불 피워 놓고 앉아서 그걸 먹는거야. 그럴 때가 있었는데.
우린 뭐 아버지가 독선적으로 한 것도 없고, 형이라고 동생들한테 어떻게 한 것도 없어요. 그냥 워낙 착한 양반들이에요. 형이고 동생이고 이런 격은 있지만 어디 꼬집어서 얘기할게 없고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에요. 근처 이웃 동네까지 다 아는 거지. 그렇게 착한 양반이에요, 그 양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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