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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주현 (증언자-이병숙,김택성)
이름: 관리자
2013-09-17 12:17:59  |  조회: 2148
2007. 10. 19. 채록
071019B 김 주 현 (金柱鉉)

피랍인
생년월일: 1914년 9월 25일생
출생지: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당시 주소: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피랍일: 1950년 9월 17일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대한청년단(강화) 부단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6남매
외모/성격: 온순한 성격

증언자
성명: 1.이병숙(1930년생) 2.김택성(1938년생)
관계: 1.제수 2.장남
증언성격: 1.직접증언 2.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강화지역 대한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했던 피랍인은 주시하고 있던 좌익들에 의해 자택에서 연행되어 선원면 지서로 끌려감.
- 이후 강화 이내성에서 73명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갔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고 개성까지 끌려 갔다는 소식이 가족들에게 들렸으나 그후 소식이 두절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납북자 가족에 대한 위로

“인민군이 총을 메고 와서 앞마당에 두어 방을 쏘니까 조그만 애들이 울지. 놀래고 무서워서. 그 지경을 하다가 인천 고모부가 와서 계시다가 그 양반하고 큰아버지하고 같이 데리고 가서 내무서에 가서 계시다가 사흘밤 주무셨나. 밥을 해 날랐지.”

“당신네, 무슨 죄 있네요. 죄 있는지 만나만 보고 간대. 잡으러 오면서 그 딴 소리죠. 죄가 왜 없어. 선발대로 꼽은 걸. 살아계셔서 내가 지금 우리 아주버님 만나면...(울먹) 그냥 그렇게 모시고 가서 그만이야.”

“세 놈이 총을 가져와서는 앞뒤로 포위해서 10여명이 아버지를 모시고 간 거지. 포승은 안 했어요. 그 때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는 피신해 있었으니까 붙들리지 않고. 한 데 계셨으면 다 붙들렸겠지만. 그후로도 저는 어렸을 때지만 무서워서 밤에 잠을 못 잤어요. 집이 넓으니까 뺑 둘러 골목 뒤에서 총 쏘고, 여기서 총 쏘고, 아주 총포 소리면 식구들이 가슴이 덜덜 떨리고 아주 말도 못했죠.”



○ 직업 및 활동

<과수원 운영. 강화지역 대한청년단 부단장 역임>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김택성)
과수원 일을 하면서 청년단원으로 활동하셨어요. 대한청년단 부단장을 역임하셨죠.

문_ 6.25전쟁 발발하고 당시 집안 상황은 어땠나요?
답_ (김택성)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해방되면서 초대국무위원을 하셨어요. 중고등학교 후원회장을 하셨고 작은아버지는 강화에 있는 호국군에 다니시다 사관학교에 들어가셔서 교육하던 중에 6.25전쟁이 났어요. 전쟁이 나면서 강화에 유지들, 그런 분들을 집중해서 끌고 갔는데 강화가 제일 심했어요. 전쟁 나고 다들 피신하면서 다니셨죠.



○ 납북 경위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고 피신해 있다 잠시 집에 들른 피랍인은 집을 주시하고 있던 인민군에 의해 자택에서 연행됨, 십여 명의 인민군들이 총을 쏘며 위협해 끌고 갔으며 이후 선원면 지서에 사나흘간 잡혀 있었음.>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이병숙)
그때 당시 다 나가셨더랬어요. 아침에 연락이 왔어 피신하라고. 그러니까 삼부자가 나갔죠.
큰아버지가 들어오셨더라고 점심을 안 잡수셔서 오셨는지 들어오셨어요. 그런 참에 이놈들이 왔어. 인민군이 총을 메고 와서 앞마당에 두어 방을 쏘니까 조그만 애들이 울지. 놀래고 무서워서. 그 지경을 하다가 인천 고모부가 와서 계시다가 그 양반하고 큰아버지하고 같이 데리고 가서 내무서에 가서 계시다가 사흘밤 주무셨나. 밥을 해 날랐지.

답_ (김택성)
겨우 여름을 나고 지내던 사이에 수차례 집을 에워싸고 사람을 찾았는데 밭에 들에 동산에 숨어 지내시다가 인천 함포 사격을 하면서 강화에 있던 인민군 애들이 철수를 했어요. 그러다 다시 들어온 거야, 여기 강화에. 그리고는 밤중서부터 사람을 찾으러 다니면서 항상 우리집을 동산에서 주시했는데 우린 몰랐지. 할아버지, 작은아버지, 아버지까지 다 피해 다니시다가 어떻게 우리 인천 고모부 되는 양반이 초지에서 사셨는데 거기는 좀 안정됐으니까 처갓집은 어떤가 궁금해서 오셨어요. 우리집에 들어오시면서 아버지도 오셔서 같이 만나셨네, 이 양반들이. 일류신사가 우리집에 들어오니까 십여 명이 와가지고 집을 에워싸서 아버지를 납치해갔지.

문_ 직접 보셨어요?
답_ (김택성)
그 때 내가 이 앞마당에서 놀고 있을 땐데 목격을 했죠. 여기서 총 쏘고 저기서 총 쏘고 말도 못했어요. 그렇게 되고 여기 선원면 지서에서 나흘 계셨어요. 내가 그 때 밥을 해서 날랐지. 점심, 저녁은 안 주는 거야. 아침만 먹이고. 그렇게 나흘간 있다가 강화군내에서 납치된 사람이 몇 명인지는 몰라도 강화산업조합인가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 창고에다 집결시켜 놨다가 함께 끌고 간 거지. 강화에 이내성이라는 곳에서 들리기로는 73명이 학살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한 30여명 찾으러 갔는데 찾지를 못했지.

문_ 누가 끌고 갔나요?
답_ (김택성)
누군지는 모르지. 사복한 사람들인데 내가 보기에는 내무서원들이나 지방 빨갱이들인 것 같아. 이 동네 사람들은 다른데 가서 그 짓하고 그 동네사람들은 이쪽에서 하고 얼굴을 서로 감추느라고 그렇게 해서 데려간 걸로 알고 있는 거지.

문_ 와서는 뭐라고 하면서 끌고 갔나요?
답_ (이병숙)
당신네, 무슨 죄 있는지 만나만 보고 간대. 잡으러 오면서 그 딴 소리죠. 죄가 왜 없어. 선발대로 꼽은 걸. 살아계셔서 내가 지금 우리 아주버님 만나면...(울먹) 그냥 그렇게 모시고 가서 그만이야.

문_ 언제 어디로 끌려간 건지?
답_ (김택성)
9.28 수복 전이지. 내가 짐작하기에 9월 17, 8일경에 끌려가서 일주일인가 열흘 강화읍에 있다가 서울 수복되고 인민군 애들이 다 철수하니까 한데 붙들려 나가신 거 같아.
선원면 지서에 3, 4일 계시다가 강화읍 공장 창고에 집결시켜 놓고 거기서 끌고 갔지. 묶어가지고, 이내성이라는 데가 있거든. 이북 가까운 선창가예요. 거기 반공굴에다 12~75명 정도를 집어넣고 사살시켰대. 그렇게 학살시키고 나머지는 끌고 간 게 개성인가까지 끌고 갔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 다음부터는 무소식이지.

문_ 자택에서 끌려갈 당시 총을 쏘고 해서 위협을 크게 느꼈겠어요?
답_ (김택성)
세 놈이 총을 가져와서는 앞뒤로 포위해서 10여명이 아버지를 모시고 간거지. 포승은 안했어요. 그 때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는 피신해 있었으니까 붙들리지 않고. 한 데 계셨으면 다 붙들렸겠지만. 추후로도 저는 어렸을 때지만 무서워서 밤에 잠을 못 잤어요. 집이 넓으니까 뺑 둘러 골목 뒤에서 총 쏘고 여기서 총 쏘고, 아주 총포 소리면 식구들이 가슴이 덜덜 떨리고 아주 말도 못했죠.



○ 납치이유

<지방 유지, 대한청년단 활동>



○ 납치 후 소식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다가 이내성에서 학살당했다는 얘길 듣고 동네사람들이 찾으러 갔으나 찾지 못함, 소식을 알 수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이병숙)
소식을 어디서 듣겠어요.

문_ 찾으려는 노력은?
답_ (김택성)
이내성에 동네 사람들이 찾으러 갔는데 못 찾고, 나는 당시 어리니 찾아다닐 수가 있나. 작은아버지는 바로 군에 입대해서 할아버지는 자식 잃으시고, 또 (독립운동하시다) 3.1운동 때 매를 많이 맞으셔서 아주 몸이 쇠약하셨어요. 밖으로 찾으러 다니며 활동할 수가 없으셨지.



○ 남은 가족의 생활은?

<아버지가 납치되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녀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나무지게를 지며 어렵게 성장, 피랍인의 배우자는 농사일을 하며 대가족과 6남매를 돌보느라 고생을 많이 함>

답_ (김택성)
농사 조금 있었으니까 여름에만 보리밥 먹고 겨울에는 죽 끓여먹고 생활이 그랬지. 과수원을 해서 풍족하게 사시다가 6.25전쟁이 나서 과수원을 돌보지 못하니까, 일 년만 내버려둬도 나무들이 병들어요. 그래서 다 토사시키고 생활이 엉망이었죠. 그 때는 지금처럼 탄이나 연료를 때는 게 아니고 순 등짐 져서 나무지게를 해서 땠단 말이에요. 그때 큰고모네 식구들이 여기 피난 와 있고 인천 고모네 식구들도 1.4후퇴 때 친정이라고 여기 와서 계셨어요. 그래서 방 넷을 땠어요. 나무를 누가 했겠어요, 나랑 열 살 먹은 동생이 했지. 나는 열서너 살이고 지게를 지고 높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면 나는 그래도 내려오는데 동생은 열 살 먹은 애가 어떻게 그 나무 지게를 지고 내려 오냐고, 해는 졌는데. 그러면 나는 내 것을 져다 이만큼 갖다 놓고 동생 또 나오기를 기다려서 그것을 져다 놓고. 아휴... 지금도 동생 만나면 그 얘길 하는 거야. “형님, 나 그때 나무 했을 때 어떻게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야, 그 때 생각해서 뭐하냐.” 해서 말았는데 지금도 그러는 거야. 텔레비전에 나오는 소녀소년가장들 불쌍하다고 정부에서 보조를 하는데 우리 자랄 때 고생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돼요.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김택성)
말도 못하죠. 우리가 6남매인데 생전에 밖에 나가서 바깥일도 못하시던 양반이 눈밭에 다니면서 일하시고, 비닐도 사 써야 되고 옷가지, 신발도 사야 하는데 돈벌이가 없으니까. 여기서 강화읍이 3킬로미터 이상 돼요. 무, 배차, 가지, 고추를 심어서 시장에다 내다팔아 애를 옷가지도 사 입히고 신발도 사 신고 용돈도 주시고 어머니 고생은 말로 다 못하죠. 지금 생각하면, 그 양반 눈물이 날 정도로 자식들 위해서 고생했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김택성)
할 거나 있나요. 다 알고 있는 거.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없었죠.



○ 호적정리

<실종 처리>

답_ (김택성)
1964년인지 65년도에 재산이 할아버지 앞으로 있어서 나한테 상속을 하는데, 그때 아버지 실종신고를 내서 내 앞으로 신고를 했죠. 그렇게 해서 호적정리가 됐는데 아버지는 실종으로 되어 있죠.



○ 연좌제 피해

<없음>

답_ (김택성)
그런 건 없었어요. 집안이 어려우니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나서 중학교도 못 가고, 누이가 중학교 다니다가 전쟁 나고 못 다니고 강화에 직물 공장에 다녀서 그걸로 동생들 둘 다 중학교까지 가르치고. 우리들은 공무원 생활을 한 것도 없고. 연좌제 관계로 피해 본 거는 없었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납북자 가족에 대한 위로>

답_ (김택성)
글쎄 다른 유공자들이나 그렇지 않으면 군인 가족이나 그런 분들도 연금을 타는데, 단 하나는 정부에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책을 갖고서 아직 한 번도 어떤 발언을 하지 않은 게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네들이 납북해갔을 때는 지방의 유지들이고 마을을 이끌어가던 공로자들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소식도 없고 행방불명이 됐을 때, 지금은 (우리가) 성장을 했지만 어렸을 적에 이런 가정들을 국가에서 찾아서 하다못해 교육비라도 대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는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죠. 비참하게 살았으니까. 공부를 하고 싶어도 공부를 못하고 아버지가 계셨으면서 공부를 못했으면 별 문제 없지만, 실력은 있는데 가정환경 때문에 공부를 못했던 게 너무나 억울하죠. 초등학교도 졸업 못했어요. 6.25전쟁 나서 집안이 망하게 되니까 초등학교도 못 갔어요. 아버지 납치된 거 때문에 내가 어렵고 배우지 못한 그 설움이라는 건 말도 못했어요. 그렇게 납북자의 자손들이 어느 가정은 대학까지 나오고 나 같은 환경에서는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그런 사람들이 좀 있을 것 같아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이병숙)
지금이라도 만나만 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야. 옛말에 새사람 들어와서 3년 나기 어렵다고 하잖아. 나 동짓달에 왔는데 그 이듬해 6.25가 났어. 해주는 것보다도 내가 이런 소리 저런 소리 좋은 소리 다 듣고 자랐죠. 그래서 소원이 어디 죽지 않고 살아만 계시다면... 이내성에서도 쏴서 죽였다고, 어디서 돌아가신 것도 몰라요. 어디가 무슨 재를 찾아. 진작 발 벗고서 이런 양반들부터 찾아줘야지. 살지도 못하고 서른일곱에 나가셨어. 한창 살 나이에. 아주 억울해. 억울해. 진짜 기가 막혀. 그래도 할아버지 계시고 작은아버지, 할머니 다 계시고 그러니까 자식들 다 길러서, 우리 형님이 (자식들) 출가 시키고 살다가 돌아가셨어. 생각을 하면 뼈가 으스러져. 이 날 이때껏 몇 십 년이 되도록 태연하게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없었던 것처럼...)

답_ (김택성)
늘 내 나이가 먹도록 그리운 것이 아버지 얼굴이고 아버지 마음이지. 지금이라도 생존해 계셨으면 한번 보고 싶은 자식 된 마음은 눈물겹도록 간절한데, 돌아가셨겠지 하면서도 그래도 기다리는 마음은 자식 된 도리의 마음이죠.

아버지, 맨날 보고 싶은 아버지예요. 엊그제도 누이가 내려와서 아버지 얘기 많이 했어요. 늘 그리운 것이 어머니도 생전에 계셔서 아버지를 찾으셨습니다마는 저희 육남매, 언제든지 아버지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 한이 없어요. 아버지 생존해 계시면 어떻게든지 말씀 한마디만 전해주시면 원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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