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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명혁 (증언자-김원형)
이름: 관리자
2013-09-17 12:17:05  |  조회: 2412
2007. 10. 19. 채록
071019A 김 명 혁 (金明爀)

피랍인
생년월일: 1917년 2월 2일생
출생지: 경기도 강화군 양사면 덕하리 157번지
당시 주소: 상동
피랍일: 1950년 8월 중순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면사무소 부면장, 대한청년단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3녀
외모/성격: 165cm의 크지 않은 키에 잘생긴 외모, 재주가 많은 편.

증언자
성명: 김원형(1940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인은 강화군 양사면 면사무소 부면장 정도의 직급의 위치에 있으면서 6.25전쟁이 발발한 당시 청년들과 함께 대한청년단을 조직해 활동했다고 가족 증언.
- 피랍인의 자녀들 및 그 자녀의 자녀에게까지 취업시 신원조회로 인한 불이익이 있어 연좌제로 고통을 겪은 사례로 보임.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명예 회복


“대한청년단을 조직한지 2, 3일 됐는데 그 명단을 뺏겼다는 거야. 공산주의 바닥 빨갱이가 밀고를 한 거야. 그래서는 그 집 안면태라는 사람한테 가서 명단을 뺐으니까 우리 아버지 이름이 다 나왔잖아요. 그래서 바닥 빨갱이, 공산주의자들이 잡으러 가는 거야. 어디 어디냐고 물어 우리 집에 왔는데, 창문 밖에 달이 이렇게 떴는데 잊어버리지도 않고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어머니, 누이 다 누워있는데, “쩍쩍”하고 인민군하고 바닥 빨갱이가 들어왔는데, 바닥 빨갱이는 우리 아버지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예요. 그래, 들어오더니 “동무, 문 열어.” 그리고 문을 확 여는데 우리들은 전부 일어나서 밤에 오들오들 떠는 거예요.”

“이틀이면 나온다, 3일이면 나온다 그랬는데 거기 지서에 가서도 못 만나게 하고 알 수가 없으니까. 아침이면 솥에 밥을 해서 사식을 들여다 줬는데 하루는 쪽지를 써서 밥뚜껑에 끼워 가져왔어요. 그걸 읽어보니까 강화읍 내무서죠. (당시 잡혀있던) 거긴 분지서고, 파출서가 분지서예요. 근데 내무서로 들어간다고 쪽지에 써 있는 거야. 집에서는 난리가 났죠. 어떻게 해야 되나. 근데 잡혀 갔으니 꺼낼 방법도 없고 선도 닿을 수가 없고, 전쟁통에 할 수가 없으니까.”


○ 직업 및 활동

<강화군 양사면 면사무소 부면장 위치에 있으면서 6.25전쟁이 발발하고 주위 청년들과 함께 대한청년단을 조직해 활동했음.>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피랍인이) 열일곱 살이 됐을 때 결혼을 안 시키면 징용으로 끌려간다고 해서 열일곱 살에 (결혼을) 해서 있다가 해방을 맞았어요. 그래 가지고 면사무소에 들어가서 면에서 총무 일을 봤습니다. 납치되기 전까지는 부면장 정도로 있었어요. 그 때는 임명을 확실히 하지는 않았지만 부면장 직급 정도로 있었습니다.

문_ 피랍인이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셨어요?
답_ 6.25가 날 때 우리는 피난을 안 가고 있었어요. 거기가 우리 김씨네 본토 고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조부께서 조상이 묻힌 데를 떠나와서 못 간다고, 그래서 이리저리 숨어 있다가6.25나고 처음에는 대한청년단 조직을 안 했어요. 그러면서 있는데 바닥에 공산주의자들이죠, 아버지 친구 되는 분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6.25가 나니까 그 사람들이 다 공산주의가 되고, 아버지가 그 사람들하고 동네에서 같이 자란 상태에서도 그게 달라지더라고. 사상적으로. 양사면에서도 몇몇 청년들이 모여 대한청년단을 조직해서 우리가 후방에서 도움이 돼야 한다, 아마 이런 조건에서 했겠죠.



○ 납북 경위

<대한청년단 명단이 유출되어 자택으로 찾아온 바닥 빨갱이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끌려감>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안면태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대한청년단 소집을 하느라 밤 한 열시쯤인가 내려가시는 것 같더라고. 내려가셔서 그 날 거기서 회의를 하고 그리고는 올라왔어요. 올라왔는데 2, 3일 있으니까 사람이 잡으러 왔어요. 바닥 빨갱이하고 인민군이지. 그 때가 8월 중순쯤 거의 됐을 거예요. 대한청년단을 조직한지 2, 3일 됐는데 그 명단을 뺏겼다는거야. 공산주의 바닥 빨갱이가 밀고를 한거야. 그래서는 그 집 안면태라는 사람한테 가서 명단을 뺐으니까 우리 아버지 이름이 다 나왔잖아요. 그래서 바닥 빨갱이, 공산주의자들이 잡으러 가는거야. 어디 어디냐고 물어 우리 집에 왔는데, 창문 밖에 달이 이렇게 떴는데 잊어버리지도 않고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어머니, 누이 다 누워있는데, “쩍쩍”하고 인민군하고 바닥 빨갱이가 들어왔는데, 바닥 빨갱이는 우리 아버지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래, 들어오더니 “동무, 문 열어” 그리고 문을 확 여는데 우리들은 전부 일어나서 밤에 오들오들 떠는 거예요.

그 정보를 우리 부친은 알고 숨었는데, 그 때는 농사들이 아주 어렵게 돼서 벼에 벼막을 짓고서 벼를 지켰어요. 먹기가 어려우니까그 벼를 훑어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리 집안 되는 사람이 그 벼막을 지켰는데, 그 날은 거길 알고 (아버님이) 거기 가서 숨었어요. 벼 막에 가서 그 이튿날, 사흘인가 됐는데 결국에는 밀고가 돼서 끌려 내려갔어요. 바닥 빨갱이들이 밀고를 했겠지. 그래서 거기서 끌려 내려가면서는 저도 어리니까 그 때부터는 상황을 몰랐는데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죠.

문_ 납치 과정에서 폭력이나 위협은 없었나요?
답_ 창문에 이렇게 달빛에 보니까 총을 가지고 있는 놈의 그림자가 달빛에 비취는 거야. 총을 가지고서 나오면 찌르든지 하려고.



○ 납치이유

<대한청년단 활동>



○ 납치 후 소식

<알 수 없음>

답_ 이틀이면 나온다, 3일이면 나온다, 그랬는데 거기 지서에 가서도 못 만나게 하고 알 수가 없으니까. 아침이면 솥에 밥을 해서 사식을 들여다 줬는데 하루는 쪽지를 써서 밥뚜껑에 끼워 가져왔어요. 그걸 읽어보니까 강화읍 내무서죠, (당시 잡혀있던) 거긴 분지서고, 파출서가 분지서예요. 근데 내무서로 들어간다고 쪽지에 써 있는 거야. 집에서는 난리가 났죠. 어떻게 해야 되나. 근데 잡혀갔으니 꺼낼 방법도 없고 선도 닿을 수가 없고, 전쟁통에 할 수가 없으니까.

그 때 열네 살이던 우리 형이 고모네에 살면서 3일간 밥을 날랐는데, 아침에 갔는데 거기서 사식을 안 받아. 사식을 안 받으면 이제는 어디로 간다고 그러더래요. 어디로 가냐니까 내일이면 양사면, 처음에 잡혀 있던 거기가 인천하고 개성을 다리 놓은 데인데 거기가 아주 가까워요. 집에서 밥을 묶어서, 그냥 주먹밥이지, 주먹밥을 만들어서 잔뜩 해 가니까 (피랍인들을) 쭉 묶어서 줄을 세워 놨는데 강화에 있던 사람들이 여기서 거기로 나간 거야. 저녁에만 나오는 거지, 비행기만 떴다 하면 콩밭 숲으로 들어가고 비행기를 제일 무서워했었거든, 6.25 때. 주먹밥을 차니까 껌껌한데 어딘지 서로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데, 여기서 밥 해가지고 간 우리들도 우리 아버지를 제대로 주지도 못하고 손 내민 사람들에게 다 주는 거야.

껌껌하니까 다 줘 버려야지 거기서 어디를 찾아. 그리고는 거기서 배를 타고 그냥 간 거야. 끌려 넘어간 거야. 묶여가지고는 그냥. 그리 넘어가면서 인천 9.28작전이 떨어진 거예요. 우리는 또 찾으러 갔죠. 개성에 가서 동네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그러더래요. 세 번을 갔는데 저기가 강화 사람들 묻힌 데라고. 그래서 갔는데 어떤 이는 옷자락을 이렇게 꺼내놓고 옷을 보고 찾는데 포대기에다 놓고서 따발총을 둘렀는지 어쨌는지 동네사람들이 흙으로 묻어놨더래. 이쪽에 가서 찾으려고 하면 이 쪽에서 꿀럭꿀럭 구데기가 막 나오고, 저 쪽으로 가면 저 쪽에서 구데기가 막 나오는데 어떻게 찾을 길이 없더래요.
평양 묘향산에서도 그렇게 많이 죽였대요. 묘향산까지 가서도 거기서도 죽였다고 하길래 거기까지 찾아가나 했는데, 결과는 토성까지 가고 그러다가 1.4 후퇴가 또 된거지. 그렇게 가서는 아주 깜깜 무소식이죠. 도대체가 어떻게 된 것도 모르고.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장녀는 폐결핵으로 죽고 생계유지가 어려웠음.>

답_ 한창 성장기 때에 저희들로서 그 고통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계유지가 되지 않아서 세 사람이 영양실조로 다 죽었어요. 밥을 못 먹으니까. 큰 누나가 6.25 나고 폐결핵을 앓아서 51년도인가 52년도에 돌아가셨어. 생계유지할 게 없잖아요. 6.25 나고 나서 한 2, 3년 되면서 강화 인조가 아주 발달됐어요. 대구보다 먼저 발달됐죠. 인조가 발달되면서 여기 직물공장이 막 생기니까 그 때서부터는 공장을 들어갔죠. 학교를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어머니는 그 인조를 가지고 팔려고 저 강원도 대관령 비포장도로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가서 파시는 거야. 그 때만 해도 물건들이 시장에는 없으니까 이런 공장에서 떠다가 팔면 그걸로 쌀도 받고 뭐도 받고 해서 쌀을 또 팔아서 돈을 가지고 기지촌, 탄광촌 이런 데를 다니면서 장사를 한 15년 정도 하셨지. 어머니도 서른셋 청춘에 그렇게 돼서 50살까지 그러셨으니 아주 고생을 했지.
저는 중학교를 다 못 나왔어요. 형은 갈 생각도 못하고. 우리 집이 군인들 중대본부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서 밥 해먹고 쌀 남은 걸로 어떻게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상황이 안되니까 담임선생님이 교감한테 가서 '얘 책을 좀 주시오' 해서 책도 그렇게 타고, 담임선생님이 유시현이라고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결과는 중퇴하고 못 나왔어요. 못 다니고 할아버지 앞에서 구학을 배웠죠.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우리 작은 아버지들이 4남매, 5남매 되고 고모들이 있고 해서 대가족이었어요. 열일곱 살에 시집 와서 서른 살까지 15년 동안 그 큰살림을, 일꾼 둘씩 놓고 애들까지 생활을 그렇게 하다가 그 어린 나이에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동네에서 이름을 날리던 집안이었는데 6.25전쟁 임박해서부터는 다 몰락해서 아버지는 그렇게 되시고. 당신은 대한청년단 조직해서 그냥 살아나 계시지, 그거 한다고 식구들만 남겨 놓고 그냥 가버리니까 나머지 식구들은 전부 다 엉망진창이 된 거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 호적정리

<미정리>



○ 연좌제 피해

<은행 취업시 신원조회에 걸려 좌절감을 많이 느낌. 피랍인의 외손자가 정보학교 졸업 후 청와대에 취업을 하려고 했으나 외할아버지가 행방불명으로 남아있어 역시 좌절되었음.>

답_ 기술 파트로 은행에 들어가는데 연좌제에 걸려서 안 되고, 애를 엄청 많이 먹었어요. 결혼해서 아이들은 둘, 셋씩 됐는데 서울 장충동에 있다가 그나마 은행에 들어가려고 (강화에) 내려왔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거기에서 좌절감을 무척 느꼈어요. 정부를 얼마나 불신했는지 몰라요.

문_ 다른 형제분들도 연좌제로 어려움을 겪으셨어요?
답_ 내 바로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의 아들들한테는 (피랍인이) 외할아버지잖아요. 그 아들이 정보학교 들어갔는데 동생이 나한테 “글쎄 오빠, 우리 애들이 청와대 들어가려고 신원조회를 하는데 외할아버지가 행방불명으로 돼 있어서 무슨 연좌제인가 뭔가로 청와대를 못 들어간대” 그래요. 정보학교를 나오면 원래 다 청와대에 들어가게 돼 있대요. 근데 그게 걸려서 못 들어갔다고 하기에, “야, 거기 너희들까지 피해가 가냐”라고 했죠.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명예 회복>

답_ 행방불명이라는 건 정부에서 쓰는 얘기고, 가족이 볼 때는 완전히 납북된 거다. 행방불명하고 납북은 상당히 다르다는 거야. 왜냐하면 행방불명은 내가 그냥 나갔어도 행방불명이 되는 거고, 납북은 잡혀가는 거란 말이다. 근거가 없다면 우리가 더 죽기 전에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한테 가서 증언을 다 들어라. 열 사람이든 백 사람이든 다 들어봐라. 일흔 먹은 사람들한테 가서 양서면의 김명혁이, 그 사람 어떻게 해서 없어졌느냐고 하면 열사람이고 백사람이고 나이 일흔 넘은 사람이면 양서면 김명혁이 다 알아요.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 사람은 납치당해서 잡혀 갔다, 대한청년단 활동하다가 잡혀갔다, 이런 게 확실히 나오지 않냐. 그러면 그런 걸 인정해 줘야지.
명예를 회복시켜다오. 그러면 이다음에 자식한테도 ‘아, 그건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있다가 납북된 거다.’ 이게 정확하게 나오지 않냐. 그걸 해다오. 납북 어부들도 보면 실종이라고 실종, 납북이 아니야. 잡혀갔든 어쨌든 실종 아닙니까. 없어졌으니까 모르니까 지금. 어떻게 그게 납북이 아니고 실종이냐고. 그것 자체가 틀린 거지.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님, 형하고 나하고 둘인데 형은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하기 때문에 이런 걸 잘 못했습니다. 저라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이런 걸, 여기서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서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마음에 위로가 되게끔 형을 대신해서 제가 아버님께 이렇게 문안 인사드립니다. 그저 저희들 앞날을 지켜봐 주시고요. 저희는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낳아주셔서 아직까지 건강하니까 이것은 다 부모님의 은공입니다. 그리고 어머님과 같이 합장하면서도 시신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아버님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해서 같이 모셨습니다. 그 점을 널리 이해해주시고 앞으로 좋은 미래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지. 어머니는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어. 자동차도 아들들이 제대로 못 해드리고 수만리길 걸어 다니시면서.(눈물)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님 말씀에 아버님은 피 눈물이 가슴에서 우러나는 것 같았을 거라고.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 얼마나 참 그렇게, (아버님이) 정말 조그마했을 때부터 그렇게 귀여워하셨는데. 그 청춘에 많이 드시지도 않고 서른세 살에 그렇게 가셨으니. 그냥 여기서 산소라도 똑바로 있으면 가서 그렇게 할텐데 그런 것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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