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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각선 (증언자-김인선)
이름: 관리자
2013-09-17 12:10:01  |  조회: 2276
2007. 3. 22. 채록
070322A 김 각 선 (金珏善)

피랍인
생년월일: 1924년 4월 7일생
출생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출생
당시 주소: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대신리
피랍일: 1950년 8월말
피랍장소: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대신리
직업: 경찰관
학력/경력: •수도경찰학교졸업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외모/성격 : 얼굴이 검고, 호남형, 성격은 급한 편.

증언자
성명: 김인선(1937년생)
관계: 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경찰관이었던 피랍인은 자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기거하던 중, 1950년 8월 말 집으로 찾아 온 내무서원과 자유대장(지방 좌익) 백씨, 자유대원 1명에 의해 연행됨.
- 자유대 사무실을 거쳐 양평내무서로 후송된 이후 소식 없음. 동생(경찰관 생활을 했음)과 함께 피랍됐으나 동생은 돌아옴.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상봉, 적극적인 대부정책, 납북자 가족 지원

“8월 말쯤부터는 인민군들이 자꾸 전세가 밀리니까, 그때 아무래도 김일성이 전 인민군이나 내무서원들에게 지령을 내렸다나 봐요. 우익인사는 다 없애고 납치하라고. 형님이 납북된 그날, 형님은 하도 폭격이 심하고 하니까 위험하다고 집 뒤에다 반공호를 파고 있었어요. 일단 자수를 했으니 마음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후 두세 시쯤 단월면 지서 자리에 있는 내무서원 한 사람이 총을 가지고 오고, 지방마다 있었던 인민군 자유대의 대장 백씨라는 사람이 자유대원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우리 형을 잡으러 왔어요.”

“어느 날인가 낌새가 이상해요. 그 때서부터 대한청년단장, 동네 간부한 사람들, 하다못해 구장, 반장, 좀 잘 살던 사람들, 면서기, 의용소방대 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금은 이북하고도 대화가 되니까 적극적으로 납북자 문제를 정식으로 꺼내놓고, '우리 납북자 현황이 이렇다, 생존자 있으면 찾아서 알려 달라' 하던가, 납북자 가족에게 적극적인 정부 지원이 있어야지. 반세기가 넘도록 묻어둘 순 없잖아요. 억울하잖아요. 과거사 진상 위원회에도 신고하러 갔더니 처음엔 안 받아 주더라고요. 납북자 신고나 6.25사변 때 좌익 세력에게 학살당한 건 접수가 안 되더라고요. 한국군이나 경찰이나 우익 세력에게 피해당한 좌익 세력은 신고를 받아준다니.”


○ 직업 및 활동

<여주 경찰서 근무>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경찰관이었어요. 수도경찰학교 2기 졸업하고, 주로 용산경찰서에서 근무했어요. 삼각지 파출소에서도 근무하고, 여주 경찰서에서도 근무하고 했어요.

문_ 형님이 결혼은 하셨어요?
답_ 했었죠. 아들 하나가 있고. (납북 이후) 형수님은 재가를 했어요. 아들은 결혼을 해서 지금 형님한테 손자 하나, 손녀 하나가 있지요. 조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고향에서 할머니와 저(삼촌)와 함께 살았죠.



○ 납북 경위

<경찰관이었던 피랍인은 자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기거하던 중, 1950년 8월 말 집으로 찾아 온 내무서원과 자유대장(지방 좌익) 백씨, 자유대원 1명에 의해 연행됨. 자유대 사무실을 거쳐 양평내무서로 후송된 이후 소식 없음. 동생(경찰관 생활을 했음)과 함께 피랍됐으나 동생은 돌아옴.>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6.25사변이 나고 다들 남하를 했는데, 형님이 가족 때문이었는지 남하를 안 하고, 여주 대신면에 외사촌 누이동생네에서 자고 먹고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경기도 양평 고향으로 와서는 집에 숨어 있었죠. 개전 초기에는 인민군들이 낙동강까지 전진하면서 당시 대한 청년단, 군인, 경찰 등 우익인사들에게 자수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형님이) 자수를 했지. 자수한 사람은 일단 처벌은 안하고, 자술서만 받고 다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니까 인민군들이 후퇴를 했다고. 그러다 서울이 9월 28일에 수복이 됐잖아? 그러니까 9월 28일 전인 8월 말쯤부터는 인민군들이 자꾸 전세가 밀리니까, 그때 아무래도 김일성이 전 인민군이나 내무서원들에게 지령을 했다나 봐요. 우익인사는 다 없애고 납치하라고. 형님이 납북된 그 날, 형님은 하도 폭격이 심하고 하니까 위험하다고 집 뒤에다 반공호를 파고 있었어요. 그 때가 8월 말쯤이었는데 더운 날이었죠. 일단 자수를 했으니, 마음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후 두세 시쯤 단월면 지서 자리에 있는 내무서원 한 사람이 총을 가지고 오고, 지방마다 있었던 인민군 자유대의 대장 백씨라는 사람이 자유대원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우리 형을 잡으러 왔어요. 당시 우리 둘째 형님도 경찰관이었거든요. 그러니 지방 빨갱이 누가 고발을 한 거예요. 저 집에 경찰관 했던 형제가 집에 와 있다고. 그래서 그 놈들이 우리 큰 형님과 작은 형님 둘을 같이 묶어서 데려간 거예요.

당시 내무서 위쪽에 마루가 엄청 넓은 집이 있었는데 거기를 자유대 사무실로 쓰고 있었어요. 거기에 원래 그 집 주인하고, 우리 형님 두 분하고, 지주급이던 목재상을 하던 최 사장, 고향에서 경찰관 했던 사람 등 대여섯을 잡아다 놨어요. 그리고는 그 놈들이 조사하고 하는 거예요. 그 자식들이 밥도 안 줘서 집에서 밥을 해다가 먹였죠. 그렇게 일주일 인가를 있었어요. 어느 날인가 낌새가 이상해요. 그 때서부터 대한청년단장, 동네 간부한 사람들, 하다 못해 구장, 반장, 좀 잘 살던 사람들, 면서기, 의용소방대 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은 산으로 피신하는 거예요. 동네가 용문산이랑 가까워서 거기 가서 구멍을 파서 숨어있고. 우리 형님은 첫 케이스로 잡아가서는 안 내 놓더라고. 그러다가 양평읍으로 연행해 갔어요. 형님하고 같이 잡혀있는 다섯 명인가가 갔어요. 한 놈은 총을 멘 채로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자유대장 백씨도 가고. 우리 동네에서 읍까지 거의 50리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양평 내무서에 가둬놨죠. 그 때부터 어머니가 매일 찾아가서 면회시켜달라고 하는데, 이놈들이 면회도 절대 안 시켜줘요. 그런데 그리로 옮긴지 열흘인가 보름 만에 우리 둘째 형은 나왔어요. 둘째 형은 경찰관이긴 했지만 일 년도 채 못하고 그만 뒀었거든요. 둘째 형 말이 큰 형도 며칠 있으면 내보낸다고 했다니, 그걸 믿고 그냥 있었던 거죠.

문_ 당시 상황이 심각했나요?
답_ 9.28이 되고 하니 이놈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거예요. 우익 세력은 전부 잡아가고 학살하고 했어요. 당시 동네 옆으로 한강 물줄기가 흘렀고, 거기엔 백사장도 있는데, 밤이면 그 놈들이 백사장을 파서 하루 저녁에 몇 십 명씩 죽여 거기에 묻는 거예요. 죽여서 덮어 버리고, 덮어 버리고. 나중에 알아보니 몇 백 명이 죽었다더라고요. 거기에도 천행으로 도망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한강 물 속으로 숨어서 살았대요. 그 사람이 나와서 죽인 장소 이런 걸 다 알려준 거죠. 나중에 파서 보니 수백 명이 죽은 거야. 양평 군내 우익 세력은 거의 다 잡아 죽인 거예요. 나중엔 유가족들이 시체 찾는다고 난리지. 나도 형님하고 부모님 따라서 찾으러 갔죠. 우리 큰 형님이 왜정 때 군인 나가서 총알을 맞아서 흉이 있어요. 그걸 찾는 데, 이 새끼들이 어떻게 죽였는지 형체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가족이 총 출동해서 3일 동안을 찾았어요. 그런데도 결국은 못 찾았어요.

그러고서도 또 양평 쪽 좌익 세력들이 그러니까 인민 위원회 놈들, 자위대 놈들, 양평 지방 빨갱이들이 용문산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산음리 산골에 백백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거기가 본거지였어요. 9.28수복이 되니까 이 새끼들이 북으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거기서 전부 집결을 해서는 야간에는 빨치산 노릇을 하는 거예요. 근방에 우익 세력을 밤이면 찾아다니면서 몇 십 명을 죽었어요. 돌로 쳐 죽이고 어쩌고. 거진 1년을 그 생활을 했어요. 그 때 당시 각 면에 방위군이란 게 있어. 양평 군 사령관이었던 하데내시가 각 면의 방위군들과 몇백명이 거길 토벌을 해서 그 새끼들이 뿔뿔이 흩어진 거죠. 1950년도 말, 1951년도 초 정도 돼요. 그 때 동네마다 과부가 가득해요. 양평 학살 사건이 엄청 큽니다. 동네마다 위령제도 지내고 그랬어요. 그래서 반공비가 양평 칼산에 있어요. 매년 기념식을 하기도 해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거창 사건이라든가,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제주도 사건, 노근리 사건 이런 거는 한국군이나 미군에게 피해 받은 걸로 이런 경우는 다 조사를 하고 보상을 해 주잖아요. 그런데 6.25때 납북되고 학살된 우리 우익 청년들, 애국인사들에게는 정부에서 굉장히 미온적인 태도예요. 대책도 없고. 납북자 가족들에게도 그렇고. 이게 참 큰 문제라고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배우자는 재가하고, 아들은 피랍인의 친가에서 자람.>

답_ 형수는 재가하고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운 거죠. 당시 조카는 세 살 정도고, 형수는 스물 네 살인가 그랬고. 젊잖아요. 그러니 수절을 못하지. 재가를 한 거고. 조카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서 커서, 이젠 가정을 이뤘지만 얼마나 한이 맺히겠어요. 나는 삼촌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이 있어도, 자기 부모만큼 지원을 해 줍니까? 부모 정도 모르고 컸으니 보면 불쌍하죠.

문_ 생계는?
답_ 아버지는 면에 다니시고 그 후에도 쭉 면장으로 있었고. 농사지었는데 크게 해서 우리가 살긴 괜찮았어요. 아버지는 왜정 때부터 면서기로 다녔어요.

문_ 아버님은 잡혀가시지 않았어요?
답_ 아버지도 이놈들이 잡으러 오고 그랬죠. 그러니 형님 잡혀가고 며칠 후에 용문산 쪽으로 도망간 거예요. 수복될 때까지 산에 있었어요. 지방에도 한 동네에 남의 집 세 살던 사람들, 고용 살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전부 빨갱이에요. 이 사람들이 자기들도 나무하러 가는 척하고 산에 숨어있는 우익 세력을 정탐해서 정보 제공하고 그러더라고요. 그 때 나는 열다섯 살이었는데 한양공고 다니다가 6.25가 나서 고향에 내려와 있던 때였어요. 미숫가루 해 가지고, 지게 지고 밤 따러 다니는 척 하면서 식량 보급하고 정보도 알려 주고 그랬어요. 산에 아버지와, 소방서에 다녔던 사촌 형님도 있고 그랬죠. 둘째 형님은(김택선)인데, 또 따로 도망 다니고. 그러니 6.25사변이 참. (한숨)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적십자사에서도 하고 내무부에서 조사할 때도 하고,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에도 하고. 신고 할 수 있는 데는 다 했어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조사만 했지. 아무 것도 없어요. 대책이 없어요.



○ 호적정리

<정리함>

답_ 오늘날까지 있다가 실종신고를 해야 하는데도, 혹시 또 모른다고 미루고 미루다가 1984년도에 실종, 사망신고를 했어요.



○ 연좌제 피해

<신원조회를 받을 때 까다로웠음>

답_ 특별한 건 없었는데 우리 고향에도 나쁜 새끼들이 있어요. 형님이 경찰관 하다가 납북되어 간 건데, 우리를 잘 모르거나 연령차가 많이 나는 놈들은 그냥 '월북했다'고. 나도 공무원을 했는데, 신원조회같은 걸 하면, 우리하고 사이가 좋거나 하는 놈들이 그런 소릴 해서 사람 골탕 먹이고 말이야. 세상에 그런 놈들이 다 있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상봉, 적극적인 대북정책, 납북자 가족 지원>

답_ 국가에서 좌익 세력에 의해 우익 세력이 많이 참변을 당하고 했으면, 그 사람들 다 애국자 아닙니까? 그러면 국가에서 거기에 상당한 대우나 보상을 해 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단 말이에요. 납북자 가족에 대해서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지금은 이북하고도 대화가 되니까 적극적으로 납북자 문제를 정식으로 꺼내놓고, '우리 납북자 현황이 이렇다, 생존자 있으면 찾아서 알려 달라' 하던가, 납북자 가족에게 적극적인 정부 지원이 있어야지. 반세기가 넘도록 묻어둘 순 없잖아요. 억울하잖아요. 과거사 진상 위원회에도 신고하러 갔더니 처음엔 안 받아 주더라고요. 납북자 신고나 6.25사변 때 좌익 세력에게 학살당한 건 접수가 안 되더라고요. 한국군이나 경찰이나 우익 세력에게 피해당한 좌익 세력은 신고를 받아준다니 나 참. 이게 무슨. 정부가 좌익 정부인 건지. 그러다 나중에 신고를 받아줬는데, 이것도 얼마 안됐어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평소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어머니에게 (형님은) 장자 아닙니까? 우리 어머니가 요조숙녀셨는데, 형님 잡혀가고는 정신이 돌아가지고 그냥 맨날 술을 드시고, 담배도 피시고. 술 먹고 울고 또 울고. 살림도 안하고 맨날 돌아다니고, 그렇게 몇년 간을 홱 돌아 있었어요. 몇 년을 그러더니, 평생을 형님을 가슴에 묻고 돌아가신 거죠.

문_ 형님에 대한 기억은?
답_ 형님이 장자였는데, 9남매의 장남이니 동생들 끔찍히 여기고, 동생들이고 부모고, 할머니고 그렇게 끔찍이 여겼어요. 아주 효자였어요.

문_ 많이 그리우셨나 봐요?
답_ 전 지금도 부모님 생각은 별로 안 나도 형님 생각이 많이 나요.

문_ 형님에게 전하는 말?
답_ 형님, 평생 어머니 아버지가 형님 보고 싶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애원하고, 형님이 보고 싶어서 어머니는 매일같이 우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이북에서 살아계시면 한 번 뵈면, 저도 소원이 없겠습니다. 형님 살아계시면 건강하세요. 꼭 한 번 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들 현수, 며느리가 손자 손녀 하나씩 낳아서 잘 키우고 잘 있습니다. 형님이 계시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아휴 (한숨).

문_ 형님 유품은 있는지?
답_ 1.4후퇴 이후 전투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피난 갔다 돌아오니 동네가 아주 잿더미에요. 집이 한 40채 있었는데 싹 잿더미에요. 그러니 유품이고 사진이고 아무 것도 없어요. 타지 않는 물건 사기 그릇, 장독대 빼곤 아무 것도 없어요. 제가 치안국이나 용산 경찰서 다 가봤거든요. 그런데 기록이 없어요. 그저 형님 수도경찰학교 2기 졸업장 하나 집에 있는 거 그거 밖에 없어요. 그 때 족보를 땅에 묻었었는데 그 안에 둔 거라 그거 하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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