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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광수 (증언자-이정화)
이름: 관리자
2013-09-17 12:08:50  |  조회: 2174
2007. 3. 13. 채록
070313A 이 광 수 (李光洙)

피랍인
생년월일: 1892년
출생지: 평북 정주
당시 주소: 서울시 효자동
피랍일: 1950년 7월 12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소설가
학력/경력: 와세다대학교 철학과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매
외모/성격 : 곧은 성품이지만 가족에겐 자상한 편이었음.

증언자
성명: 이정화(1935년생)
관계: 딸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무정, 흙 등의 한국 최초 근대 장편소설을 쓴 소설가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 나온 이후 친일 행적이 있음.
- 1950년 7월 12일경 인민군 셋이 자택으로 찾아와 피랍인의 자수를 종용, 종로경찰서로 연행. 9월 25일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차입을 허용해 물품을 넣었으나, 이미 7월에 평양으로 후송된 것으로 밝혀짐.
- 북쪽에서는 피랍인이 1950년에 사망했다고 전하나, 1963년 북경병원이나, 1964년 추방된 북한의 어느 시골에서의 사망설 등이 있어 정확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사망일자도 불명.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자 관련 공식 언급을 확대하고, 정확한 역사 기록을 남길 것.

“피랍되기 전부터 그 사람들이 와서 가자고 했어요. 자수를 하라고. 여운형씨 그런 분들과 친한 사이긴 했지만, 아버님 생각 자체는 자율적인 사상을 갖고 계셨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하고 협조를 했으니까 자수를 하라는 뜻이겠죠. 그 길로 종로 경찰서로 가셨는데 9월 25일쯤인가 공산군 저쪽에서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입을 받겠다고 그래요. 옷들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그래서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더니 오후 2시쯤에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아버님 거기 계시다고. 저희가 그래서 차입을 했죠. 여름옷을 입고 계셨으니까 양복, 비타민을 넣었어요. 감옥에 계시는 줄 알고. 그런데 9.28 수복이 되고 9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 가보니 아무도 없고 시체가 하나 있고 그런 거예요. 아버님 자취는 없고. 나중에 보니까 아버님이 7월 달에 벌써 평양에 가셨다고 계광순씨라는 분이 기고했더라고.”

“사망 날짜를 북한에서는 1950년이라고 하고, 북경에서는 1963년. 또 하나는 신상옥 선생님도 감옥에 계셨을 때 어느 분에게 들은 얘기로는, 아버님이 이북에 절대 협조를 안 해서 어느 산골짜기에 추방을 당해 혼자 감자같은 것을 잡수시며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냥 돗자리에 그렇게 싸여서 묻히셨대요. 그게 1964년인가 1965년인가예요. 그러니 정확치 않죠.”


○ 직업 및 활동

<무정, 흙 등의 한국 최초 근대 장편소설을 쓴 소설가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친일 행적이 있음.>

문_ 선생께서 언제 서울로 오셨는지?
답_ 아버지는 일본에 가셔서 한 3년인가 공부하시다가 학비가 떨어져서 또 한국에 나오셨어요. 그러다 김성수 선생님이 주신 학비로 또 일본에 가셨죠. 처음에 가셨을 때에는 명치학원에 들어가시고, 그 다음엔 와세다대학교에서 공부하셨어요. 그러다가 2&#8226;8 독립선언서를 쓰셨고, 당시 일선(日船)을 타고 상해로 가야 하니 독립선언서를 명주에 싸고, 옷에 감춰서 양복에 꿰맸대요. 그리고 상해에서 임시정부 때 계셨다가 1921년에 다시 서울로 오셨죠.

그 이후로는 해방 전까지 계속 서울에 계셨어요. 결혼도 하시고. 아버님이 일본에 계셨을 때 폐병을 앓으셨어요. 몸이 많이 아프셨는데 경성여자대학교, 그때는 의학전문학교라고 했는데 그 때 어머님이 졸업생이셨대요. 그랬는데 아버지가 그 병원에 오셨더랍니다. 폐병 3기라고 그렇게 진단이 나왔대요. 진료니 약품이니 해서 계산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으셨대요. 그래서 어머님이 몰래 호주머니에서 어머니 돈을 내드리고, 이후엔 계속 아버님 숙소에 가셔서 각혈하는 것도 다 치워 드리고 간호를 하셨죠. 요새는 뭐 학벌 따지고 집안 따지고 그러는데, 어머니는 순전히 돈 하나도 없는 폐병 환자에 생명을 바치신 셈이죠.

문_ 선생님은 저명한 문인이신데요?
답_ 그렇죠. 서른 몇 권의 책을 쓰셨고 시도 쓰시고 논문도 많이 쓰시고 수필 그런 거 쓰셨죠. 직업이 글 쓰시는 것이었죠. 책도 많이 읽으시고. 톨스토이에 많은 감화를 받으셨고요. 원고 청탁이 많이 들어왔었어요. 예를 들어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 전기, 백범 일기를 한문에서 읽기 쉽게 한글로 고치는 것도 하시고, 이승만 박사님이 시국 선언서인가 그런 것도 좀 부탁하러 사람을 보내시면 기꺼이 쓰셨어요. 교가도 많이 쓰시고 청탁 받으면 뭐든지 다 쓰시니까요. 그 쪽에서 주면 다른 분의 이름으로 글이 나오기도 하고, 도산 안창호 전기 같은 것은 아버님이 당시 친일 때문에 몇 년 동안은 이름을 내고 글을 쓰지 못하는 입장에 계셨잖아요. 그래서 아버님 이름 없이 계속 흥사단에서 출판이 되었죠. 평소 옛날 얘기를 잘 하셨어요,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하시구요. 저는 일단 아버님이 좋았죠.

문_ 다른 정치적인 활동이나 청년들 가르친다거나 대외적인 활동을 하신 것은 없는지?
답_ 아버님이 쓰신 <무정>을 보면 조국을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여성의 해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소설 <흙>에도 거국적으로 농촌 계몽운동을 하는 애국자를 쓰셨죠. 그런 글을 보고서 일반시민도 한국을 사랑하게 되고, 청년들도 아버님 글을 읽고 많이 독립운동에 참가 했답니다. 그러는 동시에 <민족개조론>을 쓰셨을 때는 근대화의 정진론을 주장하셨다가 사람들에게 친일반민족적인 입장의 글이라며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양동우회의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도 들어가셨죠. 흥사단 밑에 있는 수양동우회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문화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비밀운동 하는 거라고 해서요. 그때 아버님이 감옥에 들어가시고.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들어가셨는데 추운데서 감옥 생활을 해서 두분 다 아프셨어요. 그러다 도산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결국 수양동우회 사건의 제1의 책임자가 아버님이 되죠. 당시 아버님이 7년 선고를 받았는데 나중에 상소를 하고 나서 일본과 협조한다는 약속을 해서 거기 계신 모든 분들이 그 일로 다 무죄가 됐답니다. 그래서 감옥에 계신 분들이 다 나오셨는데, 그러니까 아버님이 제일 먼저 친일을 선언하신 거죠. 그런 일 저런 일로 아버님은 반일운동을 30년 하다가 나중에 6년 동안 친일로 돌아섰죠. 사실 일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진다면 아버지가 역적으로 매장되는 당연한 것인데, 그때 각오를 하셨답니다. 제일 문제됐던 건 최남선 선생님과 아버님이 같이 일본에 가서 학도병으로 나가라는 연설을 하신 거죠.

문_ 그런 일들 때문에 선생님이 후회하지는 않았는지?
답_ 글쎄요. 아버님께서, 옛날식으로 생각하면 그런 일 있을 때 자결을 해야 된다고, 그것이 옛날 사고방식이죠.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그러고 그냥 자결을 하셔야 하는데 안 하셨죠. 안 하시고 계속 계셨거든요. 왜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마 아버님이 자결하셨다면 저는 아버지를 전혀 모르고 자랐을 거예요.

문_ 당시 가정형편은?
답_ 어머니가 허영숙 산원(병원)을 하시면서 아버님을 병간호 하시고,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하셨어요. 아버님이 수입이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1940년 이후엔 아버지 쓰신 글이 다 금지되어서 출판도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다 경제권을 갖고 계셨어요.

문_ 평소 지인들이 많이 찾아 왔었나요?
답_ 그럼요. 끝없이. 어머님이 안 된다고 그래도 손님들이 많이 오시고 했어요.

문_ 그 의미는 아버님의 친일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는 건가요?
답_ 아 물론이죠. 아버님을 위하는 분들이야 아버님이 애국자신데 자기를 위해 친일을 하셨겠어요? 무슨 부귀영화가 있다고. 감옥에 계실 때 김동환 선생님이 그랬대요. ‘아버님이 그동안 부는 없지만 그래도 명성도 있고, 부인이 경제력도 있는데 이제 그만 세상 볼일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명예 버리고 동료를 다 살리는 것이 어떠냐?’고. 당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많았거든요. 명예를 버리고 다 심청이가 아버님을 위해서 그런 심정으로 친일을 시작하셨다는데요. 정말 그런 심정이라면 후에 누가 알아주거나 안 알아주거나 나라만 잘 되면 만족이 아니겠어요? 나라를 위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방법이 달랐던 거 같기도 해요.



○ 납북 경위

<1950년 7월 12일경 인민군 셋이 자택으로 찾아와 피랍인의 자수를 종용, 종로경찰서로 연행됨. 9월 25일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차입을 허용해 물품을 넣었으나 이미 7월에 평양으로 후송된 것으로 밝혀짐.>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7월 12일 피랍되기 전부터 그 사람들이 와서 가자고 했어요. 자수를 하라고. 여운형씨 같은 분들과 친한 사이긴 했지만, 아버님 생각 자체는 자율적인 사상을 갖고 계셨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 협조를 했으니까 자수를 하라는 뜻이겠죠. 그 길로 종로경찰서로 가셨는데 9월 25일쯤인가 공산군 저쪽에서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입을 받겠다고 그래요. 옷들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그래서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더니 오후 2시쯤에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아버님 거기 계시다고. 저희가 그래서 차입을 했죠. 여름옷을 입고 계셨으니까 양복, 비타민을 넣었어요. 감옥에 계시는 줄 알고. 그런데 9.28 수복이 되고 9월29일 서대문형무소에 가보니 아무도 없고 시체가 하나 있고 그런 거예요. 아버님 자취는 없고. 나중에 보니까 아버님이 7월 달에 벌써 평양에 가셨다고 계광순씨라는 분이 기고했더라고.

문_ 인민군이 거짓말을 한 거네요?
답_ 네, 여러 가지 회의가 있었답니다. 아버님은 6.25전쟁이 난 후에는 아무것도 안 쓰셨어요. 자수하라고 할 때에도 붓을 꺾으셨고요. 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쓸 필요가 없다고. 여러 회유는 있었지만 완전히 거절을 하셨죠.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강계 쪽으로 쭉 가는데, 아버님이 팔다리가 다 얼고 더 이상 걸으실 수 없었대요. 한참 추울 때였으니까. 그래서 홍명희 부수상한테 편지를 쓰셨대요. 그래서 그 사람이 직접 아버님을 모셔다가 집에도 들여다 놓고 인민병원에 입원 시켜줬는데, 결국은 그때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지는 저도 모르죠.

문_ 아버님이 잡혀갔을 당시에 몇 명이나 집으로 왔던가요?
답_ 아 간단해요. 세 명 정도. 아주 젊은 인민군이에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저렇게 젊은 사람이 군인이구나’하고 생각했죠.

문_ 피랍 당시 군인들이 남긴 말이 있습니까?
답_ 잠깐 가자고 그러고선 인민군이 먼저 나가고 아버님이 우물쭈물 하시다가 나중에 나갔는데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우리 언니 말로는 아버지는 트럭 중간에 앉고 인민군과 운전수는 앞에 앉고 그랬대요. 그 때 어머니가 막 큰절을 하면서 ‘잡아가지 마세요’ 하고 말렸어요. 겨우 17살이나 되는 군인에게.



○ 납치 후 소식

<북쪽에서는 1950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1963년 북경병원 사망설이 있고, 1964년 추방된 북한의 어느 시골에서의 사망설 등 다양한 얘기가 있어 사망일자가 확실치 않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나중에 어떤 분이 평양까지 가셨다가 소식을 알려주셨어요. ‘아버님이 벌써 7월부터 거기 가 계셨다’고. 그리고 1978년에 김학철 선생님이라고 연변에 계시는 작가님이 저한테 편지를 하셨어요. '아버지가 북경대학에 계시다가 병이 악화되셔서 1963년인가 북경병원에서 돌아가셨다’고요. 제가 그 편지를 지금도 갖고 있는데요. 사망 날짜를 북한에서는 1950년 이라고 하고, 북경에서는 1963년. 또 하나는 신상옥 선생님도 감옥에 계셨을 때 어느 분에게 들은 얘기로는, 아버님이 이북에 절대 협조를 안 해서 어느 산골짜기에 추방을 당해 혼자 감자 같은 것을 잡수시며 사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냥 돗자리에 그렇게 싸여서 묻히셨대요. 그게 1964년인가 1965년인가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다 1991년인가요? 미국 시민권자인 오빠에게 ‘아버님 산소가 이북에 있으니까 보러 와라. 근데 절대로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소식이 왔어요. 그래서 북한에 가 보니, 아버님묘가 평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더래요. 무덤엔 아버님이 1950년이 돌아가셨다고 쓰여 있고요. 이후 재작년쯤인가 어느 신문에서 당시 산소를 평양 쪽에 다 모았다는 얘기를 봤어요. 월북 인사, 납치된 인사들, 그런 분들 묘지 사진과 함께.



○ 남은 가족의 생활은?

<의사였던 피랍인의 부인이 생계를 꾸리고, 자녀 셋은 미국으로 유학하여 인재로 자람>

답_ 피난 가서는 어머니가 부산에서 방 하나 꾸며서 환자들을 봤어요. 나는 간호사 노릇 하고. 그러다가 또 서울에 올라갔죠. 저는 여기 저기 취직해서 돈도 벌고 했는데 어머니가 여비를 만드셔서 나랑 언니랑 화물선을 태워 미국에 유학을 보냈어요. 그게 1952년인데, 아직도 전쟁중이었죠. 화물선을 타긴 했지만, 어디서 내리는지 몰랐어요. 열흘을 가서 샌프란시스코가 나왔어요. 여기서 4년 동안 공부하고, 한국에 가려 했는데 어머니가 말려서 결국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죠. 오빠도 미국에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교에서 물리학자가 되었고요. 우리 언니는 미국에서 교수를 하다가 변호사가 됐고 지금은 부동산 사장이에요.

문_ 어머니께서 자녀 교육을 위해 희생을 많이 하셨나 봐요?
답_ 어휴, 우리 어머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보통이 아니에요.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위선자라고 그래요. 우리 아버님은 어린애 둘이 물에 빠지면, 자기 자식보다 남의 자식을 먼저 건질 사람이래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불이 나면 자식을 살리려고 불 속에 들어가는 어머니’같은 거. 그런 걸 보면 우리 아버님은 훌륭한 모성애라고 찬양을 하실 텐데, 우리 어머니는 웃으시며 ‘그거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마음이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이에요.

문_ 평소 어머니께서 아버님을 많이 그리워하셨나요?
답_ 물론이죠. 돌아가실 때 저한테 아버님이 농사를 지으시던 농가를 주셨는데요. 아마 그걸 복원하라는 뜻인 것 같아요.



○ 정부의 노력

<없었음>



○ 호적정리

<없음>

답_ 제가 199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호적은 없고요.



○ 연좌제 피해

<없음>



○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 관련 공식 언급을 확대하고, 정확한 역사 기록을 남길 것.>

답_ 정부가 자꾸 바뀌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납북자를 찾아주셨으면 좋겠는데. 글쎄요, 일본 정부에서는 납북자 문제를 계속 추적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에서는 그것보다는 화해를 먼저 하자 그런 쪽으로 나가는 것 같은데요. 정부 입장에서는 전쟁을 방지하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시민단체로서 직접 교섭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우선은 정부에서 계속 체계적으로 납북자와 관련해서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네요. ‘어느 분은 확실히 이렇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군데에서 해주면 기록이 남겠죠. 지금 필요한 것이 확실한 기록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외국에서 많이 살아서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비교해 보면요. 없어지는 역사들, 민족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 영국이나 남미에서 없어지는 역사가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되겠고, 지금도 미국에서 땅을 파냅니다. 어떤 자료엔 100-150년 전 노예들의 생활이 자세하게 적혀져 있었는데, 그들이 미국 건설에 얼마나 큰 이바지를 했어요. 우리도 그걸 해야죠. 나중에 통일되면 그런 것을 파내서 아버님이 어디서 어떻게 되셨다는 것을 알고 싶고, 산소에 있는 뼈를 통해 여러 사정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겠죠.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지, 이 협의회를 축복해주세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을 다 해 주시고 있어요. 또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지도해 주세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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