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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득년 (증언자-이희돈)
이름: 관리자
2013-09-17 12:08:19  |  조회: 2636
2007. 2. 7. 채록
070207A 이 득 년 (李得秊)

피랍인
생년월일: 1883년 음력 11월 12일생
출생지: 강화도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 50번지 2호
피랍일: 1950년 8월 12일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유도회(儒道會) 부회장
학력/경력: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보성전문대 교수, 1921년 서울 청년회 창설멤버, 조선물산장려운동 주도, 한학관계 고등고시위원 外
직계/부양가족: 외아들 내외와 손자 7남매
외모/성격: 온유하고 겸손함.

증언자
성명: 이희돈(1934년생)
관계: 손자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전쟁이 나고 피신했다가 1950년 8월 12일경 집으로 오자마자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정치보위부로 연행됨.
- 지명도가 있는 분이라 정치적으로 대북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납북한 것으로 추정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자국민 보호와 인권 차원의 납북 문제 접근,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해방되고는 수염도 깎으시고 상자에 넣어뒀던 양복을 꺼내 입고 외부로 출입이 잦으셨어요. 김구 선생과 임정요인들이 있던 경계장 출입증을 가지고 다니셨어요. 그리고 1946년에 서울에 유림들 집합소 같은 '유도회'가 생깁니다. 전국의 유림들이 모이는 데 거기서 부회장을 하시고, 1947년부터는 한학 관계 고등고시 위원으로 집에서 시험 채점하고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또 납치당하실 때 할아버지를 연행하러 온 사람이 문답을 좀 하대요. 할아버지는 방안에 계시고 자기는 툇마루에 앉아서 여쭤볼 게 있다면서. 제가 언뜻 듣기로는 '어느 정당에 문교부장으로 올라가 계시냐?'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내가 직접 그런 거 한 거 아니고, 그냥 누가 이름을 넣은 거다'고 하시고 뭐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을 들었어요.”

“정부는 1차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은 시기라 그렇겠지만, 조금 더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의 아픔을 덜어주는 인권 문제에 대해 힘을 내 주셨으면 좋겠고요. 이북의 국민을 위한 인권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자국민의 인권을 우선해야 할 것 아니에요? 우선이 아니라도 최소한 병행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점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구요. 또 저희 조부가 어디에 어떤 경위로 어떻게 사망하셨는지, 사망 날짜가 언제인지, 어떻게 하면 유골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런 납북자 문제가 이북이 6.25사변 이후 얼마나 변했나 하는 것을 재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직업 및 활동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하고, 보성전문대 교수, 1921년 서울 청년회 창설멤버, 조선물산장려운동 주도, 한학 관계 고등고시위원 등 다양한 경력이 있음. 기본적으로 유학자로 1946년부터 유도회 부회장을 맡음.>

문_ 할아버님이 대학 때 정치를 전공하셨네요?
답_ 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세요. 넓은 곳에서 학문을 더 닦으려고 하셨고, 대한제국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셔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을 하셨죠. 당시 같이 공부하셨던 분이 나중에 임정요인이 되신 조완구 선생, 또 조소앙 선생은 인근 대학에 다니셨는데 그런 분들이 친구들이었죠.

문_ 주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답_ 유학 중에는 동경유학생회 잡지 편집도 하시고, 1908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한국에 장래에 대해 유학생회 명의로 장문의 상신서를 쓰셔서 한국 정부에도 보내셨죠. 1910년 졸업하시고 귀국하셔서 보성전문대학에서 3년 정도 가르치셨어요. 그 다음에는 사회 활동을 주로 하셨죠. 저희 조부는 1906년 일본을 가서 보시고, 국가 정치권력을 장악 하는 것 이전에
사회가 개혁이 되고 발달이 돼야 한다는 것을 많이 느끼셨던 것 같아요. 당신은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이시고, 실천하려고 한 것은 교육 사업,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는 운동을 하셨어요. 구체적으로는 1921년 서울청년회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죠. 그 단체는 좌, 우익을 다 연합하는 청년 단체거든요.

그리고 조선물산장려운동에서 상당히 중심적인 역할을 하셨고, 최근 어느 책에 있는 자료에서 봤는데, 1917년에 이시영씨 형님 이회영씨와 함께 고종 황제 망명을 위해 활동하시는 데에도 함께 하신 것 같아요. 1930년대에는 일본의 세력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독립 운동이 많이 약해질 때라 공부만 하셨던 것 같고, 상해임시정부 독립군 무관학교 등과 연계해서 국내 연락책같은 걸 했었나 봐요. 이회영 선생 부인이 종종 집에 들르시고, 조카들이 많이 심부름을 다니곤 했었대요. 해방될 때까지는 여름에는 모시바지 저고리에 중절모, 봄가을에는 엷은 옥색 두루마기 입으시고 수염 기르시고, 겨울에도 오버코트 한 벌, 이런 식으로 같은 옷을 제복처럼 입고 다니시다가, 해방되고는 수염도 깎으시고 상자에 넣어뒀던 양복을 꺼내 입고 외부로 출입이 잦으셨어요. 김구 선생과 임정요인들이 있던 경계장 출입증을 가지고 다니셨어요. 그리고 1946년에 서울에 유림들 집합소 같은 '유도회'가 생깁니다. 전국의 유림들이 모이는 데 거기서 부회장을 하시고, 1947년부터는 한학 관계 고등고시 위원으로 집에서 시험 채점하고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또 납치당하실 때 할아버지를 연행하러 온 사람이 문답을 좀 하대요. 할아버지는 방안에 계시고 자기는 툇마루에 앉아서 여쭤볼 게 있다면서. 제가 언뜻 듣기로는 '어느 정당에 문교부장으로 올라가 계시냐?'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내가 직접 그런 거 한 거 아니고, 그냥 누가 이름을 넣은 거다'고 하시고 뭐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을 들었어요. 그리고는 자세한 건 가셔서 얘기하자며 연행해 갔어요.



○ 납북 경위

<전쟁이 나자마자 집안 남자들은 인근 친척, 지인의 집으로 모두 피신함. 그러나 동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피랍인을 찾아 자꾸 집으로 찾아오자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옴. 1950년 8월 12일경 집으로 오자마자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국립도서관 자리였던 정치보위부로 연행됨>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6월 28일에 인민군들이 들어왔잖아요. 그래서 저희 조부가 7월 초순에 집안 남자는 다 피난을 시키셨어요. 자신도 피하시도 저희 아버지도 피난시키시고, 또 저희 형이 고3, 저는 고1 올라갈 때라 저희 형제도 포천의 할아버지 친구 집에 보내셨어요. 그 때가 한창 의용군 지원하게 하거나 그럴 때거든요. 집에는 만삭이신 어머니와 12살 먹은 누이동생 이하 애들 다섯이 있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점잖게 집으로 자꾸 찾아오는 거예요. 존경하는 사람한테 뭐 배우러 온 것처럼.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상황을 잘 모르시고 동생을 할아버지 계신 곳으로 보내서 그런 사람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전해준 거죠. 그렇게 2주 정도를 그랬으니, 이제 할아버지도 아셨겠죠. 7월 중순부터 사람들을 잡아갔다고 하니. 그때부터는 할아버지도 각오를 하셨나 봐요. 동생이 두세 번 할아버지에게 가서 얘기를 전했대요. 그런 사람들이 와서 어머니에게 딱딱거린다는 식으로.

그래서 할아버지가 그러면 '12일에 내가 가겠다.' 해서, 12일에 집에 오시자마자 그 사람들이 바로 뒤따라 들어와서 잠깐 대화하다가 잡혀가신 거죠. 저는 마침 그 전날 집이 궁금해서 포천에서 집에 와 있을 때였어요. 저도 그 땐 상황을 잘 모르고, 그냥 그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존경해서 모시고 가나 보다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동에서 나왔다고 했대요. 가까운 곳에 있고 하니, 순진하게 받아들였죠. 그런데 할아버지가 살짝 우릴 보시며 (조용히) '어디로 가는지 따라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뒤따라갔어요. 그랬더니 송월동에서 성미길이라고 그 길로 내려가서 이화여고 입구, 덕수궁으로 빠져 프라자 호텔, 조선 호텔 쪽을 지나, 소공동 한국은행 쪽으로 내려가서, 국립 도서관으로 갔어요. 그리로 들어가요.

인민군이 총을 맨 채 둘이 문 옆에 서 있고, 옆을 보니까 젊은 부인네가 보자기에 뭘 싸서 들고 서 있어요. 그 때 비로소 알았어요. ‘아, 이게 형무소구나.’ 사람들이 옷 차입 하려고 서 있으니까. 그래서 거기까지 확인하고 길 건너편에 서 있다가 집으로 왔어요.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얘기했더니, 저희 친척 중 판사 한 분이 있는데, 그 분도 며칠 전에 그리로 갔다고 해요. 심동구라는 분이세요. 그제서야 '거기가 잡아가는 곳이구나', '잡혀가신 거구나' 안 거죠. 그 뒤로 저희 어머니가 저를 다시 숨을 곳으로 보내셨어요. 이 사실을 동네서 알면 곤란하니까, 왜냐면 그 땐 이웃집도 믿을 수가 없어요. 동네 반장네서 다 체크해서 의용군 나가야 되고 하는 시스템이 돼 있었나봐요. 그 때 저는 다시 포천으로 쫓겨 갔죠.



○ 납치이유

<인지도가 있는 분이라 정치적으로 대북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납북한 것으로 추정>

문_ 할아버지의 경우 68세로 연세가 높으셨는데 왜 납치됐다고 생각하는지?
답_ 1962년도에 나온 책을 보니까 그 당시 임정요인들, 국회위원들, 소위 말하면 이승만 정부와는 조금 안 어울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집에 연금을 시켜놓고 있다가, 7월 말 경에 서울 시청 같은 데 집합을 시켜 트럭으로 실어 평양으로 갔다거든요. 관광시켜 주겠다고 하고. 조철의 '죽음의 세월'이란 책에서 봤어요. 그러니 아마 저희 조부도 그런 부류로 넣고 집으로 계속 소재 파악을 하러 왔는데, 소재 파악이 안됐고, 나중에 발견됐을 때는 차가 떠난 다음이니, 그렇게는 못 가고. 대신 '그 동안 숨어 지낸 걸 보니 뭔가 구린 데가 있을 꺼다'며 조사할 게 있다고 데려간 거 같아요.

결국 그 분들을 평양으로 데려간 이유는 '통일은 된 거다. 그런데 남한 인민들이 100% 지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인심을 자기네 쪽으로 돌리기 위한 중간 역할을 그분들에게 시키기 위해서였어요. 그 분들을 우선 세뇌를 하고 교육을 시키면, 이들은 남한에 상당히 지명도가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이 권하는 대로 따라오지 않겠나 생각한 건데, 결국은 토사구팽이죠. 자기들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 사람도 잡아가고 필요하면 한국 정치가도 잡아가고 하면서 이용하는 거죠. 박헌영 같은 사람들 잘 데려다 대접하고 잘 부려먹고는 결국 숙청하지 않았습니까?



○ 납치 후 소식

<없음>

문_ 이후 소식은?
답_ 전혀 소식 모르죠.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소문은 외무장관하셨던 변영태씨 형제분이 저희 조부보다 10년 정도 아래신데, 할아버지와 비슷한 분을 어느 구덩이에서 봤다는 얘기를 했다는데 정확하지 않죠.


○ 남은 가족의 생활은?

<집 한 채를 팔고 줄여가며 외아들 내외와 손자 7남매가 공부함>

문_ 당시 가정 형편은?
답_ 할아버지가 유학 다녀오셔서 사회활동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도 총독부에 취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희 증조부가 재산을 좀 많이 남기셨어요. 그래서 1920-30년대까지는 그걸로 쓰신 거죠. 그러다 결국 그 재산을 다 지키지 못하고 저희 아버지에게 송월동에 조그만 집 한 채 남기신 건데, 7남매나 되는 자식이 있으니, 또 사변 이후 직장도 없고 이럴 때니, 그 집으로 다 대학공부 시키시고 하시면서 있는 거 모두 깨끗이 없어졌죠. 그러니 저희 부모(납북자의 외아들 내외)가 고생을 많이 하신 거죠. 집에 세를 놓고, 전세로 옮겨 가면서 살아 온 거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그 때는 신고하는 것도 없었고, 신고해야 하는 것도 몰랐고.
나중에 보면 1952년도니 1954도니 명단이 나오는데, 이건 치안국이라든지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거지. 아마 공무원들이 많을 거예요. 직장에서 없어진 사람들은 파악이 쉬우니까. 그러다 나중에 1956년에 저희 아버지가 아시고 신고하셨던 것 같아요.



○ 호적정리

<사망 처리함>

답_ 어느 기록에 보니 1957년에 이북에서 3백여 명에 대한 생사확인 회답이 왔다면서요? 저희 아버지가 그걸 보셨는지 1971년도에 호적을 정리했어요. 1950년 8월 12일 집을 나가신 날짜로 사망신고를 했어요. 그리고 그 날 제사를 모시고. 묘는 못 썼죠.


○ 연좌제 피해

<없었음>

답_ 그런 건 잘 몰랐어요. (손자인) 제가 육군 장교 지원해서 갔거든요. 그 때 조금 염려는 했지만, 무사통과 됐어요. 조부가 나이가 많으시니 남파간첩될 일도 없고 하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저희 집안엔 별 일은 없었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자국민 보호와 인권 차원의 납북 문제 접근,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답_ 정부는 1차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여러 가지 일이 많은 시기라 그렇겠지만, 조금 더 국민을 보호하는, 국민의 아픔을 덜어주는 인권 문제에 대해 힘을 내 주셨으면 좋겠고요. 이북의 국민을 위한 인권을 이야기하기 이전에(물론 그것도 해야 하고 좋은 일이지만) 자국민의 인권을 우선해야 할 것 아니에요? 우선이 아니라도 최소한 병행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점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구요. 또 당장 살아있는 분은 현재도 가슴이 아프겠지요. 돌아가신 분의 경우는 조금 잊고 살기도 하지만,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돌아가신 분이나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성격이에요. 저희 조부가 어디에 어떤 경위로 어떻게 사망하셨는지, 사망 날짜가 언제인지, 어떻게 하면 유골을 찾을 수 있는지 알려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이런 납북자 문제가 이북이 6.25사변 이후 얼마나 변했나 하는 것을 재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납북자 문제 한 가지만 봐도 그 사람들의 잔인성,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는 않는다는 타민족이 우리에게 한 것 보다 오히려 더 심한 일을 한 사람들이 지금은 얼마나 변했는가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독재 정권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일반 국민에게 아무리 퍼다 주고 힘을 기울여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저희 조부께서 저를 많이 생각하셨어요. 독립국가가 되기에는 상당히 먼 장래다. 그러니 자신이 4대 종손이고, 저는 6대가 되니 대를 잇는 것은 저희 형에게 맡기시고, 그리고 둘째인 저에게는 자기의 못 다한 것을 계속해서 하시게 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저희 조부가 제겐 아버지 역할을 하셨고, 가정교사 역할을 하셨고 그랬어요. 늘 저희 할아버지는 아랫목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시고, 저는 책상에 앉아 있고 그랬어요. 그렇게 공부하는 습관을 제게 길러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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