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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윤희병 (증언자-윤신중)
이름: 관리자
2013-09-17 12:01:20  |  조회: 1920
2007. 1. 24. 채록
070124A 윤 희 병 (尹禧炳)

피랍인
생년월일: 1921년 4월 19일생
출생지: 서울
당시 주소: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152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1일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은행원(금융조합 남대문지소 서기)
학력/경력: 덕수상고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매

증언자
성명: 윤신중(1945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1950년 8월 1일 오전 6시경 자택에서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서울 청운국민학교로 이송된 후 연락 없음.
- 피랍인의 처가는 피난 과정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한 피살자가 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피랍인 명예 회복

“1.4후퇴 때 외할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이 총살당했어요. 피난 간 곳이 시화공단,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얘네들(인민군)이 나중에 퇴각을 하면서 거기를 지나갔어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볏단 속에 숨었어요. 그걸 이웃집 사람이 알려준 거예요. '시계를 차고 있다'면서. 왜냐면 당시 외삼촌은 금은방을 해서 잘 살았거든요. 그러니 쉽게 말해서 인민군보다도 동네 사람이 더한 거죠. 그러고 나서 남은 여자들과 아이들은 피난 간 집의 사랑방 같은 곳에 다 모아 놨어요. 그리고 새벽에 총소리가 났대요. 한참 있다가 누가 문을 따 줘서 나가니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시체를 눈구덩이에서 찾았다니까요.”

“소식이라도 알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이죠. 단동에 가면 북한 사람들이 많이 와요. 우리는 고구려 유적지 관광도 하는 겸 갔는데, 북한 사람 중에도 중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이 있는 사람은 압록강을 수시로 들락거리더라고요. 저도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한 번 얘기를 해 봤어요.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희망을 갖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이쪽에서 자진 월북을 한 사람은 그래도 저쪽에서 대우를 받았고, 그렇지 않고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기 때문에 한 쪽으로 제쳐놨다고 하더라고요.”


○ 직업 및 활동

<은행원(금융조합 남대문지소 서기) 이었음>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은행원이었어요. 남대문에 금융조합이 있을 때 가본 적은 있어.

문_ 직장 외의 다른 활동은?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특별한 뭐 그런 건 없었어요. 그냥 술 좋아하시고.

문_ 가정 형편은?
답_ 어머니 말씀에는 왜정시대 때 다른 사람들은 고무신 신기도 힘들었는데, 고무신도 잘 가져오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은행 쪽(종사자는)이 살기가 괜찮으니까. 배급도 많이 받아오고 그랬대요.



○ 납북 경위

<1950년 8월 1일 오전 6시경 자택에서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청운국민학교로 이송된 후 지금까지 소식 없음. 당시 인근 주민들과 친척들도 다수 피랍됨. 이후 피랍인의 처가 쪽은 피난 과정에서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함.>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저는 너무 어려서 잘 기억 못해요. 하나 기억나는 건 부엌에서 어머니가 주먹밥을 만들어서 어디론가 쫓아가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가 청운국민학교라고 하더라고요. 그 안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어머니가 철조망 사이로 주먹밥을 들여보내던 기억이 나요.

문_ 질문이 없어요.
답_ 아버지가 잡혀간 다음날인가 집 근처 이발소에 있는 사람도 잡혀 갔어요. 그 사람은 아버지 친구인데, 잡혀 가다가 '설사가 났다'고 하면서 도망쳐 왔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 소식을) 물어보니까 '윤희병이는 그놈들한테 끌려갔다'고 했대요. 그게 끝이에요.

문_ 납치 당시 아버지가 집에 계셨나요?
답_ 어느 날 갑자기 빨간 거를 한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문을 두드리곤 했어요. 우리 집에도 새벽, 아침쯤에 왔어요. 나간 날짜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당시 해군이었던 작은 아버지가 8월경이라고 신고를 했더라고요.

문_ 주변에 잡혀간 사람들이 많았나요?
답_ 많았어요. 이종사촌형, 막내외삼촌, 이 사람들은 지금도 행방불명이에요. 이종사촌형인 최순철은 납북자 명단에 있던데, 최인모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1.4후퇴 때 외할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이 총살당했어요. 피난 간 곳이 시화공단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얘네들(인민군)이 나중에 퇴각을 하면서 거기를 지나갔어요. 그 마을에는 남자들이 별로 없었는데, 인민군들이 온다고 하니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볏단 속에 숨었어요. 그걸 이웃집 사람이 알려준 거예요. '시계를 차고 있다'면서. 왜냐면 당시 외삼촌은 금은방을 해서 잘 살았거든요. 그러니 쉽게 말해서 인민군보다도 동네 사람이 (더한 거죠). 그러고 나서 남은 여자들과 아이들은 피난 간 집의 사랑방 같은 곳에 다 모아 놨어요. 그리고 새벽에 총소리가 났대요. 한참 있다가 누가 문을 따 줘서 나가니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시체를 눈구덩이에서 찾았다니까요.



○ 납치 후 소식

<없음>

문_ 가족들의 찾으려는 노력은?
답_ 어머니가 찾아보려고 하셨겠죠. 하지만 1.4 후퇴 때는 피난 가 있으니 찾을 방법도 없고. 피난 가서 생활하다가 57년인가 58년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배우자가 양장기술이 있어 자녀 3남매를 양육함>

답_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부터 양장점 기술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개 6.25때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들은 어머니들이 삯바느질하고 식모살이해서 가족 부양하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렇지는 않았어요. 양장점 기술로 돈을 버셔서 3남매가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어요. 동네 친구들은 고무신도 못 신었는데, 나는 구두신고 다녔으니까요. 그러니 어머니는 고생을 하셨지만, 나는 큰 어려움 없이 컸어요.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어머니는 평생 한 품고 가셨죠.

문_ 많이 그리워하셨나요?
답_ 표현은 잘 안하셨지만, 재혼도 안하고 3남매를 기른 걸 보면 요새 말로 일편단심 민들레죠. 어머니가 그 때 만나던 친구들이 유명한 안재홍씨 며느리 등 전쟁미망인이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리곤 하셨어요. 나중에 내가 연좌제 때문에 '이제 아버지 실종 신고합니다. 신고해도 나중에 돌아오면 복원 된대요'라고 해도 어머니는 '뭐 그렇게 급하냐?'며 (못하게 하셨죠). 그런 걸 보면 늘 생각하셨나 보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에이, 그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어요? 우리집까지 쫓아오고 그러게. 그럴 일 없겠지.
차라리 국군으로 나갔다면 몰라도 우리 같은 민간인이 무슨. 가끔 농담으로 원망하는 게 차라리 군인이었으면 혜택이나 받을 수 있지. 납북되신 거는 오히려 연좌제가 걸려 있잖아요.



○ 호적정리

<정리함>

답_ 1980년 12월 25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때 다 호적을 정리했죠. 아버지 실종 신고도 내고. 그래서 실종 선고 판결을 받았죠.



○ 연좌제 피해

<신원조회에서 아버지가 납북자로 나오는 바람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음.>

답_ 처음에 호적상의 호주는 아버지잖아요. 그걸 실종신고를 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못하게 했어요. 그러니 자연히 호주로 남아 있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게 남아있으니, 해외를 가려고 해도 아버지가 납북자란 게 나와요. 호적을 아무리 뜯어 고쳐도 원적은 못 고쳐요. 그러다가 내가 군대를 가서 사단장실에서 근무를 하는데, 보안사령관이 나를 조사하니까 아버지가 납북자인 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게 있으면 지휘소나 통신 병과에서 근무를 못해요. 다행히 같이 근무했던 부사단장이 '내가 책임지겠다'며 신원 보증을 서 줬었어요. 크게 연좌제 피해를 본 건 아니지만,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걸린 거지.

문_ 감시는?
답_ 감시할 일도 없고, 내가 감시당할 만한 위치도 아니었고. 그런데 문제는 내가 뭘 하나 하려 해도 그 전력이 나오는 거예요. 한 번인가는 회사 일로 일본에 가려고 해도 문제가 되고.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상봉>

답_ 바라는 거 없어요. 여태까지도 하나도 안 해줬는데 지금에 와서 하겠어요? 쉽게 말해 정부에서 할 의지가 없는 거죠 뭐. 그러니 민간단체가 쫓아다니고 하는 거고. 정부에서는 기껏 해 봐야 금강산이고 판문점에서 이산가족이나 만나게 거지만, 그거 해 봐야 (상봉하지 못하는) 이산 가족이 얼마나 더 많은데요. 언젠가 신문에 보니 그럽디다. 평생을 기다려도 못 만난다고. 지금 내 나이도 벌써 62인데, 생사를 아는 사람도 만나기 힘든데, 정부에서는 쉽게 얘기해서 생색만 내는 것 같아요. 그러니 브로커가 있어 중국 가서 만나고 그러지.

가족들의 바람이야 이런 거를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서 우리 같은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는 거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지금 여든 여섯이나 되셨어요. 그 나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나이고. 아버지가 잡혀가시다 돌아가셨을 수도 있지만, 혹시 가서 사셨다고 해도 그 나이에 과연 영양실조 같은 것에 걸리지 않고 과연 살아 있겠는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5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못 만나고 있고, 지금이라도 정부가 노력해서 찾아도 될까말까 한데.

소식이라도 알고 싶은 게 당연한 마음이죠. 단동에 가면 북한 사람들이 많이 와요. 우리는 고구려 유적지 관광도 하는 겸 갔는데, 북한 사람 중에도 중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이 있는 사람은 압록강을 수시로 들락거리더라고요. 저도 그런 사람을 통해서도 한 번 얘기를 해 봤어요.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희망을 갖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이쪽에서 자진 월북을 한 사람은 그래도 저쪽에서 대우를 받았고, 그렇지 않고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기 때문에 한 쪽으로 제쳐 놨다고 하더라고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살아계신 소식만 듣는다면 제가 고마운데, 희망을 안 갖고 있어요. (머뭇) 엄마가 많이 고생하신 것만 아시면. 너무 어려서 헤어져서 아버지 소리가 선뜻 나오질 않네요. 살아계시면 건강하시고, 혹시 세상이 변해 만날 수 있으면 그 때는 아버지라 크게 부를는지. 그동안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3남매 기르느라 고생하셨어요. 혹시 저세상에서 만나더라도 두 분이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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