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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하준 (증언자-김하겸)
이름: 관리자
2013-09-17 12:22:20  |  조회: 2084
2007. 10. 22. 채록
071022A 김 하 준 (金河濬)

피랍인
생년월일: 1924년 8월 10일생
출생지: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대평리
당시 주소: 서울 안암동
피랍일: 1950년 6월 28일경
피랍장소: 금융조합연합회
직업: 금융조합연합회
학력/경력: 보성전문학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외모/성격: 미남형에 활달한 편

증언자
성명: 김하겸(1936년생)
관계: 동생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인은 당시 서북청년단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만삭인 아내를 돌보느라 피난을 가지 못하고 집에 피신해 있던 중 직장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출근한 뒤 연행된 것으로 알려짐.
- 피랍자의 고향은 함경남도이므로 전쟁 이후 부친만 북에 남고 모친 증언자 등은 월남한 이산가족이 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피랍인 명예 회복

“6.25가 터지니까 피난을 가야되는데 형수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집에 숨어서 형수를 돌보고 있었어요. 직장을 못 나가고. 근데 하루는 직장 동료가 형님 보고 나오라고, 직장이 비어있으니까 나와서 일도 해야 되고 또 당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붙잡아 가겠느냐, 그래도 우리가 옆에서 있어주면 되는 것 아니냐 하고 갔는데 그 날 붙잡혀 갔단 말이예요.”

“어머님, 본인 둘이서 살았어요. 마음고생이 많았죠. 어머님은 84세에 돌아가셨는데, 30년 동안을 가슴에다 응어리를 묻고 사셨을 거예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았어. 피난 생활이라는 건 말도 못하게 고생했죠. 내가 대학은 다녔지만 직장 다니면서 밤에 다녔어요. 그 때는 방통대도 없고...”



○ 직업 및 활동

<금융조합연합회 근무, 동대문구 서북청년단 활동>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어릴 적부터 서울에 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얻었는데 그 당시 금융조합연합회이고, 지금의 농협중앙회 전신이죠.

문_ 다른 청년 활동을 하셨나요?
답_ 형이 활달한 성격이죠. 살던 곳이 안암동이었기 때문에 동대문구 서북청년단 총무 정도로 활동하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문_ 가족관계는?
답_ 형님과 형수. 애기가 빨리 서지 않아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임신이 좀 늦게 됐죠. 당시 가족은 형님과 형수 두 사람이었고, 저하고 아버지, 어머니는 북한 함경남도에 살고 있었죠.



○ 납북 경위

<만삭인 피랍인의 아내를 두고 피신할 수 없어 집에 숨어 있던 중에 직장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출근했다가 연행됨>

문_ 납북소식은 어떻게 들었어요?
답_ 6.25때 형수가 만삭이라 해산달이었어요. 6.25가 터지니까 피난을 가야 되는데 형수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집에 숨어서 형수를 돌보고 있었어요. 직장을 못 나가고. 근데 하루는 직장 동료가 형님 보고 나오라고, 직장이 비어있으니까 나와서 일도 해야 되고 또 당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붙잡아 가겠느냐, 그래도 우리가 옆에서 있어 주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갔는데 그 날 붙잡혀 갔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 형수가 불편한 몸으로 사식을 넣으면서 왔다 갔다 했죠. 그러면서 해산을 했는데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고 일주일 돼서 죽었어요. 내가 알고 있기로는 6월 말경에 해산을 해서 7월 초순에 아기는 죽고 형수는 7월 초순부터 9.28때까지 두 달 정도 서대문 형무소에 사식을 해서 다녔어요.

9.28때 국군이 들어와서 전해주기를, 도망가면서 사람들을 끌고 가서 죽였다고 했어요. 형이 붙잡혀 가서 죽었다고 지금까지도 그렇게만 알고 있는 거예요. 국군은 우리 형님처럼 남한에 살던 분인데, 우리 형님은 직장에 다니고 그 사람은 국군에 입대해서 전투하다가 고향으로 다시 밀고 들어온 거죠. 그리고 형님하고 가까운 분이기 때문에 알고 와서 전해준 거예요.

문_ 당시 주변에 납치된 분들이 있었는지?
답_ 북에서도 내무서에 붙잡혀서 며칠씩 구류를 당하다가 9.28로 도망칠 때, 북한에서는 아마 10월 초, 중순쯤 될 거예요. 그 때 가면서 남쪽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 때 우리 아버지도 대상이 됐는데 아버지는 잠시 피해 있어서 붙잡혀가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많이 붙잡혀갔거든요. 근데 총알이 없어서 일일이 쏠 수가 없으니까 죽창, 또는 칼로 찔러 죽였어요. 해변가에 방공호를 파서 거기에 전부 쇠사슬, 포승으로 만들어서 열을 지어 전부 집어넣고 찔러서 사살하고 도망갔거든요. 근데 거기에 한 겹이 아니고, 두 겹, 세 겹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제일 밑에 깔린 사람들은 창이 미처 들어가지 않아서 살 수가 있었어요. 그렇게 도망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얘기를 우리는 수십 번 듣고 목격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 형도 그렇게 됐으리라 싶어 아예 생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걸로 끝났구나 했지요. 그리고 뒷조사를 해 흔적을 남겨서 내가 가지고만 있으면 되고, ‘언젠가 통일되면 자세한 소식을 듣겠다, 형수라도 만나야겠다’ 는 생각밖에 없고, 다른 건 내가 할 도리를 못했어요.

문_ 뒤에 형님의 흔적을 찾아보고 알게 된 내용들은?
답_ 직장관계는 기록상으로 보고 6월 28일 정도 될 겁니다. 어느 날 직장에 나왔다가 직장에서 붙잡혀 갔고 붙잡혀 갔을 때는 직장에 출근한 사람들이 모두 봤죠. 우리 형님만 붙잡혀간 게 아니고 3명인 걸로 알아요. 인사카드를 찾아보면 그 때 붙잡혀간 사람들 이름이 나와요.



○ 납치이유

<서북청년단 활동>

문_ 서북청년단은 어떤 단체인가요?
답_ 반공을 모토로 하고 북에서 내려온 북한 학생들이 모여서 사상으로 뭉친 친목, 정치 단체라고 볼 수 있죠.

문_ 납북 이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답_ 오랜 세월이 지나서 확실하지 않은 걸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는 (피랍인이) 서북청년단의 안암동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과 알력이 생긴 게 어느 정도 있었을 거예요. 평상시에는 모른척하고 있다가 인민군이 나오니까 그 때 알력이 생긴 사람이 인민군 쪽에서 활동하면서 우리 형님이 대상이 되어서 잡혀간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 납치 후 소식

<없음>

문_ 국군이 전해준 소식 외에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는지?
답_ 없습니다.

문_ 찾으려는 노력은?
답_ 피난 가서 고등학교를 거기서 다니고 졸업해서 서울에 올라왔어요. 그 때가 57년도인데, 57년도 올라와서 형님 다니던 직장을 찾았고, 형님이 살던 집, 하숙집 주인을 만나서 형님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어요. 형님이 살던 집에서 옮겨온 책상이며 책이며 사진 문서를 봤고, 직장에 가서는 기록상 우리가 알고 있던 상황이 다 맞아서 퇴직 위로금도 받고 그랬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아버지는 북에 남고 어머니와 단둘이 월남해 오랜 피난생활동안 말 못하게 고생함>

답_ 어머님, 본인 둘이서 살았어요. 마음고생이 많았죠. 어머님은 84세에 돌아가셨는데, 30년 동안을 가슴에다 응어리를 묻고 사셨을 거예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았어. 피난 생활이라는 건 말도 못하게 고생했죠. 내가 대학은 다녔지만 직장 다니면서 밤에 다녔어요. 그 때는 방통대도 없고...

문_ 아버님은 북에 남아계셨나요?
답_ 아버님은 어머님보다 십년 위예요. 북에서 남아 있는 재산도 있고 하니까 남한에 나와도 땅굴 속에서 살다가 몇 달 있으면 다시 들어오니까 집을 지키고 있겠다. 추운데 병나서 죽는 거나 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해서 아버지는 집에 계시고, 어머니하고 나만 나온 거예요. 이후에 아버님 소식은 끊긴 거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이산가족 신청을 하셨어요?
답_ 물론 했죠. 처음 할 때 바로 신청했다가 이산가족 명단을 다시 정비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 추가시키고 해서 다시 올려서 신청해놨어요. 한 달 전에.



○ 호적정리

<월남해 원래는 호적이 없고 가호적을 만들었으나 피랍인의 기록은 기억나지 않음>

답_ 우리는 원래 호적이 없었어요. 여기 나와서는 이북 호적으로 그냥 있으면서 피난민증으로만 살다가 가호적제도가 생겨서 가호적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은 다 정리가 됐죠. 정리하면서 형님의 기록이 어떻게 내가 기억을 잘 못하겠네. 이후에 내가 남산도서관에 가서 족보를 떼다가 형님이 족보에 올라있는걸 봤거든요. 내가 어렸을 때 족보를 만든 거예요. 그 때 족보를 가지고 집에 와서 내가 생각나는 사람들 기준으로 조그마한 가승보를 만들었어요.



○ 연좌제 피해

<없음>

답_ 오히려 반대겠죠. 내가 사상이 정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우익쪽이니까 문제가 된다면 북에서 나온 사람들을 남쪽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그런 건 있어도 내가 생활하는데 지장은 없었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유해 송환>

답_ 우리 얘기는 이제 다 가신 분들이니까 더 얘기하지 않더라도, 당장은 아직 나이가 정정한 어부나 국군포로들을 빨리 만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고요. 금강산에 만드는 이산가족 면회소가 빨리 만들어져서 활성화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곧 있을 12월 선거에서 정부가 바뀌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고, 빨리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형님이 돌아가신 게 분명하고 안 돌아가셨다 해도 84세니까 생존해 있지 않다고 봐요. 형수가 북에 가셨으면 형수를 만나고 싶고, 형수 만나면 그 당시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죠. 시신이라도 지금 수습할 수 있다면 따뜻한 양지바른 곳에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게 제 소망이에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보고 싶은 형님, 제가 형님 얼굴을 못 본 지가 무려 60년이 넘었는데 형님 얼굴도 거의 잊어가는 나이가 됐습니다. 형님이 생존해 계셨다면 모든 게 잘 풀려서 가정이 모두 화목하고 여유롭게 살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형님이 가서 여러모로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형님이 그 청춘을 다 살지 못하고 간 게 안타깝고 후회스러웠습니다. 형님이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했으면, 그 태어나는 자식을 버리고라도 몸을 피신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형님도 좋고 모두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가족만 생각하고 그렇게 우둔하게 살았습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형님은 이미 가신 걸로 알고 저 세상에서라도 편안하게 가십시오. 제가 형님이 다 못한 뒤를 아직 미력이나마 남았으니까 통일이 되면 고향 가서 제 할 도리를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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