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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권태술 (증언자-권영환)
이름: 관리자
2013-09-26 10:21:55  |  조회: 2409
2007. 12. 17. 채록
071217A 권 태 술 (權泰述)

생년월일: 1903년 4월 26일생
출생지: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2가 91번지
당시 주소: 상동
피랍일: 1950년 8월 8일(오전 8시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공무원(서울특별시 중구청장)
학력/경력: 동경 중앙대학 법학과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4남 2녀
외모/성격: 신장은 160cm, 콧수염이 있고 안경을 쓴 갸름한 얼굴
온화하면서도 정확한 성격

증언자
성명: 권영환(1936년생)
관계: 자
증언 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서울 중구 구청장이었던 피랍인은 1950년 8월 8일, 무장한 군인을 대동한 내무서원 또는 정치보위부 기관원에게 연행된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음.
-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사법계에서 종사했으며, 고위 공무원이었던 피랍인을 행정가로 북에서 사용하기 위해 납치한 것으로 추정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치 피해 국가 공무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불편한 마음. 국가를 상대로 관련 소송 진행 중. 전후뿐 아니라 전시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와 노력 필요


“1950년 8월 8일, 아침 6, 7시쯤 됐을 거예요. 그 때 무장한 군인을 대동하고 내무서원이나 또는 정치보위부에 기관원으로 아는데 사복을 입어서 모르겠고, 와서는 아버님을 뵙자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 때 아버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고 어머님께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어머님이 아버님을 깨웠죠. 누가 당신을 찾는다고 그 말을 하고 있는데 그 기관원이 방으로 들어와요. 그래서 (기관원이) 가시자고, (아버님께서) “응, 알았다. 갈텐데 나는 아침마다 화장실 가는 버릇이 있으니까 화장실 갔다 와서 같이 가자” 그러시고는 화장실을 갔다 오셨어요. 그런데 그 기관원이 아버님이 화장실에서 우리 가족한테 무슨 연락사항을 적어놨다든지 또는 거기다 뭘 숨겨놨는지, 이런걸 확인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도 볼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화장실까지 쫓아가더라고요. 그런데 가면서 같이 온 군인한테 뭘 하나 건냈는데 권총이예요, 권총. 그걸로 봐서는 우리 아버님이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면 아마 협박이라도 해서 데리고 가려고 했던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되네요. 그 날 나가신 게 마지막이에요. 그 때가 여름이라 나가시면서 모시 고이 적삼에 운동화 차림이셨는데 이렇게 마루에 앉으셔서 세 살 난 동생 안고, “아빠 곧 갔다 올게”'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마지막 모습이고 마지막 말씀이에요.”







○ 직업 및 활동

<일본 유학 후 미군정청에서 근무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서울시 중구 구청장으로 발령 받아 근무>

답_ 1919년 3&#8228;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아버님이 중학교 3학년인가 그랬어요. 할아버님이 일본 유학 가서 공부하라고 하셔서 일본에 가셔서 1924년에 중앙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셨어요. 그래서 쭉 사법부 계통에 계셨죠. 지금의 대법원이에요. 그 당시에는 법원이라고 하지 않고 재판소라고 했는데 재판소에서 쭉 근무하시다가 해방되고 미군정청에 계셨는데 1945, 46, 47, 48년, 횟수로는 4년 있으셨죠. 군정청에 일본인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 관리처라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은 재경부 산하에 관제과라고 전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치프(chief: 과장) 역할을 하셨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서울시장으로 윤보선씨가 선임됐을 때 윤보선씨가 우리 아버지를 발탁하신 거죠. 그래서 중구청장으로 발령을 받아서 근무하시게 된 거예요.

문_ 전쟁 당시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1948년도에 정부 수립이 되고 그 이듬해인 1949년 2월 14일자로 서울 중구 구청장에 발령이 났습니다. 중구 구청장으로 근무하시며 다른 활동 없이 오로지 국가 공무원으로 근무만 하셨습니다.



○ 납북 경위

<무장한 군인을 대동한 사복 입은 자가 1950년 8월 8일 이른 아침, 자택으로 피랍인을 찾아 옴. 갔다가 곧 오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모시 고이 적삼에 운동화 차림으로 연행됨. 마포경찰서로 가셨다는 소식까지 확인하고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음>

문_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셨어요?
답_ 6&#8226;25때 피난 못 갔죠. 그 때는 못 가고 1&#8226;4후퇴 때는 피난을 갔죠. 6&#8226;25 때 피난은 서울에 계신 분 중에 95% 이상이 못 갔어요. 졸지에 6&#8226;25가 발발해서. 그리고 95% 정도가 피난을 못간 이유가 38선에서 항상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고, 개성 근처, 송악산 근처에서도. 그렇게 항상 충돌은 있었는데 정부에서 얘기는 '우리 국군의 실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절대 전쟁은 안 일어난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도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압록강 가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우리 국군의 실력이 대단하니까 정부를 믿어라' 이런 말이 그 때 한창 유포됐었다고요. 그리고 전쟁이 나서도 '옹진반도에 국군이 재수립을 했다. 개성을 탈환했다' 이런 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피난 갈 생각을 전혀 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27일 되니까 서울 근교에 대포 소리가 펑펑펑 나고, '아이고 이게 아니구나', 그 때서야 정신 차려 보니까 이미 한강다리는 끊어졌고 그래서 시민들은 대부분 다 피난을 못 갔죠. 그래 가지고 빨리 국군이 재입성하기를 기다린 거죠. 그것이 9&#8226;28 수복입니다.

문_ 납북 당시 상황은?
답_ 1950년 8월 8일, 아침 6, 7시쯤 됐을 거예요. 그 때 무장한 군인을 대동하고 내무서원이나 또는 정치보위부에 기관원으로 아는데 사복을 입어서 모르겠고, 와서는 아버님을 뵙자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 때 아버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고 어머님께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어머님이 아버님을 깨웠죠. 누가 당신을 찾는다고 그 말을 하고 있는데 그 기관원이 방으로 들어와요. 그래서 (기관원이) 가시자고, (아버님께서) “응, 알았다. 갈텐데 나는 아침마다 화장실 가는 버릇이 있으니까 화장실 갔다 와서 같이 가자” 그러시고는 화장실을 갔다 오셨어요. 그런데 그 기관원이 아버님이 화장실에서 우리 가족한테 무슨 연락사항을 적어놨다든지 또는 거기다 뭘 숨겨놨는지, 이런걸 확인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도 볼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화장실까지 쫓아가더라고요. 그런데 가면서 같이 온 군인한테 뭘 하나 건냈는데 권총이예요, 권총. 그걸로 봐서는 우리 아버님이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면 아마 협박이라도 해서 데리고 가려고 했던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되네요. 그 날 나가신 게 마지막이에요. 그 때가 여름이라 나가시면서 모시 고이 적삼에 운동화 차림이셨는데 이렇게 마루에 앉으셔서 세 살 난 동생 안고, “아빠 곧 갔다 올게”' 그렇게 말씀하신 게 마지막 모습이고 마지막 말씀이에요.

문_ 납치 당시 가족들은 잠깐 가셨다가 오는 걸로 알았겠어요.
답_ 그렇게 연행을 해 가면서 그 기관원이 양심이 돌아왔는지 아니면 우리 가족한테 미안했는지 우리 어머니한테 그러더군요. 한 3, 4일 조사하고 귀가 조치 시킬테니까 너무 염려 마시라고요. 우리는 그렇게 말해준 게 정말인지 알고 기다렸죠.

문_ 피신할 상황은 아니었는지?
답_ 그렇지는 않았죠.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국가공무원으로 일했을 뿐인데. 그렇죠. 그러나 그 쪽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던 거죠.



○ 납치이유

<행정가로 쓰기 위해 북에 데려갔을 것으로 추정>

답_ 그거는 제가 나중에 생각한건데요,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서 그 쪽에 행정가라든지 일손이 모자란다고, 그러니까 모셔가서 이용을 하려고 데려간게 아닌가 (생각해요). 젊은 사람이라면 자기네 군대에 쓰겠죠. 고급 두뇌니까 자기네 행정력에다 이용하려고 그랬던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문_ 주변에 비슷한 경우가 있었나요?
답_ 네,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닌데 그렇게 아버지께서 연행되신 후에, 같은 근무처에서 근무하시던 분인데 황과장님이 계셨어요. 우리 아버지께서 먼저 (연행되어) 가신 후에, 그 댁에 증인으로 출두하라고 호출을 해서 출두하셨는데 그 분도 그 뒤로 소식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 댁은 순전히 우리 아버지 때문에 증인으로 출두했다가 그 뒤로 소식이 없는 거죠.



○ 납치 후 소식

<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은행에 다니던 바로 위 형님이 백방으로 알아보긴 했지만 일단 마포 경찰서 쪽으로 가셨다는 말씀까지는 확인됐고 그 다음에는 소식을 알 수가 없었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가장을 잃고 벌이가 없는 상황에서 집에 있던 패물이나 옷가지를 팔아 식생활 문제를 해결, 1&#8226;4후퇴가 있고 지방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 1954년에 서울로 돌아와 하숙을 치고 세를 줘서 생계유지>

답_ 졸지에 가장이 안 계시게 됐으니까 나이들도 어리고 생산 활동이라는 건 할 수 없었어요. 그때가 전쟁 중이니까 경제활동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고, 오로지 집에 있던 것, 환전, 환금하기 좋은 패물이나 옷가지들을 시장에 갖다 팔아서 그걸로 양식을 해다 먹는 거죠.

문_ 경제활동은 형님께서 주로 하셨어요?
답_ (큰형님이 은행에서 근무했었는데) 은행에서는 인원 정리한다고 감원대상에 들어가서 은행을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경제활동하는 사람이 없었던거죠. 그러다가 1&#8226;4후퇴가 일어나서, 9&#8226;28되고 1&#8226;4후퇴까지 겨우겨우 살기는 했는데, 또 6&#8226;25 치하에 있을 수가 없어서 그때는 피난을 갔어요. 4남 2녀 중에서 형님이 제가 군대 가 있는 중에 돌아가시고, 누님도 돌아가셨어요. 제 동생이 조종사였는데 사고로 순직했고, 육남매 중에 셋 남았어요.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쇼크를 많이 받으셨죠. 전쟁 후 서울에 천도한게 1953년인데 그때까지 지방에서 피난 생활하다가 54년에 서울 집에 올라왔어요. 집이 좀 컸기 때문에 하숙생도 받고 세도 놓고 그렇게 생활하다가 제가 군대 갔다 와서 취직도 하고 그때부터는 어느 정도 살만하게 된거죠.



○ 정부의 노력

<없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신고를 어디다 해요. 우리 쪽에서는 그 쪽이 적인데 적한테 무슨 신고를 해요.

문_ 정부의 조치가 없었나요?
답_ 그건 한참 후에 정부가 두 번째 다시 부산까지 환도했던 일이 있어요. 다시 서울로 올라온 시기가 1953년 휴전 후에 천도됐는데, 그러고 나서 적십자 신고 문제도 나오고 했어요. 그때는 당연히 (신고를) 했죠.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있었으면 참 좋았죠. 전혀 없었습니다.



○ 호적정리

<미정리>

답_ 저희로서는 굳이 해야 된다는 필요를 못 느꼈어요. 호주로서 생존에 계신 걸로 호적에 되어 있는데 자식 된 도리로서 생존해 계신지 아닌지 확인이 안된 상태에서 호적정리를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치가 이뤄진다면 그 때 가서 호적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그걸 증명 세워서 정리를 한다든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무슨 특별한 재산이 있어서 상속을 받는다거나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 연좌제 피해

<없음>

답_ 그런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생각에 저쪽(북)에서 우리 아버님을 연행해 간 것은 자기네가 어디까지나 이용하려고 모셔가다시피 해서 데려간 거고, 우리 정부에서도 어느 정도 시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족에 대해 해코지를 한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희 동생이 비행기 사고가 났다고 했는데, 군 조종사였어요. 그 때 신원조회 무사 통과했고, 막내 동생도 군무원 했는데 그것도 신원조회 무사 통과했고, 나도 군대 있을 때 신원조회 잘 통과하고 여행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었어요. 그런 점으로 봐서는 이상할 정도예요. 다른 사람들은 연좌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은 그런 건 없었습니다.



○ 정부에 바라는 말

<납치 피해 국가 공무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불편한 마음. 국가를 상대로 관련 소송 진행 중. 전후뿐 아니라 전시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와 노력 필요>

답_ 저희 아버님은 정부가 필요에 의해서 임명한 국가 공무원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국가 공무원이라는 건 대한민국 정부에서 볼 때는 한 식구라고, 같은 식솔이란 말이에요. 근데 식솔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요. 자기 식구 중에 누군가 사고가 나면 가만히 있나요, 그렇지 않죠. 그런데 하물며 행정부 이사관이나 서기관급 공무원인데 그렇게 된걸 가만히 있다는 건 정말 안타깝고, 속이 좋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우리 납북자에 대해 너무 미지근하게 대하는 게 참 마음에 안 들고요. 왜 하필 전시 납북자하고 전후 납북자를 구분해서, 같은 납북자인데 그 쪽은 우선권을 주고 우리는 차등을 두느냐 그게 참 못마땅하네요. 전시 납북자라는 건 이쪽 정부가 잘못해서 그 사람들이 납북된 건데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고 왜 전후에 납북된 것만 신경을 쓰고 치중하는지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북쪽하고 대화하면서 제발 좀 큰소리를 내서 납북자 가족들에게 좋은 소식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_ 납북자 가족으로서 하고 싶은 말씀은?
답_ 벌써 몇 년 전에 6&#8228;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 가입을 했고 작년도에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고 지금 소송이 계류 중에 있죠. 그것 말고 개인적으로는 정부에 어떤 조치를 취할 수는 없어요. 단체의 힘을 빌린다든지 그렇게 해야 되겠죠.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연행되셨을 당시에 마흔일곱이셨고 지금 생존해 계시다면 백세가 훨씬 넘으셨는데 생존해 계실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래서 집에서 나가신 후에 어떻게 보내시고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리고 북에 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셨고, 최악의 경우 거기서 돌아가셨다면 유해송환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송환하고 싶어요. 저희 삼형제가 공교롭게 아들, 딸들 하나씩만 낳았는데 손자들만 여섯이란 말이에요. 그 분에게는 증손자들이죠. 그거 보시면 참 대견해 하실 텐데 그런 것도 못 보시고, 유족으로서 저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으니까.

아버님, 저 영환이예요, 셋째. 항상 저를 기억해주시고 뭐든지 “나 닮았어” 했던 영환입니다. 이렇게 커서 아버님 앞에 말씀 드리게 됐어요. 하지만 언제 뵐 수 있을까요. 뵐 수 있을까요, 정말? 그건 불가능하겠죠. 아버님도 무척이나 우리 생각을 하셨을 테고. 더 이상 말이 막혀서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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