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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정대 (증언자-김은호)
이름: 관리자
2013-09-17 12:55:14  |  조회: 2452
2007. 11. 3. 채록
071103A 김 정 대 (金鼎大)

피랍인
생년월일: 1920년 4월 1일생
출생지: 경기도 강화
당시 주소: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피랍일: 1950년 7월 말 ~ 8월 초경 새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상업(구둣방 운영)
학력/경력: 동국무선(현 광운대학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1녀
외모 및 성격: 건장한 체구에 온화하면서도 쾌활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은호(1946년생)
관계: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납치상황/원인)
- 강화도에서 지주의 아들이었던 피랍인은 1950년 7월 말에서 8월 초경에 같은 동네 빨갱이 두 명에게 연행, 같은 해 가을에 납북됨. 강화에서 형사 일과 반공 청년단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당시 강화군 내에서는 서울에서 공부한 지도자급이었기 때문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 확인 및 유골 송환, 남북간 대화 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와 노력


“1950년 7월 말에서 8월 초 새벽이었어요. 느지막이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모자 쓴 빨갱이 두 명이 문을 두드리더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여름이니까 빤스 바람에 나가서 문을 여셨대요. 그때 저희 어머니하고 할머니께서 뒷담으로 숨으라고 하셨어요. 뒷집은 아버지 친구분인 장순구씨 집이었는데, 그 분은 자동차 트럭을 운전하시던 분이었어요. 그 집으로 숨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잡혀 가려고 그러셨는지 순진하게 대문을 열어 주신 거예요. 대문을 열어주니까 모자 쓴 두 사람이 딱 들어오더래요. 그러고서 아버님은 꼼짝없이 바지랑 간단한 옷만 겨우 챙겨 입으시고 그 길로 강화경찰서로 끌려 가셨어요.”

“그놈들이 말하는 보위부, 내무서예요. 거기 계시다가 월곶이라는 포구에서 한 보름인가 계셨어요. 거기서 마포까지, 지금 말하면 여객선이 다녔어요. 갑곶리에서도 다녔지만 옛날에는 이리로 다녔나봐요. 그래서 여기서 잡혀가시는 날, 저희 어머니하고 할머니께서 아시고 월곶까지 쫓아 가셨어요. 그런데 벌써 배가 떠나는 거예요. 삼촌 얘기로는 할머니하고 저희 어머니가 아버지 갖다 드리려고 인절미를 해서 가셨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멀리서만 보셨대요. 그렇게 안타깝게 끌려가셔서 그 후로는 소식도 없고…”




○ 전쟁 당시 상황

답_ 제가 듣기로는, 그 때 임진각 건너서 황해도 해주하고 연배, 그 쪽에서 강화도가 아주 가까웠다고 해요. 그래서 인민군이 제일 먼저 쳐들어왔대요. 물론 육지로도 개성으로 해서 파주 쪽으로 오겠지만, 옛날에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 때는 임진각에도 출현을 했잖아요. 또 바닷가가 썰물일 때는 허리밖에 안 차니까 그냥 올 정도로 바다 수심이 아주 얕았어요. 황해도 연배 평야하고 강화도 쪽하고 아주 가깝고 짧은 거리였대요. 그래서 아주 순식간에 인민군이 넘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강화가 제일 먼저 점령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다리가 없었어요. 강화에서 김포 가는 다리가 지금은 두 개가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다리가 없어서 강화읍의 갑곶에서 김포의 성동이라는 그 지점을 똑딱선으로 왔다 갔다 했어요.

강화에는 빨갱이들이 많았어요. 1945년 해방되고 48년에 정부수립을 했지만, 3년 동안에 반탁이다, 신탁이다, 빨갱이다 뭐다 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물론 한국 역사가 그렇지만, 혼란의 시기였죠.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되자마자 손 볼 수도 없이 1950년 6.25 전쟁이 난 거니까, 48년에 해방되고 나서부터 1950년까지 모든 사람들이 들떠 있었지 전쟁이 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라고 봐요. 저희 아버지도 일본 사람들한테 박해 당한 것에서 해방된 것에 감격했지, 인민군이 쳐들어 올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하셨죠. 근데 강화도가 너무 가까워서 인민군이 제일 빨리 넘어와 침공을 했죠. 그런데 다리가 없으니까 육지로 못 가고, 도망도 못 가는 독 안에 든 쥐 상태였어요.



○ 직업 및 활동

<구두방 운영, 이전에 반공청년단 단장으로 활동>

문_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지금의 광운대학교, 광운전자공고의 전신인 동국무선을 다니셨는데, 거기 학교를 나와서 라디오나 전자기술 계통에 잠시 계셨어요. 그래서 할아버님께 돈을 받아서 강화도에서 라디오방을 하셨어요. 라디오 부속을 사다가 고장이 나면 고치는 일을 하셨는데, 당시에 라디오 보급이 많이 안 되어 있어서 라디오방이 잘 안 됐어요. 또 유도 유단자여서 기골이 아주 장대하고 튼튼하신 분이라 형사일도 좀 하셨어요. 그리고 구두가게를 하셨는데 그러던 중에 전쟁이 난 거죠.

그 전에 젊었을 때에는 반공청년단 단장을 하셨다는 얘기를 막내 삼촌한테 들었어요. 월급 받는 일은 아니었지요. 1945년에 해방된 후 1950년까지 저희 아버지께서 여러 가지 일을 하신 거예요.



○ 납북 경위

<1950년 7월 말에서 8월 초 새벽, 피랍인은 자택으로 찾아온 두 명의 바닥 빨갱이에 의해 강화경찰서로 연행됨. 한 달간 강화경찰서에 잡혀있다가 월곶을 통해 서울로 이송됨. 피랍인의 어머니와 부인이 월곶까지 쫓아갔지만 떠나는 배에 타고 있던 피랍인을 멀리서 바라본 것이 마지막이 됨.>

문_ 피난을 가셨어요?
답_ 네, 전쟁 나고 피난을 갔어요. 불은면이라고 강화읍내에서 한 40리 길에 있어요. 거기에 할아버님의 몇 촌 친척 되는 분 집으로 갔어요. 읍내는 빨갱이들이 완전히 치안을 잡고 있어서 거기서는 숨 쉬고 살 수가 없으니까, 일단 40리 길 되는 시골로 피난을 간 거예요. 거기까지는 아직 빨갱이들이 미치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서 한달 동안 숨어있었어요. 피난 갔을 때, 그건 기억이 나요. 제가 다섯 살 때였는데 저는 아버지 등에 업혔고, 두 살이었던 제 동생은 둘째 삼촌이 업고 갔어요. 그리고 그때 개가 한마리 있었는데, 개가 따라왔어요. 그게 피난이었어요. 피난이라는 것이 어디 육지로, 아니면 본토에서 멀리 깊은 산속으로 숨은 게 아니었고, 강화군 내에서 도망간 거니까 가봐야 독 안에 든 쥐죠. 그때가 전쟁 나고 바로였어요.

문_ 한 달 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답_ 할아버지의 몇 촌 친척 되는 분 집에 있다가 저희 집으로 다시 왔어요. 남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열 식구가 넘는 대식구가 밥을 먹으니까 그 사람들이 좋아하겠어요? 친척이라도 같은 친 형제가 아니니까 구박을 하고 싫은 티를 냈죠.

그 때는 어떤 정보라는걸 모를 때였어요. 전쟁에서 이겼는지, 졌는지, 밀렸는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제 생각에는 그 당시 눈칫밥을 먹었기 때문에 '굶어 죽든, 살든, 잡혀가든, 내 집에 가 있자' 하고 온 것 같아요. 라디오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읍내로 와서 집으로 오시자마자 그날 밤에 잡혀 가신 거예요. 그래서 항상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하룻밤만 더 있다 왔어도 잡혀가지 않았을텐데' 하시면서 통탄하시는 걸 제가 듣곤 했어요.

문_ 납북 당시 상황은?
답_ 1950년 7월 말에서 8월 초 새벽이었어요. 느지막이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모자 쓴 빨갱이 두 명이 문을 두드리더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여름이니까 빤스 바람에 나가서 문을 여셨대요. 그때 저희 어머니하고 할머니께서 뒷담으로 숨으라고 하셨어요. 뒷집은 아버지 친구분인 장순구씨 집이었는데, 그 분은 자동차 트럭을 운전하시던 분이었어요. 그 집으로 숨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잡혀 가려고 그러셨는지 순진하게 대문을 열어 주신 거예요. 대문을 열어주니까 모자 쓴 두 사람이 딱 들어오더래요. 그러고서 아버님은 꼼짝없이 바지랑 간단한 옷만 겨우 챙겨 입으시고 그 길로 강화경찰서로 끌려 가셨어요. 끌고 간 사람들은 그 동네 빨갱이라는데,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들은 바가 없고 무조건 잡아갔어요. 그때 당시 증조할머님도 살아계실 때예요. 증조할머님까지 모두 울고 불고 아우성을 쳤지만 그때는 시국이 빨갱이 세상이니까 아무 소리 못하고 잡혀가신 거예요.

문_ 밀고를 당한 건가요?
답_ 그럼요. 동네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 누가 밀고해서 잡혀갔다" 하는 얘기를 제가 어렴풋이 들었거든요. 오모씨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확히는 모르고, 그 동네에 우리 아버님하고 앙숙인, 아주 악질이 있었어요. 사람이 세상에 다 좋을 순 없잖아요. 그 중에서도 아버님을 싫어한 사람이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이 그 쪽 빨갱이 완장 차고 행세하다가 거기서 뭐 하나씩 잡으라고 하는 지령이 내려오니까 우리 아버님 같은 사람은 아주 첫 번째로 잡혀가게 된 거죠.

문_ 가신 곳이 강화경찰서였나요?
답_ 네, 그 때 당시 내무서라고 했던 강화경찰서로 끌려가셨어요. 그놈들이 말하는 보위부, 내무서예요. 거기 계시다가 월곶이라는 포구에서 한 보름인가 계셨어요. 거기서 마포까지, 지금 말하면 여객선이 다녔어요. 갑곶리에서도 다녔지만 옛날에는 이리로 다녔나봐요. 그래서 여기서 잡혀가시는 날, 저희 어머니하고 할머니께서 아시고 월곶까지 쫓아 가셨어요. 그런데 벌써 배가 떠나는 거예요. 삼촌 얘기로는 할머니하고 저희 어머니가 아버지 갖다 드리려고 인절미를 해서 가셨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멀리서만 보셨대요. 그렇게 안타깝게 끌려가셔서 그 후로는 소식도 없고, 아마 서대문 형무소로 가신 것 같아요.

문_ 강화경찰서로 찾아가 보셨어요?
답_ 거기 한달 정도 계실 때 증조할머니께서 여러 번 찾아가셨대요. 근데 면회가 안됐나 봐요.



○ 납치이유

<강화도에서 지주의 아들, 반공 활동 경력>

답_ 제가 생각해 볼 때는, 아버지께서 지주의 아들이셨고, 예전에 형사, 반공청년단 일을 한 적이 있으니까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아요. 공산당과는 반대되는 일을 한 것이죠. 정치적인 지도자는 아니지만, 강화군 내에서는 저희 아버지가 서울에서 학교까지 다니셨고, 할아버지가 지주여서 그런 행세를 했던 게 미웠던 거죠.



○ 납치 후 소식

<납치 되어 피랍인과 함께 끌려갔다가 탈출한 피랍인의 부인 친척 동생으로부터 피랍인이 납북되어 갔다는 소식까지 확인함. 이후 다른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소식이 없었는데 한참 만에, 가을경에 소식을 들었어요. 저희 어머니의 몇 촌 되는 친정 동생이 저희 아버지하고 같이 끌려가셨다는 거예요. 두 명씩 두 줄로 해서 포승줄에 묶여 같이 끌려갔는데, 우리 아버지는 유도도 하고 키가 크고 장대해서 맨 앞에 갔대요. 인민군이 양쪽이랑 맨 뒷줄에서 갔고, 맨 뒤에서는 인민군 두 명이 따발총을 들고 갔대요. 어머니의 몇 촌 동생인 재승이 아저씨는 중간에 있었어요. 중간에 있으면서 미군 공습 때문에 낮에는 못 가고 초저녁하고 밤에만 가는 거에요. 그러다가 아저씨는 포승을 풀고 그냥 냅다 뛰어서 결국에는 살아 왔어요. 그렇게 와서 어머니한테 우리 아버지는 맨 앞에서 끌려가서 모든걸 체념하고 포기한 상태로 그냥 끌려가셨다고 하셨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이놈아, 매부랑 같이 오지. 왜 너 혼자 도망 왔냐." 하면서 한탄을 하셨어요.

문_ 찾으려는 노력은?
답_ 그 이후로는 전쟁통이라 꼼짝을 못했어요. 다리도 끊기고 그 때는 걸어서 가야 했는데 차편도 없었겠지만 걸어서도 다닐 수가 없었을 거예요. 미군 공습도 있고 해서, 아주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가장을 잃고 벌이가 없는 상황에서 피랍인의 부인과 어머니가 재봉해 만든 누비포대기를 팔아 생계 유지. 피랍인의 부인은 층층시하에 생활고로 막내를 잃고 힘들게 지내다 친정으로 간 후 재가하고, 남은 자녀는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중학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함.>

답_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의 생활은 정말 피눈물 나는 비참한 생활이었어요.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쌀 몇 백 가마 하는 지주셨는데 토지개혁이 되면서 소작인들한테 배급을 받으며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주다 말다 주다 말다 하다가 한 3년 지나서는 그냥 없어져 버렸어요. 그 이후로는 아버지도 안 계시고 큰 삼촌은 입대하고, 식구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나, 누나, 동생, 증조할머니, 삼촌, 이렇게 열 식구 가까이 됐는데 먹을게 없고 다 어리니까 아주 비참하게 사는 거죠.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어머니는 할머니하고 자봉을 해서 누비포대기를 만들어 팔러 다니셨어요. 저희 어머니는 청상과부 된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 할머니에 증조할머니도 계셨으니 많이 힘드셨죠. 저는 1954년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제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같은 날에 동생이 죽었어요. 못 먹어서 창자가 꼬여 죽는 병으로, 그렇게 죽고 나니까 우리 어머니 마음이 좀 바뀌셨나봐요. 그 전까지는 3남매를 잘 데리고 살려고 마음을 먹으셨는데, 동생이 여섯 살 때 그렇게 되니까 친정인 서울 아현동으로 가 버리셨어요. 여기서는 눈치도 보이고 생활이 곤란하고 하니까 친정으로 가신 거예요.

문_ 교육받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답_ 그 얘기하면 눈물 나요. 강화에 있던 집을 팔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삼촌, 고모와 함께 서울에서 방 한 칸을 얻어 계시고 저는 졸업하기 전이라 친척집에 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주 그냥 보통 눈칫밥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도 서울로 중학교 시험을 봐서 갔어요. 할아버지께서 입학금은 대 주셨는데 그 다음 등록금은 못 대준다고 하셔서 어머니를 찾아 갔어요. 어머니가 등록금을 대준다고 하긴 했는데 그 다음부터 수난이었어요. 학교를 다니는데 3개월이 지나니까 2기분 등록금 내야 하잖아요. 어머니는 그 사이 재가를 하셨는데 저희 어머니도 넉넉한 형편이 못돼서 의붓아버지라는 사람이 등록금을 안 대주셨어요. 그렇게 남들 3기분 낼 때 2기분 등록금을 내고, 4기분 낼 때 3기분 등록금을 냈어요. 2학년도 그렇게 간신히 보내고 결국에는 중학교를 다 못 마쳤죠.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강화경찰서에 신고가 돼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하신 걸로 기억해요.

문_ 정부나 사회의 도움이 있었나요?
답_ 없었어요. 아무 것도 없었어요.



○ 호적정리

<1981년 실종신고 후 사망 처리됨.>

답_ 저희 할아버지께서 1981년도에 돌아가셨어요. 81년도에 돌아가신 후, 호주 상속을 받아야 되는데 제가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가 호주가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아버지 생사확인이 안된 상태에서 1981년도에 실종신고를 했어요.



○ 연좌제 피해

<없음>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 확인 및 유골 송환, 남북간 대화 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와 노력>

답_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북 경제적인 지원은 계속 해주면서 납북자에 대해서는 일언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만나서 납북자 얘기는 하나 꺼내지도 못했고, 그 쪽에서는 반응도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냥 피땀 흘린 돈으로 이북에 갖다 퍼주냐 이거예요. 저는 그 자체가 반대예요. 또 금강산이고 개성공단이고 관광 가지 않습니까. 저는 관광 안 갑니다. 저는 주위에 관광 가는 사람 있으면 전부 말려요. 왜 우리가 지금 그 많은 돈을 전부 김정일 아가리에 집어넣는, 금강산 구경을 무엇 때문에 가야 합니까? 금강산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반대합니다. 저한테는 그런 아픔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금강산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아요.

또 하나는 그래요. 지금 김정일이고, 그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을 안다면 하루 빨리 자기네들이 속죄를 하고 해야지. 우리 아버지가 1920년생이에요. 지금 연세가 88세예요.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그걸 모르는 거예요. 제사를 못 지내고 있어요. 지금 88세시니까 돌아가셨으리라고는 봐요. 언제 돌아가셨는지 날짜를 알아야, 유골이라도 찾고 화장이라도 할 것 아닙니까. 산소를 모시든지 어디다 뿌리든지, 그리고 제삿날에 제사는 지내야 될 거 아니에요. 생사확인하고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아야 되는 거예요. 그게 소망이지. 다른 뭐 금전적 보상이야 해줄 리 있겠습니까, 이 정부에서. 저는 우리 애들한테도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할게 없어요. 할아버지가 6.25 때 납치당한 것만 알고, 애들도 공산당이라든가 이북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있는 거잖아요. 제가 자식들한테 할아버지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합니까. 참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지, 참 갑자기 아버지라고 불러보니까 마음이 뭉클하네요. 지금 살아계시면 88세, 한국으로 말하면 미수(米壽)인데 비록 이렇게 못난 아들이지만 계셨으면 잔치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지금 어디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참 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제 다 말랐어요. 이제 생각은 안 나요. 그게 벌써 55, 6년 전 얘긴데 지금 막상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 보려니까 마음이 뭉클하고 그래요.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날 때 제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아버지라고 크게 불러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시다면 건강하시고 내내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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