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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이채덕 (증언자-이의훈)
이름: 관리자
2013-09-17 13:01:01  |  조회: 2572
2007. 11. 15. 채록
071115A 이 채 덕 (李采德)


피랍인
생년월일: 1915년 1월 25일생
출생지: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155번지
당시 주소: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158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말경
피랍장소: 서울 왕십리 광무극장 뒤 초가집(임시 거주지)
직업: 세무서 근무, 대한청년단원
학력/경력: 서울중앙고등학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매
외모 및 성격: 신장 170cm 정도, 활달한 성격

증언자
성명: 이의훈(1936년생)
관계: 차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 해방 이후 좌우익의 알력이 극심했던 강화에서 우익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피랍인은 서울에서 세무서에 재직중 내무서원에 의해 충정로 내무서로 연행됨.
- 충정로 내무서에 사식을 나르며 면회했던 증언자에게 칼을 준비해 오라는 피랍인의 말을 듣고 포승줄을 끊을 칼로 여겨 준비해 갔으나 무장한 내무서원 곁에서 끌려가는 피랍인을 목도한 것을 끝으로 연락이 끊김.
-피랍자의 고향인 강화에서는 피랍인의 부친이 좌익에 의해 학살당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대책 강구


“사촌형님이 의용군으로 잡혀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 혼자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짐을 싸서 아버지 계신 왕십리, 광무극장 뒤 초가집으로 갔어요. 거기서 아버지하고 같이 숨어서 지내면서 그 때부터 내가 아버지 보호자 역할도 하고 그랬어요. 가마니 깔아놓고서 체리, 자두 이런 걸 놓고 팔면서 이런저런 분위기도 보고, 그러다가 불안하면 광무극장 뒷골목으로 자전거포가 하나 있었는데 자전거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그 옆에다 그걸 펴고서 팔기도 하고. 그러면 거기서 우리집 들어가는 골목이 바로 옆에 보이니까 내 딴에는 경계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꽤 여러 날을 보냈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은 내가 장사하는 데로 갑자기 옆집 아주머니가 오셔서 아버지가 잡혀 가셨다고, '이상하다. 내가 길목을 지켰는데 어떻게 된건가' 하고 뛰어 들어갔는데 벌써 잡혀 가시고 집은 비어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길을 아는 사람들이 미리 다 알아가지고서 그 뒤쪽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뒷길로 해서 모시고 갔다고 해요.”

“쌀은 귀하고 그 아욱에다 잡곡으로 죽을 쒀서 그걸 두 그릇씩 갖고 광무극장에서 아현동 고개까지 터덜터덜 혼자 걸어서, 두 그릇을 해야지 두 번은 잡수시니까, 그렇게 충정로 내무서로 와서는 아버지하고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드시게 하고 하나는 놔두고 가고. 그런 생활을 며칠 했어요. 그 날은 아버지가 ‘내일 강화로 압송한다고 한다. 너 내일 올 때 칼 하나 준비해 가지고 와라.’고 해요. 뭐랄까 지금 생각해도 가장 답답한 기억인데, 거기 내무서원들이 다들 있어서 슬그머니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무슨 얘기인지 알고 죽 두 그릇하고 접는 칼 하나 구해 가지고 갔어요. 마침 가니까 벌써 출발 준비하고서 내무서원들은 다 있고 강화에서 온 못된 사람, 그 사람이 아버지를 포승줄로 묶은 채 끈을 잡고서 어깨에다, 인민군들 따꿍총 같애. 그거 하나 들고서 강화로 출발하는 거야. 내가 가자마자 바로 출발했어요. 못 따라오게 하는 걸 그래도 가는 데까지 가본다고 하니까. 그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이고 평소에도 알고 우리가 많이 생각해주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세상이 바뀌니까 완전히 딴 사람이 돼 버렸어."



○ 직업 및 활동

<전쟁 당시에는 세무서 근무,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의 알력이 극심했던 강화에서 대한청년단 활동 등 우익에서 활발한 활동을 함.>

답_ 해방 후 부터 6.25까지는 강화에서 주로 할아버님 사업을 돕는 역할을 하시다가 형님과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서울 관수동에 계시면서 서울과 강화를 오가며 사업을 하다시피 했어요. 6.25 때에는 서울에 정착하셨는데 직장이 필요한 연세시니까 세무서에 들어가셨어요. 세무서 나가시면서 새롭게 정착하려던 단계였는데 그 때 6.25가 난 거죠. 그러다 보니까 그 때부터 수난이 시작된 겁니다.

문_ 다른 사회 활동도 하셨어요?
답_ 그 때만해도 해방 후에 좌익, 우익 해서 특히 강화에서는 세력 싸움이 아주 심했어요. 그 때 아버님이 청년단 관계도 하시고 우익 계통에서 활동하시면서 좌익하고의 알력관계가 있던 상황에서 6.25가 났으니까 그 사람들이 아버지를 해코지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찾아가지고, 결국은 당해서 이렇게 납북 가족이 된 거죠.



○ 납북 경위

<서울이 인민군에게 넘어가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피랍인은 왕십리 광무극장 뒤 초가집을 빌려 피신해 있었으나 7월 말경 사이가 좋지 않던 친척의 인도로 내무서원 다섯 명이 찾아와 충정로 파출소로 연행됨.>

문_ 전쟁 나고 피난을 가셨어요?
답_ 그 때는 처음 그런 일을 당한 거라 피난 같은 건 생각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6.25 나기 전, 그 때는 가끔 38선에서 북한군들이 넘어와서 한번 휘저어 놓고서 가고 그러면 뉴스에서 북한 인민 괴뢰군이 침범했는데 우리 국군이 물리쳤다고 하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올 때예요. 알다시피 전쟁 나고도 이승만 대통령이 걱정 말라고, 우리 용감한 국군이 물리칠 테니까 걱정 말고 안정들 하고 계시라는, 그런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니까 6.25 난 것도 그렇게 우리가 쫓아내겠지 믿고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까 (피난 갈) 시기도 놓치게 되고 생각보다 빨리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당시 웬만한 서울 사람들은 피난 갈 생각을 못할 때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그대로 인민군을 서울에서 맞이하는 모습이 돼 버렸죠.

문_ 아버님은 출근을 하셨어요?
답_ 그 때서부터는 직장을 안 나가셨지. 6월 25일이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그 날이 우리가 임시로 이사를 가게 된 날이었어요. 관수동 27번지에 있던 집은 왜정 때부터 있던 집이라 거기서 계속 살았는데, 어릴 때라 잘 모르겠지만 집안에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현국민학교 앞에 개울 건너 한옥촌이 있었는데 거기 살게 돼서 그리로 임시 이사를 가게 됐어요. 그 날이 6.25가 터진 날이에요. 그 때만 해도 달구지에 이삿짐을 싣고 종로에서 서대문까지 끌고 가는데 서대문 사거리에 가니까 난리가 났더라고. 군인들 차가 불을 키고 가고 방송을 막 하고, 멀리서 포 소리도 들리고 심상치 않더니 여러 날 지나지 않아서 아침에 탱크 소리가 나요. 그래서 내려가 보니까 아현국민학교 앞 전찻길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와 있는데 인민군 탱크가 벌써 들어와서는 주민들이 빨간 인민군기를 흔들고 인민군 탱크에서는 얼굴이 시커먼 인민군 여군들이 굉장한 환영을 받으면서 들어왔어요. 서울의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고, 우리 어버님은 강화에서부터 알력이 있던 세력의 보복은 예측했었지만, 며칠 지나서 강화에서 소식이 왔는데 옛날 그 사람들이 아버지 찾는다고 피하셔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피신을 하셨다가 왕십리, 지금 광무극장 뒤에 초가집 하나를 빌려서 거기 계셨어요. 다른 식구들은 양식도 그렇고 해서 어머니하고 모두 강화로 떠나고 서울에는 나하고 사촌 한분, 그 분은 가다가 의용군으로 잡힐까봐 못 가시고 숨어 계셨어요. 낮에도 외출할 때는 밀짚모자 푹 눌러쓰고 다녔는데 어느 날 사촌 형님이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 다음날도 안 들어오시고 해서 나중에 수소문해 보니까 길에서 의용군에 잡혀갔대요. 신촌 고개에서 차에 실려 가셨다는 얘기를 누가 쪽지로 전해줘서 알았어요.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어요?
답_ 형님이 의용군으로 잡혀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 혼자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짐을 싸서 아버지 계신 왕십리, 광무극장 뒤 초가집으로 갔어요. 거기서 아버지하고 같이 숨어서 지내면서 그 때부터 내가 아버지 보호자 역할도 하고 그랬어요. 왕십리 집이 광무극장 뒷골목으로 들어가서 샛골목으로 좀 들어가면 있는데 좀 외지고 숨어 지내기에 괜찮은 곳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나대로 길목을 지킨다고 그 앞에 나와서, 광무극장 그 옆에 높은 축대 같은 데가 있어요. 그런데다 가마니 깔아놓고서 체리, 자두 이런 걸 놓고 팔면서 이런저런 분위기도 보고, 그러다가 불안하면 광무극장 뒷골목으로 자전거포가 하나 있었는데 자전거포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그 옆에다 그걸 펴고서 팔기도 하고. 그러면 거기서 우리집 들어가는 골목이 바로 옆에 보이니까 내 딴에는 경계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꽤 여러 날을 보냈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은 내가 장사하는 데로 갑자기 옆집 아주머니가 오셔서 아버지가 잡혀 가셨다고, '이상하다. 내가 길목을 지켰는데 어떻게 된건가' 하고 뛰어 들어갔는데 벌써 잡혀 가시고 집은 비어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길을 아는 사람들이 미리 다 알아가지고서 그 뒤쪽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뒷길로 해서 모시고 갔다고 해요.

문_ 그 때가 언제인가요?
답_ 7월말쯤 될 거예요.

문_ 외진 곳에 숨어 있었는데 누가 밀고를 한건가요?
답_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친척들도 많고 옛날에는 그랬어요. 친척이라고 해서 똑같이 모두가 좌고, 우가 되는 게 아니고 그 중에서도 갈려서 싸우고 하던 라이벌 관계도 있었고, 그 친척 중에 한 사람이 아주 자세하게 약도까지 그려서 정보 제공을 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내무서원 다섯 명하고 강화에서 온 자위대인가 하는 뭔가가 있었어요. 인민군 보조하면서 뻘건 완장 차면서 전부 활개 치던 사람들, 그렇게 왔어요. 그 사람을 앞장 세워서 내무서원 다섯 명하고 와서 모셔 갔다고 해요.

문_ 끌려가신 곳은 어디였나요?
답_ 충정로 삼거리에 파출소가 하나 있었어요.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파출소 자리가 내무서니까, 거기 유치돼 계시다고 연락이 왔어요. 뭐 달리 (연락이) 온 게 아니고 그 사람들도 식량이 없으니까 사식을 해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문_ 아드님이 직접 내무서로 찾아가 사식을 드렸나요?
답_ 네, 밥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때는 아욱이 흔했어요. 쌀은 귀하고 그 아욱에다 잡곡으로 죽을 쒀서 그걸 두 그릇씩 갖고 광무극장에서 아현동 고개까지 터덜터덜 혼자 걸어서, 두 그릇을 해야지 두 번은 잡수시니까, 그렇게 충정로 내무서로 와서는 아버지하고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드시게 하고 하나는 놔두고 가고. 그런 생활을 며칠 했어요. 강화에서 온 사람들은 고약하게 굴어도 그 때 내무서원들은 점잖은 편이었어요. 그런 생활을 며칠 하다가 한 사나흘 정도 됐을 거예요.

그 날은 아버지가 “내일 강화로 압송한다고 한다. 너 내일 올 때 칼 하나 준비해 가지고 와라.”고 해요. 뭐랄까 지금 생각해도 가장 답답한 기억인데, 거기 내무서원들이 다들 있어서 슬그머니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무슨 얘기인지 알고 죽 두 그릇하고 접는 칼 하나 구해가지고 갔어요. 마침 가니까 벌써 출발 준비하고서 내무서원들은 다 있고 강화에서 온 못된 사람, 그 사람이 아버지를 포승줄로 묶은 채 끈을 잡고서 어깨에다, 인민군들 따꿍총 같애. 그거 하나 들고서 강화로 출발하는 거야. 내가 가자마자 바로 출발했어요. 못 따라오게 하는걸 그래도 가는 데까지 가본다고 하니까. 그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이고 평소에도 알고 우리가 많이 생각해주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세상이 바뀌니까 완전히 딴 사람이 돼 버려서.

어찌됐든 그래 가지고서 마포강 쪽으로 걸어서 가는 거예요. 아버지는 포승줄에 묶여서 이렇게 가고, 저는 자전거 끌고. 마포까지 걸어 나가서 나룻배로 건너가려고 거기 갔는데 마침 그 전에 마포에 다리가 폭파되고 배가 뜨지를 않아 마포나루에서는 건널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강둑을 따라서 걸어 내려가 서울을 벗어나는 데서 건넌다고. 그러면서 걸어가는데 난 이제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넌 들어가라’, 뭐 조금이라도 더 가려고 해도. 그 때야 서릿발 같은 시절이니까 그러면서 헤어졌는데.

마포까지 가면서 이제 아버지가 자꾸 이걸...(손에 묶인 줄을 칼로 끊으라고) 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어도 그게 수갑도 아니고 끈으로 묶여 가는데 칼도 있었으니까 한번 툭 하면 간단하게, 우리 아버지 힘으로 그런 사람 때려 눕히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그냥 벌벌 떨면서 그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을 보면서도 그걸 못한 게. 어찌됐든 그래 가지고 거기서 못 따라오게 하니까 그 전에 아버지가 칼을 달라고 하셔서, 칼을 차라리 펴서 드렸으면. 지금도 내가 그게 아쉬워. 그게 접는 칼이니까 이걸 펴서라도 드렸으면 끊기가 좀 나았을 텐데. 접는 상태로 그냥 드렸으니까 그걸 못하신 게 아닌가 싶어. 그래 그것만 쥐어 드리고선 더는 못 따라가고 거기서 헤어진 게 이제, 그 때 제가 아버지 모습을 보고 마지막이었어요.



○ 납치이유

<우익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전쟁 전부터 강화에서 좌익과의 세력 싸움이 심했음. 그 보복으로 좌익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봄.>

답_ 해방 후 좌, 우익이 한창 세력 싸움을 할 때 아버님이 우익 계통에서는 그 일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자기네들 입장에서는 보복이라고 봐야겠죠.

문_ 아버지를 끌고 간 좌익쪽 사람들을 이후에 보셨어요?
답_ 그 사람들은 인민군 따라서 다들 월북했죠.



○ 납치 후 소식

<전혀 알 수 없음.>

답_ 더 이상 소식은 없었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부친은 강화에서 좌익에 의해 학살당하고 집을 뺏기는 등 수난을 당함. 남은 재산이 있어 경제적 어려움은 크지 않았지만 피랍인의 아내는 현재까지도 피랍인의 소식을 기다리며 한 많은 세월을 지내옴.>

답_ 할아버지는 누가 어떻게 해코지 했는지도 모르게 강화에서 그 사람들한테 학살당하시고 아버지 그렇게 되시고.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기둥이신데 그렇게 되시다 보니까 집안이... 집도 완전히 뺏겨서 아버지 사진 한 장도 못 가지고 있는 게 다 그래서예요. 그래도 원래부터 갖고 있던 재산이 있어서 그런대로 어머니 모시고 지내면서 그렇게 어려움은 없었어요. 어머니는 매일같이 새벽이나 밤중에 장독대에다 정화수 떠 놓으시고, 지금도 눈에 선해요. 그리고 식사 때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서 아버지 진지 그릇을 이렇게 싸서 아랫목에다 놓으시고, 10년 이상을 그렇게 하셨어요. 우리보다도 아버지 생각만 하시며 평생 수절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그 젊으신 나이에 그렇게 어려운 일 당하셔서... 그래서 나는 어디가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못해요. 우리 어머니 앞에선 그저 내가 죄인인 것 같아요. 그런 세월을 홀로 이겨내셔 지금 97세이신데, 어머니 살아생전에 한을 풀어 드려야하는데 우리 세대에 그걸 못 해드리니까 죄스러울 뿐이에요.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강화에서 했죠. 실향사민 신고하라고 해서 적십자사에 가서 하고, 형님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고를 한 것 같아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도움은 없었어요. 바라지도 않았고. 그 땐 그럴 상황이 못됐으니까.



○ 호적정리

<실종처리>



○ 연좌제 피해

<없었음>

답_ 큰 피해를 직접 당한건 없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대책 강구>

답_ 지금 정부는 북한하고 대화할거 다 하면서 왜 납북자 문제는 그렇게 떳떳하게 거론을 못하는지 답답해요. 의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풀어나가는 모습을 좀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납북자 가족들의 한을 좀 풀어주는 역할을 이제는 정부에서 해야 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봐요. 지금처럼 시간만 끌고 세월만 보내는 건 그만하고, 이제는 우리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정부에서 방법을 강구해야죠. 만나보고 싶은건 늘 하던 얘기고, 몇 날 남지 않은 이 분들마저 다 눈 감기 전에 정부에서 대책을 강구하는게 중요하다고 봐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지 생각만 하면 기가 막힙니다. 모든 게 내가 바보같이 똑똑하지 못해서 아버지를 고생시키고 그렇게 만든 변변치 못한 제가 자식으로서 참 부끄럽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아버지 생각하면 우리 식구들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아직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게 답답하고 한심스럽고 그럴 때마다 잡혀가신 아버지 생각은 더 간절합니다. 그 어리던 제가 벌써 70이 넘고 어머니는 아흔 여덟이 되십니다. 이번에 또 세상이 바뀌면 무언가 또 달라진 세상에 한번 더 기대를 해 볼텐데 그 전에 우리 아버지 살아나 계신지 어떠신지. 참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문_ 아버님에 대해 어떤 기억들을 갖고 계세요?
답_ 아버지와 함께 보낸 세월은 길지 않지만 제가 어렸을 때 지금도 기억이 선한데 아프거나 몸살이 나면 이불을 들치시고 와서 “아픈 건 나 주고 너 빨리 일어나라” 하시며 얼굴 비비면서 귀여워 해주시던 그 아버님 모습이 지금도 선해요.

문_ 어머님 생전에 아버님 소식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시죠?.
답_ 네, 제발 좀 부탁드릴께요. 수고하고 계시지만 (납북 문제 해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조금이라도 변화가 된다면 노력해 주시고요. 개인보다는 단체에서 이렇게 하는게 효과가 있을테니까 아주 간절하게 부탁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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