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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백범기 (증언자-백완현)
이름: 관리자
2013-09-26 10:19:57  |  조회: 3240
2007. 12. 3. 채록
071203A 백 범 기 (白範基)

피랍인
생년월일: 1900년 6월 2일생
출생지: 경기도 양평군 서정면 문호리 553번지
당시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558-78호
피랍일: 1950년 9월 18일 오전 10시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전농초등학교 교장
학력/경력: 평양사범학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매
외모/성격: 외강내유형

증언자
성명: 백완현(1932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난을 갔다가 서울에 남아있던 배우자가 궁금해 집으로 돌아온 후 피랍인은 민청위원장 및 내무서원에 의해 강제 연행됨.
- 이후 정신여중 교장 사택 창고에 감금되어 고초를 당했다는 사실을 함께 있다 탈출한 지인이 전해주었으나 이후 소식 두절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및 특별법 제정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시작될 즈음에 아버지가 서울로 잠깐 가족이 궁금해서 왔단 말이야. 근데 그게 화근이 된 거지. 그때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혼자 계시니까 온 거죠. 그런데 학교 교사들 중에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버님이) 밤에 몰래 숨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 동향을 알아가지고 ‘교장선생님 면회 좀 해야겠습니다.’ 하고 1차로 학교로 모셔갔대요.”

“학교로 갔는데 학교에서 뭐라고 했냐면, 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이걸 인수를 해야 할 거 아니냐고 하면서, 보니까 벌써 학교 간판을 인민 무슨 학교라고 붙여놓고 빨간 완장을 다들 차고 있고, 그렇게 돼서 집으로 돌아오셨어요. 돌아오셨는데 그때부터 문제지. 돌아오신 게 확실히 확인이 되니까 민청위원장 이한웅이라는 사람하고 내무서원 한 명이 9월 18일 오전 10시경에 전농동 집으로 들이닥쳤다고 해요. 내무서원은 지금으로 말하면 경찰하고 마찬가지지. 와서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으니까 금방 오실 겁니다’ 하면서 모시고 가더라 이거야.”







○ 직업 및 활동

<평양사범학교 졸업, 전농국민학교 교장>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평양사범을 나오셔서 교편생활을 하셨어요. 서울 시내 여러 학교에서 하셨는데 혜화국민학교에도 계시다가 6.25 나던 그 해 봄에 전농초등학교 교장으로 전근을 오신거죠.



○ 전쟁 당시 상황

<피랍인의 배우자만 자택에 남고 피랍인과 나머지 가족들은 본적지인 양평군 서정면으로 피난을 감. 용산중학교 학도호국단 간부였던 피랍인의 장남은 26, 27일 즈음 등교했다가 학도지원군 모집이 있어 지원하지 않고 홀로 양평군 서정면으로 피난을 가 가족들을 만났으나 그 곳에서도 의용군 모집을 피해 숨어 지냄>

문_ 피난을 갔었나요?
답_ 의정부에서 포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북쪽에서 피난민이 26, 27일부터 서울 시내로 계속 내려왔죠. 그때 방송에서 정부는 ‘피난을 가라, 상황이 급박하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피난민이 계속 내려오는 상황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상황이) 시원치 않으니 다같이 피난을 나갔죠. 성수동 뚝섬 쪽으로 나갔는데 피난민들이 전부 들이닥치니까 건널 수가 없고 한강 그 쪽에는 다리가 없죠. 배로나 건너야 할 텐데 배로 건널 상황이 못 돼서 첫날은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 다시 피난을 가려고 하는데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기차도 못 가고 피난갈 수가 없는 거지. 일부 나간 사람들도 있지만 피난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거죠. 그 대신 본적지인 양평 서정면으로 피난을 간 겁니다.

가족이 다 간 게 아니고 어머니는 집에 계시고 아버지하고 내 동생, 누이는 다 시골로 가고, 나는 용산중학교(현 용산고)를 다녔는데 학도호국단 간부여서 26일인가 27일에 학교를 나갔어요. 그래서 가족하고 떨어진 거지. 그래서 나는 그 혼란 중에 학교에 갔더니 학도지원병들을 모집하고 있었어요. 그때 용산은 미군기지였고 한국군 포부대도 있었는데 그때 지원했던 사람들은 북진하면서 전부 전쟁을 치뤘는데 나는 지원 안하고 집으로 왔어요. 집으로 와서 나는 나대로 시골로 피난을 간 거지. 그렇게 시골에서 가족들과? 합류했는데 그곳에서도 인민군 지원병을 모집하고 그래서 그게 무서워 나는 그냥 시골서 숨어 지냈어요. 9월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될 무렵 단파 방송을 듣는 사람들 얘기에 의하면 유엔군의 작전이 개시되고 벌써 그때는 6.25전쟁이 낙동강까지 전투가 대단했대요.



○ 납북 경위

<양평군으로 피난을 가서 있다가 인천상륙이 시작될 무렵, 서울에 남아있는 피랍인의 배우자가 궁금해 서울로 돌아옴. 피랍인의 동향을 알아챈 같은 학교 좌익사상의 교사들이 면회를 좀 해야겠다며 피랍인을 학교로 모셔감. 그리고 피랍인은 귀가했으나 9월 18일 오전 10시경 잠깐 드릴 말씀이 있다며 자택으로 찾아온 민청위원장과 내무서원에 의해 다시 연행됨. 함께 잡혀 있다 도망친 정동훈이라는 사람을 통해 정신여중 교장 사택 창고에 감금되어 문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음>

문_ 납북 당시 상황은?
답_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시작될 즈음에 아버지가 서울로 잠깐 가족이 궁금해서 왔단 말이야. 근데 그게 화근이 된 거지. 그때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혼자 계시니까 온 거죠. 학교 교사들 중에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버님이) 밤에 몰래 숨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 동향을 알아가지고 “교장선생님 면회 좀 해야겠습니다.” 하고 1차로 학교로 모셔갔대요.

학교로 갔는데 학교에서 뭐라고 했냐면 학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이걸 인수를 해야 할 것 아니냐면서, 보니까 벌써 학교 간판을 인민 무슨 학교라고 붙여놓고 빨간 완장을 다들 차고 있었대요. 그렇게 돼서 집으로 돌아오셨어요. 그때부터 문제지. 돌아오신 게 확실히 확인이 되니까 민청위원장 이한웅이라는 사람하고 내무서원 한 명이 9월 18일 오전 10시경에 전농동 집으로 들이닥쳤다고 해요. 내무서원은 지금으로 말하면 경찰하고 마찬가지지. 와서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으니까 금방 오실겁니다” 하면서 모시고 가더라 이거야. 어머니는 혼자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가 있나, 내무서원들이니까 겁도 나고. 그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후에 한 사람이 돌아와서 얘기를 해줘서 알았는데 청량리 홍릉 근처 어느 기름집에 (피랍인이) 수용됐다가 종로 5가 쪽으로 걸어가서 정신여중 교장 사택 창고에 감금돼 있었다는 거야. 당시 납치된 사람들이 무척 많이 붙들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단파방송을 듣다가 들켜서 온 사람 등 별 사람들이 다 있더라고. 정동훈씨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해요. 자기는 단파 라디오를 듣다가 그렇게 됐다고. 교장선생님을 내가 거기서 봤는데 매를 맞아서 얼굴에 다친 상처도 있었다고. 그런 얘기를 집에 와서 전달을 해주니까 그제야 ‘이놈들한테 붙들려 가서 고초를 당하는구나’ 알게 됐죠. 그 후 지금까지 생사를 전혀 모르는 거지.

문_ 처음 선생님들이 와서 모셔갔을 때 어떤 얘기가 있었는지?
답_ 이렇게 인민공화국이 됐으니 학교 문을 열어서 얘들을 가르쳐야겠는데 교장으로 계시니까 책임자로서 학교를 인수, 인계를 해줘야할 것 아닌가, 그런 얘기로 끝내고 돌아오신 거지. 그리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잡혀가게 되신거지.

문_ 납치 과정에서 폭력은 없었나요?
답_ 그놈들이 계획된 건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오셨다는걸 이미 알고 전농국민학교에 모셔다가 학교 인수 문제에 대한 얘기를 하고 보냈기 때문에 폭력은 없었죠. 위협을 받아서 강제로 끌려간게 아니고 갑자기 내무서원이 들이닥쳐서 “잠깐 말씀만 드리고 집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고 데려갔으니까 어머니도 금방 오시려니 생각했죠. 안타깝죠. 눈치 채고 도망을 갔으면... 그리고 발을 다쳐서 불편하니까 뛰어서 도망갈 수 있는 형편도 못되고 그런 상황을 눈치 채고 어떻게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면 가족으로서 안타까운 일이죠.



○ 납치이유

<교직 공무원 이외에 다른 활동은 없었음>

답_ 모르겠어요. 교직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회활동이나 사상적인 활동을 했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 납치 후 소식

<당시 중의적삼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던 피랍인은 발에 종기가 나서 끌려갈 때 걸음이 불편해 잘 걷지 못했다고 함. 9.28수복 후에 청계천에 많은 시체들을 쓸어 넣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확인했으나 찾을 수 없었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내무서원이 왔을 때 (피랍인의) 복장이 중의적삼이었어. 한국 사람들 여름철에 하얀 아래 위 바지저고리에 옷고름 맨, 그냥 얇은. 거기에다 고무신 신고, 집에 그냥 있었던 거니까. 근데 발에 종기가 나서 걸음이 불편했어. 그 당시 그래 가지고 잘 걷지를 못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들었죠.) 나는 같이 있었던 게 아니고 시골에 숨어있을 때지. 혼자 올라오셨다가 그렇게 됐으니까 어머니한테 얘기 들어서 알게 된 사항이죠. 나는 바로 그해 10월에 학도병으로 입대를 해서 군대를 나갔죠. 그 후 지금까지 전혀 생사를 알 수가 없는 거죠.

문_ 찾으려는 노력은?
답_ 9.28수복이 되고 난 후에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청계천에 쓸어 넣었으니 거기라도 가서 찾아보라는 얘기를 듣고 막내 누이가 어머니하고 같이 거길 찾아가서 전부 시체를 확인했다고 해요. 근데 시체가 없더라고.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장남은 그해 10월에 입대하고 막내 누님이 동생의 학업과 어머니의 생활을 돌보며 어렵게 생활함. 피랍인 뿐만 아니라 둘째 누님도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어 소식을 알 수 없음.>

답_ 납치되신 후에 나는 10월에 군대에 가고 생활이 어려웠었죠. 군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방생활을 하고 55년도에 제대를 해서 와 보니까 집안 상황이 어려웠어요. 6.25전쟁 중에도 양식 문제 때문에 양평군에서 내가 직접 쌀을 짊어지고 밤에 몰래 와서 어머니한테 쌀을 놓고 도망해서 내려간 기억도 있고, 생활이래야 참 어려운 생활이었죠. 동생을 학교 보내고 대학까지 보내는 건 막내 누님이 맡으셨죠. 막내 누님이 결혼을 하면서 가족과 어머니를 다 돌봐드린 거지. 가족 중에 아버지만 6.25전쟁으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우리 5남매 중에 큰 누님이 지금 연세가 90이 다 되시고 그 아래 둘째 누님이 계셨는데 6.25전쟁 중에 둘째 누님도 행방불명이 됐어요. 지금까지 우리 누님 생사를 모르고 이렇게 지내요.



○ 정부의 노력

<없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수복이 되고 정부가 안정되어 가면서 동사무소나 구청을 통해서 실종자 신고가 있었고, 그 후에 적십자사에 신고를 했죠. 나는 군대를 나갔기 때문에 모르지만, 우리 누님이 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납북자 서울시 교직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이 올라있는데 그게 아마 지금 말하면 동사무소나 구청 내지 시 교육위원회에서 조사가 돼서 나중에 납북자 명단이 나오게 된 게 아닌가 보는 거죠.

문_ 퇴직금을 받거나 정부의 지원이 있었나요?
답_ 재정적인 도움은 1950년대 다 어려운 형편에 우리 가족끼리 서로 도왔지, 납치 가족이다 해서 돕고 그런 건 없었어.



○ 호적정리

<1962년경 6.25전쟁으로 인한 생사가 명확하지 않은 행방불명자로 정리>

답_ 정부에서 일제히 신고가 있었어요. 그게 확실히 기억이 안 나는데 1962년인가 1960년대에 정부에서 일제히 신고가 있었어. 그때 신고를 했죠. 6.25전쟁으로 인한 생사가 명확하지 않은 행방불명자지. 그때 우리가 경기도에 살아서 여주재판소에서 호적정리는 그렇게 했어요. 호주상속을 내가 받고.



○ 연좌제 피해

<없음>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 분도 계셨다고 하는데 나같은 경우에는 군에서 대한민국에 충성을 한 사람이었고, 공채시험이라든가 절차를 통해서 정당하게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그렇게 (살았죠).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신원조회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런 면에서 어떤 제지를 받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및 특별법 제정>

답_ 이제 100세가 넘은 분인데 다만 자손된 도리로서 6.25전쟁으로 강제 납치되어 가셨다는 이런 비참한 현실이 안타깝고, 그분이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지금까지 생사조차 모른다는게 그야말로 분하고 원한이 많은거죠. 이러한 우리 아픈 가슴을 누가 쓸어줄 사람이 있겠느냐. 과거 정부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대통령인데 햇볕정책하면서 북한만 더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가족회를 만들어서 그나마 우리 손으로 이렇게 하니까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는 척하고 있지, 아무도 해주는 사람이 없어.
6.25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입니까. 북한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예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국제재판에서 전범자로 가려내고 피해보상을 하고 확실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그렇게 했을 때 한반도 평화를 만들자고 얘기가 나와야지, 느닷없이 우리 한국이 먼저 핵무기 어떻게 됐으니 지금부터 평화다, 종전이다, 우리가 먼저 자꾸 나서잖아요. 이런 비참한 8만여 명의 납북자들이 세상 어디 또 있어요. 거기다가 한국군 포로들 끌어다가 다 어떻게 했어요. 북한당국은 그런 사실이 없다. 이산가족 외에는 없다고 말하고, 통일부나 정부가 같이 춤추고 있다는게 한심한 일이죠. 오늘날 이러한 현실의 안타까움을 정부가 전쟁중 납북자들을 위한 특별법을 하루 속히 만들어서 이 분들의 마음을 쓸어줘야할텐데 그걸 어려워하고. 우리 당사자들은 나이가 먹어가고 6.25전쟁의 뼈저린 아픔이 이 세대에 와서 점점 희석되어 가는데 역사가 분명하게 가려서 이런 비참한 현실을 우리 민족들이 겪었다는 사실을 후세가 알아야 합니다.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게 중간에 가다가 폭격에 돌아가셨건, 북한에 가서 정착해서 살아계셨건 간에 가족들 생각, 자식들 생각을 안 했겠어요. 그분이 나를 얼마나 그리워하셨을까, 그리고 자기 생명이 다할 때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생각하셨을까, 나를 생각해주셨겠지, 그 분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그 생각뿐이에요.(눈물)
왜 그 당시 그러한 순간을 예상하지 못했나, 그런 정황을 알고서 본인이 어떻게 해야겠다는 걸 왜 모르고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끌려갔는가 하는 것은 참 이해가 안 가요. 그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 사람들에게 가서 조사를 받을 만큼 그렇게 순진했을까. 그때 피했으면 서로 이런 상황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 끌려가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에 그저 늘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점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더해가고, 이제 나도 백발이 성성해 가는데 부모님을 만났을 때에 내가 무엇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지, 자식으로 내가 옆에서 잘 보필해서 그렇게 위험한 고비에 옆에서 잘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는 불효한 마음 그거 한가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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