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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인현 (증언자-이원목)
이름: 관리자
2013-09-17 12:24:30  |  조회: 2122
2007. 10. 31. 채록
071031A 이 인 현 (李麟鉉)

피랍인
생년월일: 1906년 11월 6일생
출생지: 경기도 용인
당시 주소: 경기도 용인
피랍일: 1950년 7월(음력 6월 19일)
피랍장소: 수원경찰서(수원내무서)
직업: 금융조합 이사, 마을 구장(현 이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외모/성격: 건장한 용모에 강인한 성격

증언자
성명: 이원목(1932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인은 지주 출신으로 마을 구장을 지내며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반동분자로 분류돼 있었던 것으로 보임.
- 피랍인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경기도 광주로 은신했으나 뒤에 피랍인을 대신해 외동아들이 잡혀갔다는 사실을 알고 내무서로 가서 자수를 한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자 문제의 조속한 해결

“어느 의사 선생님이 아버님 보고 지금 당신 잡으러 가니까 피하라고 해서 집에 안 들어오시고 피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자고 있었는데 별안간 목이 따끔하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하고 눈을 떠서 보니까 보위부에서 세 사람인가가 와서 내 목에다 대금정을 대고 손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어나니까 뒤로 그냥 묶어버리더라고, 이유 없이. 거기에 대한 특별한 아무 얘기가 없었어요. 그러더니 가택 수색을 하더라고요.”

“주로 너희 아버지가 서민들 착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 대라고 하는데, 내가 착취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래서 모른다는 일관된 답변이었죠. 내가 그 묻는 의도를 알아도 사실은 모르고요. 왜냐면 학교 다닐 때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뭘 압니까. 그걸 똑바로 대라고 계속 고문을 하는 거예요.”




○ 직업 및 활동

<금융조합 이사, 마을 구장>



○ 납북 경위

<피랍인은 경기도 광주에 피신해 있던 중에 자신을 대신해 외동아들이 끌려간 사실을 알고 자수하러 수원내무서에 갔다가 이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됨. 그 사이 끌려갔던 아들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이미 피랍인은 자수를 하러 간 상황이었고 다시 찾아가 면회를 시도했지만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는 소식만 들음.>

문_ 전쟁 발발하고 피난을 가셨어요?
답_ 별안간 났으니까 피난가지도 못했어요. 수원 나가서 방송을 들으면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까 피난 갈 필요도 없었고, 그때 피난 갔으면 이런 봉변이 없었겠지만 피난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정부에서는 아무 일 없으니까 안심하고 본업에 종사하라고 하니까 피난을 갈 이유가 없었죠. 느닷없이 별안간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듯이 걔네들이 들어오니까 아군인지 인민군인지 구별도 못하겠더라고요.

문_ 납북 경위를 설명해주세요.
답_ 아버님께서 납북되실 당시에 사실 제가 먼저 잡혀갔습니다. 아버님의 행적을 대라는 이유 하나로. 그 전날에 면에서 각 구장 회의가 있었어요. 근데 어느 의사 선생님이 아버님 보고 지금 당신 잡으러 가니까 피하라고 해서 집에 안 들어오시고 피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자고 있었는데 별안간 목이 따끔하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하고 눈을 떠서 보니까 보위부에서 세 사람인가가 와서 내 목에다 대금정을 대고 손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어나니까 뒤로 그냥 묶어버리더라고, 이유 없이. 거기에 대한 특별한 아무 얘기가 없었어요. 그러더니 가택 수색을 하더라고요. 당시 내가 내무원 소총 7정을 전부 분해해서 깨끗이 청소를 해 놨었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버리고 간 거여서 특별한 사유는 없었어요. 제가 중학교 5학년 때 군사훈련 들어갈 때 다 배우니까. 그렇게 해서 벽장에 넣어놨는데 뒤지다 보니까 그게 나왔어요. 그래서 누가 그랬냐고, 내가 그랬다고 그래서 그거 다 압수당해 끌려갔는데, 아버지 피하라고 한 의사, 그 분하고 둘이 맨발로 잡혀서 새벽에 내무서로 연행됐어요. 옛날에는 거기가 경찰서였죠. 뒤로 묶어서 팔에다 나무를 껴서 매달아 놨는데 팔이 뒤집히죠. 24시간을 해 놓으니까. 원형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24시간 정도가 걸리더라고요. 젊은 애인데도. 그래 놓고는 방에다 집어 넣어놨어요. 한 일주일 됐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더라고요.

문_ 잡혀갔을 때가 언제인가요?
답_ 1950년 7월 8일경이었어요.

문_ 내무서에 며칠 동안 수감돼 있었나요?
답_ 9일만인가 불러내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잘못하면 큰 봉변을 당할 거 같더라고요. 당시에 내가 나이를 두 살을 속였어요, 열일곱 살이라고. 그 바람에 매를 더 많이 맞았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목을 잘못 쓰게 되었어요. 뒤에서 야구방망이로 그냥 내리치고, 그래도 끝내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니까요. 밤 1시에 시작해서 3시 반까지 고문을 당하고 다시 제 방으로 끌려서 왔는데 그 다음날, 우리 아버지 보고 피하라고 했던 의사 선생님, 박종하씨인데, 꼭 걔네들은 조사하는 게 밤 1시예요. 조사 받고 조금 있다가 와서 보니까 이건 사람이 아니예요. 해골이 두 쪽이 쪼개져서, 우리 아버님 때문에 그런 걸 당하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미안한데 그 상황을 보니 견디겠어요? 속옷을 찢어서 동여 맺는데, 사흘만인가 인민재판을 열더라고요.

그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둘 다 사형이더라고. 사형수는 일단 보위부에서 다른 곳으로 돌려버려요. 수원에서 제일 부자인 양 무슨씨인데 그 양반의 김치광이 엄청 큽니다. 거기다 전부 수용을 하더라고. 그런데 15일 되던 날 주위 사람들을 몇 사람 부르더라고요. 가더니 돌아오지 않아요. 간 다음에 한 3, 40분 있으니까 총소리가 났는데, 우리들은 그 안에 있으니까 총소리가 왜 났는지도 모르고, 안 돌아오니까 ‘아, 총 맞아 죽었구나’ 그거만 알고 있는 거지. 그 다음에 불려 가면 먼저 가서 자리 잘 잡고 편하게 쉬라고 거기서 서로 이별의 포옹을 하고 그랬는데, 제가 19일 되던 날, 이상하게 5시 반에 부르더라고요. 이상하다 하고 갔어요. 갔더니 연령 미달로 너는 석방하니 인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신발하고 혁대를 찾으라고 하는데 신발하고 혁대를 찾을 길이 어딨어요. 거기 가는 것도 끌려서 갔어요. 보행을 못했는데 그 순간 내가 가는 뒤에서 쏘는게 아닌가 해서 문 밖에 나와서는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7, 8m 정도를 뛰었어요. 사력이라는게 그런데서 나오는 거 같더라고요. 뛰다가 길바닥에 넘어져서 정신을 잃어버렸죠. 동네사람이 지게를 지고 나를 실어다 놔서 일주일 만에 소생이 됐는데, 그 길로 산으로 피신해서 토굴을 파고 그 안에서 지하운동을 했어요.

문_ 아버님은?
답_ 아들이 저 하나예요. 딸도 없이. 그 날, 제가 나오던 날, 아들이 죽는데 내가 살아서 뭐하냐고. 이 양반이 자발로 들어가셨던 거예요. 그래서 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제가 일주일 후에 집에 있는 금은보석들하고 돈 얼마를 보따리에 싸가지고 수원내무서에서 취조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리를 놔서 그걸 전해줬어요. 우리 아버님 면회 한번만 하려고. 기다려 보라고 해서 있었는데 그냥 다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면회도 못했어요. 한창 인천상륙작전한다는 소리가 나올 때인데 생사관계도 그렇고 면회도 안되고, 수소문해보니까 용인 신갈로 해서 끌려갔다는 얘기만 전해주더라고요. 그쪽 내사면으로 가다보니까 한 300여명의 시신이 개천에 묻혀있더라고요. 그래서 덮어 놓은 나뭇가지를 다 치우고 하나 하나, 근데 부패가 되다 보니까 입을 벌려서 우리 아버님 앞에 금니 두 개 한 거, 그거만 확인해 보는 거예요. 근데 거기도 안 계시더라고. 그것이 원산면에도 있다고 해서 갔는데 거긴 몇 사람밖에 없고 별게 없더라고요. 소식을 들을 길도 없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렇게 흐른 거죠.

문_ 내무서에 잡혀서 고문당할 때 어떤 질문을 받았나요?
답_ 주로 너희 아버지가 서민들 착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 대라고 하는데, 내가 착취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그래서 모른다는 일관된 답변이었죠. 내가 그 묻는 의도를 알아도 사실은 모르고요. 왜냐면 학교 다닐 때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뭘 압니까. 그걸 똑바로 대라고 계속 고문을 하는 거예요.

문_ 풀려 나온 건 언제였나요?
답_ 7월 하순, 말경이었어요.

문_ 아버님이 자수하고 나서 풀려난 건 아니고요?
답_ 내가 나오던 날 아버님이 자수한 거죠. 그래서 연결이 안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아버님 계시던 곳으로 가니까 벌써 떠나셨고. 어디서 은신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어요. 경기도 광주에서 은신하고 있었으니까.



○ 납치이유

<지주 자본가이면서 반동분자, 마을 구장을 지냄>

답_ 지주 자본가와 반동분자죠. 그리고 구장을 했다는 자체가 반정부에 충성을 했다는 것, 이유는 그 두 가지입니다.



○ 납치 후 소식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그렇죠. 소식은 없었어요. 전혀 못 들었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갖고 있던 전답으로 농사를 지어 생활했으며 피랍인의 배우자가 고된 농사일로 고생함>

답_ 전답은 있으니까 그대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는데, 제가 1.4후퇴 당시에는 피난을 갔어요. 피난 가서 제2 국민 지대장인가 직책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내려갔다가 거기서 울산에 떨어져 있다가 울산에서 착출이 돼서 헌병학교로 끌려갔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군에 입대했어요. 헌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집에 와서 보니까 생활이라는 건 눈물밖에 안 나고 뭐 말로 표현이 안되더라고요. 어머님은 주위사람들하고 집에서 일을 해주시는 머슴 두 분이 잘 모셔서 건강하게 계시다가 1978년도에 작고하셨어요.

문_ 어머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을 텐데.
답_ 물론이죠. 말도 못하죠. 아침에 눈 뜨면 별을 봐야 집에 들어오시니까. 밭일 논일을 다 다니면서 일을 해야 하니까.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신고는 안해도 면에서 알고 있으니까, 상황 관계에 대해서는 제가 면사무소에 기록해 놓은 게 있었어요. 당시 수지면에서 두 사람이에요. 저희 아버님하고 호적 계장하던 분, 김형기씨, 그 두 분이 연행됐는데 김형기씨는 가까운 곳에서 즉결 처분(처형)당했고, 그분 시신도 찾았어요.

저희 집은 셋째 삼촌이 현장에서 즉결 처분 당했어요. 신길동에 사시다가 대한청년당 영등포지부 감찰부장을 했었어요. 그 여파로 연행되다가 반항하니까 현장에서 바로 즉결 처분해서, 삼촌 시체는 그냥 모셔왔고.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 호적정리

<사망으로 처리>

답_ 1960년대 후반부터 법무부에서 호적정리를 하라고 내려오더라고요. 쭉 안하고 있다가 제 이복동생이 1983년도에 호적정리를 했더라고요. 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체 호적정리를 못하게 했어요. 근데 제 이복동생이 호적정리를 해버려서, 그 바람에 지금까지도 우리집에 못 와요. 아버님 제삿날에도 오지를 못한다고.



○ 연좌제 피해

<신원조회 과정 중에 납북이 월북으로 오기(誤記)되어 불쾌감을 느낄 때는 있었지만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음>

답_ 제가 나와서 사회생활을 할 때 가끔 불쾌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보통 그때 당시 뭘 하면 신원조회를 1년에 2번씩 합니다, 안기부에서. 정보부죠. 신원조회 통보 온 걸 보면 납북이 월북으로 돼서 뻘건 도장을 찍어서 왔더라고요. 그때 당시 치안본부 차장으로 이기섭씨가 있을 때인데, 제가 이기섭씨와 좀 친했어요. 그래서 그걸 들고 치안본부로 갔습니다. “이거 어떤 자식이 신원조회했냐”고 하면 “왜?” 그럽니다. 얘기를 해서 명단을 보면 명단에 있거든요. 월북이 아니라 납북인데 일반적으로 전화로 하니까 전화통에 잘못 들려서 오차를 일으킨 거죠. 그런 불상사가 몇 번 있었죠.



○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 문제의 조속한 해결>

답_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엄청 많습니다. 하지만 현 정부에 백날 얘기해봤자지, 바라는 것도 없어요. 우이독경이니까. 그리고 저희가 초창기 때에도 이미일 이사장님(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 발의를 해서 여러 좋은 대안들을 만들어 정부에 냈었어요. 그런데 이사장님이 수고만 하셨지 거기에 대한 건 일부러 찾아볼래야 볼게 없어요. 그런 정부에 하고 싶은 얘기가 뭐가 있겠어요.

국민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이면 국부인데 국민들은 자식이 아닙니까. 사람이 자식 사랑을 해야 하는데 자식 사랑을 못해요. 자식 사랑을 한다면 한마디 빈말이라도 했을 거예요. 정상 회담 가서도 그런 건 내정간섭이라고 얘기하면 안된다는 사람인데. 정권이 교체돼서 이사장님이 추구하시는 것과 같은 그런 현안들이 빨리 해결이 됐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습니다.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살아 계시다면) 103세여서 생존 가능성은 희박하죠. 이북의 상황에서 장수한다는 건 힘든 거고, 돌아가셨다면 여기 가족회에서 명복을 빌어주시고, 또 앞으로 좋은 방향을 찾아서 제시할거 같으니까 ‘편안하게 눈 감고 계십시오’라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여기 들어오면서 (벽에 전시된 납북자들) 사진을 보고 목이 좀 메였습니다. 저 양반들이 과연 얼마만큼 죄를 지은 양반들인가, 여기에서 머리 숙여 저분들께 드릴 말씀은 ‘편안하게 계십시오’라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식이 똑똑하고 우월했다면 아버님의 생사확인을 잘 찾았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으로는 아버님께 불효자식이라는 것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흐느낌)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납북자 가족들도 다 피가 거꾸로 솟을 겁니다. 부디 삼가 명복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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