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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곽명선 (증언자-곽재덕)
이름: 관리자
2013-09-26 10:17:22  |  조회: 2757
2007. 11. 27. 채록
071127A 곽 명 선 (郭明善)

피랍인
생년월일: 1906년 8월 23일생
출생지: 서울시 성북구
당시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피랍일: 1950년 8월 초순
피랍장소: 자택
직업: 양복점 운영, 대한청년단 답십리동 단장
학력/경력: 서울경신중학교
직계/부양가족: 모, 배우자, 자녀 2남 2녀
외모/성격: 가냘픈 외모에 온유한 성격

증언자
성명: 곽재덕(1929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대한청년단 후원회장 및 답십리동 단장으로 활동했던 피랍인은 주변 좌익의 밀고로 자택에서 연행됨.
- 같은 지역의 대한결사단 조직원들도 인민군에게 명단이 넘어가 그 중 19명이 2, 3일 사이에 잡혀가고 그중 한 명이 집결되어 있던 청량리의 대학 예과강당에서 탈출에 성공, 피랍인을 비롯해 모두 북송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명예 회복,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차진성이라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아버님께) ‘아저씨 위험하시니까 피난을 가시죠’ 했는데 그때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해방 이후에 신발이 변변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걸 밤새도록 꿰매는거지. 우리 외가까지 200여리를 걸어야 되니까. 그날 그냥 바로 출발을 하셨어도 괜찮았는데... 그걸 꿰매느라 하루를 주무시면서 그날 잡힌 거예요. 소위 동네 빨갱이라고 하죠. ”

“열아홉 분이나 되는데 그분들이 2, 3일 사이에 전부 (납치됐어요). 대한결사단이라는 조직의 본부가 시내에 있었답니다. 답십리동단 명단을 가지고 중앙 본부에다 제출을 하러 가다가 전농동 굴다리가 있는데 거기서 괴뢰 내무서원한테 검거돼서 명단을 빼앗긴 거예요. 그래서 명단에 기재된 분들, 19명이 다 납치됐어요. 그리고 소식을 모르는 거예요.”









○ 직업 및 활동

<양복점 운영, 대한청년단 답십리동 단장>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양복점을 하셨고요. 대한청년단 후원회장으로 동네에서 추대되어서 후원회 회장을 하셨어요. 열의가 좋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단장 일을 맡긴 거예요. 대한청년단 전신이 대동청년단이라는 게 있었는데 (아버님이) 대동청년단 답십리동 단장을 하셨어요.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이라고 단체가 여러 개 있었는데 그것이 통합돼서 대한청년단이 된 거죠. 통합되고도 답십리동 단장을 하셨어요.



○ 납북 경위

<피랍인의 배우자와 자녀들은 외가로 피난을 가고 피랍인은 노모와 서울에 남게 되면서 바닥 빨갱이의 밀고로 자택에서 납치됨>

문_ 납북 당시 상황은?
답_ 6.25사변이 나면서 북에서 밀고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피난을 가야겠다고 우리 4남매를 데리고 외가인 충청도로 갔죠. 아버님은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두 분은 남아계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버님이 납치돼 가신 것도 몰랐어요. 내 친구가 서울에서는 식량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 저 있는 데로 식량을 구하러 온 거예요. 나도 볼 겸 와서 그 친구가 전해줘서 알게 된 거죠. 차진성이라는 친구인데, 그 친구가 우리 아버님께 “아저씨, 위험하시니까 피난을 가시죠” 했는데 그때 운동화 밑창이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해방 이후에 신발이 변변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걸 밤새도록 꿰매신 거지. 우리 외가까지 200여 리를 걸어야 되니까. 그날 그냥 바로 출발을 하셨어도 괜찮았는데, 그걸 꿰매느라 하루를 주무시면서 그날 잡힌 거예요. 소위 동네 빨갱이라고 하죠. 내무서원인지 인민군인지가 고발을 해서 잡혀가셨다고 했어요. 그 친구가 한참 후에 와서 알려준 거죠. 그 당시에 전화통화가 됩니까.

문_ 충북 외가에는 얼마 동안 있었나요?
답_ 9.28수복될 때까지는 거기 있었죠. 서울에는 괴뢰군들이 모두 점령하고 있었으니까. 저는 그때 학생이었지만 학생들도 운동들 많이 하고 그랬거든요. 학생들도 좌우로 갈라지고 분열이 많을 때니까 인민군 치하에서는 버틸 수가 없는 거죠. 할머니하고 아버지하고 그렇게 계신데도 무서워서 서울로 오지를 못하고 그냥 외가댁에 있었는데, 결국 친구가 전해줘서 아버지 납치되신 걸 알게 된 거죠.

문_ 주변에도 납북된 분들이 있었는지?
답_ 열아홉 분이나 되는데 그분들이 2, 3일 사이에 전부 (납치됐어요). 대한결사단이라는 조직의 본부가 시내에 있었답니다. 답십리동단 명단을 가지고 중앙 본부에다 제출을 하러 가다가 전농동 굴다리가 있는데 거기서 괴뢰 내무서원한테 검거돼서 명단을 빼앗긴 거예요. 그래서 명단에 기재된 분들, 19명이 다 납치됐어요. 그리고 소식을 모르는 거예요. 듣기로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청량리 대학 예과라고 있었어요. 거기 운동장에 수백 명이 모였었대요. 그때가 유엔군들이 자꾸 밀고 올라오고 괴뢰군들이 막 보따리를 싸서 후퇴할 시기인데 우리 아버지같이 연행된 사람들, 답십리 결사단 조직에 가담했던 열아홉 분들이 전부 묶여서 같이 줄에 끌려갔다는 거예요. 그 소식은 동네 분들한테 전해들은 거죠.

외가에 외삼촌의 사촌이 계세요. 그 사촌이 저에게는 5촌이 되는 셈이죠. 그 분이 괴뢰군에 끌려가 입대해서 행방불명입니다. 그 아저씨는 ‘우리가 여기서 한두 명이라도 그냥 끌려가야 얘네들이 와서 수색을 안 하지. 공연히 버티고 있어 봤자 여럿이 다 고생이다’ 그래서 이 양반이 자진해서 끌려가다시피 갔어요. 인민군으로 갔는지, 그랬기에 행방불명이 되고 소식도 없죠. 지금까지.



○ 납치이유

<대한청년단 후원회장에 이어 단장으로 활동>



○ 납치 후 소식

<끌려갔다가 탈출한 이웃을 통해 납북자가 청량리 대학 예과 강당에 연행되었고 북쪽으로 끌려갔다는 소식까지 들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끌려간 사람들 중에 탈출한 사람이 있어서 그 친구(강성률)한테도 들었지만 동네에서 그걸 아주 잘 아시는 분이 있어서 소식을 들은 거죠. 그 명단을 그렇게 뺐겨서 열아홉 분이 연행돼서 청년들이 대학 예과 강당에 집결을 해서 그 사람들하고 다른 동네에서 온 사람들, 수백 명이 전부 같이 묶어서 끌고 갔다는 거예요. 북쪽으로 끌고 갔다는 것만 알지 행방은 모르죠.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난 갔던 외가 근처에 집을 빌려 피랍인의 배우자가 떡장사, 기름 장사를 하며 연명함. 당시 인민군들이 젊은 사람들이 보이면 괴뢰군으로 끌고 가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후방 보군병으로 강제 동원해 가던 시기여서 피랍인의 장남은 피난 이후에도 한동안 산 속에서 숨어 지내다 1.4후퇴 때 입대함.>

답_ 시골 외갓집에서 얹혀 지내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머니가 집을 나오셔서 떡장사를 하셨어요.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는 가장이 없으니까 기름 장사를 하시고 그랬죠. 참기름, 들기름을 바구니에 담아서 이고 다니면서 방문 판매를 하고 그러면서 연명을 했어요.

문_ 수복되고 서울로 와서 할머님과 함께 계셨나요?
답_ 9.28수복 돼서 올라와 할머니 모시고 있었는데 또 1.4후퇴가 벌어진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할머니 모시고 외가로 피난을 갔죠. 외가에 가서도 외삼촌이 대한청년단 면단장을 하셔서 외삼촌도 쫓기는 처지였죠. 무제봉이라는 산으로 피난 가 있는 거예요. 그 때 젊은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소위 괴뢰군으로 입대시키고 그랬어요. 나이든 사람들은 후방에서 탄약 운반이나 보급을 시키고 그랬죠. 외가댁에 가서도 산에 숨어서 살았죠. 그 때는 팬티라는 것이 하얀 것 밖에 없었어요. 이걸 입고 내려가면 보일 것 아니에요. 그걸 피해서 나체로 밤에 내려와 쌀을 요만큼 얻어서 깊은 산골에 올라가서는 소나무 솔가지 끝에 죽어서 바짝 마른 게 있어요. 그건 떼도 연기가 안 나요. 그런 것만 끝에 잘라서 밥 끓여먹고 그렇게 피신해 있었죠. 1.4후퇴 때 저는 측지부대를 따라서 부산으로 갔어요. 저는 군에 가 있고, 남은 가족들은 외가에 계속해서 여러 식구가 함께 살기가 서로가 불편하니까 어머니가 집 한 채를 빌려서 우리 가족만 따로 살았죠.



○ 정부의 노력

<없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동사무소에서 신고를 하라는 통보를 받고 가서 했죠. 그 이전에도 남산 과학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마는 거기 적십자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접수를 한다고 해서 신고를 했었죠.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전혀 없었습니다.



○ 호적정리

<납북자로 제적 처리>

답_ 납치가족이라는 것이 납치자라고 동사무소에 모두 등재가 돼 있었어요. 서류를 근거로 해서 그 당시 행정부에서 그걸 공식적으로 정리를 하라는 공문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신고를 하라는 통보를 받고 가서 호적정리를 했어요.



○ 연좌제 피해

<없음>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명예 회복, 피랍인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답_ 첫째는 납북되신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이고요. 그 당시에는 정부의 후원이 아주 아쉬웠었습니다. 직장도 없고, 저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전부 젊은 사람들인데 나이가 저보다 모두 아래예요. 후배들인데 직장도 없고 해서 그런 것을 희망하고 그랬습니다. 이런 조직을 만든 목적도 거기에 있는데 결국 하나도 성사된 게 없었죠.

열아홉 납치된 분들 중에 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저하고 동갑인데, 그 친구도 지금 일흔 아홉이죠. 저희 아버지는 백세가 넘으셨으니까 돌아가셨겠죠.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고, 유해라도 모시고 싶습니다. 지금 제 친구였던 김영환씨는 만약에 그때 그네들한테 학살당하지 않았다면 생존해 있을 수도 있죠. 그런 사람들은 생사확인을 해서 귀환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죠.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지, 지금 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만 저희들 조금도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오늘날까지 가족들이 건강하게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전부 아버님께서 돌봐주시는 은혜라고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이 편안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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