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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기원 (증언자-김기조)
이름: 관리자
2013-09-26 10:18:18  |  조회: 2899
2007. 11. 29. 채록
071129A 김 기 원 (金基元)

피랍인
생년월일: 1927년 9월 7일생
출생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내법리 197번지
당시 주소: 서울시 중구 남창동 129번지
피랍일: 1950년 9월 24~25일 새벽 4시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서울대 약학대 4학년생, 약대 학도호국단 단장
학력/경력: 서울대학교 재학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5남매
외모/성격: 잘 생긴 외모에 쾌활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기조(1931년생)
관계: 동생
증언 성격: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 서울대 약학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피랍인은 학도호국단 단장으로 반공 활동을 활발히 함. 약대 동창생으로 소개한 이에 의해 연행되어 남창동 중부서에 수감되었으며, 함께 수감되어 북으로 끌려가다 도중에 탈출한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평양 근처까지 끌려갔음.
-같은 날 피랍인의 부친도 연행되어 중부서에 함께 수감되었으나 풀려날 수 있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유골 송환 및 위령탑 건립, 피랍인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서울대 약학대 4학년, 그 해가 졸업반이었고 그 다음해 4월에 졸업예정이었어요. 제약회사 만들겠다고 그러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 약학대학 학도호국단 단장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 같으면 학생회장이에요. 그때는 학생회장이 없었고 학도호국단이라고 해서 반공단체로 해서 군사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단장을 대대장이라고 하는데 대대장을 했으니까 군사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그 당시 서울대에 빨갱이가 많았거든. 빨갱이들이 연락해서 (찾아서?) 잡아갈 명단에 (형님 이름이) 들어있었다고 해요.”

" 중부서에 (아버지와 형님이) 함께 잡혀 계실 때 한 방에 있었는데 '대한민국 지지하는 놈은 이리로 서라. 인민공화국 지지하는 놈은 저쪽에 서라. 그런데 인민공화국 지지하는 놈은 여기서 나가면 바로 총살이다.' 그랬대요. 우리 아버지는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곳에 서면 죽는 건지 알면서도 (그 쪽에 섰대요). 예지가 빨랐던 거지. 우리 형은 대한민국이 수복돼서 왔다고 하는 인민군 말에 속은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 지지하는 쪽에 섰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지지하는 쪽 사람들은 전부 끌려가고 인민공화국 지지하는 사람들은 풀어준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저 놈들이 속임수 쓴다는 것을 알고, '기원아, 기원아, 너 이리로 와라.' 해도 '아버지, 거기 가면 죽어요.' 그러면서 안 오더래."



○ 직업 및 활동

<서울대 약학대 4학년 재학생, 약학대 학도호국단 단장>

답_ 서울대 약학대 4학년, 그 해가 졸업반이었고 그 다음해 4월에 졸업예정이었어요. 제약회사 만들겠다고 그러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 약학대학 학도호국단 단장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 같으면 학생회장이에요. 그 때는 학생회장이 없었고 학도호국단이라고 해서 반공단체로 해서 군사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단장을 대대장이라고 하는데 대대장을 했으니까 군사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그 당시 서울대에 빨갱이가 많았거든. 빨갱이들이 연락해서 잡아갈 명단에 (형님 이름이) 들어있었다고 해요.

문_ 중&#8226;고등학생 시절부터 반공활동을 했었나요?
답_ 그럼요. 경복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거기(서울대) 갔는데, 일제시대에 홍성중학교로 들어갔다가 해방 후에 경복고등학교로 옮겼고, 경복고등학교에서 학생회장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걸 좋아하고 운동도 아주 잘하고, 100m 달리기에서는 언제든지 전교에서 일등하고 그랬어요. 검도도 잘했고 실제로 칼 다루는 것도 연습하고 그랬어요.

문_ 사회활동도 열심히 하셨나요?
답_ 그럼, 굉장히 열심히 하고 뭐든지 몸으로 하는 일은 활발하게 하셨어요.



○ 납북 당시 상황

<6.25전쟁 발발 후 7월 24일 늦은 밤, 약학대 동창생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자택으로 찾아와 피랍인과 함께 나간 후 남창동 중부서로 끌려감. 당시 구멍가게를 하며 재력이 있었던 피랍인의 아버지도 같은 날 누군가에 의해 연행, 중부서 같은 방에 함께 수감됨. 그러나 심문 과정에서 피랍인의 아버지는 풀려나고 피랍인은 남게 되어 북으로 끌려감>

문_ 전쟁 직후 피난을 가셨어요?
답_ 그 때 당시에 나도 19살이었는데, 용산중학교(현 용산고)에 다니고 있었어요. 6학년 졸업반이었는데 우리 친구들이 (나를) 찾으러 오고 그래서 남루한 옷 입고 시골 이천 이런 데로 고구마 캐러 간다, 보리 얻으러 간다고 하면서 몰래 몰래 다녔어요. 그리고 나는 시골 홍성에 피난을 갔었어요. 내 동생을 데리고 자전거 타고 갔다가 거기서 자꾸 인민군으로 가라고 해서 둘이서 달아나 다시 서울로 왔죠. 28일에 함포사격이 거기까지 와서 나하고 내 동생은 죽을 뻔 했어요. 우리 누나네 이층집에 미군 침대 같은 걸 놓고서 거기 있다가 한 시간 전에 나왔는데 거기에 폭탄이 직격탄으로 떨어져서 그 집이 왕창 무너졌어요. 내 동생하고 둘이 도망 다니면서 시골에 갔다 오고 갖은 고생을 했어요.

우리 형은 피난 안 갔던 거 같아요. 서울에 있었던 거 같아. 아버지, 어머니도 서울에 계셨고, 누나도 그 근처에 있었던 거 같고. 도망다닌 건 나하고 내 동생인데 그때 우리 또래가 의용군 잡아 다니는 안성맞춤의 청년들이었지요. 열일곱에서 스무 살까지 잡아갔으니까. 후반에는 더 심했지만 초기에는 열아홉, 스무 살만 잡아갔는데, (아니) 잡아가지 않았지, 지원하라 그랬지. 지원하라고 하면 이렇게 보고 달아나고 안 갔죠.

문_ 납북 당시 상황은?
답_ 그게 7월 24일이었어요. 인천에 상륙해서 함포가 우리 동네 남창동까지 중구 서울역 근처로 막 날아오던 날 밤인데, 24일 밤, 25일 새벽에 약학대 동창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나갔는데...(잡혀갔어요) 나중에 아버지도 따로 잡혀갔어요. 일제시대부터 우리 아버지가 시골에서 이장을 했어요. 해방 후에도 했고. 남창동에서 아버지가 큰 직함이 별로 없었는데 부르주아라고 잡아갔는지, 앞에 가게 주인도 잡혀가고 아버지도 잡혀갔어요. 아버지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매출이 상당했었나봐요. 잡혀가서 심문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답변을 잘한 모양이에요. 가게 주인아저씨는 우리 형이랑 같이 평양까지 끌려갔고 우리 아버지는 지금 중부서 개구멍 같은 데로 나가라고 해서 나와서 살았어요.

중부서에 (아버지와 형님이) 함께 잡혀 계실 때 한 방에 있었는데, '대한민국 지지하는 놈은 이리로 서라. 인민공화국 지지하는 놈은 저쪽에 서라. 그런데 인민공화국 지지하는 놈은 여기서 나가면 바로 총살이다.' 그랬대요. 우리 아버지는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곳에 서면 죽는 건지 알면서도 (그쪽에 섰대요). 예지가 빨랐던 거지. 우리 형은 대한민국이 수복돼서 왔다고 하는 인민군 말에 속은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 지지하는 쪽에 섰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지지하는 쪽 사람들은 전부 끌려가고 인민공화국 지지하는 사람들은 풀어준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저 놈들이 속임수 쓴다는 것을 알고, '기원아, 기원아, 너 이리로 와라.' 해도 '아버지, 거기 가면 죽어요.' 그러면서 안 오더래.

문_ 아버님과 형님이 같은 날에 끌려가셨어요?
답_ 그럼. 같은 날에 그렇게 됐지. 근데 잡아간 사람은 다른 것 같아요. 형님은 학교 사람이 잡아갔고, 아버님은 어디서 왔는지 앞에 주인아저씨하고 같이 잡혀갔는데, 들어가 있었던 곳은 중부서 지하 감방에서 한 방에 있었다고 해요. 우리 아버지가 '너 여기서 대한민국 지지한다는 소리, 그런 소리 절대 하면 안된다, 인민군 지지한다고 그래라.' 그런데 '아버지 그러면 죽습니다.' 그랬다나. 우리 형님은 대한민국 지지한다고 한거지. 인민군 앞에서 대한민국 지지한다니까 끌려갔지. 그런 어리석은 역사가 있어요. 그때 당시 무서우니까 죽기 살기로 그런 마당이니까...



○ 납치이유

<서울대 약학대 학도호국단장으로 반공단체를 이끌며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활발한 반공활동을 했음. 그런 연유로 빨갱이들의 납치 대상 명단에 피랍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내 빨갱이에 의해 연행됨>



○ 납치 후 소식

<9.28수복 전날 돈암동을 지나 아리랑 고개로 끌려갔다고 들음. 같이 끌려갔다 도망 온 이웃을 통해 평양까지 갔을 것이라고 추정, 이후 소식은 알 수 없음>

답_ 27일, 28일 수복하기 전 날 돈암동을 지나서 아리랑 고개 넘어 끌려갔다고 해요. 그 앞집 가게에 이영호라는 아저씨는 평양 근처까지 갔다가 도망 왔어요. 도로 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죽은 척하고 있는데 막 총을 쏘고 그러더래. 그렇게 달아나서 서울까지 와서 살았어요. 그때 (피랍인과) 같이 밧줄로 묶여서 평양까지 끌려 갔었대요. 가까이에서 (끌려가고) 있었대요. 그때까지 멀쩡하게 살아서 끌려갔었다고. 자기 달아날 때에도 고지식하게 따라가고 있더래요. 걸어서 평양까지...




○ 남은 가족의 생활은?

<남은 형제들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잘 성장했으나 당시 연행되어 함께 잡혀 있다 풀려난 피랍인의 부친은 심적 고통이 컸음>

답_ 우리 집안이 시골에서 부자였으니까 어렵지 않았어요. 나는 공무원으로 고위직까지 올라갔었고 내 동생은 KBS 프로듀서를 했고 누이동생도 잘 살아요. 우리 삼형제 다 괜찮고, 누나도 매부를 잘 만나서 잘 살아요.

문_ 아버님은 어떠셨어요?
답_ 그 얘기만 나오면 울화통이 터져서, 뭐 좋은 일이 아니니까 얘기를 잘 안해. 바보같이 끌려갔다고... 세상에 자기 아들 죽는걸 보는 것처럼 참혹한 일은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 기분에서인지 별로 말도 안하시고 그랬어요. 가끔 울고 그러셨죠.



○ 정부의 노력

<없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적십자사에도 신고하고 한두 번 한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쫓아다니면서 여러 번 했어요.

문_ 정부의 도움이 있었나요?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 호적정리

<사망신고>

답_ 북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얼마 안가서 총살형을 당해 산 사람들이 없을 거라고만 알고, 살아서 오는 그런 기적은 없는 걸로, 죽은 걸로 알고 참다 참다 못해서 한 10년 후쯤, 1960년경에 아버지가 사망신고를 냈을 거예요. 제적부에 보면 제적한 걸로 되어 있어요.



○ 연좌제 피해

<없음>

답_ 그 후 얼마 지나서 한 때는 납치된 사람의 태반이 빨갱이들이라 잡혀갔다는 소문이 있어서 피랍인 가족을 감시 대상에 넣었다고 해요. 우리 형님은 빨갱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으로 잡혀갔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했죠.
나는 55년에 문리대 정치학과를 나와 바로 공무원이 돼서 30여 년 동안 외교관으로 있었어요. 우리 가족이 빨갱이라는 취급을 받은 적도 없고, 그런 의심을 받은 적도 없어요. 우리 친척 중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고.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유골 송환 및 위령탑 건립, 피랍인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답_ 미아리 고개 노래에도 있지만 맨발로 끌려가서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9월에 끌려갔으니까…… 10월이면 찬바람도 불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들이 납북자를 데려다가 아주 혹독하게 했다는 얘기를 많이 듣거든요. 고생 끝에 낙이 온 게 아니라 고생 끝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 태반일텐데. 유골이라도 찾아다가 잠재우게 하고 또 좀 단장을 해서 위령탑 같은걸 만들어서 기념일을 정해 제사도 지내주고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죠. 또 납북자들 가운데 빨갱이와 동조한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다는 선입견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 6.25전쟁 후(정전 후)에 납치된 사람들에 대한 법이 통과가 됐죠. 6.25전쟁 중에 납치된 사람들에 대한 법은 통과가 안됐는데, 전쟁 후에 잡혀간 사람들보다 몇 십배 더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고 이런 사람들의 넋을 달래주는 국가적인 조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야 역사 앞에 정직해지고 그런 비극의 역사를 막지 못한 죄를 그나마 탕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문_ 납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답_ 6.25전쟁의 마무리는 실제로 남북통일이 돼야 가능할 거예요. 양 당사자가 그 전에 완전하게 하기는 어려운데, 우리 남쪽은 가둬놓고 있는 사람이 없잖아요. 비전향자가 7, 80명 있었는데 일부 보내지고 있고. 그런 것은 피차가 지금 살아있으면 다 보내줘야지. 전쟁법에 의해서도 그렇고, 인도적인 견지에서도 그렇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에 입각한 전쟁 종결이 가능한 건데 서로 노력해야죠. 우리 정부도 최근에는 북쪽 눈치 보느라고 말을 잘 안 하잖아요. 우리 납북자를 내놓으라고 하는 얘기는 '너희가 불법으로 잡아간 사람들을 다 내놔라. 풀어주어라.’는 것이기때문에 저들이 불법을 인정해야 되는 건데, 저들이 불법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어려움이 있죠. 이것은 살아서 못하면 죽어서라도 해야 돼요.

문_ 앞서 공산주의자들이 북에서 15만 명의 명단을 가지고 내려왔다고 말씀하셨는데 명부와 관련해 의견이 있다면?
답_ 『서울공화국 27일』이라는 책이 있어요. 미국 사람이 쓴 책에서 본거 같은데 15만 설도 있고 5만 설도 있고 정확한 숫자는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피랍됐거나 끌려간 사람을 전부 합하면 15만 명 정도가 될 겁니다. 그보다 더 될지도 모르는데 실제로 북한까지 끌고 간 사람들의 숫자를 지금 잘 모르잖아요. 빨갱이라고 지목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빨갱이로 오인돼서 억울한 사람이 끼어 있어요. 여기(가족회)에서 하실 일이기도 한데, 빨갱이였더라도 빨갱이에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신고해주면 좋겠다는 것을 (실태 조사시) 넣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래야 총체적으로 파악이 되죠.

6.25전쟁 때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 죽은 사람들이 있어요. 민간인 희생자거든. 근데 요즘 전쟁은 총체전쟁이라고 해서 민간인도 다 죽여야 그 전쟁에서 이기는 세상이 되고 말아서 민간인, 군인 구별 없이 다 죽여요. 독일에서 유태인들 4, 5백만 명이 죽잖아요. 그런 비참한 일이 있는데 전쟁에 관여도 않고 길 가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 노근리사건 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도 오인 사살이거든. 6.25전쟁도 비극의 전쟁으로 실제 총을 들고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항전도 하지 않고, 또 북에서 국군한테 총알 한방 안 쐈는데 죽은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납북자라고 하면 주로 반공한 사람들만 얘기하는데, 우리 형은 반공하다가 갔지만 우리 아버지는 반공 안해도 잡혀갔거든. 반공 안하다가 죽은 사람은 관심이 없는데, 그런 사람들까지도 다 포함해서 잘못된 역사를 고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위령탑을 세워서 기념관을 만드는 일도 해야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아주 잘해요. 미국은 지금도 엄청난 예산을 들이면서 6.25때 죽은 사람들 발굴해서 찾으러 다니잖아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내가 그런 용기가 안 나네요. 내 가슴이 형을 못 부르겠어요.(울음) 형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돌아가신 형을 찾으려고 50여 년 동안 애를 썼어야 했는데 한 번도 그런 것도 하지를 않았고, 형을 못 부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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