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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해일(증언자-이해궁)
이름: 관리자
2021-09-16 15:18:11  |  조회: 310
190415A 이 해 일 ( 李海一)

생년월일: 1929년 7월 1일
출생지: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당시 주소: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 244-61
피랍일: 1950년 7월 중
피랍장소: 자택
직업: 학생
학력/경력: 서울대 법대 재학
직계/부양가족: 부모, 5남매
외모/성격: 키도 크고 잘생김 / 차분한 성격

증언자
성명: 이해궁(1935년생)
관계: 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납북 전부터 여성동맹위원회에서 여러 번 형을 만나러 찾아 왔다가 그냥 돌아갔음.
•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갑자기 찾아와 참을 먹던 두 형을 바로 포승줄로 묶고 끌고 하왕십리 파출소로 연행
해 간 것을 확인.
• 연행 직후 큰형은 군용차가 와서 싣고 가는 것을 증언자가 목격함. 같이 끌려갔던 작은형은 의용군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고 함.
• 작은형은 낙동강 전투에서 국군에 투항하여 돌아 왔지만 작은형도 큰형의 소식을 알지 못하였음.

직업 및 활동
<큰형은 서울대학교 법대를 차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총명했고, 작은형도 한양대학교 학
생이었음. 그 외 다른 활동은 들은 바 없음.>
문_ 납북되신 분과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답_ 우리 집안에 맨 위 큰형님이시죠. 이해일, 이해성(둘째 형), 이혜숙, 나, 아우 둘, 여
섯 형제였어요. 제일 큰형님(이해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이학년이었어요. 그때
6·25사변이 났어요. 그때 내가 중학교 일학년이니까 열다섯살. 그 형하고 나하고는 아
주 너무 친했어요. 그 형님이 나 공부도 많이 가르치고 그랬어요. 기억이 제일 많죠 내가.
문_ 당시 거주지는 어디였나요?
답_ 왕십리. 왕십리가 우리 고향이에요. 본적은 충청북도인데 윗사람들이 충청북도고
우리는 일제시대 때 서울로 이사 와서 출생했죠.
문_ 당시 형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그 형님이 우리나라에 대법원 원장이나 법무부 장관 그런 거 할 사람이에요. 서울대
학교 입학할 때 차석으로 입학했어요. 그때 서울대학교 입학할 때 나하고 형, 누나하고
같이 갔거든요. 지금은 컴퓨터로 우편 같은 거 보내지만요, 47년도, 48년도에는 종이
에 써 붙여서 합격자를 쫙 해 놨어요, 합격한 사람. 형님이 이름이 없네? 짤렸어? 우리
형님이 공부 제일 잘 하는데 형님 이름이 왜 없어? 형님이 떨어졌나? 그러니까 어떤 사
람이 저쪽에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탑으로 입학했다 이거야. 거기 가니까 이해
일 이름이 있고 또 한사람 이름 있었다 이거야. 그래서 아주 탑으로 들어간 거예요. 거
기서 입학금인가 등록금인가 두 사람을 면제해줬어요. 그래서 돈도 없는데 면제해주니
까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게 기억난다구요. 그때 당시에는 서울대학교가 종로 5가에서
혜화 가는 길, 거기에 있었어요. 혜화동 쪽으로. 근데 지금은 관악구로 이사를 갔죠. 다
른 건 모르겠고 지금은 알바 같은 거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것도 없고. 오로지 그냥 학교하
고 집만 왔다 갔다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우리를 많이 가르치고 집에서.
문_ 납북된 형님의 성격과 외모는 어떠했나요?
답_ 그냥 뭐 차분해요. 우리 형님은 우리하고 달라서, 키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아주
여자처럼 길고, 아주 몸집도 크고. 지금 살아 있으면요, 지금은 아마 구십이 넘었죠.

납북 경위
<여성동맹위원회에서 피랍인을 찾으러 다녀서 대학을 다니던 두 형이 지하실에 숨어 살
고 대문을 잠그고 생활. 비가 오던 날, 증언자가 가게에 다녀오느라 문이 잠깐 열렸던 틈
을 타 인민군과 인민경찰이 포승줄에 묶어 두 형을 잡아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7월 말경에. 장마 끝이에요. 6·25 전에 동네 분위기는 그냥 그런대로 괜찮았고.
6·25사변 나가지고 빨갱이들이 대전을 함락시켰다 어디를 함락시켰다 뭐 그럴 때 여성
동맹위원회라는 게 있었어요. 인민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우리 형님 둘을 찾으러 오더
라고요. 그러니까 동네에서 수근수근 거리는 게, ‘지금 붙들려 가면 인민군 의용군으로
나간다.’ 그런 얘기가 돌아서 두 형님이 그때, 작은형님은 한양대학교, 큰형님은 서울대
학교 다니니까 숨어 살았어요 지하에. 그런데 참 그 얘기를 하면 눈물 나와….
7월 중순 경에 동네에서 이상하게 동네 빨갱이가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동네 통장
이야.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설마 형님 찾으러 오겠어?’ (하고) 그때 먹을 게 하도 없어
서… 한참 먹을 때 아닙니까? 두 형이나 나나 감자를 삶아서 마루에서 까먹는데, 아버지
가 용돈을 조금 준 게 있어서 가게 가서 내가 사밀을 사 가지고 온다고. 내가 그건 기억
나요.
대문을 다 잠가 놨거든요. 대문을 열고 나와서 구멍가게 가서 사밀을 세 개인가 네 개 사
가지고 들어오는데, 인민군하고 내무서원하고 어떤 젊은 사람하고 대문 앞에 이렇게 서
있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하고 집에 들어오니까 두 형이 감자 먹다가 (포승줄에
묶이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체포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어디서 보고 있었어요. 비는
오고 하니까 우리 형들이 집에 숨어있다 대문 열어 달라 그러면 형들이 숨으니까. 대문
열어 달라는 말은 안하고 가만히 있다가 내가 나가니까 그때 들어와서 형들을 묶어서 가
더라고요. 아휴, 그래서 내가 이건 날벼락 아닙니까.
그 길로 바로 동네 동회에 가니까 동회에 몇 사람이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있더라고요.
젊은 애들이… 작은형은 거기 앉히고 큰형은 또 데리고 가더라고요. 그래서 또 뒤따라갔
어요. 그랬더니 하왕십리 파출소로 가더라고요. 그래서 하왕십리 파출소에서 세 시간인
가 네 시간인가 내가 길 건너에서 ‘왜 형님이 여기 오나? 어떻게 된 건가’ 하며 기다리는
데 저녁때가 되니 어떤 차가 하나 오더니 형을 싣고 가더라고요. 내가 차를 쫓아갈 수 있
습니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있는데 그게 마지막이에요. 그게 형님하
고 나하고 마지막이에요. 형은 내가 길 건너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줄 모르죠. 한 여름
이니까 난닝구 바람하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으로 나간 거죠. 지금 시대 마냥 선풍기가
있습니까, 에어컨이 있습니까? 마루에서 감자 까먹다가 그렇게 된 거지.
그게 오늘날까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혼나고 집이 난장판이 됐죠.
문_ 피난은 가셨는지요?
답_ 그 땐 못 가고 1.4 후퇴 때는 갔었어요. 6·25 때는요, 인민군들이 이북에서 기습
공격을 해서 서울 함락이 3일 만에 됐어요. 그때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어요. 근데
이제 1.4 후퇴 때 우리 아버지 친척이 이 근방에 살았었어요, 군자동에. 그래서 그때 우
리는 피난 갔다가 다시 수복돼 가지고 서울 가서 살다가 나는 누이가 시집갔다가 와서
혼자 살았기 때문에 여기로 이사 와서 누이는 죽고 나만 있었어요. 6·25때는 한강다리
가 제1한강교하고 광나루 두 개 밖에 없었어요. 그 두 개를 아군이 끊으면서 후퇴했거든
요. 그래서 피난가기가 어려웠어요. 못 갔죠, 안 간 게 아니라. 우리 고모부하고 면장하
고 다 못 가서 인민군한테 잡혀 가서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이에요. 경찰가족이라고… 나
는 그때 뭐 했느냐? 나는 그때 왔다갔다하면서 심부름이나 하고 그랬는데, 나도 그런 일
이 있었어요. 종로 2가에서 이렇게 내려오는데 인민군이 ‘어이’하고 불러요. 왜 그러냐
니까 삽을 주며 이 사람 따라가라고 해요. 인민군들이 시가전을 하려고 공원에 가서 흙
을 파 가지고 포대 자루에 쌓는 거, 그걸 만들래요. 가 보니까 우리 아군은 서울을 그냥
내줬지만 인민군들은 서울에서 시가전을 하려고 그걸 쌓는 거예요. 몇 개 쌓는 척하다가
눈치 보고서 집으로 왔죠. 그래서 서울이 그때 아주 쑥대밭이 됐었어요. 서울 건물이 을
지로 4가에서 서울 시청까지 평지였었어요. 폭격 때문에 아무것도 없이… 나는 그것도
기억해요. 참 참혹했습니다. 참혹했어요.

납치 이유
<의용군 징집 대상자인 큰형과 작은형이 지하실에 숨어 있는 것을 알고 증언자가 문을 열
고 나가자마자 동네 빨갱이였던 통장이 밀고하여 피랍됨.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충원
으로 추측함.>
문_ 왜 납치되었을까요?
답_ 동네 빨갱이들이 이해성은 뭐고, 이해일은 법과대학 법학과고 이러니까 중요하게
여겼나 봐요. 대문을 잠가 놓고 살았거든요. 근데 누가 어디서 봤는지, 숨어있다가 내가
나가니까 그 사이에 들어와 가지고 감자 까먹고 있던 걸… 우리는 비가 이렇게 오는데,
장마인데 누가 설마 오나 하고서 방심한 거죠. 그 순간에 그걸 내가 지금도 기억하지만
통장이 빨갱이거든. 통장이 우리 집 위에 있어서 거기서 내려다봤나 봐. 대문 잠가 놓고
있는데 문 두드리면 달아날 거고 하니까 저기 누가 대문을 열고 나올 때 들어가자라고
통장이… 통장 아들이 나랑 친구였었어요. 근데 아군이 들어오자 통장은 빨갱이니까 없
어졌더라고요.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게.

납치 후 소식
<이후 하왕십리 파출소로 이송된 것을 증언자가 찾아감. 3~4시간 후 작은형은 파출소
에 남겨졌으나, 큰형은 차로 이송됨. 큰형은 소식이 끊겼고, 작은형은 인민군 의용군으
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자진 투항하여 거제도 수용소에 수감되어, 반공포로 석
방 때 집으로 돌아옴.>
문_ 형들의 납북 이후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작은형은 잡혀 가서 인민군 의용군으로 나왔어요. 나와 가지고 낙동강 전투에 배치
를 하더래요. 전투 중에 작은형이 손을 들고 세 명의 젊은이들과 전투하는 척 하면서 국
군한테 투항을 했대요. 투항을 하니까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더라 이거예요. 거제도
수용소로. 나는 그거 기억해요. 이승만 박사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 하도 그냥 잡탕이들이 거제도에 있었으니까 반공포로 석방을 하는데, 이북으로
갈 사람은 이북으로 가고 남한으로 올 사람은 남한으로 와라. 그래서 형님은 남한으로
왔다구요. 그래서 집에 왔어요. 그것도 2년인가 3년 만에 보는 건데. 오자마자 큰형님
어찌됐는지 물어봐. 나도 물어봐야 하는데… 그러니까 전부 다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그때 당시 어떻게 됐는지 모르죠, 지금까지. 작은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온 집안이 큰
형 소식을 모르죠. 작은형은 돌아와서 이제 서울 국방부 사령부 군인으로 나갔다가 제대
해서 지금 죽은 지가 한 15년인가 돼요. 미국으로 이민 가서 거기서 죽었어요. 전쟁 통
에 우리 집안이 쑥대밭이 됐어요. 친삼촌 둘, 고모부, 고모부의 아들 6·25 때문에 쑥대
밭 된 게 우리입니다. 우리 고모부는 동대문 경찰이었는데 붙들려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고모부의 아들도 의용군으로 나가서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어
요. 한동안은 내가 모든 것이 괴롭고,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사나, 다 잊어버리고 죽어버
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있는데, 근데 이게 인력으로 맘대로 됩니까? 마음대로 안
되죠. 우리 가족이 6·25의 불행입니다. 몇 사람이 행방불명됐는지도 몰라요.
문_ 동네에 같이 끌려간 이들도 있는지요?
답_ 나 같은 열살에서 열다섯살은 그냥 있고, 그 위에 친구들은 몇 사람 아마 없어졌다 그
런 얘긴 들었는데, 내가 확인은 안 해봤어요. 근데 그건 확실해요. 인민군이 많이 죽었지
않습니까. 낙동강 전투까지 내려갈 때. 그래서 이북에서 서울의 젊은이를 많이 끌어가서
인민복을 입히고 인민군 의용군으로 내보낸 건 내가 알아요. 그때 당시 그랬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장래가 촉망했던 두 아들을 잃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친척들도 실종되거나 의용군
으로 끌려가는 등 여러 사람들이 행방불명 됨.>
문_ 아들 둘이 납북되고 남은 가족들의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그날 그냥 사밀 사 가지고 오니까, 내가 대문을 열어놓고 나와서 그리 됐나. 지금
도 그런 생각 밖에 안 들어요. 자꾸 눈물이 나. 그 형하고 나하고 정말 친했어. 사무친다
고. 나와 권투시합도 하고 공도 던지고. 나를 참 좋아했어요. 동생들이 많았지만… 이젠
눈물도 말랐어. 우리 부모님은 말도 못합니다.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
는지 몰라요. 공부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입니까? 넷이나 되는데 아버지 혼자 그때 지금
으로 말하면 항만청같아. 해운공사에 과장으로 있으면서 그 공부를 다 시켰는데, 다 풍
비박산 됐으니까 아버지 슬픔은 말할 수 없죠. 헛공부 시킨 거죠. 누나도 나도 아우도
우리 공부시키느라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거예요. 근데 어느 하나 덕도 못 보고. 작은형
은 한양대학은 졸업은 시켰어요.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와서. 근데 결혼해서 이민 가고,
나는 군대 가서 5년을 복무 했습니다. 내가 군대에서 다쳐서 대구 육군병원에, 27육군
병원이 평양에서 창설했어요. 압록강까지 우리 국군이 쳐들어갔을 때 하도 많이 죽으니
까 평양에서 27육군병원이라는 걸 세워서 그것이 후퇴할 때 대구로 갔는데, 내가 다쳐
서 27육군병원에 입원했어요. 거기서 수술하고 사년 넘고 오년 가까이 입원하고 있다
가, 군대생활 못하니까 제대를 시켜준 거지. 군의가사제대.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관련 기관에 신고는 하셨는지요?
답_ 나는 그런 거 모르죠. 인민군 시절에는 찾거나 그런 것도 필요 없어요. 그런 것도 못
했어요. 어머니는 점도 많이 쳐 봤나봐. 어떻게 된 건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해
서 인민군이 후퇴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무슨 소식이라도 있을까 했는데 그때도 아무 소
식이 없어요. 전혀 모르죠. 작은형이 거제도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집에 와서 형을
찾는 거예요. 근데 나도 모르니, 서로 모르는 거죠. 참… (나중에) 물어는 봤죠. (이산가
족찾기 때) 서울 대한극장에 한 번 모이라 해서 거기 가니까 누가 연설을 하더라고요. 이
런 얘기를 간단히 하니까 우리라고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이 이산가족으로 되어있
으니까, 초청장을 보낸 거지, 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랬던 기억이 나요.
한 번은 이산가족에서 우리를 초청하더라고요. 어디서 모여라. 모이면 차를 태워서 자
유의 다리까지는 가겠다. 나는 걸음도 못 걷고 불편하고 그래서 못 갔어요. 안 간 게 아
니라 못 갔어요. (납북 당시에는) 도움도 못 받았고, (신고) 그런 건 못 했어. 뭘 알아야
신고하죠. 어떻게 된 건지.
문_ 납북자 결정서는 누가 신고해서 받으셨는지요?
답_ 이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내 친구 아들이 서울대학교 총무과인가 학생과에 있어요.
그 친구한테 넌지시 이런 거 할 수 있냐 하니까 할 수 있다 그래. 그래서 해달라 하니까
한 한 달 만에 이게 왔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거죠. 사진도 이만한 거 하나
있었는데 그건 다 부서지고 뜯어졌어요. 그건 형님 보고 싶어서 내가 써 놓은 거고. 납
북자 결정서는 내가 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이제 한동안은 그게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
예요. 이게 청와대에서 온 거예요. 납북자 가족이라고.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거
예요. 황교안 국무총리할 때. 이걸 보내고. 오늘 오신다고 해서 납북결정 통지서 찾아서
온 거예요. 신고하니까, 형의 학력증명서, 서울대학교 제적증명서. 그건 내가 써 놓은
거예요. 48년 9월 1일. 발행 2002년이요.
호적 정리
<소식을 몰라 그냥 두고 있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지금까지 호적에는 그냥 있어요. 죽은 사람 이런 거 다 했는데…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생존으로) 있어요. 다 죽었는데 나 하나하고 그 형하고. 근데 그게 내가 죽기 전에
는 해야죠. 아버지도 못하고, 언젠간 해야 하는데… 내가 특별히 형님이 죽었는지 살았
는지도 모르는데, 죽었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냥 그대로 지난 거죠.

연좌제 피해
<경험한 바 없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이번에도 딸 하나가 하와이 사는데, 아버지 보고 싶다고 꼭
한 번 오라고 해서 한 번 갔다 왔어요, 며칠 전에.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내가 되려 어
디 가서 물어보고 그랬죠. 전시에 이승만 박사가 반공포로 석방하라 하는 거 보고 전세
계 지도자들이 저 사람 미쳤네. 그때 황당했어요.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오해를 많이 받
았죠. 거기가 난장판이었거든요. 중공군, 인민군, 우리 같이 끌려가서 들어간 사람…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석방하라 해서 이북으로 갈 사람 이북으로 보내고 한국에서 고향
찾아 갈 사람 고향으로 보내고. 그것도 제가 기억을 합니다.

정부에 바라는 말
<한동안 원망도 했으나, 그때는 나라의 위기였으니 이만큼 성장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
됨. 나 같은 사람 한 둘이 아닌데 이제 무얼 바라겠는가.>
문_ 정부나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참 우리나라가 슬픕니다. 슬퍼. 한동안은 대한민국 원망도 했죠. 그것도 원망했던
내가 바보였었고… 그때 상황은 대한민국이 없어지느냐 소생을 하느냐 그런 거 때문에
내가 군대생활도 해보고 여러가지 해보니까 이만큼 된 것도 다행이다. 형님도 찾지도 못
할 거고 뭐 바라는 게 뭐 있겠어요. 뭘 말하겠습니까. 내가 지로용지에 얼마라도 다달이
보내야 할 텐데 그것도 못 보내고 있는 주제에 뭘 바라겠어요.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뭘 바라겠습니까, 이제.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형님이 보고 싶고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기를 바람.>
문_ 형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내가 죽어도 내 후손은 이걸 보라고 적어 놓은 게 있어요. 형님 보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죠. 이걸 적어 놓은 거예요. 내가 죽은 다음에 자식들이 이
런 거 보면서 잊지 말라는 거죠. 근데 적어 놓은 것뿐이지 이루어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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