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조규명 (증언자-조규만)
이름: 관리자
2021-09-17 15:11:13  |  조회: 310
190522C 조 규 명 ( 曺圭命)

생년월일: 1930년
출생지: 충북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 538번지
당시 주소: 충북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 538번지
피랍일: 1950년 6~7월
피랍장소: 마을 은행 나무 아래
직업: 군 제대
직계/부양가족: 조모, 부모, 남동생 4, 여동생 1
외모/성격: 키가 크고 잘생겼음

증언자
성명: 조규만(1945년생)
관계: 남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직업 및 활동
<군대 제대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납북됨.>
문_ 피랍인은 당시 농사일을 하셨나요?
답_ 농사일을 한 게 아니라 군대 갔다 제대를 했나 봐요. 제 기억으로는 헌병 소위였어요. 사진만 세 장 있었어요. 여기다가 헌병이라고 쓰고 칼빈총을 메고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고, 군인 정복을 입은 사진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그냥 작업하고 있는 사진 그렇게 세 장 있었어요. 제가 직접 봤어요. 끌려간 이후로 우리 어머니가 그 사진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셨어요. 6·25 때는 경비대나 군 가족들은 그냥 쏴 죽였어요. 그랬는데도 어머니가 그 사진을 보관했었는데, 지금은 비닐이라도 흔하지만 그때는 비닐도 없었어요. 그래서 비료포대를 보면 끈적끈적한, 물 안새는 것이 있었어요. 거기다 차곡차곡 보관했었는데, 제가 객지 생활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작은어머니한테 맡겼었는데 작은어머니 돌아가시고 사촌들 다 뿔뿔이 흩어지니까 다 없어졌어요, 유품이.
문_ 당시 마을에서 하신 활동은 있었나요?
답_ 활동한 거는 제가 기억이 안 나고, 군대 갔다 제대한 것만 기억이 나요. 아마 그 해에 제대를 한 것 같아. 그래서 거기 형님들 노는 사랑방이 있어요. 사랑방가면 새끼줄 꼬고 그러더라고요. 어머님이 형 식사하라고 불러봐라 하고 사랑방으로 심부름을 보내고 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나요.
납북 경위
<은행나무 밑으로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아이들과 노인들은 보내고 인민군 세 명이 청년들만 끌고 갔음.>
문_ 납북 당시가 언제쯤이었나요?
답_ 년도는 기억을 확실히 못 하는데. 제가 일곱 살 때에요. 여름인데 수백 년 된 은행나무 밑으로 모이라고 했어요. 그때는 뭐 중요한 일 있을 때 종 쳐서 모여서 뭐 하고 그랬죠. 제가 어려서 관심이 없으니까 잘은 모르고. 농촌에서 일하다가 졸리면 그냥 자고 이럴 땐데 한 이십 명 와 있었어요. 친척들도 뭐 어린애들도 따라와 있고.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정확히 열여덟 명이 끌려갔다고 하더라고요. 동네에서 소문이 나잖아요. ‘우리 애도 끌려갔어’ ‘우리 애도 끌려갔어’ 하고 끌려간 사람들의 부모가 얘기를 하니까 열여덟 명이라는 숫자가 나오더라고요.
근데 중요한 것은 조명암 씨라고 저희 일가 중 한 분은 살아왔어. 그분이 살아오니까, 가족 잃은 동네 사람들이 궁금할 거 아닙니까. 그 집에 쫓아가서 들어보니까 내가 도망칠 때 총알이 비 쏟아지듯 했는데 아마 거의 죽었을 거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주 절망을 한 거야. 자기가 도망치는 바람에 총알이 비 쏟아지듯 했다는 거야. 옥수수 수수밭인가 어디에 틈을 타서 도망을 쳤는데 한 사람이 살아온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크면서 우리 형님은 그런 배짱도 없었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문_ 누가 끌고 갔는지요?
답_ 인민군인지 뭔지 따발총을 거꾸로 멨더라고. 따발총을 많이 쏘는 게 인민군이거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인민군 세 명이 총 들고 와서 안 가면 총 쏠 분위기니까 어쩔 수 없었죠. 일렬로 서라 해서 앞에 하나, 중간에 하나, 뒤에 하나 쭉 서니까, 쫙 호루라기 불면서 그대로 앞으로 가 하더라고요. 어떻게 꼼짝달싹도 못 할 정도로.
문_ 그러면 마을 사람들 다 지켜보는 가운데 끌고 간 거에요?
답_ 마을 사람들도 많이는 못 봤죠. 모였는데 나이 먹은 사람들은 다 가라고 하더라니까. 그러니까 그때는 뭐가 뭔지도 모른 거야.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종을 쳤나보다 했죠. 그걸로 끝이라니까. 설명도 없고 무슨 어디 간다 온다 얘기도 없고. 그렇게 의용군으로 열여덟 명이 끌려가고, 그 다음에 글씨라도 좀 잘 쓰고 보통 학교라도 나온 사람들은 6·25가 터지면서 보도연맹이라는 게 있더라고. 보도연맹으로 끌려가서 죽은 사람들이 많아요, 또. 우리 동네에 말보리 고개라고 있는데 그 문벽면 저기에 나는 보지는 못 했는데 목을 줄줄이 엮어서 총으로 죽여서 그 다음에 거기에 가서 시체를 가져오고 한 그런 기억이 나요. 우리 당숙이 거기 가서 죽었으니까. 사촌이니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갔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울고불고한 기억도 나고. 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여자는 여성동맹, 남자는 보도연맹으로 끌고 갔어요.
저희 막내 고모가 예쁘장했어요. 고모가 큰형님 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근데 경찰들이 와서 여성동맹에 가입을 하라고 그래요. 형님이 끌려가신 이후죠. 근데 우리 아버지가 안 된다 해서 결국 가입은 안 했어요. 시집을 가서 뭐 아들 낳고 아들이 검사도 되고 그랬는데. 하여튼 아주 위협적으로 하더라니까. 우리 아버지 얘기가 네 고모도 내가 아녔으면 여성동맹에 가입을 해서 죽었을 건데 살아서 이렇게 됐다고 하시더라고. 그 얘기를 한두 번 듣는 게 아니야. 귀에 딱쟁이가 지도록…

납치 이유
<인력동원으로 추정.>

납치 후 소식
<같이 끌려갔던 분이 도망쳐 나오면서 총알이 비오듯 했다며, 다들 죽었을 거라고 전함. 이후 이산가족 상봉에서 같이 끌려갔던 사람으로부터 이북에서 대학을 나오고 삼남매가 있으며 괜찮게 있었다는 소식을 들음.>
문_ 마을에 열여덟 명이나 끌려갔으면 가족 분들이 좀 찾으려고 노력하셨는지요?
답_ 조명암이라는 사람이 그 얘기를 해서 찾으려고는 생각도 못 했죠. 우리 집안 아저씨뻘 돼요. 당시에 이십대였고, 지금은 돌아가셨죠. 그분은 끌려가고서 아마 얼마 되지 않아 돌아온 것 같아요. 근데 그 양반이 하는 소리가 내가 탈영하고 그럴 때 총알이 비 오듯 했습니다. 거의 죽었을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찾으려고 생각도 않고. 당시 이장이 말하자면 공산당 쪽에서 역할을 하는 분이에요. 이◯철이라고. 이북성향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종을 치고, 주선해서 데려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후에 그 사람이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동네 사람들하고 대화를 안 하고, 그 사람 오면 돌아가고 그럴 정도로. 그 사람은 전쟁 후 얼마 있다 죽었어요. 근데 그 자식들하고도 동네 사람들이 얘기를 잘 안 해. 세월이 수십 년 흐른 후에야 서로 얘기를 하고 그랬지.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2000년대로 기억하는데, 남북 이산가족 상봉할 때, 같이 끌려간 동네 사람 중 정◯재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동생들하고 연락이 돼서 상봉을 했어요. 상봉을 했는데 물어볼 거 아닙니까? 우리 형님하고 정◯재하고 동갑이고, 그 밑에 흥재라고 나하고 동갑이에요. 자기 형을 만났으니까 저희 형님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봤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북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내가 ‘형님 주소나 전화번호를 적어 오지’라고 그랬더니 거기서는 필기를 못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화하다 물어보니까 규명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는데 삼남매를 낳고 대학까지 나와서 괜찮게 있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 형(정◯재)은 한국에선 보통 학교도 못 나왔는데 양 쪽 가슴에 훈장을 늘어지도록 달고 나왔대요. 그리고 우리 형님이 죽은 지가 한 이년 정도 된다고 하더래요. 한 십년 전 쯤 그 얘기를 들었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증언자와 할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은 두번 피난을 다녀옴. 큰아들이 납북된 후 아버지가 좌절이 심하여 생계에 소홀했음.>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저는 6·25 때도 할머니하고 둘이 집에만 있었지, 피난 가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뭐 일곱 살이고 끌고 다니기 그러니까 할머니도 계시니까 둘이 그냥 집에 있고 가족들은 피난을 갔다가 한 달 쯤 후에 돌아왔던 것 같아요. 멀리는 못 갔어요. 신대라고, 그게 어딘가 하면 우리 할머니 사촌인가 누가 살고 있었는데 그리로 피난을 갔었데요. 청원군인데 신대라고 그래요. 돌아왔다가 또 피난을 가는데 보은으로 갔던 것 같아요. 피발량 고개 하는 거 보니까 보은 거기가 피발량 고개거든. 그러니까 두 번 갔다 왔어요. 자동차도 없고 그냥 걸어 다녔으니까 멀리는 못 갔던 것 같아요. 그리고 피난 갈 때 준비하는 걸 보니까 찹쌀을 갈아서 미숫가루를 만들더라고. 나하고 할머니하고 먹으라고 이렇게 해 놓고 먹은 기억도 나고 만든 기억도 나고 찹쌀가루 아니면 보리로 많이 하더라고요.
할머니랑 같이 있을 때 제가 본 거는 인민군들이 와서 밥 달라 뭐 달라 하고, 닭이 있으면 자기네들이 닭 잡아 먹고 그런 거죠. 그리고 우리는 서울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 위해서 쪽방에서 자고 다른 사람들이 안방이나 사랑방 차지하고 그런 기억이 나요. 그리고 인민군들이 동네 와서 자는 데, 닭을 쫓아서 안 비키면 총으로 닭을 그냥 쏴요. 그래서 지들이 잡아 먹고. 또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인민군이 그 동네에서 잠을 자고 담요를 이렇게 메고 총 메고 배낭 메고 줄로 서서 한 백 명 내지 백오십 명 되었던 것 같은데, 장성골이라고 그리로다가 줄을 서서 쭉 가는 걸 봤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많아보였는지, 시골이라서 그렇게 사람 많은 것을 못 봤으니까 그래서 아주 그 기억이 생생하죠. 그때가 한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이니까. 그때는 뭐 시골이라 유치원도 없고 초등학교도 머니까 한 오 킬로를 걸어서 왔다 갔다 해야 돼요. 그래서 일곱 살 먹어서는 학교를 못 가요.
문_ 아버님이 아니라 형님이 끌려가셨기 때문에 형제들 생계는 크게 위협받지는 않았겠네요?
답_ 어려웠죠. 우리 아버님은 자식이 끌려갔으니 실망을 해서 뭘 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래서 저도 공부를 많이 못 했죠. 우리 아버지가 내가 벌어서 자식을 가르쳐야겠다 이런 의욕을 잃어버려서. 왜냐면 형이 똑똑하고 잘 생기고 그랬으니까 그런 다 큰 자식을 잃었으니, 그것도 무슨 병사한 것도 아니고, 사고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뭐 노력을 해서 남은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하질 않아요.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물려 받은 땅이 많아요. 땅이 많은데 의욕을 잃어서 농사도 안 해. 이 시골에 비가 억수같이 와야만 모를 심어요. 수리시설이 안 되가지고. 제 기억으로는 모 심을 때 비가 오면 학생들, 직원들 모두 와서 심어주고 그런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적극적이지 않았죠. 약주하고, 그냥 생활비 없으면 땅 하나 내 팔고 뭐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자식 잃은 슬픔인지 괴로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볼 때는 원망스럽죠. 잃은 자식은 잃은 자식이고 나머지 자식은 좀… 나머지도 오남매 아닙니까.
우리 어머니는 그때 학벌이 없죠. 그때 참 마음 고생을 많이 했죠. 제가 아들 하나 딸이 둘이에요. 저도 경제 활동이 넉넉지 않았는데, 며느리는 국민은행을 다니고, 아들은 기린이라는 회사를 다니고요. 내가 자식한테 물려줄 건 없는데 제사까지 물려줘서 고생을
시킬 게 뭐 있습니까. 그래서 정월 초하루만 지내라 그랬어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님 그리고 제 집사람이 죽은 지가 한 이십 년 됐으니까 형님 제사는 안 지내도 다섯 번이니까 두 달에 한 번 꼴인데, 남의 귀한 딸 데려다가 그 고생 시킬 게 뭐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정월 초하루는 고생이 되어도 지내라. 나머지는 내가 살아있는 한 산소에는 내가 갔다 오마 그랬어요. 형님 제사는 안 지내요. 그때는 생사를 몰랐으니까. 이산가족 찾기 할 때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건 이제 북쪽에 자식들이 있으니까 지내겠지 생각해요.
문_ 부모님이 큰형에 대해서 주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답_ 별 말은 안 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약주하고 다니시면 가끔 먼 산을 보면서 이게 죽었나 살았나 하셨었는데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이게 큰아들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도 제가 어머니 산소에 가면 눈물을 흘려요. 우리 어머니가 자식 많이 낳고 키우느라고. 큰아들은 잃고, 남편 술 마시고 그러느라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혔을까요. 1994년도에 여든네 살에 돌아가셨어요. 2월에 돌아가셨는데 김일성이가 5월에 죽더라고. 그래서 내가 우리 어머니가 한 건 하셨다고 그랬어요. 김일성이 데리고 갔으니까. 아버지는 1970년도에 쉰다섯 살에 돌아가셨어요.
문_ 가족 분들은 계속해서 진천군에 사셨어요?
답_ 진천군에 계속은 안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 넘으면서 객지로 나오고. 왜냐하면 형제들이 다 서울로 왔기 때문에요. 우리 큰형님은 서울에 일찍 왔어요. 어머님은 큰형님하고 살다가 우리가 다 그때는 뿔뿔이 흩어졌죠. 저는 포천 쪽에서 사업을 하고 동생은 애경유지 다니고 그럴 땐데 제가 이제 1966년인가 군에 입대를 했어요. 입대를 해서 근무를 했는데 저 7사단 사령부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때는 7사단 사령부가 화천 쪽인데 최전방이에요. 해만 지면 ‘박정희 괴뢰 도당’ 막 이러면서 대남 방송이 쾅쾅 울려요. 내가 학벌도 변변치 않고, 사회 나가면 직장도 녹록치 않은데 어떻게 살면 될까 싶은 거야. 그때 월남 파병을 하더라고 1966년, 1967년 이때. 그래서 거기 지원을 했는데 안 돼요. 703 영문 타자병이야. 영문 타자병 행정병은 4단까지 안 내려와요. 6번에서는 한 번에 와요. 6번에서는 만만한 사람 찍어서 가지. 그러니 인사 참모한테 가서 월남에 가고 싶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하냐 하면 이 놈아, 부모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겠느냐. 너는 내 부하인데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이다. 전선에 어떻게 내가 보내냐면서 안 보내주더라고. 그래서 두세 번 찾아갔어요. 처음에는 그냥 그런 식으로 훈계를 하더니 두 번째는 막 야단을 치더라고. 너 목숨을 그렇게 버리고 싶냐고. 그래서 세번째 가서는 내가 이래도 고생이고 저래도 고생이다. 단, 내가 죽으면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고, 내가 살아오면 60년대 해외 탐방은 꿈도 못 꿀 텐데 내가 견문을 넓혀 오겠다고 했어요. 그때는 그렇게 가고 싶냐 그래요. 그래서 그 얘기를 했어요. 우리 형님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내가 죽으면 연금이라도 조금 나오면 가족이 도움이 될 테고 살아오면 제가 견문이라도 넓혀 올 거 아닙니까. 죽기 살기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너 병과를 바꾸라고 그러더라고. 그런 과는 죽어도 못 간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바꿉니까 그러니까 인사 쪽에 잘 알잖아. 사단 헌장 교육대를 가니까 4주 만에 703에서 610으로 바꿔주더라고. 그래서 610을 받아서 신청을 하고 다른 병사들은 첫 휴가를 갈 때 나는 월남에 가는 짐을 싸 놨어요. 근데 휴가 가서 짐 싸는 거 하고 월남 전선에 가는 짐 싸는 거 하고 보니까 그냥 세상 눈에 뵈는 게 없어요. 내무반에 내무반장도 있고, 고참들이 많잖아요. 사람들이 쟤는 월남 가는 거니까 때리지도 말고 야단치지도 말고 재워서 보내자 이렇게 하고는 매트리스 두 장을 엎어서 내주고는 그냥 자래요. 다음 날 월남으로 가서 잘 살아 돌아왔어요. 12개월 있었죠. 월남 가서 참 운이 좋았어요. 이천 이백 명 한 번에 갔는데, 거기서 세 명 뽑는데 뽑혀 갔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친구나 자식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뭐라고 하냐 하면 한 순간을 살아도 최선을 다하라 그래요. 내가 경험을 했기 때문에요. 뭘 경험을 했냐 하면, 가서 뭘 써내는 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막 써내더라고. 근데 나는 모자 챙을 잘 받혀가지고 아주 잘 공손히 써서 잘 냈는데 인사계가 글씨를 보고 뽑았어요. 그래서 이천 이백 명 중에 세 명 뽑는데 뽑혔어요. 화약 보급소 쪽으로요. 근데 저는 화약하고는 아무 전공도 아니고 관련도 없어요. 운전병일 뿐이었는데 저를 뽑아줬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납치되고 나서 지원이라던가 조사 나온 적이 있었나요?
답_ 지원이나 그런 건 없었어요. 조사 나온 것도 없고요. 저도 이래 저래 하다 보니 형님도 죽고 하니까 적십자사에 찾아 갈 일도 없고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바로 밑에 동생도 월남에 갔다 오고.

호적 정리
<확인 못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글쎄, 모르겠는데. 서류를 떼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아마 그대로 있지 싶어요.

연좌제 피해
<막냇동생이 육사, 삼사 시험을 봤는데 신원 조회에 걸려 불합격되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우리 막냇동생이 55년생이에요. 그러니까 뭐 우리 큰형님하고는 아들 같지.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큰형이 이렇게 되었다 얘기하고 다른 형들도 큰형이 헌병 소위였었는데 6·25 때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니까 이게 막내 가슴에 못이 박혔나 봐요. 그래서 청주 상고를 나와서 육사 시험을 봤는데 필기에는 합격이 됐는데 신원 조회에 떨어진 것만 세 번이에요. 바로 위에 형님이 규필이라고 있습니다. 면목동에 살았어요. 근데 거기로 신원조회가 나왔던가 봐요. 우리 형님이 좀 저하고는 달라요. 좀 트인 데가 없어. 곧이곧대로 그냥 바둑판처럼 그랬는데. 그래서 내가 형님한테 찾아가서 그때 서울을 관장하는 공사가 오일공사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기무사인가 광적대인가 그래요. 제가 형님, 거기서 조회가 오거든 여차저차 해서 잘 답변을 하세요. 그런데 두 번 봐서 신원조회가 안 되니까 막내가 아, 안 되나 보다 낙심을 해가지고 군에 입대를 했어요. 논산훈련소 본부에서 근무했어요. 머리가 좋고 필체가 좋아요. 육사는 엄격해서 안되나 보다 그래서 삼사를 보자 이래서 훈련소에서 삼사를 또 봤어요. 이번에도 됐는데 신원조회에서 또 안돼. 그래 가지고 제가 눈물이 나는 것은 우리 막냇동생이 절벽 아닙니까. 희망이 없으니까 결혼을 안 해요. 그래서 목동에 여동생이 사는데 여동생이 좀 괜찮은 도료, 말하자면 선 긋고 뭐 하는 그 회사 딸이 그때만 해도 60년대만 해도 슈퍼살롱을 두 대씩 타고 그러면 뭐 벤츠 두 대나 마찬가지거든. 근데 그 집 딸이 여의도의 맨하탄 호텔에서 막냇동생과 맞선을 보고 좋다고. 그런데 이제 막냇동생이 누나와 인사를 시키려고 어디에서 만나자 그러니까 이 아가씨가 이제 슈퍼살롱을 타고 오다가 아마 약간 내리막길이었었나 봐요. 차를 어디 길가에 세워 놓기도 마땅치도 않고 그러니까 어서 오십시오 하고 차 안에서 인사를 했는데 우리 막내둥이가 예의가 안 됐다. 잘 사는 집 애라 예의가 안 됐다 그러니까 안 한다. 이 고집이 얼마나 센지 몰라요. 그래서 그 아가씨가 10년을 기다렸어요.
그 동안에 걔는 뭘 했냐 하면, 제대를 하고 사법고시를 봤는데 안 되더라고. 한참을 봐서 안 되니까 교도소에 교정 시험을 봤는데 원래 필체가 좋으니까 합격했어요. 법무부 총무과에서 둘을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둘이 갔는데 하나는 신혼이라 마침 제주도 여행을 갔고. 얘는 가서 보니까 국민 교육 헌장을 한문을 섞어서 쓰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국민 교육 헌장을 한문을 섞어서 쓰니까 며칠부터 여기서 근무를 하라고 해서 교정 공무원으로 법무부 총무과에 근무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게 획기적인 거지. 그렇게 근무를 하는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거기가 도저히 얘가 갈 자리가 아닌데 싶어요. 초임인데 가서 뽑은 사람하고 뭔가 긴밀한 대화가 안 되면 힘들겠다 싶더라고.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싶겠는데, 형님들하고 동생들하고 상의를 해서 우리 어떻게 가서 인사를 좀 합시다. 근데 그때 그런 얘기를 하니까 막내가 펄쩍 뛰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 이제 안 다닌다 하더라고요. 근데 아니나 다를까 한 일 년쯤 근무를 하다가 인천으로 좌천을 당하더라고. 법무부 총무과에 있던 사람이 인천으로 가니까 자존심 상하고 창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기서 한 일 년 정도 근무하고 사표를 내더라고. 아 나는 이래도 저래도 인생이 앞 길이 안 열리니까 절망이구나 싶어가지고 지금 예순 다섯인데 결혼을 안하고 살아요. 그게 제일 가슴이 아프고 아주 우리 형님 가족사만 얘기하면 눈물이 나고 울분이 터지고 막 그래요 내가. 원인은 우리 형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 우리 형님이 납북자가 되어 가지고 끌려가서 행방불명되고 뭐로 봐도 연좌제 걸려서 안 되니까 좌절을 했어요.
연좌제가 80년대인가 이때 폐지가 되었잖아요. 근데 그때는 동생이 나이도 많아 이미 뭘 할 수가 없잖아요.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 가족들에게 따뜻하게 해주길 바람.>
문_ 지금 정부나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연좌제가 되어서 가족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 그걸 풀어줘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납북 피해에 대한 아픔을 겪고 있으니까 그 아픔의 만 분의 일이라도 조금 달래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뭐 이미 형님도 돌아가시고 다 알 거 알고 하니까 바랄 게 없지만, 다른 납북자 가족들에게 정말 만 분의 일이라도 따뜻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저 세상에 가서라도 편히 쉬었으면 좋겠으며, 북한의 자녀들도 잘 됐으면 좋겠음.>
문_ 형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형님이라도 부모처럼 따르고, 또 형님도 저를 그렇게 예뻐해주고 그랬는데 저 세상에 가셨으면 거기서라도 부모 형제 잊지 않고 잘 살고, 동생들도 잘 살고 있으니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북한에 있는 자녀들도 좀 잘 됐으면 좋겠고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10 납북자-조병욱(증언자-조병소)
관리자
21-09-23 288
209 납북자-윤재희(증언자-윤영자)
관리자
21-09-23 327
208 납북자-이종선(증언자-이오선)
관리자
21-09-23 259
207 납북자-이창두(증언자-이연자)
관리자
21-09-23 3039
206 납북자-조규명 (증언자-조규만)
관리자
21-09-17 309
205 납북자-박동규(증언자-박명자)
관리자
21-09-17 256
204 납북자-고재경(증언자-고재철)
관리자
21-09-17 287
203 납북자-이원일(증언자-이홍자)
관리자
21-09-17 264
202 납북자-김광래(증언자-김귀래)
관리자
21-09-17 277
201 납북자-김동섭(증언자-김관희)
관리자
21-09-17 303
200 납북자-유영기(증언자-유방원)
관리자
21-09-17 264
199 납북자-원정용(증언자-원정희)
관리자
21-09-17 312
198 납북자-이재춘(증언자-이효선)
관리자
21-09-17 310
197 납북자-김평묵(증언자-김정임, 김정옥)
관리자
21-09-17 286
196 납북자-장석홍(증언자-장석태)
관리자
21-09-17 419
195 납북자-윤관중(증언자-윤석칠)
관리자
21-09-17 448
194 납북자-정중화(증언자-정연종)
관리자
21-09-17 271
193 납북자-이해일(증언자-이해궁)
관리자
21-09-16 353
192 납북자-김득필(증언자-김화철)
관리자
21-09-16 258
191 납북자-정헌각(증언자-정헌홍)
관리자
21-09-16 310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