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이원일(증언자-이홍자)
이름: 관리자
2021-09-17 13:02:11  |  조회: 121
190429C 이 원 일 ( 李源逸)

생년월일: 1921년 11월 24일
출생지: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62번지
당시 주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64–27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13일 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한전 남부 영업소 근무
학력/경력: 고등학교 졸업, 수도 방위 훈련학교 이수
직계/부양가족: 모, 남동생, 배우자, 자녀 2남 2녀
외모/성격: 동네일에 항상 앞장서서 활동

증언자
성명: 이홍자(1941년생)
관계: 장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6·25 가 났을 당시 수색에 출장 가 계시다가 집에 오는 길에 빨갱이인 동네 사람을 마주쳐 인사만 하고
귀가한 후 바로 그날 밤에 인민군들이 와서 대문을 발로 차는 동안에 피랍자가 재빨리 피신하여 모면했
는데 세 번째는 일찍 들이닥쳐 미쳐 피하지 못하고 연행됨.
• 지금 미8군 안에 위수감옥(*일제 강점기 헌병대 감옥)이라고 일본 시대 때 만든 감옥이 있는데 위수감옥
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복덕방 하시던 분의 증언이 마지막임.

직업 및 활동
<한전 남부 영업소에서 근무했으며 민족청년단 용산지부의 청년단장을 하는 등 동네일에
항상 앞장서서 활동함.>
문_ 아버님께서 당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회사원이었는데, 수도방위 훈련학교도 이수하셨어요. 그 졸업 증명서를 제가 납북
자 기념관에 납북자 유품으로 기증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에 많이 관여
를 하신 거죠, 아버지께서. 무슨 기관이라든지, 동네 청년단이라든지, 안 하신 일이 없
었어요. 아마 지금 계셨으면 국회의원은 못했을망정 시의원은 하셨을 거라고 동네 분들
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62번지에 사셨습니다. 지금은
63번지가 되었어요. 저는 계속 그 근처에 살고 있어요. 고향을 지켰다고도 볼 수 있죠.
그 곳에서 아버님이 태어나고 우리 사남매 중에서 셋이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논밭이
있었고, 복숭아밭도 있었고, 6·25 전까지는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유관순 열사의 묘소
도 이태원에 있었습니다.
문_ 당시 같이 살던 가족들은 어떻게 되나요?
답_ 우리가 사남매에요. 제가 맏이고 밑에 남동생들이 1943년생, 1946년생, 1949년
생이 있었어요. 하나 바로 밑에 동생이 2001년도에 사망했어요. 납북 당시 제가 만 열
살이고, 학교를 일찍 가서 사학년이었어요. 원칙은 음력 7월생이라 4월 이전에만 학교
를 일찍 가는 건데 제가 그냥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대요. 우리 사남매와 어머니가 계
셨고, 삼촌 한 분과 할머니가 계셨어요. 아버지의 형제로는 누님 한 분과 남동생 한 분
이 계셨어요. 지금도 계세요. 같이 살던 작은아버지시죠, 저한테.
문_ 아버님의 성격은 어떠했는지요?
답_ 동네일이라면 어디든 앞장서시고, 동네 아들로 불릴 정도로 좋으신 분이었다고 해
요.

납북 경위
<여러 번 피신하려 했으나 가족과 함께 있어 인민군에게 저항도 못하고 끌려가심. 작은아
버지도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도망쳐왔고, 다시 국군으로 지원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
쳐옴.>
문_ 아버님의 피랍 과정을 보셨는지요?
답_ 아버지가 남부영업소에 근무하실 때 수색에 계셨대요. 그러다가 6·25가 나니까 집
으로 오시는 도중에 동네 공산당, 말하자면 빨갱이를 만난 거에요. 그 당시에는 빨갱이
를 잘 몰랐어요. 6·25가 나니까 빨갱이들이 앞장서 가지고, 우리 아버지하고 그 전에
동장을 지내던 김 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을 제일 먼저 지목한 거예요. 말하
자면 인민청에 고발해서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아버지가 집에 오는 중에 그 동
네 빨갱이를 만난 거예요. 동네 사람이니까 인사만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날 밤에 인
민군이 대문을 발로 차고 총으로 두들기고. 나는 그 소리가 아직도 쟁쟁해요. 한참 뒤에
할머니가 누가 밤에 와서 모질게 문을 두드리고 야단이냐고 삼촌들에게 나가보라고 해
서 나갔는데, 문을 열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들어오는 거예요. 인민군들이 방으로
들어와서 장롱, 이불을 총으로 찔러보고 둘러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그 동안에 피신을 하셨더라고. 대청마루가 있고, 안방이 있고, 그 뒤에 마루가 있
는데 저장고로 쓰는 지하실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모면을 했는데 다음 날도 같은 시간에
또 온 거에요. 그러니까 두 번째도 미리 피신을 하실 수 있었어요.
문_ 그러다가 어떻게 납북이 되신 건가요?
답_ 두 번째도 피신을 하셨는데 셋째 날은 인민군들이 일찍 온 거예요. 그날은 저녁을
일찍 잡숫고 딴 데로 피신을 하려고 하셨대요. 이틀 동안 찾아오니까 목표가 정해져 있
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저녁을 잡숫고 나가시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머리를 썼는지 밤
에 늦게 오다가 일찍이 찾아온 거죠. 문을 안 잠그고 있는 통에 그냥 들어왔어요. 막 일
어나서 가자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수저를 놓으시고 일어나셔서 가셨어요. 어머니 앞에
서 이러고저러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나 봐요. 저도 쫓아나갔어요, 대문 밖으로.
그러니까 동네 빨갱이가 서 있더라고요. 그렇게 가신 뒤에 그걸로 끝이었어요. 아무 소
식도 없이 동네 사람이 불러서 나간 것인 양 나가시더니 그만이더라고요.
문_ 들어온 사람들은 인민군들이었나요?
답_ 네. 들어온 사람은 인민군들이고, 밖에는 동네 빨갱이가 서 있었어요. 동네 빨갱이
라는 사람의 이름은 모르고 얼굴만 알아요. 그 사람의 어머니를 알죠. 그 어머니 별명이
‘오물이’에요. 옛날에는 이름보다는 별명을 많이 썼어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군 모자
쓰고 따발총 들고 누르스름한 군복입고 근데 그 모습이 생생해요. 민청이 우리 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지금의 이태원 시장 근처에 있었거든요.
문_ 끌려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나요?
답_ 동네 마당발이던 복덕방 사장님이 우리 아버지하고 총대라고 불리던 김 씨라는 분하
고 형무소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해요. 김 씨는 연세가 많아서 우리가 잘 모르는 분이에
요. 지금 미8군 안에 위수감옥(*일제 강점기 헌병대 감옥)이라고 일본 시대 때 만든 감
옥이 있어요. 거기를 형무소라고 하고, 그 출입문이 길 건너에 나 있거든요. 지금 현재
도 병사들이 샛문으로 드나들 듯이, 감옥은 안 보여도 쪽문처럼 조그맣게 드나들 수 있
는 출입문이 있어요. 이태원 쪽을 향해서. 앞으로도 아마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없애지
않을 걸로 생각이 되요. 위수감옥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는 복덕방 하시던 분의 증언이
마지막이에요.
문_ 끌려가신 날이 언제쯤인가요?
답_ 할머니 기록에 보니까, 우리가 제사를 음력 5월 27일에 지내거든요. 제사는 살아계
신 날 기준으로 하니까 끌려간 날짜는 음력 5월 28일인 거예요. 양력으로는 7월 13일
이 되더라고. 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시니까 우리 먼저 피난을 가라고 하셔서 어머니하고
우리 사남매하고 고종사촌오빠와 함께 강 건너에 아는 집으로 피난을 갔어요. 그런데,
다시 인민군이 들어왔으니까 있을 필요가 없다 해서 서울로 왔는데 마침 그때 아버지는
어디 피신을 하고 계셨다가 같은 날 집으로 들어와서 며칠 머물던 중 그렇게 된 거야. 수
색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3일 만에.
문_ 가족 중에 납북되신 분이 또 있나요?
답_ 작은아버님도 고등학교 2학년에 이미 의용군으로 끌려갔었죠. 작은아버지께서 좀
약하셔서 끌려가는 도중 폭격이 있었는데 집으로 도망 와서 숨어계셨다고 그래서 지금
까지 살아 계세요. 작은아버지는 아버지가 끌려 나간 후부터는 바깥에 안 나오시고, 밥
도 지하실에서 드셨어요. 그랬다가 수복되고 나서 11월에 국군으로 입대하셨어요. 국
군으로 가서 어느 전투 지역에서 포로로 되었는데, 동네 빨갱이를 만났다고 해요. 그 빨
갱이가 서울 가면 너희 어머님한테 네 안부를 전해준다고 하더래요. 그래 가지고 ‘죽는
건 마찬가지다.’ 라고 생각하고, 밤에 산봉우리 위에서 뛰어내리셨대요. 그런데, 다행히
많이 다치지 않아서 그냥 있는 대로 달렸대요. 어느 산골짜기에 가니까 조그마한 등잔불
같은 집이 보여서 들어가셨대요. 그 집 할머니한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서 생쌀을 한 움
큼 받아 그걸 씹으면서 당신 부대로 찾아오셨다고 그래요. 같은 민족끼리 동족상잔이 아
직도 계속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작은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쓰고 싶
다고 그러세요. 팔십구세예요. 저보다 십년 위이신데 많이 편찮으시긴 하지만… 지금도
살아 계세요.

납치 이유
<동네 빨갱이가 김 씨라는 분과 아버지를 인민청에 고발한 것으로 추측.>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전쟁 시작되고, 동네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어요. 당시는 빨갱이에 대해서 잘 몰랐
죠. 동네 공산주의들이 아버지를 주시하고 있다가,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민청에 고발을
해서 끌려가신 거예요.

납치 후 소식
<동네 복덕방 하시던 분이 아버지와 동네 김 씨가 위수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함.
나중에 사살되었다는 소문이 들렸으나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였음.>
문_ 납치 후에 아버님에 대해 들으신 소식은 있었나요?
답_ 복덕방 하는 분이 우리 할머니한테 직접, 김총대 하고 원일이 하고 형무소로 들어
가는 걸 봤다라고 한 후, 할머니가 민청으로 가서 매일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러 가셨어
요. 일설에는 거기서 총살을 당했다라는 소문도 있었어요. 그럼 시신이라도 달라고 청
하며, 우리가 관과 수의도 다 준비했었어요. 근데 계속 내일 만나게 한다, 내일 준다고
거짓말을 하더니 결국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할아버지의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음.>
문_ 아버님의 납북 후 어떻게 사셨는지요?
답_ 할머니가 모든 집안 살림을 관리하셨어요. 할아버지 때부터 생계는 걱정 안 하고 살
정도가 되었어요. 그전에 장사를 하셨대요. 겨울에는 남포, 청진 이런 곳을 다니시면
서. 예전에는 건어물이 많았다면서요. 그래서 건어물 장사도 하시고 여러 가지 장사를
하셔서… 우리 농지가 말죽거리 안양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가을이면 수확을 해서 일년
농사를 지어 먹기 때문에 식량 걱정은 안 했고, 집이 당시에도 3채 가량 있어서 아버지
가 없어도 생활은 걱정 안하고 살았어요. 근데 당시 아버지 나이가 우리 나이로 스물아
홉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결혼도 안 할 나이인데.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저 하나뿐
이에요. 그래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또 어머니한테 아버지 이야기를 거의 안하고 살
았어요. 어리지만 어머니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죠. 아버지가 이유도 없이 저녁에 끌려
가서 아무런 소식도 없이 수년을 살아온다는 것도 죄송하고. 나이가 들어 보니까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데가 없어요. 아버지의 그 운명을 어디다가 하소연할 데도 없고, 나 혼
자 고통의 시간을 감수했죠. 그래서 파주 납북자 기념관에 아버지 성함이 올려져 그나마
고맙게 생각합니다. 뒤늦은 시간이지만. 항상 제 아이들이나 아버지를 아는 분에게, 아
버지 이름이 국립묘지에는 아닐지라도 납북자 기념관에 올라있어서, 자손으로서 조그
만 위로가 된다구 말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피랍되고 어디서 도움을 받거나 피해상황을 조사하러 온다거나 했는지요?
답_ 그런 것도 없었어요. 전혀. 이산가족 찾기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라고 할머니가 생각을 하고 계시니까 우리도 그대로 따르고 제사를
지내왔어요. 6·25나고 얼마 안되어 구청 어느 과에 아버지가 납북자들로 기록이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납북자 신고할 때 그 기록도 떼어 제출했어요. 동네 사람이 증언을 하
고.

호적 정리
<사망 처리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54년도에 호적 정리가 되었어요, 사망으로. 그래서 큰동생이 호주가 되었죠. 제사
는 납북되고 그 이듬해부터 지냈어요.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있었고, 살아계셨든, 돌아
가셨든 간에 집에 안 들어오시니깐 제사는 어머니 살아 계실 때까지 지냈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우리는 공산당에 동조한 것도 없고, 단지 끌려가서 행방
불명이 된 것 뿐이니까요.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를 실종자라고 하는 정부에게 분노를 느끼며, 납북자로 인정을 하고 납북자 가족
의 명예를 회복하고 이 문제를 국민에게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음.>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이 시대에, 국가가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납북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납북자가 아니라 실종자라고요?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화가 나는
데 국가가 국가다운 역할을 하려면 납북자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군장병들은 현충원에 모셔 인정을 받고 있는데 납북자는 공중에 뜬 사람들이에요. 그
래서 아버지 성함이 납북자 기념관에 올려진 것이 그렇게 고맙고 또 내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국민들에게도 국가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납북자와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선례에 대해 알리고, 교육할 수 있었으면 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아버지’라고 불러보고 싶음.>
문_ 아버님께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아버지 꿈을 꾼 적이 있어요. ‘어머! 정말 아버지가 오셨어요’ 하고 제가 꿈에 외쳤어
요. 아버지 다리에 흉터가 있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꿈에도 긴가민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다리의 흉터를 확인하려고 ‘다리 좀 보세요’ 하며 바지를 들춰보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정말 살아계시면 ‘아버지!’ 하고 불러보고 싶어요. 아버지 소리를 못
하고 살았기 때문에 제가 아버지를 열한 살에 잃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버지한테 안겨보
지를 못했어요. 아버지 소리를 많이 해보지 못했어요. 근데 나도 나이를 먹고 이 세상을
뜰 날이 가까워지니,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나도 아버지가 있었다는 걸 알
리고 싶어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10 납북자-조병욱(증언자-조병소)
관리자
21-09-23 137
209 납북자-윤재희(증언자-윤영자)
관리자
21-09-23 148
208 납북자-이종선(증언자-이오선)
관리자
21-09-23 117
207 납북자-이창두(증언자-이연자)
관리자
21-09-23 123
206 납북자-조규명 (증언자-조규만)
관리자
21-09-17 146
205 납북자-박동규(증언자-박명자)
관리자
21-09-17 139
204 납북자-고재경(증언자-고재철)
관리자
21-09-17 131
203 납북자-이원일(증언자-이홍자)
관리자
21-09-17 120
202 납북자-김광래(증언자-김귀래)
관리자
21-09-17 124
201 납북자-김동섭(증언자-김관희)
관리자
21-09-17 150
200 납북자-유영기(증언자-유방원)
관리자
21-09-17 116
199 납북자-원정용(증언자-원정희)
관리자
21-09-17 172
198 납북자-이재춘(증언자-이효선)
관리자
21-09-17 157
197 납북자-김평묵(증언자-김정임, 김정옥)
관리자
21-09-17 136
196 납북자-장석홍(증언자-장석태)
관리자
21-09-17 177
195 납북자-윤관중(증언자-윤석칠)
관리자
21-09-17 172
194 납북자-정중화(증언자-정연종)
관리자
21-09-17 126
193 납북자-이해일(증언자-이해궁)
관리자
21-09-16 133
192 납북자-김득필(증언자-김화철)
관리자
21-09-16 124
191 납북자-정헌각(증언자-정헌홍)
관리자
21-09-16 150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