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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동섭(증언자-김관희)
이름: 관리자
2021-09-17 12:58:36  |  조회: 150
190429A 김 동 섭 ( 金東燮)

생년월일: 1908년 10월 15일
출생지: 장단군 임진면(현재 비무장 지대)
당시 주소: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1번지 27호
피랍일: 1950년 8월 15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동아일보 총국장 및 이사직
학력/경력: 중앙고 졸업, 일본 메이지대 1년 중퇴/간접적인
독립운동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1녀
외모/성격: 외유내강, 강단 있고 인정이 많음

증언자
성명: 김관희(1945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자의 동업자가 본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인 중에 반동성향이 있는 사람을 고자질 하면 가택 수
색과 아들 찾기를 포기해주겠는 말에 외할머니 집을 신고했고, 외할머니를 앞세워 피랍자의 집으로 와서
끌고 감.
• 피랍자 집에 와서 외할머니가 ‘관희야’ 하는 바람에 문을 열어줘서 바로 붙들려 갔고 이후 어머니와 외할
머니는 사이가 멀어졌음.

직업 및 활동
<동아일보에서 총국장직을 맡으며 후에 이사직을 맡음.>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를 말씀해주세요.
답_ 저는 김관희. 너그러울 관자에 빛날 희자. 1945년 8월 5일. 해방 열흘 전에 태어났
습니다. 납북되신 분은 저희 아버지고요. 김동섭. 1908년 10월 15일, 양력으로. 출생
지는 장단군 임진면. 지금 비무장지대쪽에 있습니다. 북한쪽 비무장지대.
아버지가 외아들이었어요. 아 형님은 계셨는데, 장단에서… 이북쪽에서 사셨으니까 여
기서는 거의 외아들로 살다시피 한 거죠.
아버지가 개나리 봇짐지고 중앙중학교에 입학하고… 여기 내려와서. 그래서 어머니하
고 중매도 송진호 선생님이 중매를 섰어요. 동아일보에 송진호라고 유명하신 사장님이
계셨거든요.
향학열에 불 타가지고 동아일보사에 고졸학력으로 들어 가신거죠.
문_ 증언자의 형제분은 있나요?
답_ 두 살 아래의 동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님이 있었고요. 누님은 재작년에 작고하셨
어요. 저보다 14살이 위니까 당시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여성동맹에 가입하
라고 해서 누님은 부광동에 있는 외할머니집에 잠시 피신해있었어요. 6·25사변 초에는
남자들은 인민군으로 끌려가고, 여자는 여성동맹으로 완장 차고 좌익 활동하라고 그게
아주 심했어요.
문_ 당시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납북 직전에 계속 동아일보에서 20년간 총국장, 취체역이라고 하고요, 지금으로 치
면 중역에 이사 정도였어요. 직전에 동아일보 총국장직을 사표내고 떠났는데, 그 대신
에 동아일보 취체역하고, 주주, 그 신분은 그대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휴전협정 끝나
고 나서 그때 이사직에서 해임이 됐어요. 이사직은 납북된 상태에서도 3년 이상 유지가
됐었습니다. 학교는 명치대 1년 중퇴라고 하더라고요. 일본 메이지 대학 1년 중퇴. 중
앙고등학교 졸업하구요. 아버지는 사회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신문사라는
게, 기자들도 그렇고 우리나라에 해방초기에는 이렇다 할 재벌기업도 없었고, 화신백
화점이 유일한 큰 거고, 제당회사 이런 것도 해방 이후에 자본을 투자해서 한 거였기 때
문에 해방초기에는 이렇다 할 큰 회사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문사의 영향력이 컸습니
다. 그래서 동아일보에서 이사장이 되면요, 심지어는 경찰서장 추천도 하고요, 그렇게
뭐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언론의 파워가 컸지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은 안 했는데, 동아
일보가 그 당시에 해방 이후에 반독제와 일제시대는 반일기조의 언론논조를 많이 폈고
반일투쟁을 했어요. 아버지가 동아일보의 살림살이를 다 맡고 그거 때문에 또 옥살이까
지 하고 그랬어요.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 꼭 뭐 로비자금을 대주거나
간도에 가서 싸우고 그렇게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동아일보에서 중추적인 역
할을 했다고 볼 수 있죠.

납북 경위
<정치보위부에서 세 명이 권총을 들고 찾아옴, 현관문이 열리자 아버지하고 바로 눈이 마
주쳐 숨지도 못하고 바로 수갑을 찬 채로 끌려 감.>
문_ 어떻게 납북됐는지요?
답_ 8월 15일 날 아침이죠. 9.28까지 한 달만 참았으면 됐는데 운명의 장난으로 말이
야. 그 당시에 너무 어려가지고 제가 문을 열어줬다고 그러는데… 외할머니를 앞세우고
정치보위부에서 운전병 하나, 정치보위부원 둘, 검정 장다리 같은 세 명이 권총을 들고
왔었대요. 우리 청파동 집에 축대가 있었어요. 집이 좀 큰 편이었고, 일제 적산가옥이었
습니다. 그때 (밖에서) 외할머니 목소리가 나니까 마당에서 놀던 동생하고 반가워가지
고 바로 문을 열었어요.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오는 소리에 아버지도 문을 내다봤지요.
우리 집에 그 당시에 집안 살림살이를 도와주는 가정부 같은 어린애가 문을 열고 나가는
데, 마당에 있던 우리 형제가 더 반가워가지고 먼저 대문을 열어줬어요. 걔가 나가면서
현관문을 여니까 바로 정치보위부원하고 눈이 마주친 거예요. 숨어서 내다보던 아버지
하고도… 그러고는 꼼짝도 못하고 체포 당한 거죠 뭐. 바로 수갑을 채우고 권총을 겨눴
기 때문에 피할 틈도 없었고, 여름 반바지에 모시 웃도리 차림으로, 어머니가 그날을 귀
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고, 어머니가 친정엄마를 많이 원망했어요. 왜 그 사람들 권총
들고 협박하여 우리 집까지 와서 납북하게 만들었냐며. 그때 아버지가 반바지 차림에 노
타이 차림으로 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좀 제대로 입고 가게 해줄 수 없겠느냐?’
고 했더니, ‘잠깐이면 됩니다.’ 이렇게 하고 갔어요. 수갑을 채우고 갔어요. 그날이 바로
8월 15일이었어요. 8월 14일 날 아버지가 뭔가가 예감이 안 좋았는지. 이런 얘기를 했
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내일은 무슨 일이 날 것만 같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
암만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 그 말이 유언같이 되어버렸어요. 그것이 예언처럼 그날
따라 내려오셔서,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애가 나가면서 현관문을 활짝 열고, 대문은 마당
에서 놀던 우리 형제가 빨리 열고 피할 틈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항상 천장에 올라가서
주무셨어요. 사다리도 놓고 이웃집으로도 도망갈 수 있게 그랬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그 외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죠.

납치 이유
<동업자가 자기 아들이 의용군에 붙잡혀 갈 것을 면하기 위해 언론사 중견인이며 지식인
인 아버지를 고자질하여 잡혀 가게 함.>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아버지가 그때 (동아일보) 나오면서 자동차 모터상을 했는데, 동업했던 이◯하라고
있어요. (이◯하를) 어머니가 원수 같이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외할머니집 근처에 살았
는데 그 사람 집에 가택수색이 나오게 됐다는 거야. 그 사람 아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갈
나이니까 마루 밑에 숨어 지냈대요. 그런데 가택수색이 나오면 잘못하면 걸릴 수가 있으
니까. 이 사람이 엉뚱한 꾀를 내서 언론 중견급에서 반동성 있는 사람 신고하면 더 이상
가택수색 안하겠느냐고, 그럼 모든 걸 다 말하겠다고, 거기서 그랬대요. 이 사람이 거기
에 넘어갔는지 뭔지 나중에 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당시 아버지가 돈 200만원을
동업하는 이◯하한테 빌려줬다고 그러더라고요. 200만원을 안 갚기 위해서 그래서 외
할머니 집을 신고한 거지요. 그 대신 가택수색은 면하게 되고. 그런 게 있으면 너희 집
은 수색 안하고 네 아들이 어디 있는지 더 이상 불문하겠다고 그래서 외할머니 집에 갔
죠, 근처에 있던.
대지가 이십평이고, 건평이 열평되는 외할머니 집을 아버지가 사줬다고 그러더라고요.
외할머니는 어려운 편이었죠. 아버지가 동아일보에 오래 계셨고, 그 당시에는 언론기관
이 상당히 보드라운 편이었어요. 그래서 재산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집을) 사줬나봐요. 그렇게 덕을 본 사람이 물론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인민
군이) 와서 총으로 그렇게 서슬 퍼렇게 하고 있으니까, 애처롭게 보이게 하려고 그래야
자기 목숨에 위해가 안 갈 거 같아서 없는 소리 해가며, 콩나물 일도 하고 나가서 채소도
갖다 팔고 일부러 우는 소리를 더 했다는 얘기예요. 외할머니가.
그렇지 않고 사위가 집도 사주고 틈나는 대로 도와주는 좋은 사위라고 그랬으면…. 그러
지 않아도 언론사의 중견인이니까 동아일보라고 하면 북한에서 가장 싫어하는 신문사였
고 그 당시에는 방송도 없었어요, 신문사 외에는… 특히 동아일보를 더 싫어했다고 하
더라고. 하여튼 군경 이상으로 싫어하는 대상이었던 데다가 이게 이렇게 되니까 악질이
구나, 이렇게 장모도 학대하는 반동이 있구나 하고 외할머니를 지프차에 태워서 그 사
람(이◯하)은 중간에서 내리게 하고, 외할머니 집만 안내해주게 하고 내리고 권총 들고
왔으니까… 우리 집에 와서 외할머니가 ‘관희야’ 하는 바람에 우리 형제가 문을 열어줘서
그게 빌미가 되서 바로 붙들려 가셨는데, 그래서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그 후에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외할머니한테 어떻게 된 경위인가 물어 보시니까 자기도 후회스럽다
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왜 그때 없는 소리를 하고, 형편이
어려웠던 것처럼 얘기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해서 사위와
이렇게 헤어지게 하고 가슴을…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우리 집안에 내려주게 했느냐
고…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외할머니는 70세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가서 문상은 했
죠. 한 5~6년간은 거의 담을 쌓고 지냈어요. 그런 비극이었어요.
문_ 그러면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서 아버님한테 같이 가자고 하던가요?
답_ 정치보위부에서 왔다고 그 한마디 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신고가 왔으니까 잠깐
조사 좀 할 게 있소. 더 이상 얘기 할 틈도 없었대요. 어머니가 옷 좀 갈아입고 갈 수 없
느냐고 하니까 수갑을 채우더래요, 바로. 나오니까 수갑 좀 안하고 갈 수 없냐 하니까
대꾸도 안하고 빨리 갑시다. 이건 뭐 그냥… 외할머니한테서 들은 악질 반동이라는 의식
이 있어가지고요.

납치 후 소식
<을지로 어디쯤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확인은 하지 못함.>
문_ 납치 후 아버님에 대한 소식은 들었는지요?
답_ 모르죠. 신기루같이 사라진 거죠. 끌려가기 전에 아버지보고 가라고 많이 했습니
다. 아버지만이라도 피난가라고. 그 후에 어머니가 수소문해서 알게 됐는데, 을지로로
끌려가셨다더라고요. 그런데 확인은 전혀 못 해봤어요. 얘기를 들어보면, 가다가 귀찮
거나 폭격이 오면 일제히 숨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러 번 하다보면 귀찮아지고
하니까 전부 나란히 세워놓고 죽이기도 했다고 특히 못 걷는 사람들, 그리고 맨발로 걷
게 했대요. 도망을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신발을 처음에 연행 당시에는 신발이 다 있었
지만, 가다가 다 신발을 벗겨 맨발로 아주 잔인하게 납북을 했대요. 춘원 이광수 선생도
가다가 사살 당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여튼 어머니가 서울 안에 어디 계시는 줄 알고, 정신을 가다듬고 일본 치하 때 투옥 건
물로 악용되었던 동양척식회사, 그 앞에 가셔서 계속 서성거렸는데, 차마 거기가 드높
은 아성처럼 보여 가지고 … 얼씬도 못 하게 했대요. 혹시나 해서 그 앞에서 매일 시간을
보냈대요. 이 쪽 사람을 찾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니가 그 후에 어머니의 시집 조카, 작은 사촌 형, 형수가 빨갱이였대요. 그래서 거기까
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붙들려갔는데 혹시 그쪽 계통이니까 그런데 당할 사람은 당해
야죠 이렇게 말했다니 사상이라는 게 그 당시에 한 번 물들면 빼도 박도 못하게 아주….
지금의 보수 우익이나 진보 좌파하고 그 이상의 굉장한, 사실 그 빨갱이 조카사위한테
매달린 게 아무도 접근할 수도 없고 알아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빨갱이 조카사위
가 이따금 (우리) 집에 묵고 갈 때 좌익이 어떻고 우익이 어떻고 언성을 높였대요. 6·25
터지기 전에도. 그나마라도 그 사람 생각이 나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나 해서 비록 사상은 완전히 다르지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데 한다는 말이 당할 일
이면 당 해야지요 이런 식으로 했다고, 그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쓰러질 것 같았는데,
그 양반은 결국은 천벌을 받았는지 폭격 맞아서 죽고 그러고 조카딸은 북쪽으로 갔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붉은 사상이 있어서 경찰에 한 번 연행됐었는데 그 당시에 아버지가
청장에게 동아일보 중역정도 되면 그 정도 힘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수도청장에게 간청
을 해서 풀려주게 한 일조차도 있었다는데, 배은망덕을 하는 그래서 쳐다보기조차 징그
러워서 몸서리를 쳤다고 하더라고요.

남은 가족의 생활
<대구로 피난 가서 어머니가 고춧가루 장사 등을 하여 생계를 유지함.>
문_ 남은 가족의 생활은 어떠했나요?
답_ 제가 기억나는 거는 아버지가 납북되고 나서, 그 다음해 1월 4일 날 1.4후퇴 때 기
차타고 어머니, 동생, 누님하고 넷이 어렴풋이 열차에 탄 기억은 납니다. 워낙 고생스러
웠어요. 누나는 아버지가 납북된 후에는 어머니와 같이 살았죠.
6·25때 한번 당했기 때문에 1.4후퇴 때 피난 간 거예요. 이거 또 이렇게 적치하가 되면
무슨 고통을 당 할지 모른다 해서 왜냐면 6·25 당시에도 9.28 수복 한 달을 못 참아가
지고 붙들려 간 건데. 그 당시 8.15 전에도 청파동 언덕배기에 약간 어려운 지역에 사는
어떤 청년이 쌀 포대자루 빈 가마니 두 개를 들고 와서 강제로 막 들어와서 이거 어려운
사람들 도와줘야 되니까 쌀 있는 대로 내놓으시오 하고 막 들어와서 작은방에 있던 쌀을
몽땅 가지고 갔다고. 겁이 나서 잘못하면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 당시에는 무법
천지가 돼가지고요.
대구에 피난 가서도 어머니가 고춧가루 장사도 하고, 그런 거보다도 주인집 아들하고 나
하고 싸웠는데, 그러면 어머니가 쫓겨날까봐 잘못한 게 없는데 두들겨 패던 생각이 나
요. 엉덩이를 막 때리면서 가서 사과하라고 그랬던 생각이… 그게 억울해서 막 울던 생
각이 나고, 방촌둑에서 잠자리 잡고 놀던 생각도 나고… 일곱 살 때 피난을 간 거니까
요. 아홉 살 때 올라왔습니다. 대구 삼덕국민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 마쳤어요. 이후
에 다시 원래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집에 올라와보니 엉뚱한 사람이 와서 차지하고
살더라고요. 그 사람 내보내는 데도 삼사일 걸렸어요. 여러가지 입증을 해야되니까. 그
당시에는 무법천지고 주위에다 인증을 받고 겨우 며칠 만에 내보냈다고 하더라고요. 그
리고 숨겨놓고 묻어놓았던 아버지의 경리서류, 뭐도 있고 했는데 다 없어졌다고 하더라
고. 누가 팠는지는 모르지요. 삼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까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은 하셨나요?
답_ 대한적십자사에 실종신고하기 전에도 계속 알아봤어요. 그런데 이산가족 찾기는 못
했어요. 할 수가 없었죠. 워낙 세월이 흘렀고, 외삼촌이 그 당시에 6·25전에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배우로 날리시던 김승호, 이해랑 그런 분들하고 같이 활동하던 연극배우였
어요. 이◯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 이름이. 그 당시에 사회주의 사상이 지금의 공산주의
랑은 다릅니다. 순수한 사회주의 사상의 문화에 심취해서 월북했어요. 근데 북한에 가
서 인정을 받아서 인민배우가 됐다고, 한때 최고 인민배우였어요. 그래서 그분이 외할
머니 돌아가시기 직전에 판문점 시찰까지 나왔어요. 그게 국내 언론 신문에도 잠깐 나왔
어요. 그래서 우리가 금강산 개방 시 배타고 갔을 때 북한 가이드한테 동생이 물어봤어
요. 이◯이라는 분 아느냐고. 그분 돌아가셨다 최근에. 어떻게 아시냐 했더니 북한 연극
계의 별이 떨어졌다고 대서특필됐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분의 아들이 거기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이산가족으로 등록할 수가 없지
요. 그런데 그분이 제1차 이산가족상봉단으로 왔어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만났어요. 그
당시 상봉단 구성이 북한에서 성공한 고위층들이 왔어요. 그 비디오에도 어머니하고 외
삼촌이 상봉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외삼촌한테도 물어봤답니다. 그랬
더니 그 양반이, 굉장히 조심을 하더래요. 마이크가 있나 없나. 그러더니 이렇게 고개를
젓더래. 혹시나 녹취가 될까봐. 감시체계가 철저한 사회니까.
문_ 정부가 지원해 준 것은 있나요?
답_ 없었어요.

호적 정리
<실종신고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실종신고가 되어 있어요.

연좌제 피해
<증언자의 동생이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증언자의 누나는 해외 출장에
필요한 여권이 안 나와 보증을 세워야 했고, 증언자도 군수품 수출에 필요한 보안허가가
안 나와 보증을 세워야 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있었죠. 우선 저희 동생이 47년생인데, 그 당시에 졸업하면서 해군사관학교를 지
원했어요. 동생 친구랑 둘이서 지원했는데, 같이 지망한 고교동기생은 해군소장으로 함
대사령관까지 성공했고, 동생은 필기시험은 합격했는데 최종면접에서 사상검사에서 떨
어졌습니다. 연좌제에 의한 사상검사죠 뭐. 면접에서만 떨어진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다 직감적으로 느꼈죠. 우리 누나가 여성동아 기자하다가 나중에 차장도 하셨는
데, 여성동아 기자 때 처음으로 홍콩으로 해외 취재를 갔었어요. 그 당시 1970년대 초
에는 기자, 특히 여기자가 해외로 취재 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거였어요. 여권을 안
내주는 시대였어요. 광화문에 있는 외교부에서 기자인데도 여권이 안 나왔어요. 아버지
때문에. 동아일보 편집장인가 누가 보증을 해주어서 한참 후에 비자가 나오는 바람에 출
발이 좀 늦어졌어요. 저도 효성물산에 있을 때 군장비를 취급했었거든요. 인도네시아
군수품, 헬멧 등 여러가지 군장비를 수출해야 되는 데 보안허가가 안 나와서 저도 예전
에 동아일보에 근무했을 때 알게 된 사장의 남동생이 보증을 서줘서 2급 기밀인가를 받
았어요. 그니까 세 사람이 다 연좌제 피해를 한 번씩 입은 거예요. 동생이 가장 큰 피해
를 입은 셈이죠.

정부에 바라는 말
<나중에 6·25 납북자 가족이 떳떳하게 보상을 받길 기다림.>
문_ 정부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생사확인은 할 수가 없는데, 나도 황교안 총리시절에 납북가족으로 인정을 받아가
지고, DNA 채취까지 했습니다. 체취해서 등록한지 5년이 된 거 같은데 유해가 어디에
묻혀있을지, 국군전사자들은 전투지마다 백마고지, 동해안, 중부전선에도 있다는데,
우리 납북자 경우에는 어느 산천에 가다가 황해도 갯벌에 쓰려져서 그냥 묻어 버렸는지,
또 평안도 갯벌 논두렁에 묻혀있는지, 함경도까지 가서 처형당해서… 그걸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DNA등록을 했어도 제 생애에는 불가능할 거 같습니다. 다만, 황교
안 총리가 있어서 파주에 위령탑을 세워주고 납북자 명비들을 일일이 다 해주고 검색을
해보면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게 정신적인 위안이 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어쨌든 내년 총
선에는 보수 우익이 승선을 해서 그나마도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고 그리고 나중에 뭔가
떳떳하게 6·25 납북자 가족이 보상을 받을, 비록 나 때는 못 받더라도 내 후손이 받을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죠. 뭐 지금 금전적인 보상, 명예를 찾는 보상은 현실적으로 지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의 자유 안보체제가 무너지려고 하는데, 더불어 민주
당이 납북자를 실종자로까지 북한에 아부를 하면서 체제를 교란하려고 하는 이런 정권
에서 무슨 기대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이런 활동은 무의미하고 아무리 국회
에 계류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보수우익 야당의 입장을 생각하는 각오를 갖고 서
로 뭉쳐서 나갔으면 합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불행했던 상처는 다 잊으시고, 언젠가는 저 세상에서 기쁜 마음으로 같이 후세를 살았으
면 하는 바람임.>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아버님은 내가 볼 때는 뭐, 생사확인 할 때는 지나갔고, 살았어도 연세가 이미 고인
이 한참 될 연세니까. 계속 영면하셔서 극락세계나 천당에 하여튼 평온한 곳에서 불행
했던 상처는 다 잊으시고, 저도 곧 따라갈 나이가 됐으니까, 언젠가는 저 세상에서 기쁜
마음으로 같이 후세를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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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납북자-이재춘(증언자-이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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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157
197 납북자-김평묵(증언자-김정임, 김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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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136
196 납북자-장석홍(증언자-장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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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176
195 납북자-윤관중(증언자-윤석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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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171
194 납북자-정중화(증언자-정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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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7 126
193 납북자-이해일(증언자-이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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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132
192 납북자-김득필(증언자-김화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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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124
191 납북자-정헌각(증언자-정헌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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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6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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