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고재경(증언자-고재철)
이름: 관리자
2021-09-17 15:02:35  |  조회: 153
190522A 고 재 경 ( 高再敬)

생년월일: 1903년 8월 3일
출생지: 경기도 신도면 효자리
당시 주소: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 202의 4호
피랍일: 1950년 7월 8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경찰 경부, 대광 종합상사 총지배인
학력/경력: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졸업
직계/부양가족: 모, 배우자, 자녀 4남 2녀
외모/성격: 돈암동의 유명인사로 ‘고경부’라 불림

증언자
성명: 고재철(1934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일제 강점기에 경찰일을 하였고, 이에 대한 증거를 없애기도 하며 피난 준비를 하던 중이었음.
• 모든 가족들이 점심식사를 하려 모여 있는데 완장 찬 이들이 에워싸고 끌고 감.
• 당시 같이 납북된 인사 중에는 안재홍(安在鴻), 조소앙(趙素昻)이 알려져 있음.

직업 및 활동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졸업 후 경찰에 응시. 이후, ‘경부’ 직위까지 승진하
였으나 해방되기 6개월 전 사퇴하였고, 종로에 위치한 대광 종합상사의 총지배인 역임.>
문_ 당시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경찰에 있었죠. 쉽게 말하면. 일제 강점시기에 아버지가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나
와서 그 당시에 생활에도 그렇고 살기 위해서도 그렇고 일제 강점기의 경찰. 그러니까
흔히들 과거사 얘기하면 친일파라고도 얘기하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조선 사람들한
테 생활의 권익을 도움을 주기도 하기 위해서 경찰 간부에 응시를 해서 합격 되어서 경
찰 그 당시에 경부까지 승진됐었죠.
치안보안 담당으로 계셨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 6개월 전에 2월에 사퇴하고.
그 다음에 해방될 때 까지는 잠시 6개월 동안을 일제 강점시기였기 때문에 별 다른 직업
없이 그냥 집안일을 돌보시다가, 해방되고 나서 종로 지금 현재 제일은행 본점이 있는
종로 서울빌딩에서 대광 종합상사라고 거기 총 지배인으로 계시다가…
거기가 대광 택시라고 하는 택시 사업하고 그 다음에 무역, 그 다음에 운수사업, 그 다
음에 주류 그 당시에 주종 원료로 해가지고 이런 술 같은 것 만드는 그 회사에 거기 회장
이라는 홍◯표 씨라고 하는 분하고 연고가 되가지고 그 회사 총지배인으로 있었습니다.
경찰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때 당시는 초창기 아닙니까. 그래서 내무부에 청탁으로 경
찰조직 및 현재 고문관으로 계셨죠.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고문관으로 경찰 조직에 이바
지 했죠. 한국 해방된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해방되고 나서 경찰 조직에 고문 역할을 했
었습니다.

납북 경위
<피난 갈 준비를 마치고 자택에서 점심 식사를 하던 중 2명의 인민군과, 2명의 내무서
원, 빨간 완장을 착용한 2명의 민간인에 의하여 끌려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내가 중학교 3학년에 제일 맏이고, 나도 그때 어리고 공산주의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학교 다니다가. 그날이 아마 일요일이었어요. 돈암동에 지금 없어진 동도극장이라
고 있었어요. 그게 돈암동 대로변이죠. 거기가 돈암동 전차 종점이 있었고 미아리 거기
넘어가는데, 거기서부터 막 물밀듯이 피난민이 몰려오는 거야. 그러면서 지나가고 하여
튼 군용 지프차하고 트럭에서 휴가나 외출 나갔던 국군장병들 긴급히 귀대하라고 큰 확
성기로 막 떠들어. 사람이 그러면서 미아리 거기부터 돈암동 대로에 피난민들이. 우마
차, 그때 트럭이 흔하지 않을 때야. 그 마차에다가 짐을 싣고 의정부나 포천서부터 피난
민들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돈암동 대로로 막 쏟아져 오는 거야. 그러면서 방송에서도
이제 긴급 뉴스로 나오고. 그래 가지고 6·25날 걔네들이 전부 쳐들어오면서 28일 새벽
에 서울 딱 점령했지.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시간 없이, 피신할 시간 없이, 딱
점령했죠. 그때 우리 할머니도 계셨지만 우리 집안 때문에. 아버지가 사상적으로 걔네
들한테 반동분자니까. 미리 좀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주 아쉽죠. 우리 가족을 생
각하는 바는 행여나… 그러다가 완전히 7월 초순 때, 아버님이 옛날 일제 때에 경찰관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예복이라던가 예법도나 긴 예신용 칼 같은 것, 평소에 차고 다니
던 칼 4 자루가 있었어요. 그걸 이제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런 거를 전부 찾
아서 나하고 아버님하고 둘이서 가마솥 아궁이에다가 그 물건을 일제 때 남겨놓은 그런
칼이라던가 그런 기념품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르면서 다 폐기 시켰죠. 그때 아버님하
고 나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폐기하던 모습이 아직 떠오르죠.
그러고 나서 아버지가 피해야 되잖아요? 7월 2~3일 동안 완전히 다 폐기시키고. 그러
고 7월 8일쯤 완전히 피신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그리고 마지막 12시 반쯤에 대청마루
에서 식사를 했어요. 날씨가 더웠거든요. 제 기억에 7월 초순인데, 그게 3일인지 8일인
지 그게 알쏭달쏭 해요. 그러니까 7월 3일 날은 과거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폐기 시키
고, 납치당한 날이 7월 8일인가 그랬습니다.
7월 8일 인민군 둘 하고 그러니까 따발총하고, 딱궁총이라고 하는 총으로 무장하고 그
다음에 걔네들이 말하는 내무서원, 그리고 빨간 완장 찬 두 사람. 그렇게 여섯 사람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마지막으로 피신하려고 준비해서 점심 잡숫고 나가려고 하는 찰나
에 걔네들이 들어와서 끌고 갔죠. (끌고 가도) 아버지가 뭐라고 얘기를 할 수가 없었죠.
워낙 여섯 명에 둘러 싸여가지고 붙들려갔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서 우리가 말하는 빨
갱이 세상이 됐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죠. 그리고 우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죠.
공포에 질려 가지고 나는 마당 내려가서 아우성 치고, 아버지 발을 잡아당기면서 ‘아버
지 아버지’ 하면서 울면서 매달렸지만. 그때가 중학교 3학년이라고 할지라도 막 그냥 내
가 발버둥을 쳤죠. 내무서원 두 명하고, 인민군 두 명하고, 완장 찬 두 명하고 여섯 명.
내무서원이라는 게 요새 말로는 경찰관 그렇게 네 명하고, 완장 찬 민간인 두 명 그렇게
여섯 명이죠. (아는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워낙 공포에 떨어서 붙들려 가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라 그 어른을 내가 알겠어요? 동
네 사람이라던가 아니라던가. 그 전에 무슨 보도연맹이라고 해 가지고. 그 빨갱이들 공
산주의자들이 자수해서 만든 기관이 보도연맹이라고 있었어요. 걔네들이 아버지에 대
한 이력은 너무나 잘 알죠. 돈암동 지역에서 유명인사로 있었어요. 그리고 안재홍, 조소
앙 그분은 잘 아시죠? 조소앙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했던 분이고, 안재홍은 6·25사변
전에 군정시대에 군정 장관까지 지냈던 분이니까. 그분도 같이 납치당했죠.
문_ 그 외에 같이 납북된 분도 있는지요?
답_ 최◯규 씨라고 있는데 그 가족은 지금 다 미국에 이민 가고 그 집 형제들하고 나하고
형제 같았지. 제일 친한 것은 성신고에 다니던 나랑 동갑내기가 있었어요. 고등학교까
지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소위 짝꿍으로 지냈어요. 그 집 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
하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이 납치당했어요. 그게 최◯규 씨인데 그분이 여기 등록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최◯규 씨 부인하고 저희 어머니하고 왕래하며 서로 의지하며 형
제같이 지냈습니다.

납치 이유
<돈암동 지역의 소문난 유지로서, 일제 강점기에 경찰 간부였기 때문에 일급 반동분자로
알려진 것을 원인으로 추정.>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아버님이 이제 ‘아, 세상이 바뀌었구나. 나는 어차피 걔네들한테는 죽임을 당하겠구
나.’ 하고 완전히 피신하려고 보따리를 준비하고 이제 마지막 점심을 한 끼 잡수시려고
그때 점심시간에 대청마루에서 점심을 잡수시는 도중에 아까 얘기한 그때 인민군이 우
리 집에 쳐들어 온 것을 처음 봤어. 아주 완전히 인민군 노란 그 군복을 입고 내무서원은
파란 거야. 아주 파래. 모자 넓은데다 파란색 내무서원하고 인민군은 복장이 달라. 아주
뚜렷한 것은 노란 복장의 인민군 두 사람하고 딱궁총이라고 있지? 그리고 따발총 이거
를 무장을 하고 내무서원은 옆 춤에 권총을 차고, 내무서원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 경찰
관이야. 걔네들 말하는 내무서원하고 인민군 둘하고 민간인이 빨갱이라 하는 빨간 완장
을 차고 이게 도합 여섯 명이 제 집을 둘러싸고 집을 샅샅이 뒤지는 거야. 안방이고 장롱
이고 지하실이고. 증거물도 안 나오겠어? 나오겠죠. 일제 때 아버지가 했던 거 그런 등
등이 나와. 아무리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서 납치당하기 전에 미리 폐기한 것도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나머지는 집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또 나온 게 있죠. 아이구 그 큰집에 물
건이 많은데 안 나오겠어요? 걔들은 또 나름대로 뒤져가지고 그래 가지고 아버지를 대
청마루에서 딱 잡고 포위해가지고… 근데 그 상황은요 벌써 아주 그 할머니 어머니 나뿐
만 아니라 내 동생 다 질려가지고 어디다 항의할 수도 없어. 나만이 아버지 붙잡혀 갈 때
아버지 다리 잡고 엉엉 울면서 그런 일이 있었지. 이후에는 면회 할 생각도 못하고 면회
안됐을 것 아니에요. 어머니, 할머님도 국립도서관까지 갔다가 일절 면회 못 하니까. 그
때 삼촌이 한 분 계셨어요. 작은아버지하고 저하고 국립도서관에 가니까 반동분자 가족
이 무슨 면회 오느냐고 말이지. 아주 일급 반동분자다 이거야. 이놈이 죽일 놈이다 이거
야.
끌려가는 것을 다 봤죠. 그게 왜냐면 6·25날 새벽에 삼팔선 넘어서 오는데 벌써 이미
동틀 적이니까 막 쳐들어오니까. 6·25날 이미 벌써 의정부까지 쳐들어왔대. 그쪽에 살
던 사람들이 그냥 뭐 우마차에다가 짐을 싣고 아우성을 치면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이
제 지금 돈암동에 태극당이라고 있습니다. 태극당 제과점 골목으로 들어가면 성신고로
들어가고 큰 길이 있죠. 지금은 전철역이 되어있죠. 거기가 위에 전차 선로에 전차가 다
녔었습니다. 거기로 해서 삼선교로 지나가는데 아주 굉장히 사람이 꽉 찼었죠. 그러니
까 이제 임진왜란 때 역사에서나 봤지. 굉장히 이게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구나 군용 지
프차 오고 가고 하면서 방송에서도 휴가 중이나 외출 중에 있는 군인 장병들 긴급 귀대
하라고, 그래서 이제 아 난리가 났구나 그러고서 6월 28일 벌써 탱크가 인민깃발에 만
세 부르고 한 쪽에서 28일 새벽에 서울 점령해버린 거야. 아버님이나 저희 가족이 한 발
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원망하는 게 뭐냐. 이승만은 벌써 27일인가 비행기 타고 내려가면서 서울시민
들 안심해라 이런 방송이 나오고. 대부분 약삭빠른 사람은 한강을 넘어갔죠. 피신해서
한강을 내려갔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서울에 주저앉은 거죠. 웬만한 사람은 다 잡혀
가고 죽었고 그랬죠. 방송 믿고 안 내려간 사람도 있고. 우리 아버지는 벌써 사상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꼈죠. 걔네들한테 아주 찍혔죠. 빨갱이들한테 자동적으로 벌써 일급
명단에, 소위 그 살생부에 올라가 있었던 거죠.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서울 점령하면서
세상이 바뀌니까. 자동적으로 밀고할 것도 없이 벌써 이미 성북구 돈암지역에서는 안재
홍, 조소앙, 그 이상 우리 아버님 뭐 몇몇 사람, 또 최◯규라고 있어요. 그 사람도 같은
날 같이 잡혀갔는데, 몇몇 사람들 돈암동에서 알려진 인사들은 다 잡혀간 거죠.

납치 후 소식
<을지로입구에 위치한 국립도서관에서 조사 받았으며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것까지는 확
인이 되었으나 면회가 거부되었고, 이후 소식은 알 수 없음.>
문_ 납북 이후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그 당시 돈암동에 살던 안재홍, 조소앙하고 같은 날 벌써 납치 되셨을 때부터 아버
지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납치당했으니까 경찰서로 끌려갔을 것 아니에요. 그 경찰서
가 오늘날 성북경찰서에요. 성북내무서. 을지로 입구에 있는 국립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게 정치범 수용소가 국립도서관이야. 을지로에 있고 납치당한 사람, 정치적으로 납치
당한 사람은 거기에 다 감금되고 서대문형무소로 이행되면서 조사받고 했지. 그 이후에
들은 건 거기까지만 알고 면회도 일체 안 되고 성북경찰서 내무서 아닙니까? 거기 있다
가 국립도서관 간 것 아닙니까? 국립도서관에 수용, 감금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
면서 오고 가며 조사를 받았을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북내무서에 갔다가 정치범 수용하고 있는 을지로입구에 국립도서관
으로 갔다고 해서 거기로 찾아갔죠. 거기서 수용된 것까지 확인됐죠. 그 후 서대문형무소
에 있는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그 이후에는 모르죠. 그 이후에는 자동적으로 9월 28일 서
울이 수복되면서 다 이북으로 한 많은 미아리고개 거기 임진각에 사진 있지만 그거 아주
똑같아요. 걸어서 납치한 거야. 그거 아주 똑같아. 그렇게 해서 납치한 거야. 피난가면서
아주 그냥 뭐 포기 한 거죠. 그렇잖아요. 그걸 어떻게 해. 그거는 전체적으로 국립도서관
에 정치범 수용한 사람은 거의 다 함경도 아니면 평양도로 끌려갔다는 걸 다 알고, 국립
도서관에서 정치범들 취조받고 조사받고 했잖아요. 서대문형무소에 수용을 하면서 그렇
게 했겠죠 뭐. 국립도서관인데 거기서 뭐 그 많은 사람 수용을 했겠어요. 서대문형무소에
서 수용을 하면서 끌어다가 조사 받은 데가 바로 국립도서관 자리죠. 지금 롯데백화점 자
리야. 국립도서관 문 밖에서 그 사람들 다 그냥. 그걸 자세히 얘기를 할 수가 없었던 게.
우리 집이 다 압수당해서 끌려 나가고. 우리는 북한산 아래 효자리에 피난 갔었고 나중에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이제 이북으로 끌려갔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남은 가족의 생활
<전쟁 후 작은아버지에게 도움 받고, 이후에는 되찾은 자택에 남는 방을 세를 주며 어머
니 홀로 6남매를 키웠음.>
문_ 납북 이후 가족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결국은 7월 말일에 집에서 다 나가라고 해가지고 쫓겨났죠. 역사입니다, 이게. 그
나라 정부에 반대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몰수당했죠. 그래서 집을 내놓고 나갔
죠. 인민군 일개분대 집이 그 집이었지. 돈암동 집이 거기가 한 150평 대지입니다. 그
집이 한옥집인데 7월 말일쯤 7월 한 28일쯤이에요. 우리 집을 내놓고 나갔죠. 다 그냥
몸만 나간 거죠. 아주 질려서 가져라 하고 우리는 나왔죠.
세상이 바뀌어야할지를 어디서 느꼈냐하면 8월 20일쯤 됐어. 8월 20일부터 멀리서 말
이야. 대포 소리가 꽝 소리가 나. 그게 인민군이 이미 낙동강까지 쳐들어왔다고 자랑을
하는데, 웬일인지 그냥 대포소리가 꽝 터지고. 그게 바로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을 온
거야. 인천 상륙할 때 인천 상륙하는 항공모함에서 대포를 서울에다가 쏜 거야. 나는 벌
써 그걸 들었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니들 망한다, 니들 쫓겨나가겠다. 왜냐면 그렇게
한 번 사격으로 서울에 대포를 쏘면서, 군함에서 대포를 쏘는 게 서울에 오는 거야. 그
래서 서울의 어느 지점에서 대포가 터질지 몰라. 이것도 또 공포야. 이걸 내가 왜 얘기
하느냐면, 나는 우리 어머님하고 우리 가족들은 구파발 효자리에 가 계셨지만, 작은아
버지 집에 잠깐 있다가 저기 지금 고양군 효자리라고 있어요. 북한산 아래에 구파발에서
북한산 가는데 그 쪽이 우리 할머니 고향이에요. 그 쪽으로 내가 피난 갔었죠. 효자리가
북한산 아래 옛날 할머니가 자란 곳이에요. 북한산 아랫동네로. 아니, 집이 갈 데가 없
잖아요.
나는 그동안 혼자서 자전거를 타면서 서울 오고 가고 했다고. 구파발 효자동에서 자전거
를 타고 궁금하잖아 서울이. 또 우리 작은아버지 삼촌댁이 있으니까 아무리 우리가 집을
내놓고 나갔다 하더라도 가끔가다가 시골에 가만히 있느니 답답하니까 자전거를 타고
또 어린애는 안 잡아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어서 그 더운데 자전거를 세워 놓
고 7월 달이니까 참외도 막 나오고 해서 참외도 먹고, 우리 살던 집으로 내가 자전거 타
고 슥 지나가면 인민군이 보초를 서고 있는 거야. 아주 인민군이 일개 소대가 있어. 서
울 주재 인민군들이지. 그니까 작은아버지 집에 잠깐 갔다가 또 효자리를 가는 거지.
서울에서 인천 상륙을 했는지 벌써 8월 말이나 9월 초중부터 대포 소리가 막 나는 거야.
소위 그때는 우리가 제트기라고 했어. 제트기가 막 폭격을 하는 거야.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그 비행기에서 폭격하는 거보다, 우리는 비행기가 막 내 눈앞에까지 내려와. 미아
리에 성심원이 있는데 그 뒤쪽에 곡사포가 있었어. 거기다 대고 막 쏘고 난 그걸 실제로
봤죠. 미국 비행기가 계속 폭격을 하고… 그러니까 막 또 다시 세상이 바뀌어지는구나
하는 걸 느꼈죠. 그러다가 9월 28일 인천 상륙이 그것이 성공이 되가지고 서울을 딱 수
복을 했죠.
문_ 도움을 주신 친척은 있었나요?
답_ 작은아버지가 도움을 정신적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다시 우리가 집에 들어갔죠. 들
어가니까 그나마 삼촌이 계시니까 삼촌을 의지하고 뭐 어떤 생활 방법을 강구하면서 살
았죠. 부자가 망해도 3년 산다고 아버지가 납치당했더라도 저희 집이 크니까. 앞에 방
두 개를 세 주고 월세를 받고. 또 다른데도 차고지 같은 땅이 있었어요. 뭐 거기다가 세
를 줘 가지고 그걸로 우리가 공부는 다 했죠. 그걸 다 관리를 해서. 어머니가 혼자 과부
되어 가지고 우리 여섯 남매 키우느라고 뭘 말할 수 없이 애를 썼죠.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도움을 청한 정부기관이 있나요?
답_ 없었어요. 도움 청할 수가 없었지.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 도움 청할만한 사람도 없
었고 도움을 청할 수가 없어 난리통이니까. 그렇잖아요? 다 그 빨갱이 세상인데 누구한
테 도움을 청해요.
문_ 적십자사나 정부나 관청에 신고는 하셨나요?
답_ 내가 직접 했죠. 납치 등록하라고 해서. 납북, 납치죠. 납치당했으니까 후에 뭐 소
식이나 그 기관을 통해서 들을까 하고 등록을 했죠. 뭐 믿거나 말거나. 적십자사 가서
내가 직접 했다니까. 이게 내 글씨야. 그리고 이게 내무부 치안국에서 넘어와서 한 거
고. 그때 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이 명단에 없죠. 그때도 어린 마음에라도 이걸 했으니까
근거가 있죠. 이것도 안 했으면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 봤자 이야기 현황만 알지.

호적 정리
<1970년대에 증언자가 직접 호적 정리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정식으로 호주 상속을 언제 했느냐하면, 편의상 아버지를 내가 그게 1970 몇 년이
냐면 그냥 사망신고를 했어요. 그 전에는 아버지 살아 계신걸 실종신고로 그냥 놔뒀죠.

연좌제 피해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없었어요. (실종으로 되어서인지) 제가 서른한 살인가 서른두 살에 기무사 보안사령
부에 문관으로 취직을 했어요. 그때 무슨 6·25로 인해서 납치당한 가족이라고 해서 그
걸 피할 방법을… 그때는 아버지가 호주 상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정당당하게 우리 아버님 6·25때 납치당했어, 대한민국을 위해서 납치당했어. 정당하
게 신원조사를 받았어요. 그때 더군다나 일반 공무원이 아니고 보안사 군 공무원으로 발
탁되어가지고. 집에서 아까 얘기한대로 부동산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가 내가 안 되겠다
해서 응시한 게 국방부에 보안부대로 취직을 하려고 당당하게 아버지 6·25때 납치당했
다. 요새는 그런 게 없지만 전에는 연좌제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되
면 되고 말면 말고 정당하게 아버님 6·25때 납치 당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고 국방부에
서 근무를 했습니다.

정부에 바라는 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유골은 어디에 묻혔으며 찾을 수 있
는지의 여부라도 알기를 원함.>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아버님이 연세가 많잖아요. 내가 여든 여섯인데,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백 살이 넘
었는데 지금 계시겠어요. 돌아가신 걸로 알고. 돌아가셨더라도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돌아가셨으면 유골은 어디에 묻혔나. 어디쯤에 있는지. 훗날에 유골이라도 찾아올 수
있을런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북에 어디에 묻혀있다는 거 그런 거는 간절히 바라고
있죠.
그 동안 시간이 흘러서 연령이 많으니까 다 이북에서 살아 계실 리가 있겠어요? 저희뿐
만 아니라 아버님 같은 나이가 다 세월이 흘러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런 거나 궁금하
지. 요새 이산가족 찾기 그거 있잖아요. 나는 아주 반갑지 않아. 그건 뭐 우리하고 관계
가 없잖아. 전혀 관계가 없죠. 이산가족이라고 해서 이와 같이 납치당한 사람의 소식을
전해준다던가 이런 것도 없고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해주는 것도. 어떤 사람이 이산가족
이냐? 공산주의에 협력하다가 이북에 간 사람. 선박 배 타다가 잘못 돼서 넘어갔던 사람
이런 사람이나 이산가족이지 뭐.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도 있어요.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이산가족으로 만나는
경우도 있죠. 우리 납북자 가족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납북자 가족에도
혹시나 개중에 공산주의에 협력해서 그로 말미암아 연좌제에 걸리지 않았는가 이런 우
려도 있었죠. 그런데 우리 납북자는 거의 100%가 걔네들 하고는 완전 사상적 이념으로
반대거든. 걔네들 말로 우리는 반동자거든. 그러니 우리는 뭐.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전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다 할 수 없기에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여부만이라도
알기를 원함.>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아버님한테 전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번이라도 뵙고 싶지만. 현재 지금 연령으
로 봐서는 돌아가신 걸로 알고. 그렇지만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
가셨는지 또 돌아가신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거는 알고 싶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10 납북자-조병욱(증언자-조병소)
관리자
21-09-23 160
209 납북자-윤재희(증언자-윤영자)
관리자
21-09-23 167
208 납북자-이종선(증언자-이오선)
관리자
21-09-23 133
207 납북자-이창두(증언자-이연자)
관리자
21-09-23 141
206 납북자-조규명 (증언자-조규만)
관리자
21-09-17 174
205 납북자-박동규(증언자-박명자)
관리자
21-09-17 158
204 납북자-고재경(증언자-고재철)
관리자
21-09-17 152
203 납북자-이원일(증언자-이홍자)
관리자
21-09-17 137
202 납북자-김광래(증언자-김귀래)
관리자
21-09-17 153
201 납북자-김동섭(증언자-김관희)
관리자
21-09-17 168
200 납북자-유영기(증언자-유방원)
관리자
21-09-17 139
199 납북자-원정용(증언자-원정희)
관리자
21-09-17 193
198 납북자-이재춘(증언자-이효선)
관리자
21-09-17 177
197 납북자-김평묵(증언자-김정임, 김정옥)
관리자
21-09-17 161
196 납북자-장석홍(증언자-장석태)
관리자
21-09-17 259
195 납북자-윤관중(증언자-윤석칠)
관리자
21-09-17 264
194 납북자-정중화(증언자-정연종)
관리자
21-09-17 150
193 납북자-이해일(증언자-이해궁)
관리자
21-09-16 153
192 납북자-김득필(증언자-김화철)
관리자
21-09-16 147
191 납북자-정헌각(증언자-정헌홍)
관리자
21-09-16 172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