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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종선(증언자-이오선)
이름: 관리자
2021-09-23 12:33:26  |  조회: 383
190523B 이 종 선 ( 李鐘善)

생년월일: 호적상 1934년 1월 8일이나 더 많을 것으로 추정
출생지: 충남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
당시 주소: 충남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
피랍일: 1950년 7월 20일 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6형제 중 차남
외모/성격: 키가 크고 미남 / 영특하고 경제관념이 뛰어났음

증언자
성명: 이오선(1943년생)
관계: 형제(다섯째 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당시 마을 젊은이들은 대부분 피난가고 육 형제와 어머니도 뒷산으로 도망가고, 증언인 이오선 씨는 나
이가 어려 할아버지와 집에 남아 있다가 도망가 있던 육 형제 중에 둘째 형님인 이종선 씨가 뭔가를 집에
가지러 들렸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세 명의 무장한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것을 목격.
• 이후 근처 동네사람인 김◯준이라는 동네 빨갱이의 밀고로 끌려간 것을 알게 됨.

직업 및 활동
<학교졸업 후 농사일을 하였으며, 경제에 관심이 많았고 시골이라 특별한 청년활동 등은
하지 않았음.>
문_ 둘째 형님은 당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답_ 학교 졸업하고 지금으로 따지면 농사 지으면서 영특해서 그 형님이 어렸을 때 시골
에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내가 생각해도 경제적 개념이 저기 현대가 고 정주영
회장 같은 분인 것 같아요. 경제적인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 닭을 사다가 길러서 경
제를 일으켜야겠다. 닭을 기르면 알을 낳으니깐 알에 소득이 있을 거 아니야. 그 당시는
계란 판이 어디 있어요. 지푸라기를 열 개씩 다 묶어다가 시장에 내다 팔고 그랬다고.
형님이 좀 고지식했던 것 같아. 남한테 싫은 소리 하나 안 하고, 그 동네 처녀들한테 선
망의 대상이었어.
문_ 다른 활동은 하셨는지요?
답_ 하나도 없어요. 그 전에는 시골에 무슨 심지어는 상조회 이런 것도 별로 없었어요.
문_ 둘째 형님의 외모와 성격은 어떠셨나요?
답_ 육형제 중에서 내가 어렸을 때 봤을 때 우리 둘째 형님이 제일 미남으로 생겼어요.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갸름하면서. 지금도 키가 훤칠하다던가 얼굴도 갸름한 사람을 보
면 울컥해 가슴이… (울먹이며).

납북 경위
<아버지와 형님들은 뒷산에 숨어 있다가 둘째 형님만 집에 무언가를 가지러 잠시 들렀다
가 총을 든 북괴군 세 명이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데려감.>
문_ 어떻게 납치되셨나요?
답_ 우리 집에서 당한 거에요. 그게 내가 어렸을 때라. 다 피란가고 젊은 사람들은 난 어
리니깐 안 가고 2학년이였으니깐. 근데 형님이 뒤에 산으로다가 우리 아버지, 큰형님,
결혼한 형님 그 뒤로 숨으러 가서 피난했던 걸로 기억해요. 올라가서 거기서 숙식을 할
수 있게끔 준비해 놓고 산속이니깐. 뭘 가지러 왔었던 것 같아, 우리 형님이. 그러니깐
다른 사람도 다 올라가고, 나만 집에 있었고 할아버지도 있었고. 할머니는 닭을 여러 마
리 키웠거든요. 우리 집이 그 동네, 송선리 그 동네에서 가운뎃말이라고 하거든요. 제일
꼭대기 집이었어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 결혼할 것 같으면, 처가에 동네 이름을 따서 말
미양반, 할머니 친정이 말미(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관정리 인근)야. 그래서 말미양반이
라고 하면 행세 꽤나 하던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저기 김◯준이라는 사람이 원한 관
계도 없고, 실적을 올려야 할 거 아니야. 동네가 다 알고 있었지. 그 김◯준이 빨갱이인
건 다 알아요. 좌파 세력인 건. 우리 형님 하고 또 한 사람이, 그 사람은 태봉 씨라는 분
인데 북에 끌려갔다가 도망쳤어. 화장실 도저히 못 참겠다고, 똥누러 가야겠다고 해 가
지고 도망쳐 나오고. 동시에 끌려간 건 아니고.
그때 그 북괴군이 개미굴에 주둔하면서, 심지어는 그 따발총에서 그 총 길이가 짧아요.
그건 요렇게 실탄 삼십 발 정도 들어가요. 둥그랗게. 이렇게 해 가지고 메고 나서 딱 쏘
면, 방아쇠를 당기면 당기는 대로 ‘다다다다’ 나가거든. 다다하고 땡겼다 놓으면 따발총
소리 나는 그걸 메고 세 사람이 와서 형을 한 놈은 앞에서고, 둘은 뒤에 서서 형을 끌고
가더라고요. 형은 뭐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하지 뭐 하러 가나? 가자 가서 좀 조사할 게
있으니깐, 핑계가 조사할 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따라간 거예요. 어디
감히 전쟁터에 총기 가지고 위협하는데 응하지 안 응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깐
그 밑에 그리고 몇 사람은 행방불명 된 사람도 있어요.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나는 내
가 봤으니깐 알지.
그게 삼복더위 때니깐 복 때, 여름이죠 한여름. 그때 급속도로 밀려왔었잖아요. 낙동강
까지. 많이 봤죠. 개미굴까지는 모르겠는데, 내 친구는 북괴군이 잔뜩 있는 걸 바로 옆
에서, 그 사람 집에서 사오십미터 밖에 안 돼 전적지가. 나는 우리동네까지 이킬로 가까
이 될 거예요. 북괴군들 세 놈이, 세 사람이 와서 형을 데려갔지만. 왔다 갔다 그 안을
순찰 돌듯이 수색 작업하는 식으로다가 전부 다 총 들고 왔죠. 셋이죠. 나는 그것도 어
리고 하니까 무서워서 숨어서 본 기억이 나는데, 시골은 집이 한 채라도 헛간, 잿간 이
렇게 집이 여러 채예요. 방은 안채, 사랑채, 창고, 이런 식으로. 밖에 숨어서 보다 싶이
한 거지. 근데 집 안에서 나가다 그랬는지 하여튼 북괴군 세 사람한테 끌려서. 처음 보
는데 와서 가자고 하니깐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하지 왜 가냐? 물어볼 게 있으니깐, 조
사할 게 있으니깐 ‘가자, 동무!’ 총 들고 그러는데 누구도 그 아무리 배짱이 세고 좋아도
반항 못하죠. 할아버지가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해라 어딜 가냐, 할아버지가 이런 분인
데, 조사할게 있으니깐 가자고. 형님이 이제 할아버지가 오라고 하니깐, 걱정하시니깐
끌려가면서 걱정 마시라고 손을 흔드는 걸 기억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오겠다고, 얘
기하고서 오겠다고 그런 기억밖에 없어요. 그 기억이 마지막이야.
문_ 피난은 가셨는지요?
답_ 그 당시는 지금도 그렇지만 좌파가 어느 동네에던 간에 있었죠. 북괴 아니면 누가 압
니까? 누가 있는지, 젊은 사람이 있는지 누가 압니까. 큰형님 같은 경우는 결혼했으니깐
피난했었고. 숲이나 뒷산으로 갔어요. 그 둘째 형님도 사실 피난 갔었어. 뭘 가지러 왔었
는지 어쨌는지, 그때 발각돼서 좌파 세력이 하나씩 있었어요. 한둘은 있었어요. 그 사람
이 정보를 제공해줘 가지고, 몇 살 먹고 어디에 있다 해 가지고, 억울하게 된 거죠.
문_ 당시 마을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답_ 그 뭐냐… 개미굴이 6·25때 전적지인데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가 북괴군이 주둔하
기도 했었고, 거기도 송성리야. 같은 데인데 한 2키로미터 정도밖에 안 돼. 바로 전적지
밑에서 ‘원안(송성리 개미굴 인근 옛 지명)’이라고 내 친구도 거기서 살았으니까. 근데,
전쟁 나니까 전부 거기서 목격한 거야. 거기가 전적지이면서도 격전지였어요. 미군 1
군 대대가 규모는 정확히 모르는데 1개 대대가 죽었다고 그러더라고. 북괴군은 저쪽 앞
산에 까치산이라고 있는데 그쪽에서 조준사격을 하고… 어렸을 때 기억이지만, 장총이
라고 있어요. ‘딱콩’이라고 하는 거 따발총을 ‘다다다다’ 하는 거야. 미군부대 1개 부대가
전멸을 했어요. 북괴군이 저 밑에 낙동강까지 내려가고. 북괴군도 상당히 많이 죽고. 거
기가 아주 위험했던 곳이야. 그곳이 전적지고 격전지였다는 거야.
지금은 행정 우편이 다 바뀌어서 그런데 송성리하면 제일 밑에 동네 우리 동네 사람들
이 가운뎃말, 그 너머가 큰말, 그 건너가 주막등. 이 동네 마을마다 있어요. 전부 한 동
네 사람이죠. 여름에는 같이 모여서 뭐도 하고, 사랑방에 모여서 모내기라던가 수확철
엔 서로가 가서 일도 도와주고. 이런 저기였거든. 그러니깐 다 알지요. 몇 형제고 누가
어떻다는 거를 다 아니깐 김◯준이는 북괴에 붙어가지고 좌파 소리 듣다가 바로 또 전쟁
나서 어떻게 하니까 바로 또 군대에 간 걸로 기억해.

납치 이유
<인력동원을 하던 가운데 김◯준이라는 동네 사람이 둘째 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끌
려간 것으로 추측됨.>
문_ 둘째 형님이 끌려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_ 열아홉 살이나 스무 살쯤 되지 않았을까? 한참 후에 좌파 세력이 정보를 제공해가지
고 형이 납치되갔으니깐, 이영선이, 내 위에 형님이 술 한 잔 먹고 추석 때 화가 이렇게
복받쳤는데, 그 밀고한 사람이. 밀고라기보다는 정보를 제공한 사람, 그 사람한테 그랬
어요. 죽은 영선이 형이, 술 먹고 나서 추석날인 걸로 기억해. 내가 군대 가기 전이였으
니깐, 7~8년, 10년 가까이 됐을 때, ‘너 때문에 우리 형이 죽었다.’ 그 사람은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실질적인 내막은 잘 모르지. 그때 그 사람이 폭행당했다고 그래서
폭행상해죄로 고소를 했어. 적반하장으로 그러니깐. 그 사람은 또 6·25때 그쪽 좌파로
섰지만 그 다음에는 군대에 가서 상이군인이 됐어. 전향을 해서. 그러니까 완전 빨갱이
242 2부 증언자료 243
앞잡이 노릇을 했지만 또 바로 그쪽(북)으로 쏠려간 게 아니고. 자기 저기(안위)를 위해
서 국군에 간 거지. 내가 기억하기에는 김◯준이라는 사람이야. 큰말 뒤에 요만한 산 하
나 넘어서 살았었죠.
그래서 싸우고 나서, 다른 상이군인들이 와서 사법권도 없는 놈들이 우리 영선형님을 강
제로 연행해 가더라고. 수갑 채워가지고. 그때 시골에서 소는 큰 차 한 대 값인데, 오히
려 우리 영선 형님이 소 한마리 팔아서 합의금으로 물어주고, 이게 동네 소문이 나니 챙
피해서 부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김◯준이가 조치원 쪽으로 이사를 가더라고요.

납치 후 소식
<알 수 없었음.>
문_ 납북 이후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없지요.

남은 가족의 생활
<납북된 후 형제들이 대부분 일찍 죽었는데, 증언자는 그것이 형님의 납북의 영향을 받았
다고 생각함.>
문_ 둘째 형님이 끌려가고 나서 가족들은 어떻게 지냈나요?
답_ 자주 이야기했어요. 심지어는 할아버지, 할머니 비석에도 그 형님 이름을 넣었습니
다. 형제 이름을 다 넣어서, 제일 첫째 자 누구누구 해가지고 육 형제 이름을 다 넣었어
요. 원래 살아있는 분들만 하게 되어 있는 거거든 비석은. 뒤에다가 다 넣고. 어머니가
살림을 하실 적에는 그 시골 사람들의 하나의 미신이지. 밥을 해가지고, 손님 밥을 딱
한 그릇 해서 솥 안에 딱 넣어 넣고, 어머니 말씀하시길 너희 형이 살아있는 것 같다 이
러시는 거예요. 그 밥을 솥 안에 넣어두면 김이 서린다고 하는데. 아니 뜨거운 밥솥에다
넣어 놓는데 김이 서리지 안 서릴 수가 있어요? 하나의 바람이지. 하여튼 어머니가 살림
하실 적에는 그 밥을 꼭 그렇게 해놨어요. 떠가지고 솥단지 안에. 그게 어머니가 88세
에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78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런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생사 좀 알았
으면 좋겠다고 항시 눈 감기 전까지는 그 얘기를 했어요. 형이 살았을까? 어머니나 아버
지도 그랬으니까 그 동네에서도 아까운 사람이다 그랬으니까.
문_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되셨나요?
답_ 이행선 고인 됐고 얼마 전에 죽고. 그 밑에 형이 영선 그분도 좀 일찍 죽었어요. 한
사십 몇 살. 사십여섯인가? 사십다섯에. 또 그 다음에 내가 다섯째여서 오선이고, 그리
고 그 다음에 내 아우가 있었어요. 아우도 죽었는데 한 십 년이 넘었네. 춘선이. 춘선.
봄춘 자. 봄에 낳았다고 해서 춘선인데 남자 육 형제인데, 형제들이 단명했다는 것이 둘
째 형의 영향이 없진 않은 것 같아요. 형제였으니깐. 혈육이니깐 신경 많이 쓰고 항시
머리 썼잖아요. 그분이 한 십 년 됐다. 용산에 있다가 신경을 많이 쓰니깐 암으로 죽었
고, 영선 형님은 젊었을 때 용산서 사업하다가 중풍으로다가. 그러니깐 속은 상하지, 술
먹고 그냥 쓰러져가지고 죽었을 거야.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까. 모든 병은 평생 마음속
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형제들 속이 편할 리가 없지. 막내는 한 쉰일곱 살에 죽었을 거
야. 그 아우가 해방둥이야. 45년생이니까. 쉰일곱인가, 쉰여덟에. 그 사람은 시골에서
고향 지키면서 있었는데, 항시 신경을 많이 썼지. 형 비슷한 사람을 보면 뇌리에서 떠나
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그 동기간들이나 같은 혈육인데 어떻게 생각을 하겠어. 나는 나
대로 강하고 몸은 약하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건강에 대한 한방을 그렇게
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하나같이, 우리 셋째 형이 행선 씨가 65세에 죽었으니까 일찍
죽었지. 근데 형제 중에 제일 오래 산 사람은 그 형이야. 그럼 큰형은 환갑 전에 죽고 60
세에 죽었어. 하여간 영선이 그 형은 마흔다섯 살에. 내가 그때 현장에 없었는데, 왜 이
렇게 일찍 그런 단명할 수가 없다 이거야. 그 하나의 핑계를 댄다면 하나의 형님을, 형
제를 잃은 그 영향이 미쳤지 않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문_ 이산가족찾기는 신청하셨나요?
답_ 이산가족 찾기 하라고 했는데도 안 했고, 또 딴사람들 같으면 적극적으로 저기 하는
게 아니고 나 같은 사람은 이산가족 언제 어떻게 될런지도 몰라 언제 결정이 되가지고…
지금 신청해도 어느 천 년에 될지도 모르는 거고.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의 조사나 도움이 있었나요?
답_ 전혀. 우리도 알아볼 수가 없지. 그 뒤로 한번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게 있어요. ‘만
약에 연락이 있다던가 하면 바로 연락을 해 달라.’ 살아서… 무슨 꿈 같은 이야기지. 말
도 안 되는. 연락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 관공서에서 이제 경찰서든가 내가 기억하기론
간첩으로든 뭐다가 와서 납북해서 월남해서 올 수도 있다는 거 아니냐 이거야. 이런 건
데, 하여튼 죽은 것 같아요. 내가 봤을 때는 죽었을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의
머리로는 딴 데로 제3국을 통해서 왔던 어떻게 해서라도 왔을 거라고.

호적 정리
<동생이 행방불명처리 하였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나중에 내가 정리하다가 보니까 내 큰형님 앞으로 다가 호적이 됐으니까 지금은 다
분리가 됐잖아요. 호적에 장조카 앞으로 다가. 종선이 그 형님이 호적에 붙어 있더라고
요. 살아있는데, 내 아우가 살았을 적에 한 십여 년 전에, 내 아우 죽기 전에 그랬을 거
야. 행불처리 했더라고, 행방불명 처리. 집 나가서 5년 이상이 되었을 때 행불처리하면
호적도 가능한 거예요. 근데 내가 나중에 납북자 인정을 받고, 13년도엔가 받았을 거예
요. 2013년도에 단양서 서울로 올라와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어요. 증빙 서류를. 그렇
게 하고서 뭐 혜택, 도움 이런 거는 전혀 없고.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그런 건 없는데, 난 그런 걸 피하기 위해서 군대를 지원 입대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만 10년 하고 월남 갔다 오면서, 어떤 저기냐면 군생활 할 때도 전방부대에서도 작전 담
당하는 작전참모부에서 근무했었고 신원조회를 다해요. 집에 와서.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들어주지는 않고, 시정되지 않는 것 같다고 느
낌.>
문_ 지금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바를 말씀해주세요.
답_ 제가 군대생활을 좀 오래했습니다. 한 십년. 십년 동안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지금 하! 돌아가는 거 보니까 이건 아니다. 애국이 어디에 있고, 이
게 뭐냐. 이건 다른 사람이 저기하는 거는 예를 들어서 반공법이다 이적행위다 하면서,
자기들이 갖다 퍼붓고 어쩌고 한 것은 이적행위도 아니냐? 이건. 얘기가 안 되는 얘기
야. 국기 하면 태극기 하면 그 나라의 상징입니다.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
만, 지도층에 있는 놈이 국기에 대고 코를 풀지 않나, 국기를 짓밟고서 추모사 읽을 때
그러잖아. 아는 사람은 다 알 겁니다. 세계 방송국이 이목이 집중해서 방송할 때야. 평
창 올림픽 할 때. 누군지 얘기를 안해도 알 거야. 그 흔들던 응원하던 태극기에다가 코
를 푼다 이거야. 야, 그럴 수 없다. 내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만 10년을 일했단 말이
야. 헛수고 했구나, 비참하지.
나는 제일 저기 한 것이 내 부모, 형제 다 잃고 육 형제는 지금이니까 많다고 하지만, 옛
날에는 육칠 남매씩 낳고 그랬어요. 육 형제 중에 유일하게 나 혼자 남았는데, 내 생전
에 생사라도 알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먼저 통일부하고 국무총리실, 적십자사에서 합
쳐서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어요. 그때가 2013년도였을 거야. 내가 서울서 계속 생활하
다가 우리 집사람이랑 암 걸려서 단양서 삼 년 동안 살다가 애들도 병원 가까운 데 살아
야 한다 해서 군포에서 한 몇 년, 한 오 년 살다가 일 년 전에 이쪽으로 왔는데, 거기서
단양서 서울로 와서 어디서 보고서 했나. 내가 납북자 가족 이랬더니 적십자사하고 통일
부 주체에서 왔더라고. 와 가지고 국무총리실에서 납북 결정자 통지는 왔고, 유전자 검
사해가지고, 동영상 찍었는데, 동영상은 내가 기억이 난다니까. 정부에 저기 해도 되지
도 않을 거고, 되지도 않을 것 같고. 예를 들어서, 나는 어떠한 특수 단체를 폄하하거나
모독하기 위해서 하는 게 절대 아니고. 공시생이 무슨 응시를 해서 99점을 맞아서 합격
이 되는 선인데, 5.18 유공자 90점 받은 자한테 밀려나. 가산점이 십점 붙어 일점 차이
로 밀려나.
그리고 그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되는 건데 이게 우리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전쟁 나서 처
음에, 일곱 살 먹어서 전동국민학교에 할아버지가 같이 가서 입학식 하고 난 뒤에 2학년
올라갈 때 전쟁이 났어요. 그러면 그 학교를 마치는데, 거기에 개미굴에서 700미터 떨
어진 학교 건축물에 올라가서 전쟁통에 폭격을 당했어. 폭격기가 바람에 의해서 지붕 올
라가는 길에 기와담이 쓰러졌어. 학교를 다닐 데가 있어야죠. 그러니까 그 친구랑 저하
고 며칠 전에 만나서 술 한 잔 하면서 어떤 얘기를 했냐하면, 초등학교를 남의 집 사랑방
에서, 또 겨울에는 사랑방, 여름에는 큰 나무 밑에서, 한두 군데 옮긴 게 아니야. 그게
또 나중에 이제 전쟁 다 끝나가는데, 저리 (방향을 가리키며) 초등학교로 편입해서 그리
다니다가 또 4학년 때 학교가 아직 다 안 올라왔어. 아직 학교건물이 다 안 올라왔으니
까 4학년 2학기인가 학교를 다 지어 두 칸 지어서 거기서 공부한 사람이야. 창고, 큰집,
사랑방, 방앗간 이런데서 앉아가지고 우리 같이 공부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런데 이
렇게 저기해서 나라를 지키느라고 애쓰고 애국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친구들
하고 얘기를 해보면 세상이 이제 말세가 오는 게 아니냐.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살아서 만나면 단 하루라도, 한 달이라도 같이 살고 싶음.>
문_ 납북된 형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해주세요.
답_ 살아서 만나서 하여튼 같이 살아야 해. 단! 하루라도 한 달이라도. 그것밖에 없죠.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나 죽기 전에, 나도 나이 먹어서 나이가 77세니깐
아픈데는 많고,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내가 죽기 전에 형님 생사 알아가지고 유
골가지고, 유전자 검사를 다 해놨으니까 일치된다면 연락 올 거 아닙니까 그거야 바라는
게. 그럼 내가 유골이라도 고향, 선산에 가져다가 어머니, 아버지 산소 옆에 안장을 시
켜 놔야지… (울먹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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